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왕후 청송 심씨(沈氏)
조선 최초의 합장릉에 왕과 왕비가 함께 누운 금슬 좋은 영릉은 처음엔 물이 흐르는 습지였다. 물 속에서 지금의 영릉으로 빠져 나왔고 이 때도 나란히 누워 지금껏 금슬을 과시하고 있는 중이다. <소헌왕후 영릉지>에 정인지는 소헌왕후에 대하여 다음처럼 묘사하였다.
"왕후는 나서부터 정숙하고 완만하여 오직 덕을 행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사저에 살고 있을 적, 태종께서 훌륭한 문족 중에서 배필을 구하였다. 1408년에 왕후가 자라자 덕행과 용의(容儀)로 뽑혀 와서 빈이 되어 경숙옹주로 봉작되었다. 공경하여 양궁을 섬기어 두텁게 사랑을 받으며 가실의 화목한 날 내당에 정위해서는, 인자하고 검소하여 엄숙하고 온화한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왕후가 들어오고 물러갈 때는 전하께서 반드시 일어서시니, 그 공경하고 예로 대하심이 이와 같았다. 1417년 9월 삼한국 대부인으로 고쳐 봉하였다."1
이렇게 처음에는 왕자의 부인이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남편이 세자가 되고 또 왕위에 오름에 왕비가 되었으니 인생이란 신기한 거다.
"왕후의 인자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한 것은 천성으로 부터 나왔다. 중궁에 정위한 뒤로는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여 빈잉을 예로 대접하고 아래로 궁인에 미치기까지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은혜를 가하지 않음이 없었다."2
정인지는 그 밖에도 <소헌왕후 영릉지>에서 소헌왕후를 묘사함에 끔찍할 만큼 드높였다. 국모 29년 동안 경계함이 지극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심해 사시던 중 병이 들어 앓다가 승하하였는데 그 때 나이 52살이었다.
소헌왕후는 8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세자에서 문종으로 즉위하였고,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뒷날 세조로 즉위하였다. 그러니까 소헌왕후는 태조 이성계의 첫 왕비 신의왕후 한씨에 이어 두 명의 아들을 왕으로 배출한 두 번째 조선여성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이라 그게 위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영릉 안채. 경기도 여주
소헌왕후의 참담한 세월
아버지 심온(沈溫 ?-1418)은 개국공신 가문 출신이었는데 딸이 충녕대군의 부인이 되면서 1411년 관찰사가 되었고 대사헌,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 뒤 사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름에 따라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 이방원이 심온을 영의정으로 기용하였고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갈 적에 환송행렬이 대단했다는 소문에 태종이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심온의 아우 심정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태종에 대해 비판하였으므로 태종은 명나라에서 귀국하던 심온을 의주에서 죽여 버렸다. 심온에게 사약을 내리고자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일단 귀경시켜 취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좌의정 박은(朴訔 1370-1422)은 취조할 필요 없이 죽여야 한다고 했다. 사약을 받은 심온이 좌의정 박은의 소행을 알고서 유언으로 후손들은 결코 반남 박씨와 결혼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태종은 나아가 심온의 딸이자 세종의 왕비까지 폐비시켜 버리고자 했다. 하지만 세종은 이를 가로막아 겨우 왕비의 지위를 지켜주었다. 하지만 상왕 태종은 심온의 혈족을 모두 노비로 강등시켰는데 심지어 왕후의 어머니인 심온의 부인 안씨까지 노비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물론 심온도 노비 신분으로 죽었으니 왕후는 오직 홀로 왕후일 뿐이었다. 왕후는 1418년부터 1446년까지 무려 30년 가까이 고통을 당해야 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데도 남편 세종은 왕후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장인인 심온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왕후의 어머니 안씨의 천비 신분을 풀어준 건데 그것도 1426년 그러니까 무려 9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소헌왕후가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집에서 52살의 나이로 승하하였을 때 올린 <소헌왕후 애책(哀冊)>이 유난히 애달픈 까닭은 저 서글프고 서글픈 생애 때문이었을 것이다. <애책문(哀冊文)>이라는 게 본시 슬픈 것이지만 소헌왕후 애책문은 유난스럽다.
"아아, 처음 열병이 드시어 잠시 나으시는 듯하였으나 졸지에 못드심에 -중략- 늘어선 무리들은 슬픔에 뒤엉켜 저마다 죽어서 뒤따르기를 원하고 거듭뜬 눈동자에 눈물이 응어리져 통한을 이기지 못하오며, 백성들은 또한 제 어미가 죽은 것 같이 슬픔에 빠지고 대소 신료들도 그 어머니의 임종을 당한 듯 넋을 잃었습니다. 오호라, 애통하옵니다."3
이렇게 슬픈 문장은 한참을 더 이어가는데 상중에 이어 상여 나가는 길을 묘사한 그 표현이 또한 슬픔으로 가득하다.
