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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50코스
성호3차아파트-구봉산임도-본정마을-사라실예술촌-유당공원-광양버스터미널 입구
20220208
1.황금동굴의 황금룡과 사라실예술촌의 쇠똥구리
*백제시대에는 마로(馬老), 통일신라시대에는 희양(曦陽), 고려시대부터는 광양(光陽)으로 불려왔는데 '마로'는 우두머리, '희양(曦陽)양'과 '광양(光陽)'은 따스하게 빛나는 햇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지난 1989년 당시 광양군의 일부지역이 동광양시로 분리되었으나, 1995년에 통합을 이루어 도시와 농촌 복합형 도시인 광양시로 새출발하였으며, 21세기 해양시대를 맞아 동북아시아의 물류거점 항만도시로의 커다란 도약이 기대되는 고장이다. - '광양시청'에서
2주만에 다시 광양에 왔다. 광양시 중동 성호3차아파트 305동 앞 50코스 시작지점에서 안내도를 살폈다. 구봉산전망대, 사라실예술촌, 광양와인동굴&광양에코파크, 이렇게 세 곳이 안내되고 있다. 과연 이 세 곳을 모두 들를 수 있을까? 그런데 50코스를 걸으며 들를 수 있는 곳은 오직 사라실예술촌뿐이다. 단체트레킹이어서 제한시간을 지켜야 하기에, 코스에서 벗어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곳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그림의 떡이다.
광양시의 중심지 중동지역에서 서쪽의 구봉산을 향하여 제철로를 따라간다. 성황천 표지판이 나온다. 아, 이곳이 성황 지역이구나. 조선시대 영조 때의 어사 박문수가 전라도 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예찬한 성황(城隍)이 이곳이야. 그래서일까? 성황천 서쪽 들녘에 대규모택지가 개발되고 있다. 앞으로 이곳이 개발되면 그 뒤쪽의 이미 개발된 지역과 함께 광양시 중심 중동 지역과 어깨를 당당히 견줄 것 같았다. 택지개발지구 뒤쪽에 금강산을 닮았다고 전해지는 가야산이 이 지역을 내려보고 있다.
먼나무들이 가로수 행렬을 이루고 있는 제철로에서 구봉산 임도로 들어섰다. 구봉산 임도에 푸른 잎들이 무성한 가로수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잘 조성된 임도길을 걸으면 언짢은 마음도 밝아지는데 길손의 부풀어진 마음은 더 달아올랐다. 이 아름다운 가로수 이름이 무얼까? 알아보니 가시나무, 이름과는 달리 가시가 없다.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우지하는 상록활엽수 가시나무는 구봉산 임도가 끝나는 배나무재까지 이어져 길손의 가슴이 푸르게푸르게 물들었다.
구봉산 임도에서 구봉산전망대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제한시간을 넘겨서 일행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그 욕망을 억누르며 임도를 빙 돌아 걸었다. 그런데 임도를 걷고 나서야 확실하게 깨달았지만, 전망대에 올랐다가 반대 방향의 임도로 내려오면 임도를 걷는 시간과 그리 큰 시간 차이가 나지 않을 듯싶었다. 여럿이서 걷지 않은 미지의 길을 걸을 때, 잘 아지도 못하는 길을 나 혼자만의 판단으로 결정하여 시간을 어기게 될까 봐 정상적인 코스로 길을 걸었다. 광양만의 대규모 항구시설과 산업단지, 건너편 남해도의 망운산과 산줄기, 광양 앞 바다의 이순신대교와 묘도, 바다로 돌출한 여수반도의 영취산과 여수국가산업단지, 여수공항과 율촌산업단지, 순천왜성 등을 조망하며 구봉산 임도를 돌아나왔다. 구봉산전망대에 올랐다면 남쪽으로 더 광활하게 광양만과 남해 바다를, 북쪽으로 백운산과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하여 지금도 마음이 쓰리다.
