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星)과 별(別)하다. / 이 운 순
언제부터인지 메일확인이 주 단위, 혹은 더 길어지기도 해서 ‘전체선택’ ‘삭제’를 퍽 여러 차례 거듭하는 날이 자연히 많아졌다. 꼭 받아야 할 중요한 메일보다 상업성, 광고성 스팸메일이 대부분인지라 이따금 대충 훑어보고 삭제를 하면서 생긴 버릇이기도 했다. 엊그제도 여느 날처럼 전체선택과 삭제를 반복하다가 화면을 응시하던 내 눈길을 의심해 손길을 멈추었다. 아! 대구 종숙님이시다. 어려운 시댁어른, 시 종숙님이 되시지만 오늘같이 메일을 주시는 날에는 종질부와의 거리감 보다 ‘문우’로서의 동지적 성향에 무게를 두시고, 가끔 안부와 함께 따끈따끈한 수필을 보내주신다.
설렘도 잠시, 종숙님의 메일 ‘별이 지다’라는 제목만으로 나는 그만 메일을 열어보기도 전에 눈자위가 붉어지고 목이 메어왔다. 종숙님께서 누구를 회고하시는지, 이글을 쓰실 때의 종숙님의 심중이 어떠하셨을 지에 마음이 닿자 그만 가슴이 답답해 왔다. 예기치 않게 훌쩍 떠나 이별을 고한 당신의 종제, 사촌아우에 대한 원망과 회한을 어쩌시지 못해 그 비통하신 마음이 수필이 되어 화면을 채웠다. 통상적으로 하는 말처럼 몸도 마음도 약해진다는 높은 연세, 내년이면 희수가 되시는 어른에게 친 혈육만큼이나 아끼던 사촌아우에 부음이 얼마나 큰 충격이고 아픔이었는가에 눈앞이 흐려진다. 범인들의 시선으로는 두 분 종숙님 간에 우애를 가름할 수 없을 테지만 그렇더라도 시집온 지 이십칠 년, 적지 않은 세월을 뵈어온 바로 감히 짐작 못할 부분도 아니다.
'비보‘를 접한 건 이달 초하루, 음력 윤삼월 열하루새벽이었다. 한밤중 혹은 이른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은 수화기를 들기 전 부터 이유 없는 두려움을 수반한다. 어쩌면 잘 못 온 전화이기를 바라는 소심한 마음이었지만 소식은, 너무도 건강하셨던 서울 큰댁 큰 종숙님께서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칠순이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멋지시고 너무도 건강하셨던 아제님께서.....누구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부음에 진정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릴 듯 그것은 큰 충격이었다.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귀골이 장대하시다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시는 옥골선풍이셨던 종숙님, 항상 젊은 청년의 마음으로 후진들의 귀감이신 종숙님의 비보는 그야말로 청천병력이었다. 이즈음의 종숙님께서는 윤달에 맞춰 하기로 했던 큰댁과 작은댁 윗대 조부님 신도비를 세우는 대사를 준비 중이셨으며 그날 저녁에도 신도비에 새길 비문을 마치시고 잠자리에 드시던 중, 갑작스런 심장 이상으로 병원에 모셨지만 손 쓸 여유도 없이 그렇게 황망히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일 년에 서너 차례, 더 자주 뵈어야 겨우 대 여섯 차례 뵐뿐인 종숙 질 간이었지만 늘 소심한 성격 탓에 시댁어른 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었다. 시집 온지 이십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제법 없던 변죽도 생겨나 이제 겨우 집안 대소사에서 뵈면 한층 더 반갑게 다가갈 수 있었던 나로서도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문상오신 집안 대소가 어른들의 침통하신 모습들, 이렇게 다들 한자리에 모이면 늘 좌중을 압도하시고 그 어떤 모임이던 모임에 격을 한층 더 높이시던 어른이셨지 않은가. 이렇듯 당신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모였건만 언제나처럼 잔잔한 웃음을 띤 영정 속에 종숙님은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들릴 것만 같은데 묵묵부답 말씀이 없으시다. 이렇게 이미 우리들과 종숙님과의 거리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거리가 되어 이별을 확인 시킬 뿐이었다.
대구종숙님의 메일 ‘별이 지다’전문에는 돌아가신 큰댁 종숙님과의 남다른 우애를 드러내셨다. 경북예천 작은 마을에서 두 분 다 유학을 가신 곳이 대구였으며, 대구종숙님은 대학 1년, 돌아가신 큰댁종숙님은 대륜 고 1년, 고향을 떠나와 낮선 곳에서 함께 유학생활을 하시며 남다른 우애를 지니게 되셨으리라, 서로를 의지를 했을 수도 있지만 서로 꿈을 키우기 위한, 시기와 경쟁심은 없으셨을까? 그러나 대구종숙께서는 시종 사촌아우의 인물됨과 학생회장을 하시는 등 공부와 서예는 물론 특히 많은 대중 앞에서 사회며 노래며 늘 남보다 출중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언젠가 총 동문회자리에서 전 국회의장 이만섭씨가 사회를 보시는 종숙님을 가리키시며 ‘대륜에도 저런 인재가 있었나.’ 하시더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아까운 동생을 잃었다고 비통해 하신다.
아!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이토록 아끼던 아우를 잃은 종숙님의 슬픔을 차마 혜량하기 어렵다.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혈연으로 시작되어, ‘유학’이라는 청년기를 함께 보내신 두 분, 이후, 서울과 대구라는 거리를 두고서 사촌아우의 행보를 늘 지켜보시던 칠십년 세월은 사촌아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반증이다. 두 분 종숙님의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고향산자락 아우의 ‘천년가옥’ 앞에서 하염없이 우셨다는 말씀엔 나도 몰래 눈앞이 흐려졌다. 선산에 일이며 종중의 중요한 일 등 산적한 일들을 그 자랑스러운 아우와 함께 의논하며 일 처리를 해 나가리라 꿈꾸었지만 아우는 홀로 먼 여행길을 떠났다. 수필의 말미, 아우를 보내는 배웅 길에서 당신의 남은 생애 동안 두 분이 함께 꿈꾸어오던 가문과 후손을 위한 사업들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현몽을 해서라도 만나자는 말씀은 하늘의 뭇 별 만큼이나 아끼는 아우와 언제까지나 함께 하고픈 종숙님의 마음이 담겨있음이다.
범부로 살아 오시면서도 결코 범상치 않으셨던 종숙님, 가시는 길이 아름다운 꽃길이었기를 기원 드리며, 또한 변변치 못한 ‘문우’에게 아픔과 그리움을 담담히 정리하시고 당신의 건재를 보여주신 대구 종숙님께 무한 감사의 마음이 일렁인다.
2012. 포천문학 지에서
첫댓글 좋은 글 많이 보여 주세요!!!
우리 재경 내골 친목회에 이런 좋은 글을 쓰시는 분이 있으니 행복해요
부끄럽습니다. ㅎ
포천동서의 아름답고 훌륭한 글 칭찬해주고 싶어요....
에고 형님 쥐구멍 찾으라구여...
" 현몽을 해서라도 만나자는 말씀은
하늘의 뭇 별 만큼이나 아끼는 아우와 언제까지나 함께 하고픈 종숙님의 마음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호명 웅골 외손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조사에서 뵈면 인사도 잘 못드렸었는데 너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