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케 2
일년 동안 낯익었던 글자 2023년도에서 조금은 낯 선 글자로의 이행인 2024년 1월 2일
올케를 병문안 가는 날.
공동체에서 12월 28일 '무죄한 어린아기 축일' 전통으로 젤 막둥이 수녀님이 청한 Free day혜택으로 하루를 장만했다. 날씨가 종일 우중충이다. 마음이 산뜻하지 않으니 다 우중충하게 느껴지는 날이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지인이 이재명 의원의 피습사건을 문자로 보내왔다.
나라와 백성이 미쳐가고 있나 보다…. 우울하다.
걱정되어 묵주기도를 바쳤다. ‘부디 살려주시고 더 건강한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시켜 주십사’라고.
오후 세 시 약속된 면회 시간이 되어 올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를 대하면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히 ‘잘 만나고 잘 이야기해야겠다’라고 속 다짐을 했고,
성모님께 잘 부탁드리는 짧은 기도도 드렸건만 마음이 마구 심란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침대에 실려 내려오는 모습에 가슴이 무너졌다.
사십여일 전에는 힘들었지만 자기 걸음으로 걸었었다.
침대에 누운채 올캐는 멀리서 온 수녀 시누에게 눈 인사를 하려는지 겨우 눈을 뜨고 있었지만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눈 뜰 힘도 없는 것인지, 뜨기 싫은 것인지.
할 수 없이 동반해 온 간병인을 통해서 식사,잠, 통증 정도의 몇 마디를 물었다. 조선족 아주머니는 선한 낯빛으로 잘 설명해주셨다. 십여 분 면회 시간, 유일한 말은 혼자 말처럼 ‘속이 거북하다’라고 한 말이 전부였다.
어쩌면 내가 듣는 마지막 말이 될런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우리 집에 시집와서 성실하게 살아 준 것, 오빠와 사별하고 삼남매를 잘 키워주어 고맙고, 가난해서 더 좋은 최고의 의료적 혜택을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하다고 했다.
마침 평일이라 근무 중인 요양 병원 주치의를 통해 자세한 상태를 면담할 수 있었다.
주치의 말로는 제일 심각한 것이 먹는 것이 힘든지 삶의 의욕을 놓은 것인지 먹지 않는다고 했다.
올케는 위로는 거북하고 아래로는 설사하고 못 먹으면서 햇 수로 이년 반, 만 일 년 반 오래 버텼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녀의 남편 오빠 곁으로 가기를 바라며 병원을 나섰다.
십여 분 버스 터미널을 향해 걸어가며 참을 수 없는 우중충함에 울어버렸다.
어디 가서 실컷 울고 싶은데 터미널 옆 큰 대로여서 맘껏 소리도 못낸 채,
병도 죽음도 나의 교회는 '성사' 라지만 지금은 내 올케가 그의 인생이 가엽고 불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