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의 사자성어(62)>
62. 권토중래(捲土重來)
말을 권(捲), 흙 토(土), 권토라 함은 ‘흙을 말드시’라는 뜻이고, 무거울 중(重),올 래(來), 중래라 함은 ‘거듭해서 온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권토중래’라함은 “흙먼지 말아 올리면서 다시 온다”는 뜻이다.
‘한번 실패한 사람이 다시 분기하여 세력을 되찾는다’ 라는 의미로 쓰인다. 내년 총선에 지난번에 선거에 졌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 출마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다.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IMF의 혹독한 시련에 쓰러졌던 회사가 다시 재기하였다면 이는 권토중래한 것이다. 개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기보다 월등히 실력이 좋은 사람에게 패배를 거듬하다가 다시 분기일전(憤氣一轉) 실력을 쌓아 대적한다면 이는 권토중래한 것이다.
권토중래라는 말은 당나라 때 시인 두목(杜牧)의 제오강정(題烏江亭)이라는 시에 나온다. 두목은 ‘작은 두보(小杜)’라는 명칭을 가질 정도로 시를 잘 지었다.
오강(烏江)은 항우가 유방과 천하를 다투는 결전에서 패하여 도주하다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이었다. 거기에서 항우는 젊은 나이로 자결한다.
항우가 죽은 지 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 두목이라는 시인이 오강이 바라보는 나루터에서 항우를 그리며 너무나도 빠른 그의 죽음을 애석(哀惜)해 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승패는 병가도 기할 수 없는 것 (勝敗兵家不可期 : 승패병가불가기)
수치를 참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나이다.(包羞忍恥是男兒:포수인치시남아)
강동의 자제에는 준재가 많으니(江東子弟多俊才 :강동자제다준재)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왔으면 승패는 알 수 없었을 터인데(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오강은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화현(和縣) 동북쪽, 양자강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때 오강을 지키고 있던 정장(亭長)이 배를 언덕에 대놓고 항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우가 나타나자 정장(우리로 치면 파출소장격이다)이 말했다 “강동 땅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십만 인구가 살고 있으므로 충분히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서 배를 타십시오. 제가 모시고 건너 가겠습니다.”하며 항우에게 강동으로 돌아가라는 권고를 한다.
강동은 양자강 하류의 땅으로 강남이라고도 부르는 곳인데, 항우가 24살에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 곳도 이 곳이었다. 정장은 항우가 다시 옛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옛날 내가 강동의 팔천명 젊은이를 데리고 서쪽으로 향했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강동의 그들 부형(父兄)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
강을 건너기를 거절한 항우는 자기가 타고 온 말은 죽일 수 없다면서 이를 정장에게 선사했다. 그리고는 뒤쫓아 온 한나라 군사를 맞아 잠시 그의 용맹을 보여준 다음 스스로 목을 쳐서 죽었다.
요즘에도 흔히 힘센 사람을 “항우장사”라고 부르듯이 항우의 힘은 산을 뽑고 (力拔山:역발산), 기운이 세상을 덮을 정도(氣蓋世:기개세) 였다. 젊은 나이에 7년간 군사들을 이끌고 세상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하였으나, 유방과의 결전에서 패하여 오강에서 자결하는 항우의 처절한 모습이 너무나 허무했다. 그 때 항우의 나이가 서른 한 살이었다.
‘오강정에 붙인다(題烏江亭)’라는 시에서 “강동의 부형에 대한 수치를 참고 견디었더라면 우수한 자제가 많은 곳이므로 만회할 가능성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하고 항우를 애석하게 여기는 정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항우는 단순하고 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우희(虞姬)와의 사랑에서는 인간적인 감성이 넘쳐흐르고 있어, 패왕별희(霸王別姬)라는 경극은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예술 작품이다.
권토중래와 비슷한말로 사회부연(死灰復燃)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는다”는 말로서 “세력을 잃었던 사람이 다시 세력을 잡는 것을 뜻하거나, 또는 곤경에 처했던 사람이 훌륭하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사기(史記) 한장유 열전(韓長孺 列傳)에 나온다.
한나라 때 관리 한장유가 법을 어겨 감옥에 갇히게 되자 옥리(獄吏)조차도 그를 우습게 대했다. 이애 한장유가 “다 타버린 재에서도 불길이 살아나지 않겠는가?(死灰獨不復然乎 사회독불부연호)라면서 권력을 되찾겠다”고 말하자, 옥리가 ”다시 불이 붙으면 오줌을 싸서 끄겠다(然則溺之 연즉요지)고 비웃었다. 참고로 여기서 연(然)은 불타다의 연(燃)과 같은 뜻으로 쓰였고, 물에 빠질 익(溺)은 오줌누다의 요(溺)의 뜻으로 쓰였다.
권토중래(捲土重來)에서 권토는 수많은 말과 수레, 병사가 달릴 때 흙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한번 실패하였다가도 온 힘을 기울여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 어부는 망망대해에 나가 악전고투 끝에 큰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나 그 큰 물고기를 끌고 오다가 상어떼에게 살점은 모두 뜯기고 앙상한 뼈만 남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또다시 바다로 나가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노인의 불굴의 투지가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어제가 개구리도 깨어나는 경칩(驚蟄)이었다. 무릇 겨울을 이겨낸 매화의 꽃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법이다. 시금치도 언 땅에서 자란 것이 더욱 달고 맛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실패와 시련을 겪게 마련이다. 그 실패와 시련을 극복하고 성공에 이르렀을 때 진정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두목(杜牧)의 시(詩)에서 처럼 권토중래(捲土重來)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2023.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