구봉산 임도 배나무재를 넘어서 광양시 황금동에서 광양읍 사곡리로 들어간다. 멀리 신선대와 백운대 그리고 억불봉이 조망되고 아래는 봉화산과 구봉산 사이 분지에서 사곡저수지와 점동마을이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다. 광양시 중심지 공업도시와는 다른 광양읍의 전형적인 농촌 점동마을 풍경이 정답다. 황금둘레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사곡리 지역이 금광마을임을 알았다. 황금동굴을 들러서 내려와야 하는데, 멍청하게 사곡저수지로 내려와서 마을 아낙에게 물어보니, 저수지 건너편에 황금동굴이 있다고 한다. 시간에 쫓기니 가볼 수 없고, 사곡저수지 둑방에 조성된 조형물 '매향이'와 '매돌이' 앞에서 왼쪽의 구봉산, 오른쪽의 봉화산, 그 사이의 배나무재, 그리고 점동마을과 황금동굴 입구를 살피고 길을 떠난다.
조선시대의 어사 박문수가 예찬한 성황 지역보다 사곡리 이 지역이 내게는 훨씬 마음에 든다. 그 시절의 이 지역과 지금의 이 지역을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 없지만 박문수가 이 지역을 방문했더라면 평가가 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벤더 향기를 환각하며 '사라실라벤더농원' 앞을 거쳐 내려가면 본정마을의 400년이 훨씬 넘은 당산목 느티나무가 길손을 반긴다. 중년부부가 매실나무를 가꾸고 있다가 길손의 행선지를 묻는다. 길손은 마을이 아늑하다고 이야기하니 마을의 자부심을 들려준다. 본정마을 또한 금광 채굴로 유명했던 지역이며 폐광된 곳을 해방 이후 마을 유지 하태호씨가 갱내를 복구하여 다시 채굴하였다고 한다.
본정마을에는 노거수 느티나무들이 우람하게 버티고 있어 그 자체로 마을의 유래를 알려주는 듯하다. 본정마을 입구 방향으로 내려가면 벚나무에 뜨개옷을 입힌 그래피티 니팅 작품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많이 헐고 빛이 바랬다. 조성한 작품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그래피티 문화의 특징일까? 이 농촌마을에 새로운 문화의 길을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을 생각하면 늘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피드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깃든다. 결국 돈의 문제겠지. 그렇더라도 이 지역 예술가와 주민들의 협조가 이루어져 이 문화를 처음 시작한 마음으로 끊임없는 창조의 샘물이 솟아오르기를 소망한다.
창고형 갤러리 '사라실'을 지나서 본정·점동마을 입구로 나간다. 억만천의 사곡교를 건너면 사라실예술촌, 폐교된 사곡초등학교를 개조하여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정문 옆 콘테이너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니, 전시 기간은 지났지만 연장된 듯 그대로 전시되고 있다. 예술적 안목이 없는 길손에게는 그 솜씨들이 놀랍고, 작품들이 곱고 예뻐서 한참을 머물며 감상했다. 사라실예술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창작실과 체험실 그리고 복도의 전시품들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살피고서 밖으로 나와서 쇠똥구리 조형물을 보았다.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는 모습이 쇠똥구리가 실을 뽑아 동그란 실뭉치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마을의 옥녀봉에 살던 옥녀가 베틀로 비단을 짤 때 작업실로 쓰던 곳이라 하여 이곳 지명이 '사라실'이 되었다고 하는데, 쇠똥구리가 실을 뽑아 뒷다리로 굴리는 모습이 옥녀가 베틀에서 비단을 짜는 모습처럼 연상되었다. 물론 지명 '사라실'에서 토박이말 '실'은 '실(絲)'을 뜻하지 않고 '골, 골짜기'를 뜻하며 한자어 '谷'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사라실의 '실'은 꼭 명주실 같은 느낌이 들면서 쇠똥구리 조형물의 의미가 멋지게 상상되었다.
사라실예술촌 동쪽에는 사곡보건진료소가 있고, 그 옆에는 본정마을 폐광을 복구해 채굴하여 마을을 일으킨 하태호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다시 사라실예술촌 정문 앞으로 나와서 '숲 속의 전남만들기' 사업으로 조성한 사라실정원 숲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얀 색 굵은 줄기의 플라타너츠 나무들이 사라실예술촌 담장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햇빛에 반짝이는 하얀 색 줄기들이 머언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줄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빛과 볕의 고장 광양과 흰 겨울눈의 시베리아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반짝이는 햇빛과 따스한 햇볕을 쬐는 흰 줄기의 플라타너츠 나무와 하얀 눈이 덮인 평원에서 눈보라를 무릅쓰고 줄지어선 흰 줄기의 자작나무가 대조되는 듯 유사한 이미지를 전해준다.
