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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문학 청탁평론 2023.4,12일
최근 서점가의일본과 한국문학
김우종
ㄱ. 한국 문학 속의 빈자리
모든 생명체는 그들만의 고유 재능을 천부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남들을 두드려 패는 깡패들이나 땅굴을 파는 두더지나 하늘을 발레리나처럼 가볍게 춤추며 날아다니는 나비들이나 모두 제 재주를 타고 났다.
그 중에서 문인의 고유재능은 참 거룩하고 품위가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에 잘난 영장류인데 생각은 언어로 하는 것이고 문인은 언어의 재주꾼이기에 더 뽑낼만한 서열에 있다.
진실은 언어로써 깊이 사고하며 파고들어야 나오는 보석이고 이를 통해서 윤리적 도덕적 올바른 판단을 해야 선(善)에 도달하고, 이를 문자화된 언어의 표현기교로 가슴을 더 많이 울리며 이 세 가지가 3위1체로 작동해야 최고로 아름다운 예술이 되며 이는 문학밖에 없다.
이렇게 존귀한 재능을 문인은 천부적으로 거저 물려 받았으니까 그 재능은 조금이라도 사회에 기여해야 옳다. 취미생활도 좋지만 가끔 취미 이상의 가치창조를 위해 시간을 내기도 하는 것이 떳떳하다.
물론 나 한 사람만의 취미생활로도 문학은 된다. 그러나 나의 얘기가 우리의 얘기로써 주제가 확대되고 심화되면 더 문학적 가치는 상승된다.
언어는 화자와 청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러므로 혼자만의 신변 소재가 신변론에만 그치면 언어의 본질을 배반한 문학이다. 그것은 굳이 출판이라는 확성기로 담 밖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 문학은 좁은 울타리의 아늑한 정원만을 선호하는 경향이 너무 짙다. 문제가 많은 세상밖에는 나가지 않기 위한 문단속이 심한 편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 현실에 대한 참여를 너무 피하기 때문에 우리 문학은 세계무대에서 하위로 뒤처지기 쉽다.
문학사 책으로 보면 애초부터 빈 자리가 확연하다. 치욕의 식민지 시대가 지나 해방을 맞았으면 그래도 그 동안에 일제에 굴복한 친일문학만이 아니고 이렇게 싸우다 갔노라는 문학도 있었음을 입증해야 된다. 그런데 그렇게 일제 파시스트들과 맞서다가 참혹하게 주음을 당한 윤동주의 문학이 땅 속 항아리 속에서 나왔는데도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1948년에 시집으로 출판되고 55년에 다시 작품이 추가되어 시집이 나왔지만 해방 후 약 30년이 될 때까지 우리 문학사에 그의 이름은 없다. 그 시집에 서문을 썼던 정지용은 더 심하다. 그는 거의 50년이 자난 1989년에야 공식적으로 문학사에 이름이 올려졌다. 문협회장이던 김동리에게 내가 사석에서 정지용을 말하자 ‘그는 좌익문인들과 친해서...’라는 답만 돌아왔다. 윤동주를 비롯해서 그렇게 오래도록 문학사에 이름도 안 올리고 외면한 것은 참으로 황당하고 어이없는 참사다. 친일문학 중에서도 가장 나쁜 대표작이 정부수립 무렵부터 1990년까지 교과서에 실리고 그것으로 온 국민을 가르쳐 온 참사에 비하면 너무 해괴망측이다. 그리고 망국으로 백성들이 흩어져서 디아스포라 문학이 형성되었는데도 그들은 그저 남의 식구일 뿐이다.
이렇게 있어야 할 사람은 없고 없어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이 우리문학사라는 책이고 교과서 였다는 것은 우리 문학이 애초부터 많이 곪아 있었다는 뜻이다. 아직도 덜 아물었다면 그것은 만성적인 골병이다. 문학은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과거의 프로문학형태로 오해하고 이를 이유로 원고청탁을 거부하는 일도 있으니 아직도 적지 않은 우리 문인이 골병쟁이다.
