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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 음
본문 이사야 26장 3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우리는 다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다 같은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매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걱정하는 자들을 가리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씀 하신다. 마6:30
반대로 자기 자식의 문제를 놓고 주님 앞에 간구한 여자를 향해서는
‘네 믿음이 크다’고 하셨다. 마15:28
◉ 또 하나님 보시기에 연약한 믿음이 있는가 하면 굳고 강한 믿음이 있다.
롬14:1 골2:1
◉ 또 거짓 없고 진실한 믿음이 있는가 하면 거짓되고 파선된 믿음도 있다.
딤후1:5 딤전1:19
◉ 죽은 믿음이 있는가 하면, 영혼을 구원할 만큼 성장한 살아있는 믿음도 있다.
약2:26 히10:39
◉ 주님 보시기에 신령한 믿음이 있는가 하면, 유아기적 수준에 머문 미숙하고 유치한 믿음이 있다. 고전3:1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 믿음의 상태를 매일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믿음의 상태를 점검하지 않아 그릇되고 미숙한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바르고 성숙한 믿음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게 된다면 이보다 더한 인생 낭비는 없다.
믿음은 구체적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앎이 자신의 삶으로 연결되는 전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에 구체적이어야 한다. 바르고 성숙한 믿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신앙용어를 구체적인 단어로 재정립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의 믿음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공허한 이론이나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은혜, 사랑, 긍휼, 자비 등 흔히 사용하는 단어들은 그 뜻이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이런 단어들이 내 삶과 관련되어 구체적으로 어떤 뜻과 개념을 지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로 믿음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믿음의 대체어 1.
1. 믿음은 ‘순종’이다. 순종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누군가가 나를 믿는다면 구체적으로 내 말을 믿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이는 단지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둘째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삶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삶에 어려움이 다가올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부터 한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겪게 하시는 것이 그 상황 속에서 나를 새롭게 빚으시기 위함임을 믿고, 그 상황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이다. 내 눈 앞에 닥치는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께서 단지 피하라고 주시 는 것이 아니라 이를 믿음으로 뚫고 나가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2. 믿음은 ‘용기’다. 매사에 말씀에 순종하고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는 것은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처녀인 마리아에게 ‘네가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한들 무엇 하겠는가? 처녀가 아기를 낳으면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주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며 순종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해를 당해도 자족하고 절제하고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은 용기 없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용기의 출처가 자기 자신이라면 그것은 만용에 그치고 만다. 만용은 항상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해치고 만다. 우리 용기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다.
3. 믿음은 ‘시선’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 시선이 늘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다. 하나님을 보아야만 용기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쓰실 때 언제나 광야로 부르셨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다윗,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광야의 특징은 하나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향한 시선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선을 당신께 고정시켜 주시기 위해 때로 우리의 인생을 광야로 끌어가신다.
4. 믿음은 ‘다루어짐’이다. 내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다면 나 같은 피조물은 절대로 하나님을 다룰 수도, 조정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바라볼수록, 시선이 깊어질수록,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져야할 존재임을 알게 된다. 나의 재물이나 달란트로 하나님을 다루고 어르는 것은 ‘미신’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매일 다루어지는 것이다.
5. 믿음은 ‘신실’이다. 믿음은 헬라어로 ‘피스티스’(신실)다.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 = '네가 신실해지고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는 말씀이다. 신실한 자는 자기의 욕망을, 거짓된 것, 헛된 것을 구하지 않는다. 신실한 자는 오직 진리를 위해 참된 것을 구한다. 그러므로 주님이 응답하시는 것이다.
6.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다루시는 신실한 사람이라면 나의 신실함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일 것이다. 믿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이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말씀을 전할 때 한 앉은뱅이에게 큰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여, 치유를 얻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남의 믿음을 보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나의 믿음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7. 믿음은 곧 ‘자기발견’이다. 믿음은 남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자기도 자신을 믿음의 측면에서 재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에노스) 죄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되고, 에노스인 나를 깨닫고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다 인침 받은 새로운 속사람인 나를 다시 발견한다. 욕망의 노예인 겉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좇는 참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믿음은 진리 안에서 나의 속사람을 발견하는 기쁨이다.
