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개포동
개포란 동명이 붙여진 것은 이 지역에 갯벌이 있다하여 "갯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또는 한자명으로 개포라 하였다. 이것은 개포동의 옛 마을 이름으로써 지금도 개패·개포의 옛 지명이 전하여지고 있다. 개포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포일동, 반곡동의 일부였는데, 1914년 경기도 구역 획정 때에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가 되었다.
1983년 12월1일 개포1, 2동으로 분동 되고, 1985년 개포2동에서 개포3동이 분동 되었고, 1988년 개포1동에서 개포4동이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르며, 인접한 대모산은 표고 293m이며 산모양이 늙은 할미와 같다고 하여 옛날에는 할미산이라 부르다가 조선조 제3대 태종대왕의 헌릉을 모신후 어명에 의하여 대모산으로 고쳤다 하며 서편 포이동 쪽으로 구룡산과 마주하고 있다. 현재 개포2동에 전하는 자연부락 이름으로 한여울이 있으며 이는 한강이 이곳에 이르러 여울이 거세어져 흐르고 마을이 갯바닥에 있는 데에서 반곡이라 하였다 한다. 개포동에서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4개의 남방식지석묘(고인돌)가 조사된 기록이 있으나 도시 개발에 밀려 모두 없어져 그 형태와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강남구 대치동
대치동 동명의 유래는 원래 자연부락 7~8개 마을 중 큰 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 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조선 말 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치동이었는데 일제 때에는 대치리라 하였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대치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85년 9월1일 대치2동에서 대치3동이 분동되었으며, 1988년 7월1일 대치1동에서 대치4동이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른다. 자연 부락으로는 한티를 비롯해서 움말, 오달짝, 새말, 능안말, 중간말, 세촌, 아랫말 등의 8개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위치를 보면 움마을은 현재의 대치동 975번지 일대, 옹달짝은 980번지 일대, 새말은 915번지 일대, 능안말은 891번지 일대, 중간말은 910번지 일대, 세촌은 98번지 일대, 아랫말은 941번지 일대로 추정되어 비가 조금 많이 내리면 탄천과 양재천이 범람하여 농토가 물에 잠기어 별 쓸모가 없는 데다가 또 저지대에는 갈대만 무성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옛날 주민들은 마을을 둘러싼 쪽박산이 없어져야 이 마을이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고 하며 이 마을에서는 80년대 초 까지도 용신제라는 우물제를 올려 마을의 풍요로움과 질병 퇴치를 기원하고자 길한 날짜를 받아 5개의 공동 우물 청소를 깨끗이 하고 흑돈의 머리와 과일을 놓고 정성을 들여 제를 올렸다고 하나 지금은 도시 개발에 밀려 우물이 모두 메워져 치제가 중단되었다
강남구 일원동
일원동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書院)이 있었으므로 일원 또는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 대모산에 가리워져 [숨어져 있는 마을]또는 [편안한 마을]이라 해서 일원동 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일원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일원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에 속하였으며 , 1914년 3월1일 경기도 구역 획정 때에 이 지역에 있던 대청말을 병합하여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원리가 되었다. 1992년 10월 1일 일원동이 일원본동, 일원1동, 일원2동, 수서동으로 분동 되기에 이르렀다. 일원동의 대모산 기슭에는 약사절이 있다. 이 절은 고려 공민왕 2년 (1353)에 진정국사가 창건하고 불국사라고 했는데 고종 17년(1880)에 네번 째로 이곳에 옯겨 지은 것이며 이 절에 약사전이 있으므로 약사절이라고도 한다.
일원동 410번지에는 수령 250년 ,나무 높이 25m, 흉고 둘레 420cm, 수관 직경 1,5m인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느티나무를 주민들은 수호 나무로 삼고 매년 동제를 지내고 있었으나 주변이 택지 개발 지구로 개발 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어 돌보는 이 조차 없게 되었다.
강남구 도곡동
도곡동 동명 유래는 이 마을 뒤의 매봉산과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독부리라 하던 것이 독구리, 독골이 되었다가 도곡으로 변하였다 한다. 어떤 이는 동네 주변 밭에 그릇 깨진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 마을에 큰 도요(그릇 굽는 가마)가 있어서 흔히들 독골(독, 옹기,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는 마을)로 불려 왔을 것으로 짐작하여 마을의 유래를 살려서 이름을 붙인다면 道谷洞이 아닌 陶谷洞으로 해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말죽거리 양재동과의 동명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옛 이름 독골을 바탕삼아 도곡동으로 지정되었고 1988년 12월 31일 도곡2동이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른다. 자연 부락으로는 독수리, 독부리, 독골, 양재리가 합쳐 이룩된 마을이며 독구리 마을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입성하는 중간에 있는 마을로 지금의 말죽거리와 매봉산의 중간에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 길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에 잠깐 쉬어 가거나 날이 저물면 하룻밤을 묵으면서 아침에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잠깐 쉬어가는 마을이었다 한다
강남구 수서동
수서동 동명의 유래는 이 동리의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 하여 수서라 하였다. 수서동은 옛부터 궁말 또는 궁촌 이라고도 불리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 방번 내외와 그 봉사손 광평대군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수서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수서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였으며,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획정 때에도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로 남아 있었다. 1992년 10월1일 일원동에서 수서동이 분동 되었다.