그 결과가 서점가에서 보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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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서점가의 한일 풍경
2023년이 되자 온 나라는 한일 회담에 눈귀가 쏠리게 되었지만 한국과 일본이 마주 보고 힘 겨루는 풍경은 서점가에도 있고 좀 부끄럽다. 이래도 되는 거냐고 화가 치미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베스트셀러를 모시는 1등석이 있고 그 다음 2등석이 있고 창고에만 처박혀 있다가 먼지 쓰고 반품이 되는 3등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잡음은 있지만 서점의 주인이 마음대로 소설책들의 자리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사 주는 다수 독자들이 주인이다. 그들의 선택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비교적 공정한 싸움판이다. 그러니까 실력으로 밀려 났으면 실력을 키우고 1등석을 차지하면 된다. 다만 한국문단을 오래도록 바라본 사람의 눈으로 평가하면 한국문학이 대수술을 하고 건강을 회복하지 않는 이상 일본은 물론 다른 선진국과 달리 문학으로 명성을 얻기는 어려운 약점을 지니고 있다.
문학은 언어예술인 이상 한국인이 한국말로 창작한 작품과 달리 원작자의 글을 다른 사람이 우리말로 바꾼 번역물은 큰 차이가 있다. 한국서점의 독자가 한국인인 이상 번역물은 기본적으로 경쟁에서 불리한 입장이다. 그런데 일본문학이 베스트셀러 1위가 되고 한국작가의 작품들이 뒤를 따른다는 것은 망신스럽다. 화가 나서 쌍말로 욕이 나올 지경이다.
ㄷ. <스즈메의 문단속>이 전하는 사랑과 평화의 편지
금년 봄(2023년 3월 30일) 유명서점의 집계로 나타난 소설부문 베스트셀러 1순위는 일본 작가 신카이 마코토의 <스즈메의 문단속>이다. 그후 열흘 쯤 지났어도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신카이 마코토는 사실은 작가가 아니라 감독이며 작품은 애니메이션 영상물을 종이 인쇄물로 바꾼 것이다. 그 다음 순위로 한국 작품 몇 개가 따르지만 무라세 다케시의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이치조 메사키의 <오늘밤 세상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등 일본 소설 서너편이 10위 안에 들고 있다. 전 세계 242개 국가들이 소설을 출품할수 있는 자리인데 거기서 상위 10개 중 서너개가 일본이라면 기현상이다. 약 1개월전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1순위도 일본문학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회담에서 보면 전자가 아무리 체중이 나간다 해도 아이와 어른이 4각의 링 위에 올라가 맞붙는 모양새다. 그래도 양쪽 모두 핵을 가졌으니 서로 다 같이 깨지든 말든 게임이 되는데 서점가의 문학에서는 일본이 너무 우세한 것 같다. 노벨상이 무조건 최고작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권의 기본적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가와바다 야스나리와 함께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상을 받고 우리는 번번히 낙방만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문학이 그만큼 부족한 당연한 결과라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형국이다. 고은이 받을 듯하다가 미수에 그친 것이 문학 외적 사건 때문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반적으로 진지하게 세계문학속의 우리문학의 위상을 살피고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 다시 ‘미투’ 해도 된다. ‘나에게도 달라’ 라는 뜻으로.
최근 서점가의 그런 풍경과 함께 또 최근에 작고한 두 일본 문인을 생각 해 봐도 비슷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금년초 1월 15일에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무라마스오(大村益夫)교수가 작고했다. 그리고 이어서 3월 3일에 소설가 오에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작고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90 직전의 고령에 작고했으며 독자층은 앞의 베스트셀러의 경우와 조금 다를 것이다.
그런데 작고한 두 사람과 베스트 1위 작품에 나타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생각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바깥 세계를 내다보며 인류의 아픔에 다가서고 그런 상황이 없는 세상을 갈망하고 그 속의 괴롭고 슬프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가해자에게 맞서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인류를 위한 사회 참여도가 높고 그 속에서 살다 갔거나 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은 최근 서점가나 작고문인 소식으로 본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의 차이지만 오래 전부터 일본문학의 일부가 그렇게 자주 서점가에서 우리 것이 밀리는 큰 원인을 여기서 찾아봐도 좋을 것이다..
신카이 마코도의 <스즈메의 문단속>은 영화 애니메이션으로 본 바로는 후쿠시마의 대지진을 비롯한 참혹한 재앙을 사실적으로 재생시켜 나가며 이를 막기 위해 17세 여고생이 많은 고난을 겪어 나가는 이야기다. 부모 없이 규슈의 이모 집에서 혼자 살던 여고생이 일본인들에게 가장 일어나는 큰 재앙을 막기 위해서 재앙의 문을 닫으러 다니며 고난을 이겨내는 모습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문학이 고통받는 인류의 아픔을 위무하고 치유하며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신을 나타낸다.
