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독도, 격렬비열도를 가다
꿈 속에서 다녀왔던가? 그 몽환의 섬
우리국토의 최서단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 <격렬비열도>는 충청남도 태안군의 열도이다. ‘3개 큰 섬과 9개의 작은 부속도서가 마치 바다 위를 나는 새들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충청남도의 최서단이며 대한민국의 영해 범위를 결정하는 영해기점 23개 도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국 산둥 반도와 268km, 충청남도 태안군과 5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북격렬비도, 동격렬비도, 서격렬비도가 삼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700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화산섬이기도 하다.
본래 이 섬에는 1909년부터 북격렬비도에 유인 등대가 설치, 운영되었으나 1994년부터 등대원을 모두 철수시키고 원격조정이 가능한 무인등대로 운용돼 왔다. 그러다 2014년 한 중국인이 격렬비열도의 섬 하나를 매입하려 했다가 불발되면서 이 섬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영토 및 영해주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양수산부 소속 대산지방해양수산청에서 2015년 7월, 20여 년 만에 다시 등대원을 파견하여 운용하고 있다. 항로표지관리원 두 명이 2인1조로 보름씩 육지와 섬을 오가며 교대근무를 하고 있다. 중국어선의 불법어업 감시와 인근 해역을 오가는 배들에 불을 비추는 일이 상주 인력의 주요 임무이다. 섬 정상에는 직원들이 살 수 있도록 투룸 형식의 숙소 4채가 지어졌고, 섬에 전기를 공급할 태양광 발전시설, 그리고 헬기장도 조성됐다. 기상 관측 장비도 대폭 확대돼 중국발 황사와 미세먼지 등에 대한 관측기지 역할도 맡게 된다.
세 섬 가운데 북격렬비도는 국유지이지만 동, 서격렬비도는 민간이 소유한 사유지이다. 세 섬 중에서도 가장 서쪽, 중국쪽에 위치한 섬이 서격렬비도. 바로 이 서격렬비도를 2년전 중국인이 사려고 시도하다가 무산됐다. 정부는 현재 격렬비열도를 외국인 거래 제한구역으로 지정한 상태다. 따라서 외국인이 섬을 사기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장인 태안군수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한국인 대리인을 세운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사진제공-태안군
북격렬비도에는 등대와 함께 기상청의 파고계·지진계·황사관측장비 등도 설치되어 있다. 주변 수역은 청정해역으로 칼새, 가마우지, 쥐박구리 등 각종 바다새가 서식하고, 참돔, 감성돔, 농어 등의 어족이 풍부하다. 100년 이상 된 동백나무 군락지, 팽나무, 후박나무 등의 희귀식물과 다양한 야생화가 섬을 둘러싸고 있다.
<격렬비열도>는 이처럼 정기여객선도 없이 낚싯배로만 충남 태안 신진항이나 모항항에서 2시간 반 이상 걸려야 찾아갈 수 있는 외로운 섬이다. 왕복 5-6시간의 먼 바닷길, 그 길은 우리 국토의 서쪽 끝자락을 찾아가는 발길이요, ‘꿈의 섬’을 그리는 몽환의 여정이기도 하였다.
필자 일행은 오전 10시에 모항항을 출발, 약 2시간 반 정도 걸려 격렬비열도에 도착하였다. 항구를 떠나 약 1시간 정도는 섬 하나 없는 망망대해다. 우리들을 태운 배는 10톤 규모의 낚싯배. 정원 22명의 작은 배다. 안개가 조금 있지만 다행이 바다는 잔잔한 편이다. 선장의 말에 의하면, 격렬비열도는 먼 섬이라 파도가 심할 때는 4-5m까지 올라갈 정도여서 쉽게 갈 수 없는 섬인데 우리들은 운이 좋은 편이라 한다. 배가 시속 16-18노트로 파도 위를 달린다. 1시간 쯤 가면 흑도, 궁시도, 낭도, 병풍도, 우배도, 석도 등 무인도들이 연이어 시야에 들어온다. 이중 특히 병풍도는 마치 바다 한 가운데 병풍을 쳐 놓은 듯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섬이라 경관이 수려하다.
2시간 쯤 가자 바다 한 가운데 희미하게 섬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안개 속에 보일 듯 말듯그 자태를 드러내는 실루엣, 바로 격렬비열도다. 바다가 아니라 하늘에 떠 있는 섬 같다. 우리 가슴 속에 숨어 있던 ‘상상의 섬’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제일 먼저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섬은 동격렬비도. 세 개 섬 중에 경관이 가장 빼어난 섬이다.
