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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 |
소속원 및 분장 업무 |
녹기연맹 |
* 주간(津田剛) - ‘녹의 생활운동’ 건설 실시에 관한 방침을 정하고 전반적인 지도 감독. * 총주사(山里秀雄) - 연맹의 경영에 관해 본부 및 부속시설의 원할한 운행과 지도 감독. * 강사(山里秀雄, 森田芳夫, 玄永燮, 津田節子) - 교화에 종사. |
녹기연맹본부 |
* 주사(森田芳夫) - 본부의 집무와 경영방침을 정하고 본부직원 통솔과 본부의 일상업무 담당. * 주사보(源平義郞) - 주사를 보좌하고 주사가 사고시에는 대행. * 서기 - 교무주임(源平義郞), 편집주임(현영섭), 서무주임(小林次三, 崔世溶) * 숙직원(2명) * 급사(1명) |
녹기일본문화연구소 |
* 주사(森田芳夫) - 연구소 사무 통괄 * 연구원(津田剛, 山里秀雄, 森田芳夫, 玄永燮, 津田節子, 源平義郞) - 연구에 종사 |
청화여숙 |
* 숙장(津田よし江) - 교육과 운영방침을 정하고 직원 통솔과 교육 총괄 * 숙감(津田節子) - 숙생의 훈육과 교무 등 사무 통괄 * 강사(森田芳夫, 津田剛, 向井虎吉, 宮田眞澄, 須江愛子, 佐藤靜江, 安藤クリ) - 담당과목 지도 * 서기(小林次三) - 서무회계 담당 * 숙직원(2명) |
녹기의원 |
* 원장(須江杢二朗) - 의원의 사무와 경영방침을 결정하고 직원 통솔 * 직원(宮田寬) - 진료사업 종사 * 서기(須江愛子) - 서무회계 담당 * 간호부(2명) * 식모(1명) |
1938년 12월에는 지부규정이 결정되어 1938년 직제개정에 대한 후속작업이 이루어졌다. 지부설치에 대한 기록은 1940년 10월 12일에 평양지부로부터 비롯된 이후, 1941년부터 활발해져 10월호에는 경성지부 설치기사가 나타난다. 녹기연맹이 본부체제로 전환한 이후 경성지방은 본부직속체제로 운영되다가 1941년에 경성지부가 설치된 것이다. 이후 지부 결성은 1941년말에 경성, 인천, 충남, 충북, 군산, 전주, 부산, 김천, 평양, 진남포, 개천, 강서, 안주, 순천, 함북 등 15개 지부를 갖춤으로써 일단락되었다.30) 지부조직은 간사와 고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39년에는 녹기농장 農生塾(숙장 : 柳澤七郞)이 설치되었다. 농생숙은 1939년에 농촌교화사업의 일환으로 오류동에 설치되었다.31) 숙장인 柳澤七郞은 이미 1936년에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는 평택군 소재 군립농민훈련소에서 근무하던 인물이다.32) 그가 녹기동인회 시절에 회원들과 친분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미루어 녹기농장은 농민훈련소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류동에 설치한 농생숙은 1942년에 金郊로 이전하였다.
1942년에 녹기연맹의 조직은 두 차례 변화되었다. 그해 1월에 나타난 조직구성을 보면, 녹기연맹은 녹기연맹본부와 녹기일본문화연구소, 청화여숙, 녹기농장 金郊農生塾, 녹기학생숙, 녹기의원으로 확대된 듯 보인다. 녹기연맹본부 아래에는 주간실(주간 津田剛), 총무부, 교무부, 편집부, 서무부, 부인부를 두었고, 녹기일본문화연구소에는 소장(津田剛)만이 있을 뿐 연구원직은 보이지 않는다. 이외에 녹기연맹 역원이라 하여 회장(津田榮)을 비롯해 이사(13명)와 평의원(14명)을 두었다.
1942년 5월에는 ‘결전하의 교화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기구를 재편성했다. 주간실 아래에 총무, 교무, 편집, 서무, 부인 등 5부를 소속시키고 각부는 부장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33) 이러한 기구 재편은 주간실과 각 부서간의 관련성을 강화하여 조직의 일원화를 꾀하기 위함이다. 1942년의 조직 구성을 1938년과 비교해서 가장 큰 변화는 구성원이다. 조직내에서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던 강사와 연구원 직제가 없어지고, 조선인 이론가 현영섭이 조직원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② 녹기연맹의 활동
녹기연맹은 1933년 발족 당시 사업내용으로 1. 일반사회의 교화. 2. 사상연구. 3. 중견인물양성. 4. 후생시설 설치 등 네가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따라 조직체계도 구성했다. 이 사업내용은 이후에도 줄곧 약간의 명칭만 바뀐채 골격은 유지해갔다. 연맹 결성 이후 계속된 네가지 사업은 녹기연맹의 강령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이 가운데 후생시설 설치를 제외한 세가지는 같은 성격을 갖는다. 즉 일반사회교화를 위해 사상을 연구하고 중견인물을 양성하며 발간물을 통해 보급하는 것이다.
이러한 큰 사업의 방향과 목표 아래 녹기연맹은 구체적인 일반사회교화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된 운동을 지원하는 것과, 연맹의 독자적 운동을 설정해 전개하는 두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국민정신작흥운동이나 심전개발운동이고, 후자가 ‘綠의 생활운동’이다. ‘녹의 생활운동’은 이후 녹기연맹의 중심 운동으로 정착했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국민정신작흥운동이나 심전개발운동과 달리 ‘녹의 생활운동’은 녹기연맹이 독자적으로 전개한 운동이지만 ‘녹의 생활운동’이 심전개발운동과 무관하게 전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총독부 제정책과의 조응 아래 진행되었음은 물론이다. ‘녹의 생활운동’을 전개한 시기가 심전개발운동과 이어진다는 점과 1936년 6월에 발표한 「녹의 생활운동에 관한 방침서」 등에서 실천요강으로 ‘심전개발운동에 공헌’을 들고 있는 점, 사회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점34) 등은 양자간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녹기연맹은 1936년 5월 17일에 열린 제4회 총회에서 ‘녹의 생활운동’ 전개를 결정했다.35) 이를 위해 녹기연맹은 먼저 기구를 개편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36년의 조직개편은 실업국과 기획부의 창설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은 ‘녹기연구소의 확대충실을 도모하고 녹의 생활운동의 두뇌적 존재로써 기능을 발휘’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교무국에 속했던 편집부를 독립하여 ‘녹의 생활운동’ 언론전에 대비하고자 했다. 즉 이 조직개편의 골자는 녹기정신의 실천활동을 위한 제도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실천활동이 바로 ‘녹의 생활운동’이다.