“ 문인이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사랑과 평화의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만 보 내는 연애편지도 좋지만 온 세상 사람에게 써서 보내요,“
이것은 필자가 문단 동료들에게 가끔 하는 말이다.
위 작품 속의 스즈메가 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가 찾아가는 곳은 지진같은 재앙이 있던 곳으로서 일본열도의 남쪽에서 북까지 여러 곳이다. 참혹한 역사에 대한 기억을 재생시킨다. 스즈메는 그렇게 재앙의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어린 천사이며 이를 막기 위해 재앙의 문을 닫으러 다니기에 감동적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의 영상물로서 그 다음에 종이 인쇄물로 변신해서 서점가에서 소설 코너의 서가에 꽂혀 있고, 또 여기서 표지가 잘 보이도록 특별히 상석에 눕혀져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감독 이전에 서사문학형태로 글을 쓴 다음 누군가가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문학의 필수 조건인 언어예술로서의 섬세한 어휘와 문장의 퇴고는 좀 부족해도 큰 문제가 없다. 젊은 감독과 화가와 성우 등의 재능의 합작이다. 그 다음에 이것이 종이 박스에 들어간 인쇄물로서의 소설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한국에서 지난 1월에 처음 개봉되어 1주일만에 3백만명 관객이 동원된 영화였고 다음 그 홍보효과를 타며 잘 팔리는 소설로서 서점의 소설코너에 등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인공 스즈메는 이렇게 영상 예술의 주인공이 되고 소설 속의 주인공도 되면서 스즈메(한자어 鈴芽는 ‘방울꽃의 싻’도 되지만 발음은 ‘참새’도 된다.)처럼 은방울 소리를 내며 참새처럼 날아다닌다.
그녀가 재앙을 막기 위해 문을 닫으러 다니는 행위는 사랑과 평화 운동이며 그것은 하늘이 주는 사명 또는 양심의 명이라 할 수 있다. 스즈메의 날개짓이나 방울 소리는 오락이나 취미생활만이 아니라 이처럼 현실에 참여하며 가슴을 울리는 양심의 동작이기 때문에 대중적 공감도가 높다.
ㄹ.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사회참여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고 한국의 땅과 사람을 일본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전쟁을 기억하고 있 는 우리들은 평생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속죄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의 근본 입니다. 그 정신이 평화헌법 9조에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한국에 와서 경북대 김영호 교수와 대담한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그는 일본의 아베정권이 평화헌법 9조를 고치려 하자 이를 반대하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 헌법 9조를 말하는 ‘9조의 모임’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국가의 폭력을 비판하고 천황제도를 비판하고 과거에 일본이 한국에게 가한 많은 억압에 대해서 국가가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위안부도 만나면서 일본이 사과해야 된다고 발언했다. 그는 또 장애인인 자기 장남 히카리를 키우면서 그가 지닌 장애인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온 세상에 전하며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개인적 체험>(1964년)도 그런 기록이다. 그는 이로써 일본의 문인들이 선망하는 아쿠다가와 상을 23세의 가장 젊은 나이(수상자중)에 받았다. 그리고 <오키나와 노트>는 오키나와를 답사하며 태평양전쟁 때 민간인들에게까지 다 죽으라고 ‘옥쇄’를 강요하며 참혹한 인간 도살장이 되었던 곳을 답사하고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일제 범죄를 고발하고 평화를 외친 것이다. 장편소설 약 30편과 평론 수필등이 사랑과 평화 운동으로 가득하며 그래서 그를 ‘일본의 양심“이라 부르게 되고 그에게 노벨 문학상이 주어졌다. 노벨상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먼저 받았지만 오에겐자부로의 문학은 이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이다.