수서동에는 탄천에 접한 지역 쪽으로 남부순환도로가 올림픽공원까지 이어지고 있고, 자곡동·율현동·세곡동을 지나 성남시로 이어지는 도로가 서로 교차하는 수서동 인터체인지가 있어서 중요한 교통 시설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강남구 포이동
포이동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큰 물이 지면 한강물이 들어와 갯펄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포이리라 했던 데서 연유한다. 포이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포이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포이동이라 하다가 1914년 3월1일 경기도 구역 획정 때에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포이리라 하였다. 1988년 7월1일 개포1동에서개포4동이 분동 되어 현재는 개포4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맡고 있다.
포이동, 개포동 일대에 걸쳐 있는 구룡산은 해발 283m로서 계곡이 9곳이 있는 산으로, 이 산 이름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옛날에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임신한 여자를 보고 놀라서 그 중 한 마리가 양재천 연못에 빠져 죽고 9마리가 올라갔다고 하여 구룡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구룡산은 양산 통도사에서 세운 서울 포교당으로서 1987년 8월12일 만불전의 기공식을 가졌다
강남구 신사동
신사동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 한강변에 있던 부락 새말과 사평리등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조선 시대 신사동의 자연 부락에 대한 상고에 의하면 이곳에 사평원이라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조선 후기에는 송파시장을 중심으로 이곳에도 그 영향이 미쳐 성행하였다. 또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른 새벽에 도성을 빠져 나와 이곳 사평원에 머물러 의의죽으로 요기한 일도 있었다 한다. 1925년에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주민은 모두 이주하였고, 모래벌만이 남아 있었다. 새말은 한강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어진 이름으로 일명 신촌이라 불렀으며 새말나루터가 새말에서 한남동으로 건너가는 길목, 즉 한남대교 주위에 있었으며 신사도선장이라고도 하였다.
강남구 청담동
청담동의 유래는 지금의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에 맑은 못이 있었으며, 또 134번지 일대 한강변의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청담리였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청담동이 되었다. 1970년 5월 18일 법정동과 행정동을 일치 시킬 때, 수도동사무소가 청담동사무소로 개칭되었다. 1973년 신설된 성동구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5년 10월1일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88년 청담1동과 청담2동으로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남구 역삼동
역삼동은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역촌이었던 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세마을을 합쳐 역삼리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1997년 도곡동사무소에서 역삼동 사무소가 분동 신설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는 역삼동이 역삼1동과 역삼2동으로 분동 되어 현재에 이른다.
웃방아다리라는 이름은 즉 방아다리의 웃마을로서 현 테헤란로 부근 국기원 근처 마을이었다. 이들 마을은 띄엄띄엄 자연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5~10여 호 정도가 한 부락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아랫방아다리는 방아다리 아랫 마을로 현 833번지 일대 역삼초등학교 근방에 있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옛부터 상부상조의 협동 정신이 강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효자, 열녀가 많았다 하며, 역삼동 산 21의 1에서는 숭실대 사학과 유물 발굴단에 의하여 선사 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을 사용한 사람들은 길이 16m 폭 3m정도 크기의 장방형의 주거지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거지의 실내 면적은 12평 정도로 당시 일반 생활인의 가옥으로서는 상당히 큰 집으로 판단되며,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기원전 7~4세기 사이의 주거지로 보고 있다
강남구 세곡동
세곡동 동명은 1914년 행정 구역을 조정하면서 옛날의 자연 부락 명칭인 세천리와 은곡동의「세」자와 「곡」자를 각각 따서 제정한 것이다. 세곡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이곳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세천리, 은곡동 지역으로서 1914년 3월1일 이곳을 광주군 대왕면 세곡리로 칭하게 되었다. 세곡동의 행정동 변천 관계를 살펴보면, 1962년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관할 아래였던 이 지역은 1975년 10월 1일에는 성동구로 부터 분리·신설된 강남구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세곡동사무소는 변함 없이 율현·자곡·세곡동의 행정을 맡고 있다.
