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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 수도원의 원장 엔조 비앙키 수사가 요한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요한에게
형제여, 그대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지역에 본당에서나 혹은 그대의 공동체에서 전례를 거행할 때 성서 독서를 듣게 됩니다. 적어도 주일에는 그러합니다. 그때는 그대에게 선사된 성서 본문의 설명이자 현실화라 할 수 있는 강론의 선물도 나누어 받습니다. 이리하여 그대는 자신 안에 메아리치는 하느님의 살아 움직이는 말씀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주님 자신의 현존 앞에 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씨 뿌리는 분으로서 그대 안에 당신 말씀의 씨를 뿌리시는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전례典禮는 두 가지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비길 수 있습니다. 말씀의 양식과 성찬의 양식이 그대에게 선사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대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 아버지께로 가는 여정에서, 양육하시고 위로하시며 또한 힘을 북돋우시는 분께서 베푸시는, 이 음식을 맛봄으로써 힘을 얻어 기력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전례는 과연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적 체험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이 체험이 물론 일상 중에서, 그리고 독방에 고독 속에서도 개인적으로 새롭게 체현되기를 바라겠지요. 아니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수호자요 동반자로 그대에게 선사하신 형제의 자매들과 나누는 공동체 담화에서도 거듭 체험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형제여, 물론 그대는 그대 자신의 초라한 능력에 기대서는 결코 성서를 이해하거나 소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독서를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 조건들 이야말로 그대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독서할 수 있게 해 줄 것이고,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며,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대한 관상의 시야를 열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의 독서, 기도하며 읽는 성서, 한마디로 ‘거룩한 독서’… 바로 그것입니다.
1.이스라엘 교회의 체험인 거룩한 독서
벌써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말씀으로 기도했으며 기도 안에서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예컨대 느헤미야서 8장의 묘사된 공동체 전례는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독서 그리고 그 설명, 이어서 기도를 제시하는 이러한 방법은 유다의 고전적 기도 방식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그리스도교가 물려받은 것입니다. 신약 성서는 이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곳에서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통하여 이 방법으로 기도해 왔습니다. 그들은 비성서적인 신심에 치우치지도 않았거니와, 교회의 기도 생활에서 말씀에 절대적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 신심에도 치우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동서방 교회의 모든 교부들은 거룩한 독서에 이 방법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신자들에게도 가정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독서의 열매인 훌륭한 성서 주해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하물며 수도승들이야 어떠했겠습니까? 사막에서나 수도 공동체에서나, 이들 삶의 중심은 바로 거룩한 독서였습니다. 이들은 이를 수도승의 수행이라 불렀으며 또한 수도승이 일용할 양식이라 일컫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시점에 이르러서는 거룩한 독서의 방법을 문자로 기록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갓 세례 받은 이들도, 거룩하게 하시며 신화(神化,Deificatio)시키시는 성령 안에서, 같은 방법으로 말씀을 얻어 누리도록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리게네스는 유다 랍비들의 학파에 이른바 신적독서神的讀書를 제시하면서 가르침을 폈습니다. 그리고 예로니모는 기도의 리듬으로 독서를 진행시켜야 함을 일러 주었고, 요한 카시아노는 묵상의 뜻을 밝혀 주었습니다. 한편 귀고 2세는 수도승들을 위한 천국의 계단으로써, 그리고 베르나르도는 이 독서가 마음에 입에 마치 꿀과 같이 감미롭다고 노래하면서 각각 거룩한 독서를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생-티어리의 굴리엘모가 그의 책 ‘황금 서한’에서 그랬거니와 다른 많은 이들도 여러 가지 말마디를 사용하여 거룩한 독서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인들이 거룩한 독서를 하느님과의 형언할 수 없는 정담으로 나아가는 왕도로 삼아 정진할 수 있도록 장려해 주었던 것입니다.
1,300년대까지 바로 이 방법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던 것이었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조차도 끊임없이 이 방법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스콜라 학파의) 이른바 질문과 논증의 방법이 도입되면서 거룩한 독서는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여러 세계에 걸쳐 거룩한 독서라는 기도 방법은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더 내관적內觀的이고 심리心理를 살피는 경향의 근대적 신심과 이냐시오식 묵상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독서는 단지 수도승들과 마리아의 수도회에서만 온전히 보존되어 왔을 따름입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 ‘계시 현장’이 다음과 같이 선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이가 끊임없는 거룩한 독서와… 주의 깊은 묵상을 통하여… 성서와 친숙하게 되어야 한다. … 독서에는 기도가 동반되어야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계시헌장25항) 두말할 나위 없이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이 방법이 여러 세계에 걸쳐 완전히 없어지지 않게 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2. 거룩한 독서의 장소
형제여, 그대가 이 기도에 젖은 독서에 잠기고 싶다면, 무엇 무엇보다 고독과 침묵의 장소를 찾으십시오. 그리하여 그 비밀스러운 곳에서 아버지께 기도하고, 그곳에서 그분을 관상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대의 방은 하느님의 현존을 맛들일 수 있는 장소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실 이곳이야 말로 그대의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전장戰場이며, 예수께서도 기도하시고 유혹을 받으셨던 사막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그대를 당신께로 끌어당기시며 그대의 마음에다 속삭이십니다. 그분은 바로 이곳에서, 가슴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 치는 번뇌의 심연을 희망의 계곡으로,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 주심으로써 그대를 충만한 선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독한 장소에서 그대의 영적 젊음은 쇄신될 것이며 바로 여기서 그대의 주님이신 분, 신랑이신 분께 노래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그대는 오직 그분께만 속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며, 모든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누리게 됩니다. 나아가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든 피조물과도 평화로운 관계를 누리게 됩니다.
