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10. 21(목/경찰의날)
■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선생 묘.
(2009. 09. 10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 3에 있는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선생의 묘이다. 그는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선생의 증손서(曾孫壻 : 증손녀의 남편)로서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세종조에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471년(성종 2)에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었으며,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는 또한 연안이씨의 중흥조이며 그의 묘는 정몽주 선생 묘역과 근접한 옆 능선에 위치해 있다.
▲저헌 이석형 선생 묘 /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5(는원리 산3번지)
▲저헌(樗軒) 선생의 묘갈비 ⓒ인터넷
▲좌측 보이는 묘역이 포은 정몽주 선생 묘이고 우측이 저헌 이석형 선생 묘역이다.
이석형선생의 부인은 포은 정몽주선생의 증손녀입니다.
▲저헌(樗軒)선생 묘의 문인석이고 뒷쪽 언덕에 보이는 묘가 포은 정몽주선생 묘역이다.
▲저헌선생 묘 후경
▲저헌선생 신도비각
포은 정몽주 선생 묘역내 저헌 이석형선생 묘소가 같이 있습니다. 이석형선생의 부인은 포은 정몽주선생의
증손녀입니다.
◇도지정 기념물 제 171 호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 3번지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
이석형은 1415년(태종 15) ~ 1477년(성종 8). 조선초기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대호군 회림(懷林)의 아들로, 김반의 문인이다. 1441년(세종 23)에 사마시에 합격, 이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좌정언에 제수되고, 이듬해에 집현전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 직전, 직제학을 두루 역임 하였다.
집현전 응교로 재임한 1447년 문과 중시에 합격 하였으며 왕명에 의하여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에 진력 하였다.
1461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경기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호조참판을 거쳐 판한성부사에 7년동안 재임 하였다.
1470년(성종1)에는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지성균관사를 겸하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 4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집현전 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 "고려사"의 편찬에 참여 하였으며 저서로는 "대학연의"와 "고려사"에서 권계(勸戒)할 것을 덧붙인 "대학연의집략" 21권과 "저헌집"이 있고 편저로는 "역대병요, 치평요람"등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내기마을의 포은 정몽주선생 묘소 우측에 있다.
1477년(성종 8)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해 2월 8일, 부인 연일정씨와 합장 하였다. 묘역에는 문관석 4기와 묘비석, 상석등 석물이 있다.
신도비는 1624년(인조 2) 11월에 건립 하였으며, 묘지의 좌측 아래 위치 하는데 전액은「연성부원군 저헌 문강공 이선생신도비명(廷城府院君 李先生神道碑銘)」이라고 되어 있다. 신도비는 개석이 없는 비갈형이며 비대석은 상단에 복련을 두고 각우와 전후 중앙에 동자주를 두어 운문을 조각 하였으나 마멸이 심하다.
비양(碑陽)과 비음(碑陰) 역시 명문과 음기가 있으나 마멸이 심한 상태다. 비문은 조선 인조때의 문신 청음 김상용(金尙容)이 전액하고 글은 선생의 4대손이며 우의정을 지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찬(撰)하고 글씨는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남편인 신익성(申翊聖)이 썼다. 비의 크기는 비신의 높이 210. 폭 90. 두께 22Cm이고 대석은 높이 135, 폭 84, 두께가 51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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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鄭夢周)
1337년(고려 충숙왕 6) ~ 1392년(고려 공양왕 4)
고려말의 학자요. 충신으로 초명은 몽란(夢蘭), 몽룡(夢龍), 자(字)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경북 영천(永川) 출신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수찬 등을 거쳐 1363년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였고,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등이 주장하는 배면친원(排明親元)의 외교정책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고 이듬해 풀려 일본에 사신으로 가 왜구의 단속을 청하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 시켰다.
1383년 이성계와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고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대명(對明)국교를 세우는데 큰공을 세웠다. 당시 이성계(李成桂)의 위세가 날로 커서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나중 나갔던 이성계가 낙마하여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에 의해서 실패하였다.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는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에게 격살되었다.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고, 성리학에 뛰어난 동방이학(東方理學)으로 추앙되었다.
고려의 혼란한 법질서를 바로잡고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이성계 등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시문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 이외에도 많은 한시가 전하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조 태종1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翼陽府院郡)에 추봉되었으며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 유적(묘터) 이야기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는 연일(延日) 정씨(鄭氏)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연안(延安) 이씨(李氏)인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선생의 묘가 나란히 있다. 선산(先山)에 조상을 같이 모시는 우리에게는 비록 이석형(李石亨)이 정몽주(鄭夢周)의 증손서(曾孫壻 : 증손녀의 남편)라고는 하지만 가문(家門)이 다른 두 사람의 묘가 한 곳에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李成桂)의 간곡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절개를 저버리지 않은 정몽주(鄭夢周)를 이방원(李芳遠)은 그의 부하들을 시켜 선죽교(善竹橋)에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고려의 충신을 살해하고도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저자 거리에 내다 버리고 시신을 치우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본 송악산 스님들이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풍덕군(豊德郡)에 묘를 만들어 주었는데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정몽주(鄭夢周)가 죽자 살아남은 고려의 충신들을 모두 숙청한 이성계(李成桂)는 3개월만에 조선왕조의 태조(太祖)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왕자들의 왕위 다툼으로 정국은 혼란해졌는데 이성계(李成桂)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권력 장악에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자식들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지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선덕왕후(宣德王后) 강씨의 소생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이 죽자 이방원(李芳遠)에 정나미가 떨어져 고향 함흥(咸興)으로 가 칩거하면서 노여움에 치를 떨었다.