현재 대왕국민학교가 있는 세곡동 로터리 부근에 가느다란 개울 세천이 있고, 이 개울가에 세천리 마을이 있다. 현재로 헌릉로에서 은곡동을 들어가려면 세천교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는 1957련 1월에 놓았으며, 이 세천리에는 술막이라는 술을 파는 곳이 있었다. 세천리와 함께 세곡동의 명칭이 있게 된 은곡동은 헌릉로 북쪽 대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은곡동은 일명 망골, 막은골이라 칭한다.
막은골이란 이름은 나무를 심어서 마을 수구를 막았으므로 유래된 것이라 하며 은곡동에서 자곡동의 못골로 넘어가는 곳에 도당터가 있으므로 이 산을 도당뫼라고 부른다. 또한 이 부근 세곡동 362번지에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으며, 은곡동 서쪽의 들판을 용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용푼에는 굴이 있는데 기이하게도 이 굴에서 불을 때면 700m 떨어진 도당터 고목나무 줄기에서 연기가 피어 오른다는 것이다. 또 은곡동에서 못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마고개라고 칭하며, 이 마을의 뒷 산인 대모산에는 북 소리가 나는 바위가 있어서 못골 쪽 봉우리에있는 이 바위를 두드리면 북소리가 난다고 한다. 비선거리는 세곡동 118번지, 즉 세곡동사무소가 위치한 부근의 마을로서 전일에 비석이 서 있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강남구 삼성동
삼성동은 조선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봉은사 무동도 닥점 지역이었는데 일제 때인 1914년 3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대치동, 청담동과 함께 수도동사무소에서 관장하였다. (수도동이라는 명칭은 봉은사가 있는 수도산에서 따온 것이라 함) 그 뒤 1970년 5월18일 법정동과 행정동 명을 일치 시킬때 수도동사무소는 청담동사무소로 개칭되었고 1977년 9월1일 청담동에서 삼성동이 분동 되었고 1985년 9월1일에는 삼성로를 경계로 삼성 1,2동으로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른다.
삼성동의 자연 부락은 닥점, 무동도, 학당동, 배곶이마을 등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닥점은 무동도 쪽에 있던 마을로 이 마을에는 닥나무(한지원료)를 파는 상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강남구 압구정동
압구정동은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1415~1487)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압구정이 있던 자리는 북쪽의 옥수동과 금호동의 동호 일대와,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선시대 닥나무가 무성했던 저자도가 그림처럼 펼쳐졌으며, 멀리는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까지 시야에 들어와 절경을 이루었다 한다.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언제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결혼한 박영효에게 저자도와 함께 하사되었고 고종 21년(1884)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그가 역적으로 몰려 전 재산이 몰수될 때 압구정도 몰수되어 고종 말년에 다시 찾았으나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가 않고 다만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압구정 터임을 알리는 바위돌만이 우뚝 서 있다. 조선시대 압구정동의 자연 부락은 뒤주니, 먼오금, 옥골, 장자말 등이 있었다. 뒤주니는 압구정 밑에 있는 마을로 압구정을 뒤지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먼오금은 압구정구내에 있던 마을이었고, 옥골은 한강물이 마을 앞에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옥골 뒷산에서는 석기시대 돌도끼가 출토되기도 했었고, 장자말은 옛날 큰 부자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장자울이라고도 불렀고 기와집이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강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업 위주의 마을이었으며 일제 하에서는 배밭 등 과수원을 주농업으로 해온 마을이기도 하다.
강남구 궁마을
수서역에서 개포동 방면으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오른쪽 아파트 단지와 맞은편 주택가가 궁마을이다. 현재 수서동 400∼500번지 일대가 해당된다. 본래 궁마을은 궁말, 혹은 궁촌(宮村)이라 불렸고,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에 속해 있었다.
궁마을의 유래는 성종 원년(1470)에 세종대왕의 손자인 영순군(永順君)을 현재 궁마을 앞의 대모산(당시 경기도 광주 수토산)에 예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 후 연산군 2년(1496)에 무안대군과 광평대군의 묘소를 광주 서촌 학당리에서 이곳으로 이장한 후, 영순군의 아들 3형제가 수토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삼궁(三宮)이라 일컬었기 때문에 이 마을을 궁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궁마을이 지명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영순군의 차남 청안군(淸安君)의 손자인 아산현감 이인건이 궁촌에다 재실을 지은 후 대대로 제사를 지내게 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용주별곡 ]에 보면, 궁촌마을은 남한산성에서 서쪽으로 20리 지점 대왕면에 있으며 백제 때 도읍한 곳이라고 나와 있고, I중종실록 J에는 남한산성 서쪽에 탄천이 흐르고 탄천 동쪽과 서쪽에 수초가 무성하므로 수렵의 장소로 삼았다고 쓰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궁마을은 수풀이 울창하여 사냥터로도 즐겨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일대는 옛부터 경관이 아름다워 궁촌팔경으로도 유명했다. 궁촌팔경으로 꼽은 것은 동곡의 봄꽃, 약사의 새벽종 소리, 구현의 나무꾼 노래, 금평의 농부 노래, 쌍봉의 가을달, 남한의 저녁 노을, 탄천의 고기잡이 횃불, 광진의 돛단배이다.
