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아들이 제대를 했다.
숨도 제대로 돌리지도 못한 녀석을 붙들고 먼저 한 말이 카드를
만들지 말 것이며, 친구에게 보증도 서 주지 말라는 당부였다.
왜냐하면, 얼마 전 친구가 엄청난 곤경에 빠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보증을 잘 못 서는 바람에 살던 집까지 날린 판이었며, 아들 녀석이 자기 친구와 같이 신용카드를 내면서 맞보증을 섰고, 아들의 친구는 삼천 만원이라는 돈을 유흥비로 탕진하고 도망을 가고 만 것이다.
그러니 카드사는 보증을 선 친구의 아들에게 돈을 내 놓으라고
다그쳤다. 설상가상이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아들을 신용 불량자로 만들 수 없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별 구제책이 없어서 친구가 너무 딱하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그렇게 부탁하고 다짐한 것이다.
카드는 현금을 대신하기도 하고, 돈이 급하게 필요한 사람에게는 대출을 해주는 편리한 기능까지 있다. 하지만 돈이라면 우선
쓰고 보자는 심리로 인해 갚을 능력 이 갖추어지지 않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독이 되는 것이다.
'더 베스트 베스트 베스트' 라는 말은 1960년도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 나오는 대사 중의 일 부분이다. '태양은 가득히'는 거장 '르네 크레망'이 감독했고 미남배우 '알랑 드롱' '마리 라포네' '모리스 로네'가 주연한 영화다.
영화의 내용은 재벌의 아들 '모리스 로네'가 호화 요트를 타고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 친구 사이인 '알랑 드롱'은 항상 그와 어울려 다닌다. 가난한 '알랑 드롱'은 친구이지만 그런
부자의 주위를 맴돌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듯 '알랑 드롱'도 사치스러운 생활이 몸에 베어 갔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생활을 갈망하게 된다.
영화의 많은 부분은 이태리 앞 바다에 떠 있는 호화 요트에서 이루어졌다. 이글거 리는 태양,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 요트의 하얀 돛들이 조화를 이루었고, 특히 트럼펫 연주의 주제가는 이 영화를 성공시키는데 일조 한다. '르네 크레망' 감독은 이 작품에서 출렁이는 파도를 '알랑 드롱' 의 분노와 욕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친구로부터 멸시와 구박을 받을 때마다, 카메라는 '알랑 드롱'의
침울한 얼굴과 넘실거리는 바다를 잡고 있다. 그런데 파도는 자꾸만 거칠어 갔고, 결국에는 친구의 모욕적인 말 한마디에 '알랑
드롱'은 친구를 칼로 찌르고 시신은 밧줄로 묶어 바다에 던지게
된다.
돌발적인 사고로도 볼 수 있지만, 의도적인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는 완전범죄로 위장하기 위하여 친구의 사인을 끝없이 연습하여 친구가 살아있는 것처럼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마침내 친구의 통장에서 거금을 인출한다. 나아가 친구 애인까지 차지하여 형사가 조사를 해 보지만 증거를 잡지 못한다. 완전 범죄가
굳어가던 어느 날, 친구가 자기에게 준 것으로 처리된 요트를 팔려고 한다. '알랑 드롱'은 여자에게 잔금을 받아 오라하고 혼자
해변 카페에서 기다린다.
해는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그는 비치 파라솔 아래의 의자에 길게 앉는다. 웨이터가 다가와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 '알랑 드롱'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천천히 그러나
힘을 주어 '더 베스트 베스트 베스트'라고 한다. 물론 '최고급 최고급 최고급' 이라는 뜻이다.
자기는 이제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웨이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돌아간다.
한편, 요트를 사겠다는 사람들은 배의 밑바닥을 보자고 요구한다. 그래서 요트는 크레인에 의해 서서히 뭍으로 끌려나온다. 그런데 요트의 꼬리에 무엇인가 딸려 나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리스 로네'의 시신이었다. 밧줄로 묶어 바다에 던졌던
시신이 스크루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화면은 놀라는 얼굴들이 크로즈 업 되다가, 해변의 카페로 바뀌고 '알랑 드롱'의 행복에 겨운 표정이 비치고,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커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과학의 발달로 살기는 무척 좋아졌다. 따라서 소비와 향락문화도 극도로 발달했다. 밤이 되면 휘황찬란하게 조명을 밝혀놓고
천지사방에서 유혹을 한다. 이런 마당에 신용카드까지 생겼으니, 자제력과 인내력이 부족한 젊은이들의 소비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비들 마냥 내일이야 어떻게 되든 사치와 쾌락에 너도나도 빠져들고 있다. 이렇게 사용된 카드 빚 때문에 급기야 목을 메는 사람,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강물로 뛰어드는 사람, 치기배, 은행강도,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고 있다. 모두 영화 속의 '알랑 드롱'처럼 말이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삶의 근본은 의, 식, 주, 이 세 가지일진데, 춥지 않게 입고, 배고프지 않게 먹고, 눈과 비바람 막아 주는 집만
있으면 되는 것을...
조금 더 예쁜 옷, 조금 더 맛있는 음식, 조금 더 넓은 집, 조금 더
재미있게, 바로 그 '조금 더' 가 사람들을 잡고있는 것이다. 미련한 우리는 그 '조금 더가' 저 끝임 없이 꿈틀대는 요염한 바다와
같은 줄도 모르고, 오늘도 '더 베스트 베스트 베스트!'
(2002년 4월 11일 수필토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