8. 믿음이 자기 발견임을 알게 되면 믿음은 곧 ‘자기 사랑, 자기 가꿈’이 된다. 안델센의 ‘미운 오리새끼’가 자신이 백조임을 알고도 계속 엉덩이를 뒤뚱 거리며 걷겠는가? 날지도 않고 물 위에서만 놀겠는가? 백조처럼 우아하게 걷고, 날아 본적이 없어 날개가 아파도 힘을 다해 나는 법을 배우고 백조처럼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어 갈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내 자신, 되어져야할 속사람을 발견한다면, 그때부터 나의 속사람을 지성으로 가꾸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머릿속에 지식을 넣기 위함이 아니다. 속사람을 가꾸기 위함이다. 자기 속사람을 가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게 된다.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할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사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집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에게 사랑은 이웃을 술자리에 데리고 가 함께 술 마시는 것, 함께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나의 속사람을 바르게 세우고 나를 사랑 하고 존중할 때에만 겉사람의 후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게 된다.
9. 믿음은 ‘자유’다. 나의 속사람을 가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유혹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10.믿음은 ‘삶’이다. 하나님에 대한 앎이 순종, 용기, 시선, 다루어짐, 신실함, 자기발견, 자기 가꿈, 자유함을 지향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은 점점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얼굴’의 본딧말은 ‘얼꼴’로 영혼의 상태가 드러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얼굴이 곱게 보인다. 이같이 우리의 믿음이 바로 세워져 가면, 우리의 삶 자체가 곱게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추상화 된 믿음을 구체화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믿음의 대체어 2.
1. 믿음은 ‘지피지기’다. ‘지(知)피(彼)’는 적이 아니라 ‘저쪽 상대’라는 말이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고 또 나를 알아야 성숙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현실의 삶속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실생활과 무관할 때가 많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보배와 질그릇은 하나님과 나 자신을 의미한다. 에노스의 뜻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뜻이다. 우리는 본래 질그릇이다. 이보다 잘 깨어지는 것도 드물다. 작은 유혹에도 깨어지고, 시련의 바람이 살짝 불어도 무너지는 영락없는 질그릇이다. 형편없는 질그릇에 불과한 내 속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다. 이 지피지기를 알면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을 만난다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후4:8-10)
지피지기의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말 부요한 자로 살 수 있다.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지 않는다.(고후6:9-10)
지피지기의 믿음을 가질 때 상처받지 않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참된 보화를 가진 사람은 상처 받지 않는다. 부자에게 가난뱅이라고 해도 상처받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깊은 상처가 된다. 박사인줄 모르는 사람이 무식꾼이라 하면 박사는 웃고 말지만 초등학교도 못 가본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된다. 내 안에 보배이신 주님께서 계심을 깨닫는다면 아무도 나를 상처 줄 사람이 없다.
지피지기의 믿음을 지닐 때에만 우리는 일평생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 (고후12:9) 자신이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임을 잊지 않고 주님만 의지한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고 고백했다. 주님께서 헌신하는 자를 존귀케 하시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때 교만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이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임을 잊지 않을 때에만 자기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 거할 수 있다. 허영으로 일하는 것도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지만(빌2:3), ‘저는 할 수 없습니다’하고 항상 사양하는 것 또한 겸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겸손은 내 속에 계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무엇이든지 행하는 것이다.(마3:15 - 요한에게 침례 받으시는 주님) 침례요한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주님께 침례를 베풀었다. 겉으로만 보면 교만해 보일 수 있으나 요한에게 있어 그것이 겸손이었다. 그것은 지피지기의 믿음 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2. 믿음은 ‘거룩한 부담’이다.
(렘20:8-9)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그렇게 살다가는 망한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핍박을 가했다. 결국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마음속에 불일 듯 일어나는 부담감으로 인해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생기게 된다. (고전9:16)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주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이 자기만의 안일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예전에 문제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부담감이 느껴져야 한다. 전에는 식구만 편안하면 그만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친척 일가와 이웃에 대한 부담이 생긴다. 욕망을 위해서만 살던 자기 삶의 태도에 부담감이 생긴다. 이는 그만큼 믿음이 성숙했다는 의미이다. 마음에 거룩한 부담이 생기지 않는다면 아직 믿음을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믿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믿음은 ‘약속어음’이다.