섬 전체가 깎아지른 암벽이다. 기암괴봉도 나타나고 신비스러운 동굴들도 보인다. 마치 홍도, 백도나 백령도의 해안 절벽과 유사하다. 우리들을 태운 배는 동격렬비도를 한바퀴 돈 후 북격렬비도로 간다. 점심식사는 미리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선상에서 때운다. 등대가 있는 북격렬비도는 해안선이 동격렬비도에 비해서는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낚싯배 정도가 정박할 수 있는 간이선착장도 정비되어 있다. 등대까지는 약 700m 정도의 비탈길을 지그자그로 올라가야 한다. 북격렬비열도에 직접 오르기 위해서는 미리 대산지방해양수산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생진 시인, 류병구 시인, 박정대 시인, 손택수 시인, 장석남 시인, 정끝별 시인, 박후기 시인 등 여러 시인들이 시로 격렬비열도를 노래하고 그리워한 섬. 박정대 시인은 그의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같은 눈이 내리지>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이 불멸, 두 잎의 불멸, 세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또, 정끝별 시인은 여행산문집 <여운>에서 “격렬한 사랑과 격렬한 청춘의 메타포로 다가왔던 ‘격렬비열도’. 저에게 격렬비열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누구나 한번은 아프게 가보았으되 떠나와서야 그리워하는, 관념의 그림이자 조어(造語)의 섬이었습니다. 불멸과 불면과 사랑과 입맞춤으로 꽃 피울 수 있는, 사랑의 적막과 멀미와 고독과 맞대면하고 섰을 때라야 갈 수 있는, 사랑의 은유와 사랑의 환상을 나란히 잇대놓았을 때라야 볼 수 있는 풍경들, 저 격렬비열도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저 격렬비열도에 갈 수 있는 한, 가보고 싶은 한 여전히 청춘일 겁니다”라고 썼다. 그녀는 또, "“망망대해의 허공에 애잔히 솟아 있는 세 봉우리의 적막과, 고독과, 멀미가 서늘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멀리, 수백 그루의 동백과 유채꽃이 섬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바닷 새들의 날갯짓과, 파도의 일렁임과, 바람의 끝모름이, 격렬비열도의 적막과 고독과 멀미를 키웠을 겁니다….”라고 이어갔다.
박후기 시인도 그의 시집 <격렬비열도>에서 "격렬과 비열 사이/그 어딘가에 사랑은 있다"고 읊었다. 그의 시집에 실린 시 대부분이 한 쪽을 넘는 시들인데 <격렬비열도> 만 왜 이리 짧게 썼을까? 이 몇줄 안되는 시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응축하고 싶었을까? 박후기 시인에게 <격렬비열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 떠도는 상상의 섬이요. 삶 그 자체다.
홍기돈 문학평론가는 박후기의 시 <격렬비열도>에 대해 "여기 언제나 비가 내리는 섬이 있다. 어느 시점까지 시인은 자유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품었으리라. 열망이 사라져서 가슴이 식었다고 하였으니 그 이전에는 응당 뜨거운 열망이 있어야만 한다. 날개가 퇴화해 버린 코바네우도 한때는 그 날개로 하늘을 제압하며 날아다녔을 것이다. '격렬'이 하강하는 빗줄기를 뚫고 위로 날아오르려는 방향성 속에서 표출되는 감정인 반면, '비열'은 주어진 조건을 운명인 양 기꺼이 수락하는 데서 빚어진다. 비열의 편으로 기울어진 스스로를 토로하는 이 시는 주제의식으로만 따지자면 '비둘기처럼 다정함'과 다를 바 없다. 비에 젖은 새들의 죽음을 적자생존 논리로 합리화하는 것은 타인의 상처에 무관심한 행태와 그대로 겹쳐지며, 먹이로 길들여지는 모습은 필사적으로 '과자부스러기'에 몸을 던지는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이다"라고 실체적 <격렬비열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시적(詩的) <격렬비열도>를 그린다.
격렬과 비열 사이의 비굴한 삶 어딘가에 사랑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그리고 이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인가. 박후기는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로부터 그 가능성을 길어 올린다. 그는 시작(詩作)의 의미를 "시를 쓰는 일은, 불 꺼진 가슴 속을 더듬어 시의 스위치를 찾아내는 일이다. 일생 동안 언어의 빈 벽을 더듬는 일이다. 시의 스위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에, 시 쓰기란 결국 눈을 감고 심안(心眼)으로 보는 일이다. 망막 속에 명멸하는 한 줄기 빛을 찾아내는 일이다"라고 말한다.(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