‘녹의 생활운동’을 전개할 당시에 녹기연맹이 표방한 녹의 생활운동은 ‘현대인을 생활의 본뜻(統一的, 圓融的)으로 돌아오게 하는 운동’이다.36) ‘녹의 생활운동’에서 주장하는 생활의 본뜻에 대해 津田榮은 ‘녹의 생활운동’은 단순한 정신개조운동이나 생활개선운동이 아니라 일본의 국체정신을 바탕으로 세계를 지도할 일본인으로써 갖추어야 하는 정신자세와 여러 생활태도를 예비하는 운동이라고 밝혔다.37)
또한 ‘녹의 생활운동’은 내선일체를 뒷받침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津田剛은 재조일본인의 사명으로써 ‘반도에 現住하는 우리가 녹의 생활운동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내선일체의 생활적 완성을 기도하고 이를 문화적으로 사상적으로 교화적으로 생활적으로 실현시켜 나가는 것’을 강조하였다.38)
1939년은 녹기연맹이 내선일체 실시를 목표로 내걸고 활동을 시작한 해이다. 이전에도 내선일체에 대한 주장은 하고 있었으나 조직의 핵심 목표로 설정한 해는 1939년이다. 1939년 5월에 열린 총회에서 녹기연맹은 1939년도 네가지 목표로 ‘1. 내선일체 실시, 2. 농촌교화 실시, 3. 시국에 대응하는 생활의식 쇄신, 4. 국민보건 및 체격 향상 공헌’을 정했다. 네가지 목표 제2항 농촌교화 실시를 실행하기 위해 녹기농생숙을 설치했다. 녹기연맹이 정한 네가지 목표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방향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3. 주요 활동가
1) 津田榮 (1895~1961)
津田榮은 1895년, 三重縣 四日市시에서 출생했다.39) 第一高等學校 재학시기부터 법화경을 읽는 등, 日蓮宗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0) 1916년 東京帝大 이학부 화학과에 입학했고, 1917년에는 田中智學이 주재하는 純正日蓮主義講習會에 열흘간 참가함으로써 田中의 일련주의를 완전히 수용하게 된다.41) 1920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慶應대학 예과 교수로 부임했고, 1922년부터는 동대학 의학부 강사도 겸임했다.
그가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24년 5월, 새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1926년부터는 동대학 의학부 강사를 겸임)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한편으로 이즈음 친구 塚本玄門의 여동생인 節子와 결혼하였다. 경성으로 부임한 津田榮은 이듬해 기원절을 맞아 경성제대 예과 立正會를 근거로 京城天業靑年團을 결성한다. 경성천업청년단의 결성과정이나 활동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이 당시의 津田榮과 경성천업청년단 활동을 모델로 한 李光洙의 소설이 있어 눈길을 끈다. 42)
1927년 8월에는 화학 및 화학교수법 연구를 위해 독일에 유학 후 1929년에 귀국하게 된다. 1930년 4월, 독일현대의 교육사조와 제도를 발간하면서 조선교육계의 중요인물로 떠오르게 되어, 동년 7월부터는 조선총독부 視學委員으로 위촉되었다.43)
1933년 2월 이사장으로서 녹기연맹 출범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1938년 직제개정으로 동생 津田剛에게 연맹의 실질적인 주도권이 넘어갈 때까지 녹기연맹의 초기 활동을 이끌었다. 특히 녹기연맹의 활동 초기에 연맹의 이념적 지향을 정립하는 데 많은 힘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1938년의 직제개정 이후로도 회장으로 녹기연맹을 대표하였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자 參士로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러한 활동이 인정되어 1940년 기원절에는 총독 南 次郞으로부터 사회교화공로자로서 표창을 받기도 했다.44)
1940년에 화학교과서 基礎無機化學을 발간했다. 녹기연맹에서는 이 책에 대해 “일본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적 문화”와 화학을 결합시킴으로써 “지금까지 미국적 또는 독일적이었던 화학교육이 완전히 일본적으로” 변화되게끔 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45) 이 책의 서문에서는 화학교육의 ‘일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皇紀 이천육백년을 맞아, 황국의 길이 유유히 세계에 빛을 비출 때가 왔다. 우리는 과거에 수립했던 모든 문화를 종합하고 순화시켜, 세계를 지도함에 족한 신일본문화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 화학교육도 역시 이 선에 따라 금년을 획기로 하여 일대 약진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책이 얼마만큼이라도 그것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더없는 광영이다.46)
이 책에서 그는 화학 학습을 통해 “황국의 경제나 문화에 기여하여, 팔굉일우의 황도선양에 공헌”47)할 수 있으며, “널리 황국신민으로서의 기원과 行과 지혜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서도 도움이 되게 마련”48)이라 하여 화학을 ‘일본주의’와 결합시키려 했는데, ‘일본주의’의 외연의 확장․확대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조선에서 그의 활동은 1942년 2월 제일고등학교 生徒主事 겸 교수로 토오쿄오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현재 도일 이후 종전까지 그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 1945년 이후로는 화학교육에만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淸泉여자대학 교수(1950), 일본화학회 화학교육위원회 간사장(1952), 화학교육연구소 설립․소장(1952) 등을 역임하며 각종 화학교과서를 집필하는 한편, 화학교육에 관한 여러편의 저서․논문을 발표했다.49) 그는 전후에 과거 행적에 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고집 내가 걸어온 이과교육의 길 및 연보․저작목록에서도 식민지 시기의 공식적 직함(城大 교수․총독부 시학위원) 및 화학교과서류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일본주의’운동 경력․저작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2) 津田節子 (1902~1972)
津田節子50)는 1902년 토오쿄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塚本道遠은 토오쿄오제국대학 농과대학 農藝化學科 출신으로, 1906년 대장성으로부터 조선에 파견되어, 5년간 염전개발에 종사한 바 있으며, 어머니 하마(ハマ)는 토오쿄오여자고등사범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明治期 여교원의 선구자 중 한사람이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자유주의적 지식인이었던 양친 사이에서 성장하며, 그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크리스챤이 되었다고 한다.51) 1921년 東京府立第三高女를 졸업하고 靑山여학원을 거쳐, 1922년 東京高女師 제6임시교원양성소 國漢科에 입학, 1924년 동교를 졸업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전기가 된 것은 1924년 津田榮과의 결혼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경성으로 이주하여, 4월부터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일본어 교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52) 자유주의적 크리스챤이었던 그녀가 국가주의적 일련종 신도로 변화한 것은 남편인 津田榮의 영향이었다.53) 일련종 신도가 된 그녀는 1928년 여성을 대상으로 경성천업청년단의 자매조직인 묘관동인의 모임(妙觀同人の集い)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유럽 유학중인 津田榮을 찾아, 단신 시베리아철도로 유럽에 건너가, 이듬해 함께 귀국했다.