"상복을 펼쳐 두었으나 헛되고, 세월의 빠름은 질주하는 말이 틈 사이를 스침과 같으며, 옥같은 이슬이 흐르니 깊은 슬픔에 풀잎이 젖어듭니다. 쓸쓸한 가을바람이 소리 내어 울어대니 나뭇가지가 놀라고, 상여가는 길 굽이굽이 머나먼 데 <해로가(薤露歌)> 소리가 쓰라린 슬픔을 채찍질하옵니다. 한강의 물결은 상심을 더하고 어둔 구름이 모여듦에 참연함이 더 하였습니다."4
애책문의 지은이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비교할 수 없이 너무도 뛰어난 문장이라 읽고 있노라면 눈물이 저절로 폭포를 이룬다. 장례가 끝난 뒤 누운 왕후의 묘소를 묘사한 문장 또한 명문이다.
"무덤의 새문을 여니 병풍처럼 둘러싼 산들이 높고 높으며, 굽이굽이 흐르는 물이 맑고 맑은지라 다만 영택(靈宅)이 이에 마땅하고 안녕하시기를 바랐습니다. 깊은 밤은 다시는 밝아지지 않고 천지가 다하도록 새벽은 오지 않을 것만 같사옵니다. 눈물이 고여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안개에 싸인 듯 희미하고, 무성한 이끼가 가리어 기린(麒麟)의 언덕이 보이지 않습니다."5
영릉 행랑채. 경기도 여주
변질된 영릉 풍경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다시 말해 세조는 첫째 아들이 일찍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맏아들인 문종, 단종이 죽고, 또 자신의 맏아들도 요절하자 부모인 세종과 소헌왕후의 왕릉 풍수가 잘못이라 여겨 능을 옮기고 싶어했다.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다가 예종 때에 이르러서 지금의 영릉 터로 옮길 수 있었다. 지금 영릉은 절대 승지(勝地)인데 풍수를 모르는 안목으로도 그곳에 가면 온 몸과 마음이 그리도 시원스러울 수 없음을 알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너무도 불편한 일들이 근래 이뤄졌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영릉정화사업을 지시했다.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를 성역화할 적에 세종의 영릉도 그렇게 해야 문과 무의 균형이 맞는다는 논리였다. 장군과 군주로 짝을 맞추는 것도 어색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기념관, 동상, 해시계인 앙구일부, 수표 및 측우기 따위 온갖 기물들과 마주치는 상황이다.
세종대왕상. 김세중작품, 1971년, 여주 영릉
처음 방문하면서 마주친 저 기물들은 기괴하기조차 했다. 또 홍살문과 정자각이 비스듬히 꺾여 있어 큰 실수의 흔적을 남겼고 특히 새로 돌을 깔아 놓은 길을 2도가 아닌 3도로 만들어 엉뚱하게도 제후인 세종을 중국의 천자인 황제로 만드는 일을 저질렀다. 제후국의 왕릉은 어도(御道)와 신도(神道)로 2도가 기본이요, 천자국의 황제릉은 어도 이외에 또 하나의 길을 두어 하위의 왕들이 걷도록 3도 형식을 취했던 거다.
비스듬히 꺾여 지어진 영릉 홍살문. 경기도 여주
게다가 입구에 방지원도(方池圓島)라는 연못을 근래 조성했는데 네모 연못인 방지까지는 맞지만 가운데 둥근 섬인 원도는 없다. 어이없는 반쪽 방지원도가 탄생한 것이다. 대체 무슨 까닭일까. 일부러 반쪽 연못을 조성한 건 아닐 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연못이며, 무슨 기념관 따위가 없었을 적 아주 오랜 옛 영릉은 그 풍광만으로도 눈부시게 시원한 땅이었다. 사람이 끼어들어 온갖 것들을 채워나가자 그 풍광은 사라졌다.
제 모습 찾으려면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
1. <소헌왕후 영릉지>, <<선원보감>>1, 계명사, 1989. 140쪽.
2. <소헌왕후 영릉지>, <<선원보감>>1, 계명사, 1989. 140쪽.
3. <소헌왕후 애책>, <<선원보감>>1, 계명사, 1989. 139쪽.
4. <소헌왕후 애책>, <<선원보감>>1, 계명사, 1989. 139쪽.
5. <소헌왕후 애책>, <<선원보감>>1, 계명사, 1989. 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