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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멤버와 함께 한 기쁜 소식의 땅의 진산, 주흘산
1. 일자 : 2011. 7. 2 (토)
2. 장소 : 주흘산(1108m)
3. 행로 및 시간
[주차장(10:05) -> 주흘관(10:24) -> 여궁폭포(10:46) -> 혜국사(11:15) -> 안정암(11:38, 640m) -> 대궐터(12:03) -> 대궐터능선(12:24, 989m) -> (계단) -> 주봉/1075봉(12:40) -> (중식, -13:07) -> 영봉/1107봉(13:43) -> 계곡삼거리(14:36) -> 꽃밭서들(14:42) -> 조곡관(15:45) -> (폭포, 교귀정, 용추) -> 조령원터(16:12) -> 주흘관(16:28) -> 주차장(16:40)]
< 주흘산 산행을 준비하여 >
경상도 문경과 충청도 충주/괴산 일대는 이름난 산과 봉우리들이 많다. 자료를 뒤적이지 않고 머리 속에서 금방 떠오르는 이름만도 굳이 월악산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조령산, 주흘산, 포함산, 부봉, 신선봉, 마패봉 등이 있다. 그 중 대장은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에 빛나는 주흘산이다. 백두대간이 문경을 지나면서 북쪽으로 월악산을, 남쪽으로 주흘산을 솟게 하였는데, 그 중 주흘산은 대간의 맥에서는 약간 빗나가 있지만 그 험한 위용에 절로 찬사의 마음을 서리게 하는 문경의 진산이다. 이름난 산 많은 문경에서 주흘이 진산이 된 것은 문경 시내가 주흘의 품에 안긴 게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라 한다.
주흘(主屹) 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우뚝 솟은 주인 산’이다. 산세는 시내가 있는 남쪽으로는 경사가 순하지만 북쪽으로는 무척 가팔라 ‘토라져서 남쪽으로 돌아앉은 산’이란 전설이 맞아떨어진다. 그 전설 속에는 한양과 도읍지 경쟁에서 삼각산에 밀려 토라져 내려앉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산세는 아름다운 여인이 머리를 풀고 다리를 길게 뻗어 누워 있는 모습이다. 혜국사로 오르는 길에 그 유래는 직접 가 보면 안다는 ‘여궁폭포’까지 있으니 주흘산은 분명 ‘문경 미녀’ 산 임에 틀림없다.
그간 여러 산을 돌아다니면서도 유독 문경 땅의 산과는 인연이 닿지 못했다. 수도권에서 차량으로 이동 가능한 2시간 거리에 있어 안내산악회를 이용하기 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부근을 여행할 때 기회를 보아 올라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문경은 예전 서울에서 영남으로 연결되는 주 교통로 상에 있어 군사적 요충지이며 동시에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많은 한 때 잘 나가던 고장이었다. 지금도 TV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문경새재 관문’으로 대변되는 관광지이다. 그러나 주변의 산들은 암릉으로 구성되어 있어 오르기에 만만한 곳은 아니다.
예전 ‘뚜벅이’라는 친근한 이름의 산악회를 통해서 등산 신청을 했다 성원이 되지 않아 취소된 기억이 있다. 당시는 문경호텔에서 출발하여 남봉을 거쳐 주봉과 영봉에 오른 후 능선을 따라 내려와 원터를 지나 주차장으로 돌아 오는 코스를 계획했었다. 오늘은 주흘관을 들머리로 여궁폭포와 혜국사를 지나 주봉을 거쳐 영봉에 오른 후 조곡관으로 하산하는 이 산의 대표적 코스로 잡았다. 주흘관의 고도가 260m, 정상 영봉이 1106m이니 850m의 고도를 치고 올라야 한다. 무더운 날씨를 감안하면 만만치 않다. 등산 시간은 어느 곳을 택해도 주봉까지 2시간, 영봉까지 40분, 조곡관까지 90분, 주흘관까지 50분, 총 5시간여가 예상된다.
길의 사정은 혜국사까지는 2km/40분이니 만만할 것이고, 이후 대궐터를 지나 주봉까지 길은 같은 2km에 80분을 예상하니 된비알이 틀림없다. 주봉에서 영봉까지는 굴곡이 적은 길로 1.2km/40분을 예상한다. 하산 길은 조곡골 계곡을 거쳐 조곡관까지는 산 길이고 이후는 도로 길을 따라 내려 올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폭포와 절, 암릉과 능선, 계곡, 문화재와 포장도로가 어우러진 다이나믹한 산행을 기대한다.