억만천을 따라서 길을 간다. 억만천 건너편 지방도 58번 도로에는 여러 산업공장들이 줄지어 있다. 억만천을 따라 가는 길이 '금너길', 이 길은 사라실예술촌 앞에서 석정삼거리까지 이어지는 길인데, 예전에 이곳을 '금너리'라고 하여 길 이름이 '금너길'이 된 듯싶다. 길 건너편 동북쪽 햇볕 바른 구릉 아래 마을이 아담히 형성되어 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볕이 들어서인지 포근히 느껴진다. 이 길이 '금너길'이니 저 마을은 아마도 '금너마을'인 듯 싶다. '금너마을' 구릉 너머로 '마로산성'이 있을 듯한데, 분명하지가 않다. 서녘으로 기우는 태양이 강렬한 볕을 쏟아붓는 걸 보면 뒤쪽에 '마로산'과 '마로산성'이 있을 것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금너길을 따라 백운로 지하보도를 나오면 석정삼거리, 해가 많이 길어졌고 남쪽이라 햇볕이 더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빛과 볕의 고장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볕이 더 따뜻하다는 생각이 든다. 광양경찰서 교차로에서 석정삼거리 방향을 돌아보니 오네뜨아파트 오른쪽 뒤로 분명히 마로산성이 어림된다. '마로(馬老)'는 우두머리를 뜻한다고 하니 '마로산', '마로산성'은 우두머리산, 우두머리산성이 된다. 광양 출신의 박현모가 읊은 <희양십경> 중 '馬老落照(마로낙조)'는 아마도 저곳에서 읊었을 것이다. 광양 바다로 해가 지고 있다. 지는 햇빛, 낙조(落照)가 마로산을 붉게 물들인다. 마로산의 산색(山色)은 예와 다름이 없는데 사람의 자취는 어디로 사라져가는지 알 수가 없구나. 이런 심정을 마로산에서 읊었을 것이다. 마로산에서의 선생 모습이 그려진다.
"松陰高下夕陽晴(송음고하석양청)솔 그늘에 저녁 노을 곱게 피어나니/ 頹石崩崖證舊城(퇴석붕애증구성)무너진 돌비탈이 옛 터를 증명한다./ 山色終無今古異(산색종무금고이)산색은 예와 다름이 없는데/ 如何往跡不能明(여하왕적불능명)어찌하여 가는 자취는 밝힐 수 없는고."(박현모의 '馬老落照(마로낙조, 마로산에 지는 해)'
광양경찰서 교차로에서 광양와인동굴 방향으로 눈길을 주고는 북쪽 방향 유당공원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앞 오른쪽에는 호남정맥의 산줄기 백운산과 억불봉이 우뚝 솟아서 지친 길손을 격려한다. "거의 다 왔으니 힘을 내요. 광양동천을 건너 유당공원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광양버스터미널은 엎드리면 코 닿을 곳이라오." 광양읍 용강리에서 광양동천 초남교를 건너 광양읍 목성리로 넘어왔다. 광양동천 둔치 파크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서녘의 햇빛 속에 반짝이고, 동쪽에서는백운산과 억불봉 산줄기가 광양 전체를 굽어보고 있다. 백운산이 왜 광양의 명산이며 광양에서 왜 그렇게 백운산을 내세우는지 광양읍 목성리 들길에서 분명히 알아낼 수 있다.
우시장사거리에서 왼쪽으로 틀어 '유당공원' 앞으로 나아갔다. 그 입구에 50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출발점에서 확인한 안내도와 비교하니 차이가 있었다. 이 안내도에는 '유당공원', '전남도립미술관', '광양와인동굴&광양에코파크', 세 곳이 소개되고 있다. 출발지의 50코스 안내도와 공통으로 소개하고 있는 곳은 '광양와인동굴&광양에코파크'뿐이다. 현재의 남파랑길 50코스와 51코스를 통해 보면 '전남도립미술관'은 51코스에 포함되어야 하며, '광양와인동굴&광양에코파크'은 50코스에서 제외해야 한다. 왜 이렇게 안내도에 소개하고 있을까? 이렇게 안내도에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남파랑길 50코스를 조정하여서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구봉산전망대'와 '사라실예술촌', '광양와인동굴&광양에코파크', '유당공원'을 거쳐서 '전남도립미술관'에서 끝나는 것이 남파랑길 50코스였을텐데,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코스를 조정하여 현재의 50코스가 되었을 것이라 추정해 본다.