ㅁ.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의 사랑
74년도 유신체제 때 나는 옥중에서 변호사가 들고 온 연판장을 본 일이 있다. 나와 함께 이호철 임헌영등 5명의 ‘문인 간첩단’을 구출하기 위해서 일본에서 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보내온 구명운동의 연판장이다. 그 속에 오에겐자부로의 서명도 있었다. 그리고 런던 본부의 국제 앰네스티와 일본 앰네스티를 통한 모든 구명운동 자금을 자신이 부담한 것을 작년에 만났을 때 고백해서 알았다. 내 수필 한 편까지 번역해서 실으며 제작한 팜플렛 비용 등을 내게 지불했어야 할 강사료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그의 겸양의 말이다. 그는 자신이 해온 착한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50년이나 지난 뒤에 내 물음 때문에 고백하고 귀국 후 곧 세상을 떠났다. 내가 대학생들을 선동하며 간첩활동을 하다 구속되었다는 보도를 듣고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일본의 유명 작가와 교수들을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하며 도장받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김지하도 사형언도가 내리고 인혁당 사건에서는 8명이 사형 언도 즉시 처형되고 가족이 찾아간 시신을 강탈해서 화장해버림으로서 고문의 흔적을 지워버리던 야만의 시대였다. 이런 시기에 이웃나라에서 그처럼 애타게 한국문인을 위해 구명활동을 해 준 것은 난폭한 독재 권력으로 얼룩지고 있는 이 세상을 사랑과 평화의 꽃밭으로 가꾸려는 양심적 지식인의 역할이다.
그는 한국문학을 중국 일본 북한 등 동아시아 전반의 역사적 관계망 속에서 거시적 안목으로 가장 깊고 넓게 탐구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연세대의 학술상인 용제문학상을 받았고 또 문인으로서의 역할로 내 이름으로 된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어떤 편견도 없이 냉혹한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로서의 한국문학을 연구했지만 .그가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간 자리는 눈물과 핏자국이 남아 있는 특정지역이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상처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그 발자국에는 지금쯤 오무라가 흘린 사랑의 눈물도 있다.
그는 윤동주 연구로 한일 양국의 학자들 중 가장 많은 업적을 냈으며 그가 중국 연변에 1년간 머물며 윤동주의 묘를 찾아내지 않았으면 그의 묘는 잊혀지고 말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윤동주가 많은 관심 속에서 문학사적 위치의 제자리를 찾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김학철 윤동주 김용제 연구등으로 6권의 『오무라마스오 전작집』을 냈는데 그 연구대상은 일본제국주의 또는 공상권인 모택동의 폭력의 최대 피해자들이다.
김학철은 서울의 보성고보 출신이지만 그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려고 중국으로 가서 조선의용군 분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전투중 부상으로 포로가 되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있다가 상처 치료를 제대로 못받아서 불구자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20여년간 옥고와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1954년도 장편 <해란강아 말아라>은 한국전쟁 직후작이지만 많은 작품들은 그런 고난 속에서 집필한 것이며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투옥되는 등 국가의 폭력에 의한 피해가 너무 참담하다. 공산국가의 인민이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비판적 참여의식을 굽히지 않는 작가니까 북한이나 중국 정부가 환영하는 인물도 아니고 다리까지 잘린 독립운동가지만 한국인으로서의 훈장도 없다. 한국문학사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
오무라 교수는 윤동주 연구가 그렇듯이 일본제국주의의 영향권인 동아시아에서 그 폭력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로서 맨 먼저 감학철을 찾아갔었다. 연구실에서 책을 쌓아 놓고 보고 쓰는 연구만이 아니라 그는 김학철을 모시면서 그가 살던 서울의 관훈동 옛집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옛집은 사라졌지만 나도 함께 따라가며 그가 외다리로 절룩거리며 걷는 늙은이의 뒷모습을 보니 가엾기도 하고 남들이 봤어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처럼 외다리에 양쪽 지팡이로 절룩거리며 옥살이를 하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사는지. 중국공산당 나라가 아무리 힘들어도 그곳밖에는 살도록 허락해주는 나라가 없으니 그곳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양심적 지식인의 모습이 솔직히 말해서 처량했다.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그 복을 대신 전해드리려고 임종이 가까울 때까지 찾으며 위로해 주었는데 그도 가엾고 그렇게 남의 나라까지 찾아다니며 슬픔을 나누고 좋은 세상을 위해 적극 참여하다 간 오무러 교수의 정신이 감동적이다.
김용제(金龍濟) 연구도 그렇다. 오무라 교수의 저서 <사랑하는 대륙이여>에서 이 이름의 시를 보면 일제에 의한 한반도 착취의 참담한 모습을 이만큼 적나라하게 시적 이미지로 증언하고 고발한 시인이 따로 없다. 기법도 우수하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서 네 차례 체포되고 투옥되었었다. 일본의 사회주의 문학단체에서 마지막엔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한국으로 추방되고서도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하고 그의 주변에는 그 길을 함께 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혼자 그렇게 남아 있다가 갑자기 남들처럼 전향해서 친일문학을 했기 때문에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지워진 인물이 되었다. 해방이 된 후 갈 곳이 없는 반민족친일행위자가 되었다. 친일파가 더 기세를 올리며 출세도 하는 해방의 나라지만 그는 조용히 이름없는 출판사에서 밥을 먹고 살았다. 그 출판사에 김후란 시인이 있었다.