(행7:4-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가나안 땅에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발붙일 땅 한 평도 주시지 않고 그의 후손에게 주신다고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현찰이 아니라 약속어음이었다. 그의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25년 걸리는 약속어음이었고, 그의 후손들이 출애굽하여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는 수백년이 걸리는 어음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메시야를 예언한 것이 말라기 때였는데 그 약속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400년이 걸렸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현찰을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어음으로 주신다. 이는 현찰은 단순거래이지만, 약속어음은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현찰은 상대를 믿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다. 그러나 약속어음은 믿음의 관계 에서만 주고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래관계가 아니라 신뢰관계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조급함 때문에 늘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 이를 아는 자만이 성경이 송두리째 약속어음 다발이 된다. 세상의 유가증권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무효화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어음은 부도가 없고 유효기간이 영원하다. 그리고 인생을 언제나 바로 세워주시는 유가증권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 어음들을 자손 대대로 물려줄 것이고, 기일이 될 때마다 결제될 것이다.
4. 믿음이 약속어음임을 안다면 믿음은 ‘기다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약속어음을 받은 사람은 만기일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제를 기다리는 것이 무위도식의 기다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결제일이 도래할 때까지 약속의 내용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끔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빚어지는 기간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게’하시는 이유다.
(시66:10) 때로는 우리를 은을 단련하듯 훈련하신다. 은장색이 은을 단련할 때는 은을 완전히 녹여 불순물을 제거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인격과 자존심을 완전히 해체시킬 때가 있다. 그 속에 박혀 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해 주시기 위함이다.
(시66:11) 때로는 우리를 그물 속에 가두신다. 어부가 바다에 친 그물은 구멍보다 큰 물고기만 걸려든다. 때로 우리가 인생의 그물속애 갇힐 때, 우리가 그 그물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감량하는 수밖에 없다. 허망한 욕망과 이기심, 까닭 없는 증오심을 다 버려야 한다. 또 우리 허리에 어려운 짐을 두시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의 삶에만 충실하도록 해 주시기 위함이다. (시66:12) 때로는 내 명예와 인격이 짓밟히나 이때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뿐이다. 물과 불을 통행하면 뜨겁고 때론 춥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거룩한 영혼이 된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면 주께서 우리를 풍부한 곳으로 인도하신다. 약속어음이 결제되는 것이다. 이를 누릴 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합2:3) 이 약속어음은 때가되면 반드시 결제된다.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새로이 빚어지는 것이다.
5. 믿음은 ‘자기 확장 ․ 자기 성장’이다. 약속어음을 받고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빚어져 가면, 우리는 스스로 자기 확장, 자기 성장을 이루게 된다.
(고전13:11) 성장과 확장을 이룬다는 것은 ‘버리는 것’이다. 어제의 것, 어린아이의 것을 버리는 것이다. 버림으로 커진다. 자기의 사고방식과 사고의 틀을 깨어 버리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내 틀에 갇히면 하나님을 도무지 믿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내가 고수하고 있는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접하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팅이 끝난 보석을 주시지 않는다.
언제나 원석을 주신다. 그 원석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철저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해 나 자신이 날로 확장되어 갈 때에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면이 상대에게 있어도 그의 속사람, 즉 원석의 가치를 알아 가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내가 만든 틀 속에 갇히지 않으신다. 내가 하나님 챂에서 날마다 나의 틀을 깨어가야 한다.
6. 믿음은 ‘선택’이다.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자기 확장을 하는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매 순간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갈1:10)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을 위함인지 하나님을 위함인지, 매 순간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욕망의 법칙이 난무하는 곳이다. 이 욕망의 세상 속에서 세상 논리를 좇을 것인지, 진리를 좇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그 시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하나님을 과거형으로 잊어버리고 일주일 동안 우리 삶의 현장에 현재형으로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과 무관하게 산다.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부터 세상의 논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이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끝난다면, 주님 안에는 영원한 길이 있다.
7. 믿음은 ‘계산’이다. 바르게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 바르게 선택할 수 있다.
(마5:19) 하나님은 평등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정의는 평등이 아니라 공평이요, 공평은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는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 바울처럼 목숨을 던지며 주님을 위해 산 사람과 우리처럼 대충 사는 사람이 천국에서 똑같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계산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에서 크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서 크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인지? 세상에서 갈채받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상 받을 일인지, 바르게 계산할 줄 알아야 바르게 선택할 수 있다.