정종(正宗)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 이방원은 그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왕권강화와 흩어진 민심수습에 나섰다.
그는 왕권강화의 한 방법으로 충성심을 신하들에게 강조하기 위해 충절을 지킨 정몽주(鄭夢周)를 복권시키기로 했다.
정몽주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그의 묘(墓)를 고향인 영천(永川)에 이장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1406년(태종 6) 후손과 많은 유림의 선비가 뒤따르는 가운데 유골을 상여에 메고 고향 영천(永川)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를 지날 때였다. 상여 행렬의 맨 앞장에 세운 명정(銘旌)이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의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명정을 잡기 위해 쫒아 가보면 명정은 잡힐 듯 하면서 다시 날아가기를 반복하면서 지금의 이석형 묘가 있는 자리에 떨어졌다.
명정이 떨어진 곳을 이상하게 여긴 후손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이 자리가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구나" 감탄하면서 경북 영천까지 갈 필요 없이 이 곳에다 안장(安葬)하기로 하고 광중(壙中)을 팠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하관(下棺)은 할 수가 없었다. 몇몇 인부들에게 광중을 지키도록 하고 먼 행렬에 피곤한 후손들과 유림의 제자들은 곤한 잠이 들었는데 한 사람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몽주의 증손녀였다. 이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친정집 보다는 시댁과 자신의 자손들을 위해서 자리에 욕심을 냈다.
숙소에서 살짝 빠져 나온 그녀는 독한 술과 맛있는 안주를 준비하여 광중을 지키는 인부들에게 가 고생이 많다며 짐짓 위로하는 척 하면서 술과 안주를 권하였다.
얼마 안 가서 독한 술을 마신 인부들은 곤한 잠에 골아 떨어졌고, 정씨 부인은 묘 밑에 있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 밤새 부었다.
다음날 정몽주 선생을 모시려고 보니 광중에는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명당인 줄 알았더니 물이 나는구나" "잘못 본 것이로구나" 하고 탄식하면서 옆 언덕을 보니 그곳도 명당이었다.
그래서 정몽주 선생을 그 곳에다 모시었다. 후에 정씨 부인은 남편 이석형(李石亨) 선생이 돌아가시자 명정이 떨어진 그 자리에다 장사 지냈고 자신도 그 자리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일화가 말해주듯이 포은(圃隱), 선생의 묘(墓) 보다는 저헌(樗軒)선생의 묘(墓)가 더 큰 혈(穴) 임에는 틀림없다. 용혈을 보아도 그렇지만 포은의 후손보다는 저헌의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였다.
광산 김씨(光山金氏) 달성 서씨(達城徐氏)와 함께 조선의 삼대 명문중의 하나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며 이석형의 후손들이다.
이석형(李石亨)의 4대 손자부터 발복 하여 우리 역사상 한문학의 대가이며 선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이명한(李明漢)이 인조 때 대제학을 했고 손자 이일상(李一相)이 효종 때 대제학(大提學)을 하는 등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또 이석형의 5대손 이귀(李貴)는 인조반정의 공을 세워 연안이씨(延安李氏) 가문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여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 되었고 그의 아들 이시백(李時白)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사도세자의 스승이었던 이후(李厚)는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는 영조 때 영의정, 이복원(李福源)과 그의 아들 이만수(李晩秀)는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내 2대가 연속 대제학을 하였고, 이복원 큰아들 이시수(李時秀)는 영의정을 지내는 등 연안 이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총 250명의 문과급제를 배출했고, 정승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각각 배출하여 조선의 명문으로 위세를 떨쳤다.
반면에 포은의 후손들은 현종 때 우의정에 오른 9대손 정유성(鄭維城)과 판서(判書) 2명이 있었을 뿐 크게 벼슬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포은(圃隱)의 후손들은 포은의 손자라 하여 극형을 받을 것도 형이 감형되는 등 조선왕조의 회유책으로 배려를 받았으나 오히려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힘쓰는 가풍을 만들어 왔다.
※ 위에서 인용한 글은 EBS교육방송에서 방영하는 저헌공의 음택풍수에 대해 예비 습득할 수 있는 자료로서 www.land114.co.kr/fengshui/s1/s15.htm>에서 가져온 것입니다.이름자의 한자를 추가하는 등 약간 수정 보완하였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