유당공원으로 들어갔다. 시간에 쫓겨서 마음이 급하다. 건성건성으로 지나친다. 남파랑길을 충실하게 걷기 위해서는 시간을 충분히 보내면서 길을 걸어야 하는데, 트레킹 주최자는 남파랑길 50코스 안내도에 나온 5시간 30분에서 30분을 줄여서 5시간을 준다. 거기다가 출발지점에 10분을 지체하여 도착하니 결국 4시간 50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힘겹다. 유당공원의 연못과 충혼각에는 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음이 급하니 허둥거리기만 하고 살펴야 할 것들이 분명히 들어오지 않는다.
1528년에 광양현감으로 부임한 박세후가 처음 조성한 유당공원의 노거수들이 오랜 연륜을 느끼게 한다. 광양읍성을 축성한 뒤 바다 쪽에서 읍성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를 심으면서 유당공원이 형성되었는데 자연스럽게 방풍림 역할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를 비롯하여 공원의 노거수들을 지칭하는 '광양읍수(光陽邑藪)'가 멋지다.
시간에 쫓기지만 유당공원 내에 조성된 기념물들을 살핀다. '충혼탑'과 '참전유공자기념비', '비석군(碑石群)'. '충혼탑' 뒷면에 "고히 잠든 英靈들이시여 나라 爲한 功은 江山에 가득 차고 겨레 爲한 얼은 永世에 빛나리다."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 새겨진 비문 중 비문 앞머리는 깨어져 있다. 분명히 어떤 사연이 있을 듯한데 이유를 알 수 없다. 혹 여순사건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참전유공자기념비'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들을 추모하며 광양시장의 헌시와 박두규의 평화제단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유당공원 내 비석군(碑石群)'은,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광양 지역에 남아 있는 비석들을 이전한 것으로 모두 16기가 보호·관리되고 있다. 문제는 이 비석들 중 친일파 이근호의 '청덕애민비'(淸德愛民碑, 청렴결백한 애민 정신을 기리기 위한 비석)'와 친일파 조예석의 휼민선정비(恤民善政碑,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베푼 선정을 기리기 위한 비)'가 문제가 된다. 이 비석 2기를 없애야 한다는 지역민들의 의견이 많다. 그래서인지 이 비석 앞에 친일 행적을 적은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정신이 없다. 시간이 있다면 유당공원을 산책하며 긴 상념에 젖어야 하겠지만 이 트레킹에서는 바랄 수 없는 일, 빠르게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 유당공원을 빠져나가기 전 다시 한 번 유당공원 중심부에 있는 연못과 노거수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활을 쏘는 궁도장이 어디에 있었을까? 봄날 궁도장에서 쏘는 활이 과녘을 뚫는 소리를 들으면서 박현모가 쓴 '射亭春樹(사정춘수, 활쏘는 정자의 봄 나무들)'을 연상했다. 봄날의 나무들이 파릇파릇 잎을 틔우고 소년들이 이 풍경 속을 뛰어다니는 옛 유당공원의 풍경을 그려본다.
貫革聲高落晩風(관혁성고낙만풍) 살랑이는 바람결에 과녁을 뚫는 소리 높고
少年踊躍喜春融(소년용약희춘융) 소년들은 뛸 듯이 무르익은 봄을 기뻐하는데
晴光依舊山河變(청광의구산하변) 좋은 풍경은 예 그대로이건만 산하는 변하는구나.
何事行吟錄樹中(하사행음록수중) 무슨 일로 녹음 속을 시 읊으며 거닐고 있는가.
남파랑길 50코스는 구봉산 배나무재를 경계로 하여 광양시와 광양읍으로 구분되며 지역의 전체 분위기도 달라 보였다. 포스코광양제철을 중심으로 하여 눈부시게 발전한 공업도시가 광양시 지역이라면, 전통적인 농촌마을을 유지하며 광양제철산업 경제의 낙수효과를 누리는 배후 도시가 광양읍 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양읍은 점동마을과 본정마을 등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으며, 사라실예술촌으로 새로운 문화예술을 열어가면서, 고풍스러운 유당공원을 보존하는 광양의 자존심으로 빛나 보였다.
2.걸은 과정
남파랑길은 오른쪽 언덕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택지개발 사업으로 직진
세종해수사우나와 청풍한우 광양점 광고판이 붙어 있다.