1931년 출산과 육아를 이유로 숙명의 교원을 사임하고, 녹기연맹 발족 이듬해인 1934년, 淸和女塾54)을 개설하고 스스로 塾監이 되었다. 청화여숙 이외에도 녹기연맹 강사, 녹기일본문화연구소 등 여성대상의 선전, 조직에 앞장섰다.
津田節子는 조선옷을 즐겨입었다.55) 그녀에게 영향받은 녹기연맹 부인부의 사람들이나 청화여숙생들도 조선옷을 즐겨입었는데, 조선인의 황민화에 노력하던 녹기연맹의 인물들 중 적지않은 수가 이와 같이 조선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그녀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긴밀한 연계를 맺으며 일제말기 조선인의 ‘생활개선’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1938년 7월 1일 왜성대 총독관저에서 가진 미나미 총독과의 면회였다. 이 면담에서는 의복․주거 등 조선인의 생활개선에 관한 문제가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56) 節子의 제안에 의해, 2개월 후 총독부의 지시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발족하게 된다. 이 모임은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을 제창, ‘국기게양․구습타파․색복장려’ 등의 실시사항을 내걸었다. 57)
모임이 발족하자 곧바로 9월12일부터 1주간 각도에 순회생활개선강연반을 파견했는데, 세쯔코는 출발 및 종료에 즈음한 좌담회에 모두 출석했으며, 강연행각에 참가했던 5인을 청화여숙에 초청, 부인부주최로 「조선사람들의 생활을 말하는 좌담회」58)를 개최하였다. 1년 후 이 멤버들(손정규․조기홍․임숙재)과 더불어 생활개선의 구체책을 논의하고 그것을 금일의 조선문제강좌 5: 現代朝鮮의 生活과 그의 改善으로 출간했다. 그러나 세쯔코는, “조선의 기후풍토에 적합한 조선요리의 특색이나, 오랜 전통에서 배양된 조선민족의 생활 구성에 대한 무지를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조선인의 생활개선지도는 자신들 일본인의 의무라고 하는 자세를 언제까지나 바꾸지 않았던 것”59)이다.
1942년 津田榮이 一高 교수로 부임하며 경성을 떠나자, 節子는 병상의 시어머니(よし江)를 간병하며 경성에 남아 청화여숙의 숙장이 되었다. 1943년에는 숙장을 사임하고, 반신불수의 시어머니와 함께 토오쿄오로 상경하였다. 이로써 節子는 녹기연맹의 운영에서는 손을 떼게 되지만, 여전히 《新女性》 등에 글을 기고하면서 연맹의 활동과 관계를 유지했다.
종전 이후 세쯔코는 청화여숙 졸업생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금 과거 녹기연맹 관계자들과의 모임을 주재하기 시작한다. 1947년부터 소식지 《청화소식(淸和便り)》 출판, ‘청화의 회’ 등을 주재했다. 청화여숙 모임은 1995년까지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3) 津田剛 (1906~1990)
津田榮의 동생인 津田剛은 사카에가 경성으로 부임해 온 2년 뒤인 1926년,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60) 경성제대 재학시절의 津田剛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별로 없다. 다만, 그가 형이 주재하던 경성천업청년단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을 것이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1931년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한편으로 그의 학창시절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조선인 동료들과의 관계이다.61) 그는 예과 3회생으로 崔載瑞, 玄永燮 등과 동기였으며, 특히 최재서와 친밀하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62) 본격적인 창작물이라곤 단 한편도 없어, 문인 또는 문화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려운 津田剛이 후일 조선의 문단 및 문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최재서가 가교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이밖에도 裵相河(예과 1회), 兪鎭午(예과 1회), 安龍伯(예과 2회) 등 후일 녹기연맹의 활동에 참여하거나 혹은 《綠旗》 지상에 빈번히 집필하게 되는 조선인 학생들과도 인맥을 형성했을 것이며, 이것이 후일 녹기연맹에 조선인들이 참여하게 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녹기연맹의 운동 초기부터 연맹의 운동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국제정치 및 내선일체론 등의 분야에서의 논리개발을 통해 연맹의 정치적 지향점을 명확히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38년 이후로는 연맹의 주간으로서 津田榮을 대신하여 제반 활동을 총괄, 책임자로서 일하게 되는데, 이후 녹기연맹의 활동은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津田剛의 대외적 활동으로 눈에 띄는 것은 국민총력 조선연맹 및 조선 문화계의 재편에 관련된 활동이다. 국민총력 조선연맹은 41년 5월 총력문화부의 문화위원 연락계를 설치했는데, 津田剛(교화부문) 이외에도 녹기연맹 관계자가 각 부문에 다수 포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학술부문에 森田芳夫, 교화부문 佐藤泰舜, 출판부문 山里秀雄, 생활부문 須江杢二郞63)등이다.
그가 조선의 문화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朝鮮文人協會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1939년 10월 20일 발기인으로 참여, 10월 22일 결성대회준비회에 참석하여 김문집, 박영희 등과 함께 대회준비위원으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0월 29일 개최된 결성대회에서는 내지인측 간사로 선출되었다.64) 41년 8월의 규약 및 임원 개정․개편에서는 총무부 상무간사로 선임되었다.65) 이후로 일제말기 조선의 문단 및 문화계를 재편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42년부터 매년 1회씩 개최된 대동아문학자대회에도 참여했다. 東京에서 개최된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이광수, 유진오, 박영희, 辛島 驍 등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43년 제2회 대회에도 유진오, 유치진, 최재서, 이석훈(출석 중지), 김용제 등과 함께 조선총대표로서 참석했다. 최재서를 통해 조선의 문단에 영향을 끼친 흔적은, 최재서의 주재하에 1942년 1월에 창간된 《國民文學》(인문사 발행)의 창간호에서도 드러난다. 津田剛을 비롯한 녹기연맹의 활동가들이 대거 《국민문학》 지상에 글을 게재하고 있는 것이다.66)
전후에는 福岡大學 교수를 역임하며 일본불교사상 전문연구자로서 鎌倉佛敎の新しい視點:道元․親鸞․日蓮と現代(眞世界社, 1987) 등의 저서를 남겼다.
4) 森田芳夫 (1910~1992)
森田芳夫는 녹기연맹에서의 활동뿐 아니라, 전후의 한일관계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1910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藥種業을 하는 부모 사이에서 출생했다.67) 1927년 경성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재조일본인 2세로서 성장한 그는, 다른 일본인들과는 달리 조선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재조일본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후 그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는 자신의 原籍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쓴웃음짓지 않을 수 없다. 岡山라고 대답은 한다. 그러나 나는 오카야마에 간 적이 한번도 없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조선에 와 살았고, 오카야마에는 먼 친척들이 몇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묘도 조선에 있다.
나는 소년시대를 조선의 시골에서 보냈다. 중학시절 이후는 경성에서 살고 있다.
고향의 추억, 어린 시절의 추억, 모두 조선이다.