강남구 대청마을
강남이 개발되기 전 일원1동 주택가 및 일원2동사무소가 위치한 지점에 99칸의 한옥이 있었다. 탄천을 건너 잠실 일대에서 바라다 보면 이 한옥의 대청이 보인다 하여 이 곳을 대청마을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위치는 강남구 일원동 612-687번지 일대로 일원2동사무소 주변이 된다.
강남구 마고개
1860년경 세곡동에 살던 홍수근이라는 사람의 셋째아들이 힘이 장사였다. 이로 인하여 도리어 화를 입게 될 것을 걱정하던 홍수근이, 어느날 그 아들을 심하게 꾸짖고 매질을 하다 그만 죽여 버리고 말았다. 기이하게도 그날 밤, 이 고개에서 밤새도록 말 우는 소리가 들리자 마을 사람들은 홍장사가 말로 환생한 것으로 믿고, 이후 이곳을 마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위치는 강남구 세곡동 산 48번지 일대이다
강남구 한여울
이곳엔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자연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여울이란 지명은 한강이 이곳에 이르러 큰 여울을 이룬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1986년 은행나무가 고사하자 1990년 20년 나이의 대목(大木)을 이곳에 새로 심었다. 정확한 위치는 강남구 개포2동 189번지 일대로, 개포동 주공아파트 401동, 주공아파트 506호 사이 이면도로가 된다.
강남구 싸리고개
말죽거리와 사평나루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에는 수십 년된 싸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싸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개마루에는 이곳을 왕래하던 사람들의 안녕을 빌던 성황당이 있었으며, 고개에 오르면 서울 남산이 보인다고 해서 서울고개라고도 하였다. 위치는 강남구 도곡1동이다.
강남구 말죽거리
말죽거리는 현재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을 지칭하는데 강남 일대에서는 양재동, 역삼동이란 동명보다 말죽거리라고 하면 알아 듣는 사람이 더 많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 곳을 말죽거리라고 칭하게 된 내력은 옛날 제주도에서 올려보낸 말을 한양으로 보내기 전에 이 곳에서 최종적으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얼마전까지도 양재동사무소 동쪽의 헌릉로변 게리 또는 거여리에는 많은 마방이 있었다.
옛날에는 서울에서 충청도·경상도로 가려면 한남동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말죽거리는 이대로의 첫 길목이었다. 이와 반대로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한강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으로 휴식하는 곳이 말죽거리였다.
따라서 말죽거리에는 조선초부터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주막도 적지 않았다. 즉 멀리서 온 여행자들은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저녁을 먹은 뒤이 곳에 묵었던 것이다. 또한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압구정등에서 전송하는 벗들과 마지막 주연을 나누고 헤어져 저녁나절에 찾아든 첫 숙소가 말죽거리에 있는 주막이다.
이들은 이제부터 천리길을 가야 할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이르면서 자신도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이 곳 일대를 말죽거리로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을 가는 길에 이 곳에 이르러 유생 김이 등이 쑤어 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들고 갔기 때문에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그 밖에 다른 설은 병자호란때 인조가 청나라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청나라는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이 때 이 곳은 청나라의 장사 용골대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였다. 즉 청나라의 기마병들이 산성을 향하여 공격을 가한 후에는 교대로 이곳 병참기지에 물러나 말의 피로를 회복시키고 말죽을 쑤어 먹였다 하여 말죽거리라고 칭하였다는 것이다.