광양숯불구이 8.5km 지점의 광고판이 눈길을 끈다.
광양 성황산업단지 뒤 제철로에 산업공장들이 즐비하다.
맨 뒤에 구봉산 정상의 하얀 전망대가 보인다.
성황천변 들판에 성황·도이지구 대규모택지가 개발되고 있다. 뒤쪽에 가야산이 보인다.
골약동은 광양 발전의 중심축인 컨테이너 부두의 배후부지이다. 골약(骨若)이라는 고을 이름은 1983년에 편찬된 광양군지(p. 476)에 “강원도에 있는 명산 계골산(皆骨山, 금강산)과 골약면(骨若面)의 가야산(伽倻山)의 암석이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같을 ‘若’자를 써서 ‘骨若’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라고 기록되었고, 또한 “본래 광양군의 지역으로서 고려시대는 골약리부곡(骨若里部曲)이라 했다가 조선 태종 13년(서기 1413년)에 골약방(骨若坊)이라 칭하였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 위키백과에서
골약동이 차지하는 지역 범위가 무척 궁금하다. 예전의 골약동 지역이 여러 다른 동명으로 분화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골약동주민센터 버스정류소가 있는 것을 보면 골약동은 독립된 洞이고, 그 밖에 도이동, 성황동도 다른 동명인 듯하다.
대화마을에서 귤껍질을 파쇄하고 있다. 아래쪽 하얀 트럭의 귤껍질들이 다른 트럭 위쪽으로 옮겨져 껍질들이 부서진다.
가로수 '먼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남쪽 지방에서는 '먼나무'를 가로수로 조성한 지역들이 많다.
왼쪽 뒤에 구봉산 정상의 하얀 전망대가 보인다.
50코스 시작지점에서 5.1km 지점, 구봉산전망대까지 1.7km, 25분이 소요된다고 이정목에 적혀 있다. 이곳에서 구봉산전망대에 오른 뒤 50코스 시작지점에서 8.5km 지점으로 내려오거나 희양숲길을 따라 내려와도 좋을 듯.
50코스 시작지점에서 8.5km 지점, 구봉산전망대까지 1.3km, 20분이 소요된다고 이정목에 적혀 있다. 그렇다면 첫 구봉산전망대 갈림목에서 전망대에 올랐다가 이곳으로 내려오는 게 좋을 듯.
구봉산전망대에 오른 뒤 이 나들목으로 내려와도 괜찮을 듯.
왼쪽 산길을 따라오르면 봉화산으로 이어진다. 광양시 황금동에서 배나무재를 넘어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로 들어간다.
뒤쪽에 호남정맥 산줄기의 신선대와 백운산이 우뚝하다.
황금동굴을 들러오기 위해서는 오른쪽 경사길로 가야 하는데, 이를 놓치고 직진하여 내려왔다.
점동마을은 금광으로 부를 누렸던 마을로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 황금룡이 광산에서 금이 다시 나오게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점동마을 황금동굴 입구에는 황금룡이 지키고 서 있다고 하는데, 들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온 것이 아쉽다.
건너편 왼쪽에 황금동굴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사곡저수지가 있는 점동(店洞)마을은 '점골'이라 불렸는데, 예부터 철이 많이 나는 이곳에 솥 등을 굽는 쇠점(鐵店)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점골'은 후에 금광으로 더 유명해졌으며, 남자는 광산에서 금을 캐고, 여자는 금광석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상봉에 봉수대가 있는 건대산(件臺山 : 옛 이름 천태산(舛台山)을 지금은 봉화산으로 부르고 있다.
사라실라벤더농원에서 점동마을과 본정마을이 구분되는 듯하다. 위쪽은 점동마을, 그 아래는 본정마을이다.
지중해가 원산지인 라벤더는 보랏빛 꽃을 피우는 진정작용이 탁월하다고 알려진 허브식물로 국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식물에 속한다. 광양시 본정마을 일대에 있는 사라실라벤더농장은 2017년까지는 라벤더 시험재배 단지였지만, 2018년 6월부터 제1회 광양 라벤더 축제를 개최할 만큼 대표적 라벤더 재배지로 자리 잡았다. ‘라벤더 치유정원’이라 이름 붙인 사라실라벤더농장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신비스러운 보랏빛과 바람을 타고 코끝을 유혹하는 진한 라벤더 향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반겨주는, 말 그대로 ‘치유’의 공간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자연 속에 그대로 오픈된 농장은 라벤더를 기본으로, 다양한 꽃들이 심어진 정원과 라벤더 꽃밭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벌과 나비들을 감상할 수 있는 풍경이 이채롭다.(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재실 정문에 '油然門'이라고 쓴 현판이 붙어 있다.