‘내지에 돌아간다’고 조선에 와 있는 내지 사람들은 말한다. 나에게는 ‘내지에 간다’는 기분은 들어도 ‘내지에 돌아간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내가 돌아갈 곳은 조선 밖에는 없다.68)
이러한 재조일본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재조일본인에게 부여된 국가적 임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편협한 조국애를 청산한 일본정신의 세계화. 이것이 조선에서 자라고 조선에서 배우고 조선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의 일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69)
1932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사학과 조선사학전공)를 졸업하고, 다음날로 綠旗硏究所 所員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1934년부터는 청화여숙의 강사로 역사를 강의하게 된다. 1935년 槪觀佛敎史를 출간했는데, 그는 이 책을 통해 일본불교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연맹이 지향하는 바의, 국가주의적 불교를 불교사적 흐름 속에서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불교연구 이외에 그가 두각을 나타낸 부분은 전공인 조선사에 관한 것이었다. ‘금일의 조선문제 강좌’ 시리즈 중의 국사와 조선 등을 집필하면서, 내선일체의 역사적 필연성을 해명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일제말기에는 국민총력 조선연맹에서 사무국 전무참사(편집과장, 1943년 11월 기구개편에 의해 문화과 근무) 등을 역임하며 선전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편으로 1942년 4월부터는 혜화전문학교에 강사로 출강하며 역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의 패전과 함께 조선에서의 식민통치가 종언을 맞게 되자, 모리타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조선에 재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 만든 日本人世話會의 전임자로서 활동했다. 이후 조선으로부터의 일본인 철수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다가, 1949년부터는 외무성 소속으로 대한업무에 종사하였고, 1953년부터는 법무성 입국관리국에서 대한관계 업무를 맡았다. 1972년 재대한민국 일본국대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하여 1975년 정년까지 근무하였고, 퇴직 후에도 국제교류기금파견 일본어 교수로 성신여대에 파견되는 등 꾸준히 한국과 관련을 맺어 왔다.
퇴직후 전공인 조선사학분야에서도 활동을 하여, 1982년부터 九州大學 文學部에서 조선사를 강의했고, 1986년에는 동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1992년 8월 3일 급성심부전증으로 사망.70) 사망 후 그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 일체가 九州大學에 기증되어, 森田文庫로 분류되어 있다.
5) 玄永燮(창씨명 天野道夫, 1906~?)
현영섭71)은 최초로 녹기연맹에 가입한 조선인으로서, 녹기연맹을 발판으로 삼아 1930년대 후반 이후 대표적인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로서 활약했다. 현영섭은 1906년 서울에서 玄櫶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헌은 합병 후 경성고보 및 경성여자고보 敎諭를 역임했으며, 1921에는 학무국 視學官 및 학무국 編修官을, 그리고 1931년부터는 강원도 참여관을 거쳐,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이른 인물이었다.72)
-1920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 이미 마르크스나 크로포트킨 등의 사회주의․아나키즘 서적을 원서로 읽는 등73), 좌익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1925년 고보 졸업 후 京都로 건너가 조선인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다가 ‘완전히 패배해서’ 2개월만에 돌아온74) 후, 1926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아나키스트로서 마르크스주의 학생들과 논쟁을 벌이곤 했다고 한다.75) 그가 운동의 표면으로 드러난 것은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이었다. 鄭麟澤, 李鍾駿, 曺圭宣 등과 함께 경성제대에서 운동을 주도했다.76) 이밖에 1930년 金容讚, 李錫圭, 昇黑龍 등과 함께 二十世紀書房을 창립, 사상운동을 했다.77)
1931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영문학전공)를 졸업한 후, 7월 17일 元心昌을 따라 중국에 도항,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맹하고, 연맹원의 교양, 외국문헌의 번역, 기관지 사설의 집필, 내외에 있어서 운동상황의 소개 및 연락 등을 담당했다. 같은 해 11월 13일 도일하여 東京府 학무부 사회과에서 臨時雇로 일하는 한편, 조선-일본을 왕래하며 상해와의 연락업무 및 아나키즘의 선전선동활동에 종사했다.78)
1935년 11월 20일 경시청에 의해 검거되고, 12월 23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送局79)되었으나, 다음해 초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가 전향80)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것은 1936년 8월에 발표한 「정치론의 한토막」이다. 여기서 그는 문명발전에 대한 논구를 통해 조선어의 폐지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이 글을 계기로 본격적인 ‘내선일체론자’로서의 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81)
1938년 1월, 녹기연맹에 가입하여 편집부 업무를 보조하며 「조선인의 사상동향」을 집필했다. 3월부터는 정식으로 본부직원으로서 근무하며 강연 및 집필을 통해 연맹에서의 내선일체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의 등장은 녹기연맹의 활동 방향 자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37년 한해 동안 그가 주도한 논의를 통해 1938년부터는 녹기연맹이 전면적으로 ‘내선일체’ 실천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가 내선일체론자로서 사회적 지명도를 높이게 된 계기는 1938년 1월에 간행된 主著 조선인의 나아갈 길의 출간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조선역사에 대한 반성,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통해 조선인의 나아갈 길은 오직 완전한 일본인화의 방향 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특히 이 글에서 조선인의 완전한 일본으로의 동화를 위해 시급하게 조선어의 전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구체적인 방도까지 제시하였다. 1938년 7월 8일 총독과의 면회석상에서도 그는 이러한 주장을 되풀이 하였으나, 오히려 총독에게서 거부당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하였다.82)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자, 녹기연맹의 상근직을 사임하고 정동연맹의 편집부로 자리를 옮겨 기관지 《總動員》의 편집을 담당하는 한편, 각종 시국강연회의 강사로 활동했다. 이후 皇道學會(1940), 正學會, 朝鮮言論報國會(1945) 등에도 관여하며 해방에 이르기까지 내선일체와 전쟁협력의 이데올로그로서 활동했다.
해방후에는 일본으로 도피하여 SCAP 및 주일 미대사관에 근무했고, 퇴직 후에는 埼玉縣 大宮市에서 영어학원을 경영했다고 한다.83)
6) 기타 일본인 활동가들
山里秀雄(1901~ )은 1910년 조선으로 건너와 京城中學, 東京高商을 졸업하고 1924년부터 京城商業의 교사로 근무했다. 東京高商 재학시 法華經을 공부하게 되었고, 경성상업 부임 이후에는 학생을 모아 일본국체에 관한 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84) 1925년 國柱會 京城支部에서 津田榮와 알게 되어, 이를 계기로 1933년 녹기연맹 창설에 이사의 한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총주사를 맡아 연맹의 안살림을 전담했다. 1942년, 1943년 津田榮과 津田節子의 귀국 후, 津田剛과 더불어 종전에 이르기까지 연맹의 활동을 이끌었다.