강남구 옥돌
강남구 압구정동 526번지 일대를 옥골이라 불렀다. 옛날의 옥골은 현재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21동, 71동, 81동 자리에 30여호 정도가 자리잡고 있었던 마을로, 옥(玉)과 같이 맑고 깨끗한 한강물이 마을을 지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구석기시대 석부(石斧)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남구 학여울
학여울이란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한강 갈대밭 부근의 옛 지명으로, 조선시대 대동여지도에는 학탄(鶴灘)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남구 대치동 514번지 일대가 학여울터이다. 현재 이곳을 지나는 지하철 3호선 역의 이름도 옛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강남구 학동
강남구 논현동 26번지 학동근린공원의 지형은 용이 꿈틀거리며 등천하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요봉으로 부르던 곳이다. 용요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현 강남우체국 자리는 5일장이 섰던 들이다. 용요봉 아래에는 학동으로 불리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옛 이름을 1992년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따서 붙인 것이고, 근방을 지나는 지하철 7호선의 학동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강남구 용오동
강남구 논현동 26번지 학동근린공원의 지형은 용이 꿈틀거리며 등천하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요봉으로 부르던 곳이다. 용요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현 강남우체국 자리는 5일장이 섰던 들이다. 용요봉 아래에는 학동으로 불리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옛 이름을 1992년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따서 붙인 것이고, 근방을 지나는 지하철 7호선의 학동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초구 서초동
서초동은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하여 붙여진 동명으로 일명 상초리, 서리풀이라고도 칭하였다. 원래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에서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서초구 당산마을
당산마을은 당골마을과 마산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으로 당꿀로도 불린다. 현재 남부터미널이 있는 남쪽 남부순환도로변에 10여호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옛날산제를 지냈던 당이 있었다.
서초구 사도감마을
이 마을은 현재 영동중학교 일대를 말하는데 옛날 사또가 머물렀기 때문에 사도감이라고 불렸다. 이와 연관되어 양재역 부근에 사도감고개가 있었고 그밖에도 사도감개울, 사도감들, 사도감다리 등도 있었다.
서초구 왕촌
반포대로와 남부 순환도로가 만나는 지점인 서초동 1451번지 일대에는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고려가 멸망한 뒤 왕씨가 정착하여 500년 동안 거주해 온 곳이다. 조선 건국 후 왕씨가 멸족을 당하게 되자 태조 이성계의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나 자신의 후손들을 더 이상 멸족시키지 말고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성계가 특명을 내려 왕씨들을 더 이상 처형시키지 말고 찾아서 잘 살게 해 주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때 왕미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서초동 산 127번지에 그의 아들 왕효곤을 비롯하여 100여기의 왕씨 선조의 묘가 있었으나 1971년 도시계획사업에 따라 모두 이장되었다. 개발 전까지만해도 20가구의 왕씨 가문이 살고 있었다.
서초구 장안말
서초동 삼풍아파트 남쪽 일대를 장안말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세종 10년(1428) 임영대군에 봉해졌고, 세종 21년 여색에 빠졌다 하여 일시 직첩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문종 1년(1451) 왕의 직접 지도로 신무기인 화차를 제작하였으며, 그 후 세조를 보좌하여 조정과 백성을 위해 노력했다. 정곡은 현재 법원단지와 그 남쪽 일대를 말하는데, 옛부터 정씨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입구에 자연석 2개에 '鄭谷(정곡)'이라 정중만의 글씨로 새긴 것을 세워 놓았는데 현재 이 돌은 반포로변 해주 정씨 대종친회 건물 앞에 옮겨져 있다
서초구 잠원동
잠원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잠실리와 사평리로 불려왔는데 1914년에는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로 칭했고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잠원동이 되었다. 잠원동은 뽕나무, 양잠과 관계가 깊었던 곳으로 조선시대엔 이곳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잠원동이란 동명도 양잠과 관련있다. 원래 잠실리라 불리던 것이 서울로 편입될 때 송파구의 잠실과 구분하기 위하여 잠실리의 「잠」자와 인근 신동면 신원리의 「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인근지역은 뽕나무밭이어서 뽕 나무 묘목을 재배하고 양잠을 치는 농가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한강변에 이 지역이 위치하고 있어 뱃사람 또한 많았다
서초구 사평장터
오늘의 설악아파트 1동 북쪽, 한신아파트 337동 동쪽 잠원로 부근에는 지금부터 60여년전까지 사평장터가 있었다. 이곳은 지형이 높아 돈대마당이라고도 불리던 곳인데 그 동쪽에는 200년 된 느티나무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초구 한강나루
한남대교가 설치되어 있는 곳은 원래 한강진이 있던 곳으로 예전부터 수상교통의 길목이었다. 일찍이 신라 때는 북동이라하여 이곳에서 큰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때는 사평도라하여 진선이 배치되어 교통편을 제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제1의 도선장으로 송파·노량진과 더불어 경강 3진을 이루었다. 한강나루 북쪽에는 양진단이 있어 나라에서 봄·가을로 사고예방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부근에는 제천정이란 정자가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선비들이 자연을 즐겼다.