그는 친일활동을 하면서도 독립운동의 비밀 조직을 지니고 있었다고 오무라 교수는 밝히고 있지만 그는 이미 우리 문단에서 잊혀진 사람이다. 항일운동으로 네 차례나 투옥되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해서 ‘네 나라로 돌아가라’ 해서 돌아와 갈 곳이 없다가 친일파로 낙인된 그도 참으로 큰 피해자다. 오무라 교수는 이 사람도 임종이 가까울 때까지 가까이서 지켜 주었다.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을 임종이 가까울 때까지 찾아갔던 것도 마찬가지다 . 부모나 형제의 임종은 가족이 하는 법인데 우리 한국문인들 대신에 이를 오무라 교수가 대신 해주고 있었으니 부끄럽다. 이만큼 이웃나라를 찾아다니며 사랑과 평화의 메신저가 된 문인이나 교수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문예지 창작산맥에서는 그가 작고한 직후에 그에게 내 이름의 문학상을 드렸다. 사실은 작년 11월에 만난 자리에서 수상을 수락하고 귀국한 후 금년 1월에 작고했기 때문에 시상은 창작산맥 주간 허선주 시인이 상가(喪家) 위로 방문 겸 일본에 가서 영전에 상패와 기념화를 올렸다.
이상 최근에 나타난 몇가지 한일간의 풍경을 보면 우리 문학은 마땅히 있어야 할 중요한 창작활동의 일부가 너무 비어 있다. 단편적으로나마 최근에 일본문학의 일부를 통해서 본 한국문학의 반쪽 또는 그 이상을 보면 그렇다.
ㅂ. 일본제국주의 때문에
일본의 관동군은 1931년 9월18일에 만주사변이라는 전쟁을 일으키며 같은 시기에 한국 문인 칠팔십명을 체포했다. 족치기도 하며 혼줄을 빼놓고 다수는 석방되었지만 1934년에 또 그만큼 체포되고 그중 일부는 실형으로 복역했다. 임화는 그 중에서도 이름난 커뮤니스트지만 진짜 폐결핵 때문인지 백철 교수 말대로 그를 핑계로 삼아서 까무라치는 시늉을 했는지 호송열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 앞까지 끌려갔다가 석방되었다.
이에 비하면 일제는 일본인 자신들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더 가혹했다. <게 공선(工船)> 작가 고바야시다키치 등 3명은 맞아죽었다. 이들은 모두 프로문학작가들인데 때려죽이는 도살장이 시작되자 상위부터 전향하고 해체되었다.
전향과 해체는 당대 사회현실로부터의 퇴장을 의미한다. 생존을 위해 폭력에 굴복하고 안정지대로 도피한 것이다.
우리문학도 이를 따랐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순수문학’ 의 변질 확대의 계기가 되었다. 이태준은 이 때 정지용과 함께 ‘문장’지를 내면서 창간호 편집 후기에 그동안의 설움을 회고하는 간단한 글을 실었다. 사회주의 문학만 설치던 시절에 대한 회고다.
그런데 순수문학이 정확한 문학용어로 쓰이지도 않고 있던 이 시기에 김환태가 그 이론을 만들어서 해방후 김동리가 반공투쟁에서 반복하게 되었다. 그 이론의 핵심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문학은 목적성을 지녀서는 안 된다.
둘째, 문학은 사상성을 지녀서는 안 된다.
셋째,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해도 그것은 사회다.
여기서 남녀 둘만 마나도 사회라고 한 것은 순수문학도 그렇게 사회현실을 그려내고 있으니 사회현실을 외면하는 문학이라 탓하지 말라는 주장이었다.