< 희망사항 >
문경의 말뜻은 ‘기쁜소식’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에 응시했던 이들의 급제 소식이 아래 지방으로 퍼져나갔던 ‘플랫폼’ 같은 지역이었기에 명명되었을 지명이다. 산이 많은 고장의 主山은 어떤 풍경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올 봄은 유독 제비꽃을 많이 보았는데, 5월 초 이후 산에서 새로운 꽃을 본 기억이 없다. 문경은 산악지역이라 화려한 꽃을 기대하진 못해도 길가에 핀 여름 야생화라도 볼 수 있는 인연이 생겼으면 좋겠다. 계곡 물가에 핀 분홍빛 요염한 물봉선이 보고 싶다.
주흘산은 여성의 산이라 한다. 토라져 앉은 여인의 자태는 어떤 형상일까? 유래는 직접 보면 안다는 여궁폭포는 어떤 모습일까? 새로운 산행 친구는 산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온통 ‘어떤’이란 말이 난무한다. 난 늘 그렇듯이 ‘새로운 산과의 연애’에 오늘도 설렌다.
날씨가 연일 비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에 다시 비가 온다. 주말에는 장마 전선이 일시 소강상태가 될 것이라 하니, 부디 주흘산과의 인연이 닿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 산행에는 성우와 여성 회원이 동참한다. 오랜 숙원인 새 회원이 생긴 것이다. 오랜 홀로 산행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변화가 기대로 이어진다. ‘홀로’라는 질곡에서 벗어나자 ‘차(車)’라는 이기(利器)가 등장한다. 그로 인해 ‘홀로 이동하는 차’의 비효율이 비용과 시간측면에서 효율로 변한다. 특히 출발시간과 하산 후 귀경 시간을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본격적인 여름 산행으로 접어든다. 그것도 장마철 원거리 산행이다. 주흘산은 결코 만만한 산은 아니다. 바위 많은 동네에 솟은 산이니 주 등산로를 따라 걷는다 해도 늘 주의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동행이 있는 산행이니 더욱 그렇다. 산을 오르내리며 이어질 다채로운 ‘대화의 꽃’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인연을 만들어가야겠다.
산은 그 기대만으로도 내겐 힘이 된다.
(여기까지는 산행 전 준비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 문경 가는 길에 >
새벽 3시. 잠이 깨었다. 수 백 번을 되풀이 했건만 산행 전날은 늘 잠을 설친다. 무언가 기다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수면에는 방해요인으로 작용하나 보다. TV를 켜서 보다가, 아니다 싶어 새로 산 책을 집어 든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다. 몇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인생에서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이른
사간은 없다. / 청춘이여!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그러니 고개를 들라. 그대의 계절을 준비하라. / 걱정스러운 것은 그들이 성장하면서 수 없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자꾸 닫아버린다는 것이다. /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꿈을 계속 버전 업 하라. 그대의
눈동자 속이 아니면 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청년들에게 고하는 선한 멘토의 이야기다. 내 아이가 이런 책을 가까이
했으면 하고 바래 본다.
시간은 4시로 흘러 가고 있다. 깨어있기엔 너무 이른, 잠들기엔 너무 늦은 시간, 이 새벽에 문득 사람이 그립다. 뒤척이다. 잠이 든다. 아침 해가 훤하게 밝아 온다. 자! 주흘산을 향해 떠나자.
모닝 커피를 사 들고, 신입회원을 태우고 분당으로 향한다. 부지런한 성우, 오늘도 일찍 나와 있다. 성원이 되었다. 길을 나선다. 잔뜩 연무가 낀 하늘, 문경의 하늘은 개어 있기를 기대해 본다. 두런두런 이야기 꽃에 시간 가는지 모르게 차는 남으로 내닿는다. 10시 무렵 주흘산 주차장에 도착한다. 문경의 산군들이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하며 저 멀리 희뿌옇게 바라다 보인다. 그 속에 내가 오늘 가야 할 길이 있을 것이다. 길은 계곡을 지나 능선으로 이어지고 능선은 산으로 산은 다시 산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내게 이 길의 끝에 있을 또 다른 길을 꿈꾸게 할 것이다.
< 들머리에서 본 주흘산 풍경 >
< 주흘관에서 주봉 >
도립공원 매표소 부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행장을 차린다. 우리의 신입회원은 물만 준비했고 그마저도 내 배낭에 넣고 너무도 단출한 복장으로 앞장서 걷는다. 그래도 하는 모양새가 밉지는 않다. 말을 받아 치는 재주가 남다르다.