源平義郞은 193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과 졸업 직후부터 녹기연맹 본부직원으로 활동하다 1938년 5월 징집․입영, 1941년 제대 후 연맹으로 복귀하여 활동하였다. 森田芳夫가 총력연맹의 전임자로 활동하게 되자 연맹 편집부를 통괄하며 《綠旗》 및 《新女性》의 편집을 담당했다.
須江杢二郞(1906~1957)은 大分縣 今津 출생으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예과 2회생으로 津田剛 등과 교유하며 立正會 및 天業靑年團에서 활동했다. 경성제대 조수를 거쳐, 이비인후과를 개업했다. 1937년 녹기병원이 개설되자 원장으로 취임했다. 나중에는 조교수로 경성제대에 복귀했다고 한다. 불교에 관한 저작활동이 특히 눈에 띈다. 종전후 일본인 귀환시에는 救出醫院을 개설해 재조일본인 귀환자를 대상으로 의료활동을 했다.
須江愛子(1910~ )는 伊藤博文을 따라 조선에 건너와 적십자 조직을 만든 大橋次郞를 아버지로 한 재조일본인 2세이다. 京城一高女를 졸업하고 國柱會와 관계하였다. 須江杢二郞과 결혼한 이후, 청화여숙 강사로서 가사를 담당했다. 국민총력 조선연맹에서는 부인지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1943년 津田節子가 귀국하자, 청화여숙의 塾監을 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塾長 대리로서 節子의 자리를 채워 종전까지 녹기연맹의 여성부문 활동을 전담했다.
柳澤七郞(1908~1976)는 長野縣 출생으로 1932년 강원도로 이주했다. 1936년 平澤郡 농민훈련소에서 輔導를, 1939년 녹기농장 瑞穗農生塾 숙장으로 일했다. 전후에는 귀환하여 橘學苑女子高校에서 敎諭를 역임. 식민지조선에서의 활동을 소설화한 韓野に生きて가 있다.
7) 기타 조선인 활동가들
李泳根(창씨명 上田龍男85), 1910~?)은 충남 온양에서 출생했다. 延專 출신으로 도미유학 중 친일적 언동으로 재미한인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던 중 샌프란시스코 일본영사관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돌아왔다.86) 大日本聯合靑年團 활동을 거쳐, 1939년 1월에 녹기연맹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으로 빠져나간 현영섭의 뒤를 이어, 녹기일본문화연구소의 활동 및 외부 강연을 통해 조선인 이데올로그로서 내선일체의 선전에 힘썼다. 1940년 大和塾이 설립된 이후에는 녹기연맹에서의 직책을 사임하고 대화숙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해방 이후에는 광복군 국내지대 소위, 미군 통역 등을 거쳐 국회 전문위원, 서울신문사 상무 등을 역임하고, 노년에는 미국에 이주해 목사로서 활동했다고 한다. 4.19 직후 자신의 정치관을 피력한 그대로 突擊하자! -本質의 確立을 爲하여-(政界財界社, 1960)와 자서전 이 멍에를 메오리까(교회교육연구원, 1985) 등의 저작을 남겼다.
裵相河(창씨명 星野相河, 1906~?)는 경북 星州 출신으로 대구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예과(文科A 1회)에 입학, 1929년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운동경력은 없지만, 마르크스주의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인 경성제대 출신자들에 의해 발간된 학술지 《新興》의 발행인을 맡아 1호(1929.7.)와 2호(1939.12.)를 펴낸 바 있다.
졸업후 교직을 전전했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낭인생활을 하다가, 결국 교원생활을 그만두고 낙향, 한동안 고향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배상하가 일본국체론의 이데올로그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1937년의 중일전쟁이었다.87) 추측컨대, 일제 말기 상당수의 전향자들이 그러했듯, 중일전쟁에서 드러난 일본의 강력한 힘에 대한 확인과, 조선독립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정세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88) 전향을 결심한 그는 津田剛, 森田芳夫 등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정신의 轉開를 결정”89)했다고 한다.
때마침 1940년 5월, 녹기연맹은 ‘肇國의 정신과 조선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紀元二千六百年記念論文’모집 행사를 주최했다. 배상하는 여기에 응모하여 2等1席으로 당선(1등 당선자가 없었으므로 사실상의 1등)90)하여 상금200원과 함께 조선총독으로부터 일본도를 수여받았다. 배상하의 논문은 《綠旗》 5-11, 5-12에 分載되었다.
이듬해인 1941년 1월, 배상하는 녹기일본문화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임명91)되어, 대화숙으로 빠져나간 이영근의 자리를 채우며, 또 한사람의 조선인 이데올로그로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했다.
<표2: 일제말기의 각종 단체들과 녹기연맹 활동가들의 참여>
단체(설립연도) |
참가자(연도/직위) |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38) |
津田榮(38/참사), 玄永燮(38/편집부) |
朝鮮文人協會(39) |
津田剛(39/발기인→39/내지인 간사→41 총무부 상무간사→42/총무), 津田節子(40/전선순회강연회 강사), 金龍濟(42/상무), 李石薰(41/간사→42/상무) |
國民總力朝鮮聯盟(40) |
森田芳夫(41/문화위원 학술부문연락계), 津田剛(41/문화위원교화부문연락계, 각종 논문심사위원), 山里秀雄(41/문화위원 출판부문연락계), 三木弘(41/문화위원 생활부문연락계), 須江杢二郞(41/문화위원 생활부문연락계), 須江愛子(부인지도위원) |
皇道學會(40) |
天野道夫(40/이사), 上田龍男(40/발기인), 津田剛(40/발기인), 津田節子(40/발기인), 延原光太郞(40/발기인) |
臨戰對策協議會(41) |
朴仁德(41/상무위원) |
朝鮮臨戰報國團(41) |
朴仁德(41/평의원→41/부인부 지도위원) |
大東亞文學者大會(42) |
津田剛(42/조선대표, 43/조선대표), 牧洋(43/조선대표, 불참), 金村龍濟(43/조선대표) |
朝鮮文人報國會(43) |
津田剛(44/이사장→44/심의원→45/평의원), 牧洋(43/소설․희곡부 간사장), 金村龍濟(43/시부회 간사→44/시부회 간사장→45/상무간사) |
朝鮮言論報國會(45) |
永河仁德(45/이사), 星野相河(45/평의원), 天野道夫, 上田龍男 |
4. 녹기연맹의 성격
1) 일본불교와 녹기연맹
津田榮은 학창시절에 법화경을 연구하는 종교단체에서 활동했고, 日蓮宗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렇다면 일제하에 일본에서 불교가 가진 사회적 기능과 영향은 어떠하였으며 녹기연맹의 구성원과 일본불교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왕정복고 이후 일본의 불교는 明治정부의 神祗정책으로 인해 神道에 의해 대치되는 과정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에 廢佛毁釋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면서 佛寺는 神社로, 불교식 제례는 신도식 장제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불교계가 동맹대응함에 따라 1872년에 廢佛毁釋운동이 중지되었는데, 이후로 불교계는 당국의 정책에 조응하면서 나름의 역할을 모색했다.92)
또한 이 시기에 불교계는 기독교 진출에 대응하는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불교도들은 언론과 대중화를 통해 기독교의 초국가적인 모순을 지적하였다. 이 가운데 日蓮宗93)은 東京제대, 一高, 慶應의숙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청년회에 대항한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한편, 해외 선교도 실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종교운동의 틀을 벗어나 교육과 생활운동으로 방향을 정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널리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94)
녹기연맹의 성격과 활동 방향은 일본침략주의의 진전 상황과 연맹의 모태가 된 國柱會의 성격변화와도 관련된다. 녹기연맹이 결성된 1933년은 일본이 격심한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는 1920년대 후반의 경제공황을 조금씩 극복해나가는 시기이고,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정책이 노골화되는 시기이다. 즉 1927년 및 1928년 두 번에 걸친 山東 출병과 濟南점령으로 영토적 야심을 달성했고, 이 여세를 몰아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본은 국제연맹 총회 결정을 무시하고 1932년에 괴뢰정권 만주제국을 성립시켰고, 이듬해에는 국제연맹을 탈퇴, 서방세계와의 절연을 선언했다. 1920년대 일본의 大正 데모크라시 분위기는 시라지고 파쇼체제만이 남게 되었다.