어쨌든 순수문학 이론은 그렇게 김환태 평론가가 정립한 것이 사실이니까 김환태를 그의 고향 무주의 시비에 그대로 옮겨 쓰고 김우종이 한 말이라고 이름을 달아 놓았어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순수문학론은 일제 폭력에 굴복한 현실도피문학을 황당한 이론으로 정당화 하려 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스즈메의 문단속>이나 오에겐자부로나 오무라마스오의 활동과 정반대다. 한국문학이 최우선적 주요 과제로부터 이탈하며 이를 합리화하는 것은 이런 김환태 주장에 힘입은 바 크다. 사상성도 없는 문학, 목적성이 없으니 길 잃고 방황하는 문학, 남녀의 연애장면을 쓰는 소설도 사회참여이니 시비 걸지 말라고 우기는 듯한 괴이한 문학은 아무리 시국 탓이었다 해도 정당하지 않다. 우리문학의 전부는 아니지만 곪았으면 터뜨리고 고름을 짜내야지 제국주의가 만들어 준 고름을 그대로 봉합한 문학은 앞에서 예시한 일본의 일부 문학에 맞설 자격이 없다. 60년대 순수참여논쟁 이후 특히 산업사회의 병폐와 군사정권의 폭력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의 슬픔을 그려나간 많은 작품들, 또는 해방직후의 제주도로 돌아가서 폭력을 고발한 작품들과 달리 현실에서 멀어진 문학은 일제 강점기부터의 동기로 따지면 자랑할 문학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이 만들어 준 그 문학은 해방공간에서 당연히 수술대에 눕혀져서 고름을 짜 냈어야 옳은데 우리문학의 일부는 수술대가 아닌 안락한 미제 침대에 누워 자빠져서 비곗살만 두꺼워졌다.
ㅅ. 해방 공간의 문단주류와 김동리의 반공문학
해방과 동시에 둘로 쪼개진 한반도는 잃어버린 한쪽을 되찾고 하나가 되기 위한 운동을 열망하게 되고 그것은 전쟁 유발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문단도 서로 싸우다가 반이 월북하거나 전향했고 북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남한에서 승리한 반공문학은 순수문학이었고 김환태의 순수문학 이론을 그대로 반복한 김동리는 반공투쟁에서 혁혁한 공로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름은 반공이지만 그것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이론 투쟁이 아니라 편싸움일 뿐이었다. 칼 맑스의 자본론과 무산계급투쟁의 미래상을 내다보는 입장에서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없었다. 문학이 사회혁명의 도구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 뿐이었다. 그것은 문학적 표현 양식의 논쟁이지 사상논쟁이 아니었다. 어쨌든 스탈린의 무서운 전체주의와 침략에 의한 폭력으로 가는 길을 막는 편이 된 것은 좋았다.
그리고 순수문학파는 이승만의 정치적 배경으로서 성장하고 친일문학인들의 도피처가 되어 있어서 병자의 문학이 될 소지가 많았다. 문예지를 만들고 키워줄 정치적 배경과 돈이 거기에 있었으므로 그 문학이 문단활동의 실세가 되고 문단주류가 되고 있으니 피하기도 어렵고 지금도 그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방 공간에서 문단을 장악한 주체세력은 친일과 순수의 합작조직이며 평론가 조연현 교수는 ‘내가 살아온 한국문단’에서 주체세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는 문단의 주체세력이란 “해방 직후부터 그 때가지 대공문화전선을 조직 지휘해온 문단의 투사들을 의미한다‘ 라고 하며 박종화 이헌구 김동리 서정주 유치진 유치환등을 지적했는데 여기에는 침략전쟁에 나가 죽으라고 선동하던 친일문인들이 있다. 그리고 실제 투사는 ’청년문학가협회‘쪽의 젊은이들이다. 그 중에서 아마도 이 책의 저자인 조연현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이다. 그의 명석한 판단력과 조직력이 서정주와 김동리와 손 잡고 시 소설 평론이 다 함께 모이는 최고의 문단주체세력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미국과 이승만으로부터 매우 사랑받을만한 반공투사 문인이 김동리였고, 이승만을 위해 ’이승만 전기‘를 쓰며 누구보다 밀착되어 있으면서 친일파 경력이 굳건한 인물이 서정주니까 여기에 제갈량같은 조연현 교수가 함께 하면 최고의 상위 조직이 된다.
