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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 11. 15(금)
■ 존경받는 명문가들의 특별한 내력
글; 조용헌
명문가(名門家)는 왜 필요한가?
오랫동안 나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명문가는 필요하다. 사회가 혼란기에 처했을 때 명문가의 존재가 드러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경제 위기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상황이 되었거나, 이념의 갈등으로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었을 때 명문가의 존재가 부각된다.
명문가가 명문가인 이유
명문가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집안을 가리킨다. 존경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존경 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만한 역사적 검증을 거쳤기 때문이다.
평소에 존경이 축적되어 있어야만 난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론을 통합시키는 힘이 있다.
존경이 없으면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사회경제적 위기야말로 사회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명문가가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명문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에 해당한다. 이 사회적 자본이 없는 나라는 난세에 피를 흘리기 마련이다.
그동안 필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해 본 명문가는 이렇다.
3백년 만석군 집안다운 넉넉한 베품
경주의 최부잣집이다. 경상도는 호남과 달리 들판이 적다. 3천석 이상의 부자는 배출되기 어려운 지형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부자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상도에서 최부잣집은 3백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만석군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 독특한 것이다.
3백년 동안 만석군 기록은 서울이나 충청, 호남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최부자 집의 만석군 비결은 독특하다. 첫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철학을 가졌었다.
‘그 이상은 내 재산이 아니다’ 라는 깨달음이었다. 만석 이상은 가지고 있어 보아야 아무 필요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유사시에는 화가 될 수 있다는 이 집안사람들의 선견지명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환원 방법은 소작료를 대폭 낮추는 방법이었다. 다른 부자들은 7할의 소작료를 받았던 데에 비해 최부자는 4~5할 정도만 받았다.
소작인들로 보아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둘째는 흉년에 논을사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흉년이 되어 굶어 죽는 상황에 직면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논마지기를 10분의 1가격에 내 던졌다.
이때가 부자에게는 기회였다. 하지만 최부자는 이때 가난한 사람들의 논을 사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원망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나중에 원망을 받을망정 지금 눈앞에 닥친 재테크의 찬스를 잡을 것이냐, 아니면 돌아올 원망의 과보를 현찰보다 더 무섭게 생각할 것이냐? 여기에서 다른 부자와 최부자의 판단이 갈라졌다. 다른 부자들은 전자를 택하였고, 최부자는 후자를 택하였다.
전자를 택한 다른 부자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로 유행한 활빈당(活貧黨)에게 걸려들어 떼죽음을 당하였고, 가지고 있던 재산을 탈취 당하였다. 활빈당들은 최부잣집에 대해서는 손 하나 까딱 안했다고 한다.
활빈당도 여론 조사는 치밀하게 한 다음에 부잣집을 털러 다녔다는 증표이다.
셋째는 과객대접을 후하게 한다였다.
1년에 과객대접 하는데에 들어간 쌀가마가 약 1천 가마 분량이었다고 한다. 하루에 평균 두가마 반 분량은 밥을 해 댔다는 결론이다.
최소한 하루에 1백 명 이상의 삼시세끼를 공급할 수 있는 분량이다.
이 밥을 공짜로 얻어먹은 과객들이 전국에 돌아다니면서 입소문을 낼 수밖에 없었다. 최부잣집에 대한 소문이 전국에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넷째 ‘벼슬은 진사이상 하지 않는다’였다.
최부잣집은 9대 진사를 지낸 집안이다. 고위벼슬을 하면 당쟁에 휘말려 몸 뺏기고 재산 뺏길 수 있다고 여겼던 탓이다.
조선후기에 영남 지역은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에 속한 집안이 많았다.
기호 노론(老論)이 2백년 동안 장기집권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만년 야당이었던 영남의 남인들은 숨죽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자칫 벼슬한다고 나섰다가는 어떤 정치적 풍랑에 휩싸일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100 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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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베풀어 대(代)와 명성을 지킬 수 있었던 명문가
전남 여수 봉강동에 가면 언덕 위에 커다란 한옥 저택이 자리 잡고 있다.