본정마을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이 지역에 '본정향(本井鄕)'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본정마을은 이름의 한자만 바뀌었다. 처음 '본정'은, 이웃마을 중에 가장 먼저 터를 잡았다는 의미로 '본(本)' 자와 이 고을에 옛날 아주 맑은 우물이 있었던 점에 착안하여 우물 '정(井)' 자를 합하여 '본정(本井)'이라 하였는데, 이후 마을 앞 입구 정자(亭子)에서 놀던 문인들이 '본정(本亭)'이라고 개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3대 광맥이었던 본정마을은 광산으로 유명했던 마을이다. 1906년 초남 현월과 사곡리 본정, 점동마을 일대를 중심으로 광맥이 발견되어 채굴되어 오다가 일제시대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 중일전쟁을 계기로 산금장려정책을 실시하여 적극 권장하였기 때문에 한때는 본정광산이 광양 경제를 좌우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엔 일시적으로 폐광되었다가 1958년부터 이 마을 출신 하태호씨가 갱내를 완전히 복구하고 다시 채굴한 결과 많은 양의 금은동을 생산하였다. 본정마을에는 6곳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마을의 입구 정자 부근과 마을회관 앞에 있다. 이곳에 위치한 당산나무는 수령이 400년~600여 년이 되는 높이 20~30m의 거대한 느티나무이다. 이렇게 거대한 나무가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어 마을의 풍경이 더욱 고풍스러워 보인다.
백두산이 높다 해도 올라서면 발밑이요,/ 두만강이 지프다 해도 배를 타면 배 밑인데/ 우리 낭군 어머님은 살아갈수록 깊어지네/ 앞밭에는 고추 심고 뒷밭에는 난초 심어/ 고추 난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매울까/ 시아버님 호롱새요 시어머니 궂은새요/ 시동새는 나발새고 시누에씨 삐쭉새요/ 우리 님은 미운새요 자식 하나 우는 새요/ 며느라기 가는 질은 억만고개 불고개요/ 열한방에 자리펴기 아홉 수에 불넣기요/ 십리 길에 물 질러서 오리 길에 방에 찧기/ 요 내 홀로 타는 간장 어느 누가 알아줄까(마을 전래 민요 '시집살이' 노래)
'지담'은 지팡이와 담벼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천년고을 본정마을의 농업법인 지담(주)는 고함량 코디세핀 밀리타리스 동충하초를 전문으로 생산·가공·유통하고 있으며 더불어 식용버섯인 고품질 표고버섯 등도 함께 생육,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농악전수관이 너무 헐어 보인다. 농악의 현주소인가? 아니면 이 지역의 무관심일까?
2020년 광양시 사라실예술촌 입주 작가들이 광양시민들의 재능 기부 도움으로 벚나무에 뜨개 작품을 입혀 조성한 길인데, 헐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작품거리를 조성한 뒤에는 관리와 피드백(되먹이기)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싱크공장을 개조해 미술관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58번 백운로의 억만교 아래를 통과하여 사라실예술촌 방향으로 진행
억만천의 사곡교를 건너 사라실예술촌으로 진행
'광양사라실예술촌'과 '광양시립국악단' 명패가 붙어 있다.
사라실예술촌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에 유리벽을 한 컨테이너에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사라실예술촌은 폐교된 사곡초등학교를 활용해 2016년 예술문화 공간으로 재탄생, 지리적으로 제철 문화권의 동광양과 향토 문화권인 서광양(광양읍)의 중심에 위치해 지역민 누구나가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각자의 전문성을 갖춘 창작 입주작가들은 지속적인 자기계발과 창의적인 노력으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문화예술복지서비스, 공연, 축제, 세미나, 강연 등을 제공하고 있으며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는 인성, 체험, 진로, 교육, 치유 등 성장의 밑거름을 제공함으로써 질 높은 교육적 체험활동이 가능한 장소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을 위한 프로그램, 가족과 함께하는 프로그램 등 공모사업을 통해 지속적이고 알찬 문화예술 서비스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시민들에게는 일상을, 예술가들에게는 생활을’ 선사하고 지역 내 문화예술 거점 공간으로,
문화예술도시를 지향하는 광양시의 랜드마크가 되고자 합니다.