(마20:26-27) 세상의 계산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높아져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지만 주님의 계산법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으뜸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주님 앞에서 으뜸이 되는 길이다. 이것을 알 때, 믿는 자로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바보라서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한 가지는 우리의 승부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난다는 것이다. 영원 앞에서 이 세상은 찰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고, 오늘을 계산하며 살아야 한다.
8. 믿음은 ‘모험’이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만 하나님을 위해 모험을 할 수 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길이가 300규빗(137.4m), 넓이가 50규빗(22.9m), 높이가 30규빗(13.7m)인 방주를 지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주시거나, 일꾼들을 붙여주시지 않고 단지 명령하셨다. 그런데도 노아는 자기 재산과 전 인생을 거는 모험을 하며 순종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인생을 거는 것이 영원을 얻는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 모험의 결과로 그는 두 번째 시조가 되었다.
세상의 모험은 결과가 보장되지 않기에 도박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위해 모험을 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큰 능력과 은사를 주셨는지는, 하나님을 위한 모험의 현장에서만 확인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은 감격으로 넘쳐나게 된다.
9. 믿음은 ‘초지일관’하는 것이다.
(사26:3)내가 주를 의뢰한다는 것은 심지가 견고한, 즉 초지일관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의뢰는 기댄다는 뜻이다. 흔들거리는 널빤지에 기대는 사람은 없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께 기대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받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대었는데도 받쳐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그래도 기대야 한다(단3:17-18). 그것이 초지일관이다. 주께서 그런 사람을 평강에 평강으로 지켜주신다. 우리의 삶에 평강이 없고 늘 혼란 속에 빠져있는 이유는 자신이 정한 수준까지만 하나님께 기대고 더 이상은 기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든, 심지가 견고하여, 초지일관하게 하나님께 기대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던 그때의 마음으로 초지일관하면, 평강에서 평강으로 인도받을 것이다.
10.믿음은 결과적으로 ‘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원치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교사가 된다. 차이는 본받고 싶어 하는 ‘진면교사’가 되느냐,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가 되느냐는 것이다. 혹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반면교사는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직 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를 아는 사람들 앞에 그들이 닮고 싶어 하는 본으로 살 수 있다.
(행26:24-29) 바울은 자신을 향해 미쳤다고 말한 베스도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다’고 말했다. 철저한 믿음 속에서 살았던 바울은 이처럼 참된 삶의 본이 되었다(고전11: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이를 주석하면 ‘예수를 본받았더니 내 삶도 다른 이의 본이 되더라, 그러니 너희들도 이렇게 살아라’는 것이다.
(고전10:33)결국 바울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했다는 점에서 참된 본이 되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그들 보기에는 우리가 그들의 유익을 생각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유익만을 위하는 사람은 아무리 크게 성공해도 반면교사로 평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만 입힌다.
결 론
1. 믿음의 개념을 새롭게 재정립할수록 우리의 믿음은 날로 새로워진다.
(시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아무리 오래 된 노래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찬양하면 새 노래가 되고, 방금 작곡한 노래라도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헌 노래에 불과하다. 믿음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할수록 우리는 새로운 마음이 되고,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새 노래가 된다.
2. 날로 새로워지는 믿음은 다가오는 미래는 물론이요, 지나간 과거까지 새롭게 한다.
야구는 9회까지 경기를 치른다. 만약 9회 초까지 0대 8로 지고 있던 팀이 9회 말에도 득점에 실패하면, 그 게임은 완전히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팀이 9회 말에 9점을 얻어 역전했다면 0대 8로 지나간 시간이 역전한 승리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난다. 날로 새로워지는 믿음은 지나간 과거 까지도 새롭게 한다.
3. 날로 새로워지는 믿음은 이 땅에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영원한 이정표가 된다.
성경의 모든 위인들은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이정표가 되었다. 세월은 흘러가고 우리도 언젠가는 떠난다. 날로 새로워지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지 않으면 이 땅에 존재했던 많은 사람들과 같이 조만간 다 잊혀지고 말 것이다. 오직 참된 믿음으로 건져 올린 바른 삶만 이정표로 남는다. 하나님께 보여드릴 것도 그것뿐이다. 날로 새로워지는 믿음 속에서만 이상 언급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