탐방센터를 지나 잘 정비된 도로 길을 따라 오른다. 연무는 여전하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늘 그렇듯이 들머리에 서면 온갖 잡념이 사라진다. ‘선비의 상’이라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어르신의 동상을 지나며 잘 가꾸어진 숲 뒤편으로 주흘산의 마루금이 눈에 들어온다. 널찍하고 정갈하게 가꾸어진 잔디와 숲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 길 을 나서는 자들이 느끼는 가벼운 흥분감이 감돈다. 모두가 ‘여기 참 좋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자연과 인공이 조화롭게 섞여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눈 앞에 성곽과 성문이 보인다. 그 앞은 누런 흙 길과 잔디 밭이 펼쳐진다. 개방감에 눈이 시원하다. 주흘관이다. 문경새재 여러 관문 중에 제 1 관문이다. 성곽의 좌우는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해 주는 데 반해 성문은 새로 보수를 했는지 깨끗하다. 먼저 눈 길을 끄는 것은 성문이지만 시선을 더 오래 붙들어 메는 것은 세월의 흔적 쪽이다.
< 주흘관에서 >
주흘관을 지나자 길이 나뉜다. 우측 여궁폭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전나무 숲의 싱그러움과 계곡의 서늘함이 우릴 반긴다. 걷기에 참 좋은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계곡은 최근 계속되는 비에 그 수량이 장난이 아니다. ‘쐬쐬’하며 흐르는 기세가 자못 씩씩하다. 흐린 날, 습기 찬 계곡 산행이 결코 쉽지 않음을 과거 경험이 말해 주고 있지만 여궁폭포로 향하는 계곡 초입은 냉기마저 돈다. 길과 코스에 대한 찬사가 쏟아진다. 성우는 산에서의 휴식을 이야기하고, 신입회원은 연신 산에 오길 잘했다는 말을 한다. 나 역시 오랜만에 장거리 산행에 기분이 상승된다.
< 산행 들머리 풍경 / 여궁폭포 >
계곡을 끼고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되더니 이내 집채만한 바위를 돌아서자 길은 잠시 평지 길로 바뀐다. 오르막과 잠시의 평지 길이 반복되어 걷기에 큰 불편이 없다. 초입은 내 생각대로 길 사정이 좋다. 출발 40분 만에 여궁폭포에 도착했다. ‘여성’을 느끼게 한다고 해서 관심이 컸는데 막상 그 앞에 서니 음흉한 생각은 없어지고 그 거대한 기세에 압도된다. 폭포 밑 초록빛 소(沼)는 그 깊이를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시원해진 기분으로 다시 길을 나선다.
혜국사까지는 긴 오르막이다. 녹음이 점점 깊어져 하늘을 가린다. 오르는 길 곳곳에 크고 작은 폭포가 펼쳐진다. 11시가 지난다. 그 좋던 계곡과 폭포도 너무 잦으니 관심이 반감된다. 힘겨움에 신입회원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더뎌질 무렵 아치형 다리가 나타난다. 작은 변화에 사진기가 분주해진다. 다리에 올라서서 줌으로 성우의 모습을 잡아본다. 움직임이 있는 사진에 부쩍 관심이 많아진다. 좋은 현상일 것이다.
< 계곡과 다리 / 혜국사 >
다리를 지나 다시 모퉁이를 돌아서자 머리 위로 혜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산중턱에 자리 잡은 절집에는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잠시 눈으로 올려다 보는 것으로 인연을 만들고는 곧 자리를 뜬다. 해발은 아직 500미터를 넘진 않았는데 성우도 나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잠시 길가에 앉아 수분을 보충한다. 주흘관에서의 활기를 이제는 찾아 볼 수 없다. 본격 산행에 접어든 것이다.
오늘 산행의 최대 난코스는 혜국사에 대궐터로 이어지는 긴 오르막이었다. 계곡이 사라지고 똑 같은 풍경의 돌 길이 이어진다. 해발 640미터의 안정암 갈림을 지나며부터 모두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신입회원에게 노래를 불러 보라 한다. 말도 힘든데 웬 헛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쳐다 본다. 다리의 힘겨움을 잊으라고 ‘식인종과 엉덩이 수박’ 이야기를 들려 준다. 별 재미를 유발하진 못했지만 ‘덕분’에 가장 가파른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다시 ‘콩깍지가 씌었다’라는 말의 유래를 이야기하는데, 원래는 사랑에 빠져 정신줄을 놓았다는 뜻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신입회원은 ‘어떤 일에 집착하면 콩깍지 속에 맛난 콩이 있음도 잊는다는 말’이라는 해석을 한다. 특이하고 재치 있는 말 솜씨에 잠시 힘겨움을 잊는다.