한편 한강나루의 진선으로 관선 10척이 있었다. 세종때 삼전도를 신설하면서 1척을 이관하 여 9척으로 운행되다가 15척으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한강진은 삼전도와 더불어 대모산 기슭의 헌·인릉과 나루 동쪽의 선정릉으로 가는 길목으로 역대왕들의 도강이 있었고 봉은사에 불공을 드리기 위한 도성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연산군 때는 청계산 수렵을 위한 부교가 가설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교를 설치하여 도성을 함락하려고 하자 의병들이 이를 파괴하여 작전을 교란시키기도 하였다. 현재 한남대교가 경부고속도로에 이어지는 것은 옛날 한강진을 건너 삼남으로 이어지는 옛 길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초구 원단동
현재 농가공산품판매센터(잠원동 65-32번지)부근에는 할떡거리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옛날에 떡 하나로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양반이 묻혀 있다는 양반산소가 현재 잠원동 천주교 성당 뒤쪽에 있다.
원단동 이란 마을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풍수 설에 따라 남산의 누에를 먹이기 위한 뽕나무를 마을에 많이 심었고, 세조가 이곳에 원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옛날에 활을 쏘았던 시장 터가 있었고, 예날 황새가 앉았다하여 황샛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잘 나왔다고 한다.
서초구 반포동
반포동은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하여 '서릿개'. 즉 반포라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곳이 홍수피해를 입는 상습침수 지역으로 반포라고 불렀다 한다.
반포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상반포리·하반포리 지역이었다가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확정에 따라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로 부르게 되었다. 1963년 1 월 1일 법률 제1172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이 동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인해 훼손되었기 때문 에 찾아 볼 수가 없다.
1960년대만 해도 신반포로 이서지역의 대부분은 모래사장 또는 늪지 대로 강물 속에 있었다. 약간 높은 지역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갈대밭과 뽕나무밭이 우거 져 있었으며, 채소농업과 양잠업이 행해졌던 곳이다. 그러나 장마철에는 큰 비가 내려 한강 의 수위가 높아지며 이곳 대부분이 침수되어 농작물의 피해가 자주 있었다. 일제 때에는 지 금의 반포아파트 일대에 살던 주민들은 유사의 사리채취로 생계를 잇는 이가 많았다.
서초구 별바위터와 말무덤터
옛날 어느 임산부가 산기가 있어 친정인 마포로 가다가 진통이 심해 견딜 수가 없어 길옆 갈대밭에 들어가 혼자 아기를 낳았다. 그러나 태를 끊을 수가 없어 어려워 할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흰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기를 "태는 갈대잎으로 끊으면 되나 아기가 걱정이다"라고 하며 당부하기를 "뒤에 말탄 병사가 쫒아 올텐데 그가 아기는 어떻게 낳았으며, 태를 어떻게 잘랐느냐고 추궁할 것이니 그때 가대로 잘랐다고 말하지 말아라" 만일 말한다면 아이를 죽일 것이다."하고 일러주고는 하늘로 사라졌다.
곧이어 말탄 병사가 뒤쫓아와 산모에게 추궁을 하자 산모는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병사는 즉시 아이를 죽였다. 이 때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아기가 죽은 뒤편 큰 바위에서 무수히 많은 왕벌이 쏟아져 나오더니 그 병사를 향해 날아가 병사와 말을 쏘아 죽였다. 그 후 벌이 나온 큰 바위를 벌바위라고 불렀다. 현재 이 곳에는 반포전화국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방사를 태우고 온 용마가 벌에 쏘여 죽은 것을 안타까이 여긴 마을 사람들은 용마를 정성껏 묻어 주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반포동 1번지 경남쇼핑센터 옆이다.
서초구 서래마을
사평로 동쪽 팔레스호텔 뒤쪽에는 예부터 이곳에 살아온 20여호의 원주민들이 있는데, 이 일대를 서래마을 또는 서애마을, 서릿마을이라고 부른다. 서래마을이란 명칭은 마을 앞의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해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또 서애라는 마을 이름은 매곡동(현 조달청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마뉘꿀이라는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이 자기네 서쪽 물가에 있고, 뒤에 깎아지른 듯한 산이 있으므로 불렀던 이름이다. 서래마을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의이죽으로 요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래마을은 원래 반포 15차 한신아파트가 지어져 있는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피해를 입고 이주해 와 형성되었다.
서초구 원곡마을
둥근말이라고도 불린 원곡마을은 산 모퉁이에 둥글게 이어져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현재의 강남성모병원 뒤쪽이다. 현재 이 병원의 기숙사 자리는 전에 빙고꿀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이곳은 골짜기가 깊어 겨울에 언 얼음이 늦봄까지도 녹지 않아 이같은 이름이 생겼다한다.