田中智學의 國柱會 결성과 이후의 활동은 일본의 대륙침략과정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日蓮宗 집안에서 태어나 승려가 된 후 16세 때부터 독자적인 日蓮敎學을 연구해 온 田中은 17세 때인 1877년에 근원일체의 근본이 되는 국체정신95)을 선명화하여 국체정신보급에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러한 그의 결심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1894년 8월,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21일간 대첩기원 大國禱會를 개최하고 “천황은 久遠本佛의 정치실현을 위해 일본에 파견된 세계통일의 임무를 가진 聖王이고, 청일전쟁은 聖王의 聖戰”이라는 발원문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청일전쟁을, 야심을 가진 청국을 각성시키고, 조선의 독립을 지키고자 하는 의협심에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는데 田中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에 의한 세계통일의 제1보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또한 田中智學은 1901년에 지은 宗門의 維新에서 日蓮宗 개혁의 大綱으로 “침략적 태도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96) 아울러 “聖祖(*日蓮)는 바로 세계통일의 대스승이다. 대일본제국은 바로 그 大本營이다. 일본국민은 그 天兵”이라고 하면서 전쟁을 향한 日蓮宗門의 일심단결을 주창했다. 나아가 “침략적으로 신앙하자. 침략적으로 배우자. 침략적으로 쓰자. 모두 침략적으로 행동하자. … 오직 침략을 위해 죽겠노라고 기도하자. …만물은 모두 침략이다. 동물은 침략의 精髓이다. 만약 스스로 침략하지 않으면 다른 이에게 침략을 당한다. 이것이 천지의 公道”라고 하면서 침략을 일본국민의 과업이자 생존의 유일한 방책으로 제시했다.97)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세계통일의 天業이라는 책을 수천부 발간하여 출정병사에게 주며 독려했다. 이 책에서 그는 日蓮의 가르침을 천황제 일본에 의한 아시아지배의 신학으로 자리매김하고 또한 일본군의 만주출병을 법화경과 暝合하는 天業의 실천으로 간주하여 제국주의 침략을 불교적으로 뒷받침했다.98) 1911년에 일본에서 대역사건이 일어나자 일본민중들에게 국체관 보급이 급무임을 느끼고 1912년에 《國柱新聞》을 창간하고 1914년에 國柱會를 발족했다.99)
田中智學의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 것은 국주회 회원이자 자신의 제자인 石原莞爾 관동군 주임참모가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 이와 관련한 활동이다.100) 田中은 12월에 ‘만주문제해결대강연회’를 개최하고 자작 무용극 ‘北滿의 일장기’를 상연하며 위문금을 모으는 등, 군부에 대한 지원과 전쟁 확대를 향한 분위기 고취에 앞장섰다. 1932년에 만주국 건설이 발표되자 田中은 石原을 표창하고 1935년부터는 직접 만주에 가서 활동했다. 만주국 황제 부의에게 ‘王道의 본뜻’을 강연하고 각지를 다니면서 세계통일을 연설했다. 이 때 그가 한 연설은 “일본군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나라를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지키기 위한 공격”이라고 하여 만주국 건설을 법화경적으로 미화하는 것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田中智學의 활동은 石原莞爾의 군사적 활동을 지원하고 만주침략을 정당화하는 데 집중되었다.
田中智學의 이러한 활동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경성천업청년단 창설, 제자인 本多日生의 自經會와 知法思國會 설립 및 국가지상주의 주창101), 제자인 石原莞爾의 동아연맹 구상102), 아들인 里見岸雄의 일본국체학회 창립103), 손자 田中香甫가 경영하는 국주회활동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104) 이와 같이 田中智學의 일생은 일본국체정신보급을 위한 것, 그 자체였다.
제국주의 침략과 이에 대한 田中智學의 사상과 활동상은 국주회원이었던 津田榮을 통해 조선에 구현되었다. 국주회와 부인국주회 등이 녹기연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精華會105)와도 제휴하였다. 이들 모임에서는 槪觀 佛敎史와 田中智學의 저작들을 연구했다.
槪觀 佛敎史에서 저자 森田芳夫는 日蓮宗과 일본불교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한일합병, 만주국의 독립. 일본의 빛은 동에서 서로 간다. 옛날에 인도나 중국의 많은 은혜를 받은 일본은 지금이야말로 그 충실한 힘으로 서쪽의 나라에 보은의 실천을 개시해야 한다. 군대의 힘, 자본의 힘으로 西進하는 일본인의 생활이 진실로 서방민족과 공존공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느끼는 불교가 반환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시아의 빛으로서 불교의 빛나는 부활, 이것이 이후 일본 불교도가 해야 할 최대의 임무이다.
森田芳夫가 생각하는 일본 불교도가 가야할 길은 ‘한일합병, 만주국의 독립’과 같은 침략의 길이다. 인도로부터 받은 은혜를 ‘군대의 힘, 자본의 힘’으로 포장한 불교로써 갚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빛나는 부활’이다. 이와 같이 녹기연맹이 연구하는 불교의 내용은 침략을 위한 불교였다.