집의 당호는 봉소당(鳳巢堂)이다. 몇 년 전에 영화 ‘가문의 영광’에 등장했던 집이기도 하다. 영광김씨(靈光金氏)인 이 집의 사연도 기가 막히다. 이 집은 구한말에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 현 종손의 증조부인 김한영(金漢永) 대이다. 1만2천석을 했다.
김한영은 장사로 돈을 벌었지만, 가난한 과객 대접에 후했다고 전해진다. 김한영은 과객이 오면 반드시 주특기를 물어보았다. 덕석을 짜는 것이 주특기인 과객에게는 덕석을 짜게 하였다. 이걸 시장에 내다 팔게 해서 돈이 모이면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게 도와주곤 하였다. 이 집은 평소 소작인들에게도 후하게 대했다.
자식들이 8~9명 되는 소작인들은 자식들 먹이느라고 소작료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 처지가 딱하다고 해서 그냥 눈감아 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왜 그 집만 봐주느냐’고 항의를 할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자식들 많은 소작인들에게는 수백 가마의 쌀을 배에다 싣고 내리는 하역작업을 대신 맡겼다. 화양면 고진(古津)이라는 곳에서 여수항까지 배에다 쌀을 싣고 운반하는 일이었다. 이 대가로 소작료를 면제해 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보기에도 공평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평소에 쌓아둔 이러한 적선이 난리가 났을 때에 그 효력을 발휘하였다.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에 여수에서 가장 부잣집인 봉소당의 주인이 제일 먼저 좌익들에게 잡혀갔다. 공교롭게도 당시 좌익의 지도부 인물 가운데 하나가 평소 이 집의 혜택을 보았던 바로 그 소작인의 아들이었다.
좌익을 하긴 하였지만, 평소에 많은 신세를 졌던 ‘봉소당’의 주인을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봉소당 주인이 몰래 탈출할 수 있도록 눈 감아 줌으로써 그 보답을 하였다. 그 전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터졌을 당시에, 여수의 대지주였던 여수 봉소당의 11대 후손인 김성환(1915~1975)은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김성환이 반란군에게 끌려갔던 장소는 여천군청 2층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소작인 아들로서 반란군의 책임자급으로 있었던 인물이 책상과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김성환이 끌려오니까 이 책임자는 옆에 있던 2명의 호위병들에게 ‘너희는 밖에 나가 있어라!’하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김성환을 의자에 앉도록 한 다음, 이 책임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문만 보고 있었다. 자신의 의자를 벽 쪽으로 돌려놓고 신문만 들여 다 보았다. 이런 침묵 상태로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끌고 왔으면 심문을 해야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을 향해서 신문만 보고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김성환은 30분쯤이 지날 무렵 그 이유를 알았다. ‘아! 나 보고 도망가라는 뜻이구나!’ 김성환은 군청의 창문을 살며시 연 다음에 홈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야산으로 도망을 하였다.
이 소작인의 아들은 자신의 직책이 반란군의 책임자급이었으므로 대 놓고 ‘너 도망가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그렇다고 자기 조부 때부터 은혜를 입은 봉소당 아들을 죽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여순사건 당시 12대 후손인 김재호(1942~ )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봉소당 머슴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이는 17세였다.
반란군에 가담하여 팔에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 완장을 찬 머슴아들이 봉소당 대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여섯 살 먹은 어린 김재호는 무심코 손에 들고 있던 삶은 밤을 ‘형! 이 밤 좀 먹어봐’ 하면서 건넸다.
이 밤을 받아든 머슴 아들은 한참동안 주인집 아들인 재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고 한다. 김재호는 ‘지나고 보니까 그때 무심코 내가 내밀었던 삶은 밤 한주먹이 내 목숨을 살렸다’고 회고 한다.
논리(論理) 위에 정리(情理)가 있다. 이렇게 해서 이 집은 ‘여순반란사건’에서도 사람이 죽거나 집이 불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집은 현재에도 여전히 여수의 부자이다.