12시 무렵 샘이 있는 대궐터 부근에 도착했다. 갈증에 물을 연거푸 들이킨다. 한 고비 넘겼다는 안도감이 든다. 잠시의 휴식의 효과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대궐터 이후 능선 삼거리까지의 길도 만만치 않은 오르막이었다. 해발 989m 대궐터능선 이정표를 지나며 길은 산 어깨 길로 접어 들며 긴 오르막은 끝나가고 있다. 이어 주봉 전 나무긴 계단을 올라서자, 연무 속에 주봉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 주봉에서 본 꼬깔봉 / 주봉에서 >
< 주봉에서 영봉 그리고 조곡관 >
출발 2시간 30분만에 도착한 주봉. 높이로서는 영봉이 정상이지만 이정표와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이곳이 주흘산의 대표 봉우리이다. 정상 우측으로 꼬깔 모양의 관봉이 연무 속에서 우람한 모습을 드려 내고 있다. 시야가 탁 트인 높은 봉우리에 올라 산등성을 바라보는 기분은 낯설고도 새롭다. 모든 것이 내 발 밑에서 아득해지고 수굿해진다. 백두대간 이라는 수식어에 뭉뚱그려졌지만 문경의 산 들은 어느 하나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문경 시가지의 모습이 가뭇가뭇하다는 것이다. 문경의 진산에서 굽어 보는 도시의 풍광을 기대했는데 연무는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 주봉에서 영봉 가는 길의 전경 / 영봉에서 >
서둘러 사진으로 흔적을 남기고, 점심 식당을 차린다. 성우표 샌드위치가 빠져 조금은 아쉬웠지만 김밥, 월남쌈, 수박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역시 시장만큼 맛난 음식은 없나 보다.
30여분의 휴식은 한편으로는 에너지를 보충해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친 다리가 다시 산에 적응하느라 힘겨움을 가져다 주었다. 영봉을 향해 길을 나선다. 울창한 숲 길로 인해 경치 구경은 역시 쉽지 않다. 작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건너편 봉우리의 자태로 미루어 볼 때 주흘산은 날씨 좋은 날 와서 보면 한 경치 하는 산 임에 틀림없다. 흔히 주흘산의 모양새는 여인이 누워 있는 자태를 닮았다 했는데 길을 걸으며 지금 우리가 그 몸의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이야기 해 본다. 실제 지형상으로 특징적인 근거를 말하긴 어려울 듯하다. 주봉 출발 약 35분만에 영봉에 도착했다. 영봉은 돌 비석이 놓여 있는 작은 공터다. 주흘산 최고봉으로서의 풍모는 없다. 그래도 마음 속으로 늘 그리던 곳이다. 사진 한 장으로 내가 여기에 다녀 갔음을 남긴다.
< 주흘산 영봉에서 >
점심 식사시간이 평소보다 길어서 인지 시간이 예상보다 지체되었다. 곧바로 하산 길에 나선다. ‘꽃밭서들’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이정을 향해 비탈을 헤치고 간다. 산의 지형은 정상을 기준으로 통상 대칭적인데 주흘산 역시 그랬다. 하산 길 초입은 오를 때 모양으로 돌 길이다. 게다가 미끄럽기 까지 하다. 조릿대와 참나무 숲이 어우러진 길은 좀처럼 변화가 없다. 이런 저런 소소한 이야기로 길의 단조로움을 잊고 걷는다. 내가 앞장서고 신입회원이 그 뒤를 따르고 성우가 후미에 선다. 지체된 시간을 만회하느라 속도를 내다가 여러 번 자빠지다 급기야는 오른 손에 상처를 입는다. 손바닥이 까져 피가 난다. 덕분에 잠시 휴식을 취한다. 명세기 산행대장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다. 여유를 가지고 걸으라는 뜻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유독 하늘에 대한 농을 많이 했는데, ‘내가 윗선(하늘)에 고도를 낮추라고 이야기 해 두었어. / 윗선에 애기 해 두었으니 길이 편해 질 거야’ 등등 실 없는 농담에 ‘위선’이 노하셔서 벌을 내렸나 보다.
영봉 출발 50분만에 계곡 삼거리에 도착했다. 꽃밭서들은 이미 지났나 보다 하고 단념하고 걷는데 웬 모퉁이를 돌아 들자 거대한 돌무더기의 향연이 펼쳐진다. 매우 진귀한 풍경이다. 규모 면에서는 비슬산의 너덜겅을 능가한다. 그야말로 돌의 장관이다. 그런데 왜 이곳을 꽃밭서들이라 하는 지는 모르겠다. (처음에는 돌 무덤을 꽃으로 비유했나 싶었는데 밑에 내려와 설명판을 보니 실제 너덜겅 주위로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다. 서들은 너덜의 다른 이름일 듯하다.)