2) 식민지 체제와 녹기연맹
일본이 대륙침략정책을 전개함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통치정책도 이에 조응하는 양상을 보였다. 1920년대부터 조선총독부는 ‘사회교화’를 중요한 업무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106) 그 노력의 일환이 국민정신작흥운동이나 심전개발운동이다. 국민정신작흥운동이 운동내용이나 과정에서 한계를 드러냈다고 판단한 일본 당국이 좀더 본격적이고 근본적인 ‘정신교화’정책의 필요에 따라 1935년에 입안한 심전개발정책은 조선 내 교화단체의 적극적인 지원 활동을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녹기연맹과 국민정신작흥운동의 관련성은 국민정신작흥주간행사에 참가하는 정도만이 파악될 뿐이다. 이 주간에 녹기연맹 이사장이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민정신작흥운동을 고취하는 강연을 하거나 라디오 방송을 하는 정도였다. 이는 녹기연맹이 이 운동에 소극성을 보여서가 아니라 운동 자체가 일과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심전개발운동에 대한 녹기연맹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1935년 9월에 森田芳夫가 「시정 25주년을 맞아」라는 글에서 宇垣총독의 업적으로 심전개발운동을 든 것을 비롯해, 1936년 2월과 5월에 《綠旗》에 「심전개발운동의 근본방침 결정」과 「심전개발의 근본준비」를 통해 이 운동의 필요성과 의의를 상세히 논급하고 있다.107)
또한 津田榮은 「심전개발의 근본준비」에서 심전개발이 ‘단지 외형적인 생활 개선이 아니라 생활의 근본을 이루어야 할 올바른 신념을 부여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종교와 밀접한 관계속에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반민중의 심전개발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반민중의 생활 그 자체를 종교적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기술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각 마을에서 ‘진실로 자각된 중견인물을 양성’하고 동시에 ‘농업의 기술적 지도자나 직접 농촌의 교육이나 행정에 뛰어난 사람들이 스스로 정신생활을 한층 향상시킴과 동시에 민중의 마음 밭(心田)을 개발하는데 족할 정도의 능력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중견인물양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녹기연맹이 심전개발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가장 큰 이유는 심전개발운동의 목표가 ‘교화’라는 점에서 녹기연맹이 추구하는 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108)
조선총독부가 심전개발정책을 입안할 때에 녹기연맹이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녹기연맹이 결성 당시 밝힌 강령대로 ‘일본국체정신에 따른 건국의 이상을 실현’ 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나 日蓮宗이라는 종교를 앞세운 ‘사회교화단체’를 표방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볼 때 심전개발정책수립에 적지 않은 자극제로 역할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와 같이 녹기연맹은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는 국민정신작흥운동이나 심전개발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가장 적극적인 기여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다. 녹기연맹은 활동가와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먼저 녹기연맹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연원과 역사적 정통성을 제시했다. 津田榮은 「심전개발과 종교」라는 글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심전개발운동의 관련성을 규명하고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 그는 이 글에서 ‘최대의 문명을 국가’로 상정하고 ‘심전개발운동과 국체와의 관계’를 언급했다. “심전개발운동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종합 통일시키는 운동인데, 일본 국체는 일본사를 일관하여 문화의 모태가 되고, 문화 종합의 원동력이 되며, 문화 保育 발전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109) 즉 심전개발운동은 단순한 물질생활개선운동이나 정신수양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국체를 재인식하고 이를 세계만방에 전파하는 운동이라는 주장이다.
森田芳夫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연원을 보다 앞에서 찾았다. 그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국민운동이라고 규정하고 그 연원을 일진회에 두었다. 일진회의 활동을 통해 강제병합이 이루어졌고, 조선인이 천황의 赤子가 되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110)
녹기연맹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과의 관계는 참가자를 통해서 명확히 알 수 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회원명단에서 녹기연맹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1938년에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가입한 것으로 보아 그 구성원으로서 가입한 것으로 여겨진다.111) 또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는 녹기연맹의 주요한 성원인 津田剛과 현영섭이 일찍부터 참가하였다. 현영섭은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자 주사로 발탁되었고 1939년 2월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간사로 활동했다. 津田剛도 일찍부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1940년 10월 이후에 선전부장과 1943년에 홍보부장에 취임한 것만이 확인된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서 이들의 대외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 모두 녹기연맹의 대표적인 이론가였으므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내에서 이들의 역할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현영섭은 이 기간중에 조선인의 나아갈 길을 발표하여 1년에 11판(14,000부)을 인쇄하는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다.112)
1940년에 국민총력 조선연맹으로 개칭되고 전시체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급속히 진행되는 데 발맞추어 녹기연맹도 국민총력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하였다. 1941년에는 녹기일본문화연구소가 본격적인 연찬활동을 통해 국민정신총력운동을 지원했다.113) 1942년에 나타난 조직구성에서 조직 내에서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던 강사와 연구원 직제가 없어지는 대신 국민총력운동에서 녹기연맹 구성원들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녹기연맹이 주최의 강연회가 줄어드는 대신, 국민총력 조선연맹이 주관하는 강연회에 연사가 녹기연맹 구성원으로 충당되었고, 《綠旗》의 기사 성격도 전시체제지원 양상을 강하게 띠었다. 이외에도 신사참배, 일본어 사용, 창씨개명, 지원병 등 조선총독부의 구체적인 정책을 지원하는 역할을 녹기연맹이 담당하였음은 물론이다.114)
3) 녹기연맹의 성격
녹기연맹이 어떠한 단체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앞에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녹기연맹은 무엇을 추구하는 단체인가. 누구를 대상으로 한 단체인가. 녹기연맹이 일제하에 재조일본인과 조선인에게 미친 영향은 어떠한가. 구성원들 사이에 운동방향에 대한 공감대는 어느 정도나 이루어져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선행연구자들에 의한 성격규정을 살펴보자. 高崎宗司는 녹기동인회까지는 수양단체로, 녹기연맹부터는 사회교화단체로 평가했다.115) 南雲智는 《綠旗》를 중심으로 운동을 5단계로 구분하고 녹기연맹 출범과 함께 사회운동단체로 전환하여 1941년에는 완전한 국가주의단체로 변모하였다고 이해했다.116) 임전혜는 경성천업청년단은 불교연구단체로, 녹기연맹은 ‘파시즘 사상 단체’로 규정했다.117)
본고에서는 녹기연맹이 사회교화단체나 수양단체가 아니라, 국체사상을 보급하고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천황제 파시즘단체’118)로 규정한다. 이들은 본국에서 떠나 있는 일본인들에게서 국체의식이 약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참된 일본인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강한 의무감속에서 結社하였다. 나아가 조선인의 일본인화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이 때로는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강한 애정으로 표현되기도 했다.119)
이들의 천황제 파시즘은 ‘綠의 정신’을 통해 구현되었다. ‘녹의 정신’은 ‘녹의 생활운동’을 전개하기 이전부터 표방되었다. 녹기동인회의 결성과 함께 본격적으로 ‘綠’이라는 단체의 상징을 드러낸 것이다. 이 때 이들이 綠을 단체 이름에 붙인 이유는 ‘생성발전’, ‘절대 평화’와 ‘웅대심원으로 표징되는 원융통일’ 등 세가지이다.120) 그들이 주장하는 ‘절대 평화’와 ‘원융통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朝鮮思想界槪觀은 “綠이 생성발전을 상징하는 日本主義의 精髓를 상징하고 불교의 佛性, 유교의 天을 통해 서양문화가 표방하는 인본주의의 진의를 정화하는 의미를 가졌다”고 밝혔다.121) 즉 이들이 주장하는 녹의 정신은 ‘일본주의 정수’이다.