서초구 방배동
방배동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고을'이라는 설과 이 동자체가 '한강을 등진 모서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세조의 큰 형인 양녕대군이 세자자리를 세종에게 넘겨주고 전국을 돌아다닐 때 자신의 왕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갔다 하여 방배동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방배리였던 이 동리는 1963년 1월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관악구가 설치되자 관악구 사당1동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 1일 사당1동의 분동으로 방배동은 독립하게 되었고 이때 인구는 8,480명이었다. 1978년 10월 10일 방배동은 1·2동으로 분리되고 1980년 4월 1일 사당동의 일부를 편입, 강남구로 이관되는데 이때 이 편입된 부분이 방배본동이 된다. 1985년 9월 1일 방배2동에서 방배3동이 가라져 나오고 1988년 1월 1일로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리·신설됨에 따라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1991년 9월 방배본동과 1동의 서문로와 동광로 남쪽과 사당로 북쪽을 갈라내어 방배4동이 신설됨으로써 방배동의 행정은 방배본동·1·2·3·4 동에서 나누어 맡고 있다.
서초구 남태령
우리나라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여시골(엽시골), 즉 여우고개라 불리는 고개가 흔하게 널려 있다. 이는 예전에는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까닭이었다.
한양에서도 인근 경기도로 나가는 관문에는 곳곳에 여우고개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다름아닌 오늘날의 남태령이었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의 경계로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개이다.
18세기 말 효성이 극진했던 정조는 수원에 있는 선친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러 다녔었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다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이가 "이 고개 이름은 본디 여우고개로 불리는데, 왜 거짓말을 아뢰느냐'고 힐책하자 이방 변씨가 "이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이나 신하로서 임금께 여우고개와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했습니다."하고 아뢰니 정조가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 후 이 고개를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에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 부르게 된 것은 호랑바위가 있는 가까운 골짜기에 호랑골과 여 우골이 있어 여우가 많이 출몰한다고 해서 명명되었다는 설과, 예날에 천년 묵은 여우가 사 람으로 변신하여 이 고개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한편 남태령이 란 이름이 붙게 된 시기에 대해 광해군 때 만들어진 춘향전에 이 남태령이 이미 나오고 있 으므로 정조 이전에 불려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서초구 천촌말
이 지역은 근래에 신흥주택가로 발전한 곳이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자연부락 명칭들을 통해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천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천촌말이라 불렀고, 그 뒤에 있는 골짜기를 뒷굴, 그 뒷골에 있는 논을 뒷굴논, 천촌말 고개 너머의 벌을 뒷벌, 천촌말과 사궁말앞 벌을 앞벌, 천촌말 근처의 산개천둑을 갤둑이라 하였고 거꾸로 넘어간다 하여 가꿀고개, 논이 깊어 구레논, 쪽박 엎이 놓은 것 같다하여 쪽박산, 산 아래로 뱅돌아간다 하여 뱅도래미, 새로 생긴 마을은 새말, 옛날에 큰 마을이 있었던 터는 새텃말, 뱀장어가 많아 장앗들, 치달은 골짜기라하여 치골, 호랑이가 살았다는 호랑바위, 돌 한쪽으로 건너던 다리로 임금의 거동하던 길을 쪽다리,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하여 이복촌(이북굴)이라고 불렀다.
서초구 바람골
원지동은 현재 서초구의 남쪽 끝 청계산 옥녀봉 아래 계곡마을인 데, 탄천의 지류인 여의천이 흐르고 있다. 이 개천을 조금 거슬 러 올라가면 세원에서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는 청계산 입구 에 조그만 마을 바람굴이 있는데 이곳은 산이 높고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하여 이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서초구 양수리마을과 술바위
원지동 관현사 입구에는 현재 유원지 주차장이 들어선 곳에 옛날 양씨와 수씨가 살았던 양수리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폐동되어 단 지 그곳 골짜기와 들판이름으로만 불리는데 지금은 묘를 쓸 수 없지만 이 골짜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마을 입구 경부고 속도로 옆에 술바위란 유명한 바위가 있는데, 이는 옛날 지방에 서 서울로 올라가는 선비들이 여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쉬어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 마을 왼쪽에는 개드락이라는 골짜 기가 있고, 위쪽으로는 청계산 제2야영장이, 그 오른쪽에 장사바 위와 넙적바위가 있다.
서초구 원터마을
삼남도로를 가다보면 청계산 제1야영장과 청계산기도원 입구가 나타나는데, 여기가 원터(院基)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여행자를 위한 원(院)이 세워져 있었던 관계로 원터라 불려진 것 이다. 원지동 400번지에 일대에 원이 있었는데, 1970년대 취락구 조 개선사업으로 석축이 없어지고 현재는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있다. 이 원터마을은 경부고속도로가 놓임에 따라 주민들의 일부 가 이전하였고 옛 농촌주택은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었다.
서초구 내곡동
내곡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동으로 불리다가 1914년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로 바꾸었고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내곡동으로 이름이 바뀌어 성동구 언주출장소가 관할하게 되었다.