< 꽃밭서늘의 너덜겅 / 이름 모를 야생화 >
길은 시원한 계곡 길로 이어진다. 오전에 여궁폭포 부근에서 경험했던 서늘한 기운을 다시 느낀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인지 길가의 꽃 들을 살핀다. 동자꽃을 닮은 그러나 색깔은 연노랑인 야생화를 지나치자 산수국이 군락을 이룬 모습이 보인다. 그 밖에 분홍 싸리꽃도 자주 눈에 들어온다. 봄 보다는 그 종류가 초라하다. 여름은 역시 야생화의 계절은 아닌가 보다.
꽃밭서들에서 1시간을 걸어 조곡관 부근 작은 쉼터에 도착했다. 당초 하산 길은 1시간 30분 예상했는데 2시간이 걸렸다. 별로 쉬지 않고 걸었는데 시간이 예상외로 많이 소요되었다. 역시 여름산은 기후여건상 힘겹다. 세면을 하고 옷도 갈아 입는다. 비록 얼굴과 팔에 국한되지만 땀과 염분이 제거되자 기분이 가벼워진다.
< 조곡관에서 다시 주흘관으로 >
조곡관에 잠시 들린다. 다리를 건너 아담하게 위치한 성문과 성곽은 주흘관에 비해 교모는 작지만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어 보기에 편하다. 조곡관에서 주흘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내가 경험한 최고로 아름다운 산책로였다. 길 우측으로 맑은 계곡이 흐르고 길가 폭포가 길 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 조곡관 전경 / 길가 폭포에서 >
돌탑을 지나자 ‘산불됴심’ 비석이 나오고 용추로 대표되는 작은 폭포와 탁족하기 좋은 반석들이 계곡 도처에 산재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주흘산 반대편으로 조령산이 자태를 드러낸다. 주흘산보다 우람한 골 산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언젠가 내 발 길이 닿을 곳으로 유심히 그 형상을 살피고 마음에 담아 둔다.
문경새재 계곡 길은 자연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교귀정, 원터, 방송국 드라마 세트장들이 자연과 잘 어우러져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돌 탑을 따라 난 길을 따라 걸어오는 성우의 모습이 카메라 시선에 잡힌다.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운 체 비스듬히 선 모습이 포착되어 셔터를 누른다. 성우다운 여유로움이 묻어 나는 멋진 사진이 완성되었다. 점점 움직이는 물체를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 문경새재 계곡 전경 / 하산 길의 성우 >
이런 저런 구경에 4시 40분이 되어서야 다시 원점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1시간 30분이
더 소요된 산행이었다. 친구와 새로운 산행의 벗이 있어 행복한 토요일 한 나절이었다.
< 에필로그 >
오늘 산행은 시작과 끝이 참 좋았다. 여궁폭포로 향하는 초입 길의 전나무 숲과 서늘한 계곡의 싱그러운 느낌, 그리고 조곡관에서 주흘관으로 이어지는 잘 가꾸어진 정원과도 같이 아름다운 하산 길은 오늘 산행의 백미였다.
성우는 점점 산꾼의 풍모를 만들어 가고 있고, 새 회원은 6시간이 넘는 긴 산 길을 군소리 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모두가 고맙고 미더운 존재들이었다. 개인적 느낌으로는 주흘산 자체는 듣기보다는 매력이 덜 했다. 아마도 연무란 놈의 방해가 심해서 인가 보다. 산행을 준비하며 기대했던 ‘대화의 꽃’은 산에서 보다는 귀경 길 차 안에서의 토론에서 더 빛을 발했다. 덕분에 귀경 길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산행을 마치고 분당에서 뒤풀이를 가졌다. ‘신입생 환영회’를 겸한 술자리는 즐거웠고, 새 회원은 다음에는 물만이 아니고 제철 과일도 준비하고 배낭도 메고 산에 오르겠다는 약속을 한다. 다음 산행 계획에 벌써부터 마음이 바빠진다.
산행 다음날 아침, 세찬 장마비가 거실 유리창을 두드린다. 문뜩 ‘방하착(放下着)’ 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집착을 내려놓으면 몸과 마음은 한줄기 꽃 향기 같은 바람이 된다.’는 뜻이다. 어느 스님께서 하신 말씀일 것이다. 주흘산에서의 여러 집착을 내려 놓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내려왔다. 산에서와 같이 ‘일상의 산’에서도 최선을 다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