▲은혜를 베풀어 대(代)와 명성을 지킬 수 있었던 명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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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능히 열 수 있었던 너그러운 뒤주
지리산 노고단을 배산(背山)으로 삼고, 섬진강을 임수(臨水)로 삼고, 그 가운데에 넓은 들판을 문전옥답으로 삼은 수십 칸 규모의 저택이 있다. 바로 류씨 집안인 운조루(雲鳥樓)이다.
전망도 좋고, 풍수상으로 대명당에 해당하는 터이지만 이 지리산 아래 동네는 동학, 빨치산, 6.25의 중심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집인 이 운조루가 불타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알고 보면 대단한 사실이다.
왜 부잣집인 운조루는 빨치산과 6.25에서도 살아남았는가?
이 집의 사랑채 옆에는 나무통으로 만든 뒤주가 하나 있다. 두 가마 반이 들어가는 원통형 뒤주이다.
이 뒤주 아랫부분에는 조그맣게 네모진 나무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글씨가 적혀있다.
‘다른 사람도 능히 열수 있다’는 뜻이다.
이 부잣집의 뒤주에 들어 있는 쌀은 지나가던 과객이나, 아니면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나 와서 마개를 열고 1~2되씩 쌀을 퍼갈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운조루에서 배려했던 쌀의 양은 1달에 두가마 반이었다. 만약 월말에 뒤주의 쌀이 남아 있으면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책망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집안이 덕을 베풀어야 하는데, 이렇게 쌀이 남아 있으면 덕을 못 베풀었다는 증거 아니냐!”
평소에 어려운 이웃들이 이 쌀을 퍼갔다. 6.25 때 빨치산들이 수없이 이 지역을 들락거렸지만 이 집은 피해가 없었다.
다른 동네 출신들이 뭣 모르고 운조루를 불태우려고 하면, 이 동네 머슴 출신의 좌익들이 이를 말렸다고 한다.
“다른 집은 다 태워도 저 집은 태우면 안 된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적어도 1백 년은 지나가 보아야 그 이치를 깨닫는 것 같다. 그 이전에는 알 수 없다.
▲구례 운조루(求禮 雲鳥樓)/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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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도 따르지 못했던 한 명의 처사
충남 논산의 노성리에 가면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 고택이 있다. 함양 개평에 있는 일두 정여창 고택과 더불어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고택이 명재고택이다. 이 집안은 보통 노성 윤씨(魯城尹氏)라고 불린다. 충청도에서 1급 양반으로 꼽히던 집안이 회덕의 송씨(우암 송시열 집안), 광산 김씨(사계 김장생 집안), 그리고 노성의 윤씨 집안이다.
명재는 벼슬을 거부한 처사(處士)로 유명하다.‘정승 세명이 대제학 한명만 못하고, 대제학 세명이 처사 한명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처사는 벼슬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공부하는 선비를 가리킨다. 명재는 임금이 40번 넘게 벼슬하라고 불렀어도 끝내 벼슬을 거부한 학자이다.
마지막에는 임금이 명재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우의정을 준다고 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탕평인사’라는 명분에 맞지 않는 벼슬은 절대로 받지 않았던 것이다. ‘대제학 세명이 처사 한명만 못하다’는 경우는 바로 일생동안 처사였던 명재를 가리킨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처사는 두 명 있다고 한다. 명재와 지리산 밑에 살았던 남명 조식이다.
명재가 지닌 카리스마는 대단하였다. 그만큼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소론(少論)의 당수로서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명재는 자기가 죽은 뒤에 제사상의 크기도 미리 정해 놓았다. 제사상의 크기를 가로 세로 석자(90㎝)를 넘지 말게 하라는 당부였다.
음식을 간소하게 차리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지금도 명재 고택에 가보면 석자 안 되는 제사상이 남아 있다. 음식 몇 가지 올리면 상이 다 차버린다. 당시에 명재 집안의 윤씨들이 뽕나무 사업이 잘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뽕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를 안 명재는 “우리 집안은 뽕나무를 키우면 안 된다.