이들은 예술원 창립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최초의 문학부 회원이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 유치환외 이들에게 업혀 있는 박종화등 노년층 3명이 합친 7명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회원은 기존회원이 반대하면 아무도 입회할 수 없는 정관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의 DNA를 계승하거나 이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을 문인들로만 구성되는 정관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우수한문인드로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악랄한 친일문학을 하며 죽는 날까지 사과하지 않은 선배회원을 분명하게 비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문학은 우수하고 양심적인 작가들도 많지만 이런 양상 때문에 부끄러움을 함께 뒤집어 쓰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문단주류가 문예지를 발간하며 지녔던 운영 자금은 이승만이 준 ‘정부귀속재산, 남대문로 2가 7번지, 현재 모생명보험회사’ 빌딩이라고 조연현 교수가 앞의 저서에서 증언했다. 그곳이 “문예‘ 사무실이 되고 지하는 문인들이 모이는 집합장소가 되고 다른 공간들을 빌려주며 돈을 벌어 들였다. 그리고 문예지는 미국공보원이 고급해 주는 고급 양지로’문에‘를 발간하고 실제적 물주인 모윤숙이 사장이 되고 김동리 주간 조연현 편집장으로 되었다가 조연현이 주간이 되며 문단의 실질적 최고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문단 주체세력과 이승만의 관계는 그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부터 시작해서 망명하는 4.19 때까지 계속되었다. 1957년 경에 내가 따라갔던 지방문학강연도 그것이었다. 조연현 박경리 박용구 오학영등이 일행이 되어 기차를 타고 가던 중 내게 맡겨졌던 무거운 가방이 선거자금으로 나온 돈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강연은 아무도 안 하고 돈만 받고 자기 고향집으로 가며 흩어졌다. 그 동안 따라다니며 최선을 다하던 자유당원은 마지막날 밤에 더 큰 선물을 안기려 했던 것같고 그것에는 당황했지만 문인으로서 매우 큰 돈을 받고 놀랐다. 가난한 대학생으로서 좋기도 했지만 ‘순수문학은 정치적 도구가 되지 않는 순수한 문학이다’라고 말하던 순수문학단체의 내면을 서서히 알게 되고 결별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모윤숙에게 준 것은 그녀가 이승만의 킹메이커로서 유엔총회에 대사 자격으로 다녀오며 큰 공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윤숙은 해방직후 미국을 비롯한 외세 고위층과 사귀는 낙랑구락부를 창립 운영하며 정치적 권력을 쥐게 되고 적산가옥의 막대한 부동산으로 순수문학 주류를 키우며 가난했던 문인들을 원고료도 받으며 조금이라도 먹고 사는데 기여했으며 그런상황 속에서 그녀의 일제하의 친일활동은 거의 잊혀져 갔다.
그 후 유신체제 때 또 문인들 일부가 무서운 고통을 받게 되어 문인들은 또 몸을 사리게 되었다. 도망 가는 문인도 있었다. 간첩사건을 조작할 때 이창우 검사는 내가 참여문학 했기 때문에 걸려들었다고 말했듯이 좌많은 국가적 비리와 모순은 침묵하는 문학이 편했다. 그렇지만 문학의 사회참여를 과거의 카프문학 형태로 알고 빨갱이란 말까지 하며 ‘그래서 그렇게 까불었군’하는 문인까지 나올 수 있었던 한국문단은 너무 깊이 병들었다. 스즈메처럼 눈물과 한숨과 비명 소리를 찾아 다니는 문학, 오에겐자부로같은 양심의 문학, 오무라마스오같은 사랑과 평화의 순례자가 되는 문학은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남북의 사랑과 평화를 기다려야 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과제다. 그렇게 지진이든 제도적 폭력이든 재앙의 지역을 찾아가 함께 울며 사랑과 평화에 참여하는 문인들을 기다림은 차술령에 가서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박제상의 아내처럼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래도 참고 기다리는 것은 문인의 지조이고 아름다움이다. 역사의 시계바늘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기에 망부석의 치술령 고개마루에서 떠오르는 밝은 태양을 바라보며 이육사처럼 귀한 손님이 오리라 믿고 청포도의 은쟁반과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는 문인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2023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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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 님 의 <서점가의 일본과한국 문학>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굴곡진 현대문학사를 보았습니다. 좌익 우익 친일과 반 친일 갈등속에서
살아남기위해 어떤사람은 편하게 살려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않으려고 명애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생각은 자유고 삶도 그사람의 선택의 의해서 살아가겠지만 후세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저의 바램입니다.
교수님 강의 말씀 중에 뾰쪽한 부리로 한방향계속을 쪼으며 고운 변치않은 빛깔의 날개로 무장한 딱따구리를 생각해 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