옛 언주면의 일부로 본촌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안골, 안말로 불리던 것을 한자명으로 내곡이라 부르게 된 것이 동명의 유래인데, 일명 양지말이라고도 칭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헌·인릉이 있어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으며, 수목이 울창하여 호랑이·여우 등의 짐승이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내곡동을 둘러 싸고 있는 산 중에 인릉산은 내곡동고 성남시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내곡동 산 13-1번지에 헌릉·인릉이 자리잡고 있어 산 이름이 되었다.
서초구 염곡동
염곡동은 이곳 지형이 염통과 같이 생겼으므로 염통골 또는 한자명으로 염통곡, 염곡동이라 하였다. 염곡동의 현재 위치는 동쪽은 내곡동과 접하고 서쪽은 양재동에 닿아 있다. 그리고 북쪽은 구룡산을 경계로 강남구 포이동과 분계되어 있고, 남쪽은 야산을 경계로 신원동과 잇대어 있다.
서초구 탑성골
탑성골은 염통골 남쪽 헌릉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버스정류장 이름도 탑성골로 되어 있다. 탑곡은 옛날 이곳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에는 경주 이씨가 11대 이전부터 살기 시작하여 아직도 몇 가구가 살고 있다.
서초구 옻우물
과거 염곡동에는 아홉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구룡산 전설에 따라 아홉개의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동에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8군데가 매몰되고 현재는 염곡마을 북동쪽에 구룡산 제1약수라는 옛날 옻우물만이 남아 있다. 이 옻우물이란 약수 이름은 옻이 오른 사람이 이 우물 물을 마시거나 우물 울로 씻어내면 옻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서초구 염통골
염통골 또는 염통곡으로 알려진 염곡동은 집성촌으로 창녕조씨가 많이 거주하고있고 전주 이씨도 몇 거주하고 살고 있는데 전주 이씨는 420여년 전부터 거주하기 시작했고 그후 20년 늦게 창녕 조씨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 이전까지는 조씨가 80~90여호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떠나갔다.
서초구 샘마을
내곡동의 샘마을은 1972년에 창경궁·창덕궁 인근의 종로구 와룡동 철거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함으로써 형성된 마을이다. 원래는 박석고개 왼쪽에 정착했으나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 때 헌릉로 현재 신흥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서초구 어둔골
헌·인릉 입구 박석고개에서 남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신흥마을이 있다. 이름 그대로 광복 후 월남민들의 개척단이 이룩한 새로 생긴 마을이다. 원래 이곳은 어둔골이라 하였는데 나무숲이 우거져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 호랑이도 자주 출현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전국에서 제일 품질이 뛰어난 수제양털이불 생산업체가 들어서 있다.
서초구 평촌
신원동의 근본이 되는 마을로 본촌이라 하고 또 마을이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이라고도 한다. 평촌은 벌말을 한자로 바꾼 이름이다. 이 벌말 438번지 13호에는 김진사댁이 있었는데 전에 과거를 보던 선비들이 이 사랑방에서 숙식을 하고 갔다 한다.
취락구조개선 사업으로 대부분 성남으로 이사 가고 지금은 원주민이 반으로 줄었다. 벌말은 김해 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으며 6·25동란 때 인민군이 크게 패한 격전지이기도 하다.
서초구 신원동
조선시대 공용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개 위해 역과 함께 각 요로에 설치되었던 원의 터 아래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로 "새원" 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원동이라 한 것이다.
서초구 우면동
산모양이 소가 졸고 있는 형태의 산이라하여 불려온 우면산 기슭에 있으므로 붙여진 동명이다. 1988년에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현재 원지동과 함께 양재1동 사무소가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서초구 양재동
양재동은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 양재동으로 불렀는데,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양재동사무소가 생겨났다. 1975년에 강남구에 속했다가 1988년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리·신설됨에 따라 양재동은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고, 1992년 양재동은 1·2동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옛부터 말죽거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양재역, 양재원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로 조선시대에는 사상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주요 상업지역이었다
서초구 태봉
우면동 형촌마을 옆에 있는 나지막한 봉우리를 태봉(우면동 291- 1번지)이라고 하는데, 이 곳은 조선시대 원산군의 태를 묻은 곳 으로 알려져 있다. 커다란 돌 항아리 내에 태를 담은 백자 항아 리를 넣어두었다고 전해지나, 일제 때 일본인들이 도굴해 현재는 돌 항아리만이 남아 있다.
10여년전 일본의 한 미술관련 잡지에 는 이와 관련하여 "이 항아리는 2개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에서 갖고 왔다"라고 게재되어 있어 당시의 지명과 일치하고 태봉의 유래와 백자의 존재도 사실인 것 으로 확인되었다. 이 일대는 우면산에 둘러싸여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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