이는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심는 나무인데, 우리 같은 양반 집안마저 뽕나무를 키우면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겠느냐, 절대로 뽕나무를 심으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윤씨들은 이를 그대로 지켰다. 현재 남아 있는 명재 고택도 사랑채에 담장이 없다. 대문도 없다. 외부인이 곧바로 사랑채에 접근하거나 쳐다볼 수 있는 구조이다. 집안에 담벼락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집안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표시이다.
이 집안의 이러한 가풍이 있었기 때문에 6.25 때에도 이 저택은 불에 타거나 손상당하지 않았다. 충청도 양반을 대표하는 집안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조가 망하면서 양반도 몰락하였다. 양반들도 약자를 착취하는 토색질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양반의 나쁜 점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같이 사라졌다.
양반의 자존심과 주변을 배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같이 사라진 것이다. 해방 후에 남은 것은 ‘상놈정신’이다.
상놈정신의 좋은 점은 체면 따지지 않고, 근면성실하고, ‘너와 내가 동등하다’는 평등의식이다.
상놈 정신의 나쁜 점은 졸부근성이다.‘남이야 죽건 말건, 내 배만 부르면 장땡이다’는 의식이 바로 상놈의식이다.
이 부정적 의미의 상놈의식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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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 만석군’- 글; 이규태
모질도록 인색하게 돈을 모아 망신하는 것을 ‘놀부 제비 후리질’이라 한다면 피눈물 나도록 검약하게 돈을 모아 좋은 일에 쓰는 것을 ‘순흥 만석군(순흥 만석군)’이라 한다. ‘동야휘집(동야휘집)’이라는 문헌에 버려진 돌밭을 일구어 근면 일변도로 만석군이 되는 순흥골 황 부자 이야기가 있다.
어찌나 검약하던지 부자가 된 연후에도 밴댕이 세 마리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하여 소문이 났었다. 한데 만석을 채운 그 당일로부터 행려병자를 먹이고 재웠으며 과거치러 가는 어려운 서생들 노자를 대주고 상경하는 데 말을 주어 타고 가게 했다.
이 황 부자의 덕으로 대과에 급제한 많은 서생 가운데 하나인 최생이 경상도 감사가 되어 순흥골의 이 은인을 찾아 보았다. 황 부자는 자선에 재산을 다 쓰고 헛간에 거적 쓰고 죽어갔으며 그 웅장했던 고대광실은 쑥밭에 폐허가 되고 논밭 한뙈기 물려받지 못한 아들은 밀양 염전에 가 지게질하며 연명하고 있었다.
고금을 통틀어 우리나라 부자는 놀부나 옹고집처럼 수전노요 인색한이며 심사마저 고약한 것으로 돼있지만 순흥골 만석군 같은, 자수성가하여 이룬 그 부를 일푼 남기지 않고 또 물리지도 않고 공수거(공수거)한 이도 없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순흥골 만석군’ 같은 부자를 헤티형(형) 백만장자라고 한다. 황 부자는 밴댕이 세 마리로 제사를 지냈지만 19세기 말 월가(가)의 모든 돈이 이 여인의 손으로 집산하여 마녀로 소문나 있던 헤티 그린은 연료비 아깝다고 겨울에도 찬 오트밀만 먹고 14세 난 아들이 무릎을 다쳤을 때 무료진료소를 찾아다니는 바람에 합병증이 생겨 다리를 절단해야했을 만큼 돈을 아낀 여인이다.
그가 죽은 후 궤짝으로 맞춘 침상 아래의 식품 양철통에서 당시 2억2500만달러의 재산이 사회환원 유서와 더불어 발견되었던 것이다.
보도된 바로 우리 나라 대표적 벤처기업 사장이 경영권을 자식에게 물리지 않고 능력있는 사원에게 물렸고 자식들도 재산보다 그 정신의 유산이 더 값지다 했으며, 미국에서도 한 평생을 자기 공장의 뒤편 트레일러 집에서 살며 모은 돈 5000억원을 가족 아닌 사회에 환원하고 공수거하고 있다. 동에서 순흥골 만석군이, 서에서 헤티형 백만장자가 탄생한 정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