2016.12. 광양시 사라실예술촌
사라실(沙羅실)은 '사곡(沙谷)'의 옛 이름으로, 마을 뒷산 옥녀봉에 살던 옥녀가 베틀로 비단을 짤 때 작업실로 쓰던 곳이라 하여 '사라실'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토박이말 '실'은 골, 골짜기를 뜻하며 한자어 '谷'으로 바뀌었다.
'숲 속의 전남만들기' 사업으로 조성된 사라실정원 숲(왼쪽)과 하얀 줄기의 플라타너츠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사라실예술촌 서쪽에 있는 효자비와 정려비각은 비각의 정려비와 비문 읽기가 힘들게 위치해 있다. 설명안내판이 없다.
금너리는 본래 '굽너리'라 하였는데 문헌상으로는 '제비리(蹄飛里)'라 하여 마을 형국이 마치 말굽이 날아가는 모습 같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곳에 금광이 생기면서 명칭이 변하여 '금이 나는 고장'이란 뜻의 '금너리'로 변화되었다. 지금은 사곡리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위 도로는 경전철 복선 전철인 듯. 광양읍 사곡리에서 육교 아래를 통과하여 광양읍 용강리로 넘어간다.
왼쪽 아래는 58번 백운로, GS칼텍스 거성주요소가 있다. 오른쪽 길은 사라실예술촌에서 석정3거리까기 이어지는 금너길.
태극기가 휘날리는 건물은 석정리사무소와 석정리경로당, 앞쪽에는 가구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앞쪽에 사각형 건물 광양경찰서가 보인다. 광양경찰서 교차로에서 광양와인동굴은 왼쪽으로, 남파랑길은 오른쪽으로 진행.
광양읍 용강리에서 광양동천을 건너 광양읍 목성리로 넘어왔다.
인동육교를 건너 광양IC교차로를 통과한다.
중앙 낮은 건물이 보이는 곳이 광양버스터미널로 그 앞이 목적지, 왼쪽 뒤에 보이는 사각형 건물들이 전남도립미술관이다.
왼쪽으로 꺾어 유당공원 앞으로 진행
유당공원(柳塘公園)은 1528년 당시 현감 박세후(朴世煦)가 조성하였다. 조선시대에 광양읍성을 축조하고, 멀리 바다 쪽에서 왜구들이 볼 수 없도록 나무를 심었던 자리에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칠성리의 당산(堂山)은 호랑이가 엎드린 형국이고 읍내리는 학이 나는 형국인데 남쪽이 허해서 늪 지역에 연못을 파고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성은 없어졌으나 팽나무, 이팝나무와 함께 수양버들을 많이 심어서 근대에 유당(柳塘, 버들못)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북쪽에 심은 나무는 현재의 광양시청 제2청사에서 서울대학교 부속 연습림까지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연습림 뒤에 느티나무 한 그루만이 남아 있다. 수령은 대체로 광양읍성 축조 직후에 심었을 것으로 보아 적어도 500여 년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경에 나무가 많이 베어져서 울창하던 숲이 크게 훼손되었지만, 천연기념물 제235호인 이팝나무를 비롯하여 400∼500년 묵은 팽나무·느티나무 등 고목들이 연못 풍경과 한데 어우러져 고전적 조경미를 보여준다. 대체로 광양읍성 축조 직후 또는 1528년 전후에 심었을 것으로 보아 수령이 적어도 440여 년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광양시는 유당공원을 한국 고유의 전통공원으로 정비·복원하여 광양의 명소 겸 휴식공간으로 꾸밀 방침이다.
"고히 잠든 英靈들이시여 나라 爲한 功은 江山에 가득 차고 겨레 爲한 얼은 永世에 빛나리다." 뒷면에 새겨진 비문 중 읽을 수 있는 글자를 옮겼다. 비문 앞머리는 깨어진 듯. 무슨 사연이 있을 듯한데 이유를 알 수 없다.
