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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성지
첩첩 산중에 핀 신앙의 꽃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 북도 칠곡(漆谷)군 동명(東明)면 득명(得明)동에 자리한 한티는 산골 중에서도 깊은 산간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미터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 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화산,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군에 걸쳐져 있다. 그리하여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盆地)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예로부터 대구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 팔공 산괴의 주령인 인봉(891미터)에서 가산(901미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架山)과 주봉인 팔공산(1,192미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것이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살지 않았나 추정된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교우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 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860년 경신박해로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박해가 뜸하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1862년도 베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마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 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는다. 1868년까지 3년간에 유례없이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신간에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남겼다. 첩첩 산중 길을 가다 보면 옹기 조각, 사기 조각이 발길에 채이는 한티 성지는 수십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군데군데 그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이들 중에서 이름과 그 행적이 밝혀진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묘비가 세워진 대구 날뫼 출신 서태순, 이 공사가 등과 박해를 피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의 옹기골에 숨어들었던 배손의 일가족, 조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 동생 조아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명 순교자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있다. 한티 마을 입구 송림사 앞쪽에는 대구 대교구가 운영하는 '성가 양로원'이 있는데 순례자들은 대개 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 걸어서 한티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1983년 피정의 집이 건립되었다. 대구 시내에서 이곳 피정의 집까지는 포장 도로를 말끔하게 닦아 두었고 팔공사 관광 도로가 바로 한티를 지난다.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연화(蓮花)동에 있는 또 하나의 사적지인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의 30리 산길은 도보 순례 코스로 아주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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