두번째, 녹기연맹은 조직의 변천에 따라 단계별로 성격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체제속에서 더욱 구체화되었을 뿐이라는 점이다. 경성천업청년단과 묘관동인의 모임 단계에서 녹기동인회로 재발족한 것은 단체의 성격을 전환하고자 하는 의도보다는 회원의 소속을 자유롭게 하고 성인으로서 활동을 본격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그리고 녹기동인회 시기부터 ‘綠의 정신’이 표방되기 시작했다. 결국 경성천업청년단과 녹기동인회의 관계를 이해할 때, ‘녹의 정신’은 경성천업청년단이 발족할 당시부터 배태한 목표였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은 1920년대부터 구체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추진하는 다양한 정책을 선전하는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를 위한 준비작업은 이미 경성천업청년단 시기부터 진행되었던 것이다.
녹기연맹의 성격 가운데 세번째는 조선총독부 정책에 대한 협력정도이다. 녹기연맹은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의해서 결성한 단체가 아니었다. ‘재조일본인에 대한 국체의식 강화’에 대한 필요성을 극단적으로 인식하고 조직하여 조선인의 내선일체로 활동대상을 확대한 단체였다. 이러한 자발성은 녹기연맹내의 활동에 머물지 않고 전 조선을 대상으로 한 활동으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구현되었다. 또한 녹기연맹은 결성 초기부터 국체보급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총독부 정책 수립에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그 예가 津田節子이다. 그녀는 녹기연맹의 중심인물임과 동시에 일제하 조선의 대표적인 여성활동가였다. 그녀는 조선총독부가 간과한 조선 여성의 힘을 내선일체와 국체명징에 이용하도록 조선총독을 설득하고 실천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본인이다. 즉 녹기연맹 활동의 경험을 조선총독부에 투영하여 운동을 더욱 활성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녹기연맹이 재조일본인과 조선인에게 미친 영향은 어떠하였는가. 1932년에 재조일본인의 수는 514,666명이었다. 50만명이 넘는 재조일본인 가운데 녹기연맹원은 수백명, 또는 수천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에는 日蓮宗 신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직업별로는 조선총독부 관리나 조선총독부와 관련이 있는 기관의 종사자, 학자, 학생들로 이루어졌다. 녹기연맹원들은 재조일본인수의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이 갖는 사회적인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재조일본인 가운데 최고의 지식층인 이들이 가장 강조한 것이 중견인물양성이라는 점을 보면, 소수의 녹기연맹원은 재조일본인 가운데 논리를 생산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녹기연맹 내부적으로 볼때, 구성원 전체가 국체에 입각한 목적의식적 실천을 하고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핵심 활동가를 제외한 다수는 연맹을 ‘수양단체’ 혹은 ‘동호회’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122) 녹기연맹의 활동가들은 ‘재조일본인이 내선일체와 국체의식 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본국에 있는 일본인이 국체의식이 희박하다거나 또는 현실감 없는 조선관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현실에 바탕한 이상의 실천을 주장했다. 이들은 본국인이 아닌 재조일본인들이 국체의식을 확립하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의식화하는 작업을 수행한다는 점에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이러한 노력이 조선총독부의 인정을 받아 체제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5. 맺음말
녹기연맹은 1933년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와 학생, 졸업생을 중심으로 경성의 재조일본인에 의해 결성되었다. 연맹 스스로는 불교수양단체․사회교화단체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국가주의적 일련종의 이념에 기반한 국체론의 해설과 선전, 재조일본인 2세에 대한 ‘일본정신’의 교육 등 사상운동에 중심이 놓여 있었다. 녹기연맹이 중심운동으로 설정하고 수행한 ‘綠의 생활운동’은 단순한 정신개조운동이나 생활개선운동이 아니라, ‘일본주의의 정수인 녹의 정신’을 사회속에 체현하는 것으로서, 녹기연맹의 천황제 파시즘운동단체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녹기연맹은 총독부가 주도한 심전개발운동이나 국민정신작흥운동 등에도 참여했으나, 일제하 조선사회에서 녹기연맹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된 것은 중일전쟁 이후 국민정신총동원운동 및 내선일체운동에 전면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조직의 두뇌라 할 녹기일본문화연구소는 이념적으로 총동원운동 및 내선일체운동을 뒷받침했으며, 핵심 활동가들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간부로 파견되는 한편, 기관지 綠旗와 강사파견 등을 통해 선전활동을 수행하는 등, 조선사회의 전시체제로의 재편 및 선전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津田節子는 조선인 여성지도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여성의 전쟁동원 및 ‘가정으로부터의 황민화’를 주도했으며, 津田剛은 전시체제하 조선의 문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서 일하며 내선일체론의 이념과 논리를 생산․공급하는 역할을 한 森田芳夫, 현영섭과 같은 존재도 있었다.
전시체제하 총독부에 의해 급조된 외곽단체와는 달리, 녹기연맹은 독자적인 이념적 지향 위에서 개인들의 자발적 참여로 구성된 민간단체로서 ‘황민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녹기연맹의 활동은 위로부터 강제된 전시체제의 형성 이면에서 그것을 보족했던 움직임을 살펴본다는 의미에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1939년 이래 조선인 회원수가 급증이라는 현상은, 녹기연맹의 활동이 식민지 조선사회의 재편에서 민간단체로서의 역할 수행에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상에서의 고찰은 일제하 녹기연맹의 전체적 윤곽을 살펴본 데 불과하다. 일제하 녹기연맹이 수행한 역할과 식민지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보다 진전된 연구가 필요하다. 재조일본인의 존재양상과의 관련성, 조선인의 참여와 활동, 기타 천황제 파시즘 조직과의 관련성 등과 같은 문제에 관한 접근이 요구되는 바, 이는 향후의 연구과제로 삼고자 한다.
※녹기연맹 관계자료 및 관련연구문헌의 파악 및 수집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김인덕, 六段田豊, 이대화, 이향규, 장석흥, 최기영, 高崎宗司, 布袋敏博.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한편, 기관지 《綠旗》의 주요기사 및 필자 분석에는 南雲智 編, 《綠旗》總目錄․著者名別索引(汲古書院, 1996)으로부터 도움 입은 바 크다. 東京都立大學 中國文學科 南雲智 교수 및 색인작업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 출처 : < http://wednes.netian.com >
원문 : http://wednes.netian.com/archives/chungnlee99.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