광양읍수(光陽邑藪)는 1528년부터 1533년까지 광양현감을 지낸 문신 박세후(1495-1550)가 조성하였다. '광양읍성의 숲'이라는 뜻으로, 박세후는 이곳에 있던 읍성이 바다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읍성이란 지방 주요 지역에 쌓은 성으로, 지방 주민들을 보호하고 군사·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곳인데, 광양읍성은 15세기 전반에 축조되었다. 또한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태풍이 자주 상륙하는 곳이었는데, 이 숲이 울창해지면서 바람의 피해를 막는 방풍림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광양읍성은 1920년대를 전후하여 헐린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에 자라던 이팝나무, 푸조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왕버들 등 노거수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1971년 유당공원에 있는 18m 높이의 이팝나무 한 그루가 생물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2007년에는 조상들의 군사 전략과 바닷바람을 막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광양읍수 전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이팝나무는 물푸레나무과의 낙엽활엽교목이다.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등지에 분포하며 골짜기, 산지, 해안가 등 양지 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한국에서는 '쌀나무'라는 뜻의 '이팝나무'로 불리는데, 꽃이 필 때 나무 전체가 하얀꽃으로 뒤덮여 쌀밥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꽃은 5-6월에 피어 20일 가량 만개한다. 이 나무의 꽃이 일시에 피면 풍년이 들고, 잘 피지 않으면 흉년이 진다고 한다.
이 설명에서 '읍수(邑藪)'의 '수(藪)'는 늪이라는 뜻인데, 광양읍수를 '광양읍성의 숲'이라는 뜻으로 풀이한 게 이상하다. 혹시 이 지역이 늪 지역이었거나 아니면, 나무 '수(樹)'를 이렇게 쓴 것은 아닐까? 혹 연못을 늪이라 보았을까?
이팝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었으며, 광양읍수 전체가 200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헌시 - 광양시장 이성웅
인류의 평화와 자유,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귀한 목숨을 내어던진 님들의 숭고한 정신 청사에 길이 빛나리
평화제단 추모시 - 박두규
여기/ 순결한 꽃봉오리 바쳐/ 이 땅과 온 겨레 지킨 애국혼(愛國魂)/ 일 천 수 백 명/ 그 이름 하나하나로 우뚝 쌓은 자유 평화//조국의 거룩한 부름에/ 청춘을 불사른 님의/ 티 없는 정성 받들어/ 눈물로 아로새긴 한 자/ 피땀으로 수놓은 한 줄/ 평화제단 이루었으니/ 순국정신 우러러 따르리// 애오라지 기념비 하나!/ 쓰라린 역사의 눈물이/ 영롱하게 물들어/ 임의 뜻 더욱 빛나리/ 오늘은 희망찬 광양에서/ 내일은 통일된 한반도에서/ 겨레와 더불어 영원하리
친일파 이근호의 '청덕애민비'(淸德愛民碑, 청렴결백한 애민 정신을 기리기 위한 비석)'와 친일파 조예석의 휼민선정비(恤民善政碑,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베푼 선정을 기리기 위한 비)'. 과연 이들이 애민정신의 모범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비석 앞에 설명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이근호(1861~1923)는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으로 1902년 2월부터 제5대 전라남도 관찰사 겸 전라남도 재판소 판사를 지냈으며,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에 앞장 선 공로가 인정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또한 일제 강점하 반민족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발간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등재됐다.
조예석(1861~?)은 1902년부터 1904년까지 광양군수를 지냈고,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에 관계한 조선 관리들에게 일본 정부가 수여한 한일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또한 2009년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광양읍수는 조선 중종 때에 광양 현감이었던 박세후(朴世煦, 재임기간 1528~1533)가 조성한 마을 숲이다. 이곳에는 원래 비석이 없었으나,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우리 지역에 남아 있는 비석들을 이전한 것으로 모두 16기가 보호·관리되고 있다. 이곳에는 광양 현감과 전라 관찰사의 선정을 기리는 비 12기, 우리 지역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비 2기와 정려비 2기가 있다. 이 중 1960년대 이후 세워진 3기를 제외한 13기를 역사적·학술적 보존 가치가 높고 시민과 후손들에게 그 뜻을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광양시 향토문화유산(2008.12.24)으로 지정하였다.
광양시 광양읍 목성리에서 회전교차로를 왼쪽으로 지나면서 광양읍 인동리로 넘어간다.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야 광양버스터미널, 남파랑길 50코스 끝지점은 조금 더 직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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