형제여, 요컨데 그대의 방이나 한적한 장소가,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으로 그대를 낮추시고 또 시험하심으로써 그들을 훈육하시고 위로하시며 양육하시는 성서聖所가 되게 하십시오. 물론 여기서 그대는 틀림없이 유혹자와 적대자의 현존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대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지니도록 부추길 것이며, 고독을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느끼게 할 것입니다. 그대의 습관이나 걱정거리 따위를 이용하여 정신을 분산시킬 것입니다. 수만 가지 세속적인 생각들로 그대를 유혹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기운이 꺾이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몸을 부딪치며 겪는이 싸움을 꿋꿋이 견뎌 내십시오. 그분은 단지 그대의 싸움을 지켜보실뿐만 아니라, 그대 안에서 몸소 싸워 주고 계십니다. 성화상聖畫像 앞에서 기도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촛불을 밝힌다든지 십자가를 앞에 두든지,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도록 방석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것도 이런 방편에 사용을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겉 멋을 찾는 유행에 떨어져서는 안 될 터이지만, 이 방편들은 그대가 지금 단순히 성서를 연구하거나 말씀을 읽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과의 대화에 들어가면서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태세가 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가고 싶은 유혹이 오더라도 지그시 견디십시오. 맨숭맨숭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지그시 눌러앉아 계십시오. 인격적인 기도 안에서 정녕 하느님을 만나 뵙고자 한다면, 우리는 고독과 침묵의 시기, 세상사나 형제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기와도 친숙해야 합니다.
3. 거룩한 독서의 시간: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침묵하는 시간
형제여, 거룩한 독서의 장소와 시간이 우선 외적 침묵을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외적 침묵은 내적 침묵의 필수적인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스승께서 지금 여기 계시고 그대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다른 목소리들이 잠잠해져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사람의 목소리들은 잦아들어야 합니다. 다른 때보다 더 고요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한밤중이라든지, 새벽녘이라든지, 혹은 저녁이 그렇습니다. 그대의 소임 시간표를 감안하면서. 적당한 때를 선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은 충실히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한번 그 시간을 일과 속에 고정시켜 놓은 다음에는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일과 일 사이에 짬을 내서 주님을 만나러 가는 것은 진지한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하루 일과의 짬을 때우는 ‘땜질용’이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결코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우상숭배자라고 선언하는 꼴입니다. 하루의 시간이 그대를 위에 있는 것이지 그대가 시간의 종從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형제여, 고요히 젖어 드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독서의 시간이 그대의 생할 리듬을 이끌어 나가게 하십시오. 물론 지치지 않고(마음으로) 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억을 하루 온종일 유지하기 위해, 드러나게 분명히 기도하는 구체적이고 정해진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대는 주님과 사랑에 빠져 있습니까? 혹은 그렇게 되고자 합니까? 정녕 그리하다면 그대가 보통 안에나 남편을 위해 혹은 가족이나 친구들을 위해 지치지 않고 매일 따로 시간을 내듯이, 주님을 위해서도 따로 시간 내는 일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거룩한 독서의 시간은 넉넉히 길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십시오. 그 시간이 여가의 조각 시간이어서는 안 됩니다. 착 가라앉아서 평정에 들기 위해서는 몇 분의 시간으로는 어림없습니다. 거룩한 독서를 위해서는 적어도 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교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말들을 듣게 됩니까! 글들은 또 얼마나 많이 읽게 됩니까! 사람의 말이 주님의 말씀을 질식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대는 조심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말들이 너무 많으면 주님의 말씀이 어찌 그 말들을 위에 놓일 수 있겠습니까? 매일 어김없이 거룩한 독서를 한다고 해서 “말씀”과 “말들”의 관계를 검증할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들”은 양量으로나 질質로나 모두 거룩한 말씀을 질식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 거룩한 말씀이 자라고 열매 맺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갖 잡다한 것들을 다 읽고 세속적인 말들을 주워 들으며, 마음에 순결하지 못한 잔영殘影들을 깊이 새겨 놓는 그런 독서를 일삼는다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노라 자처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 생활 안에서 “말씀”과 “말들”의 관계를 잘 살펴보지 않는다면 어줍잖은 초심자, 신세 절름발이 귀동냥꾼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성숙의 여정에는 접어들 수 없습니다.
4.넉넉하고 선량한 마음으로
형제여, 하느님께서 그대를 대화의 시간으로, 침묵 속에 고독으로 부르셨다면 그것은 그대의 마음에 속삭이시기 위함입니다. 성서에 따르면, 마음은 사람의 지성적 기능이 자리 잡은, 곧, 마음은 인격의 가장 그윽한 곳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야말로 거룩한 독서에 주된 기관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살아가고 또 단 하나뿐인 자기 인격을 표현하는 곳이 바로이 마음이라는 중핵中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례 받지 않는 마음도 있고, 돌 같은 마음도 있으며, 갈라져 둘로 나뉜 마음도 있고, 눈 먼 마음도 있다는 사실을 그대는 알고 있겠지요? 이 모든 표현은 하느님과 멀리 떨어진 마음의, 신앙의 길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믿는 이의 마음은 때로 방탕한 생활이나 술 취함 일상사의 걱정 따위로 무거워지거나 굳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말씀과 역사하심을 알아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정도로까지 마음은 무디어질 수 있습니다. 나아가 마음은 안절부절 못하고 갈팡질팡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씀을 읽거나 말씀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마음이 “육”으로부터, 유행하는 이데올로기나 교만이라는 큰 죄 따위로부터 자양분을 길어 올리려 할 때 생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법을 배운 형제여, 마음을 손에 받쳐 들고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그대의 마음을 살 심장으로 만드시고 하나로 모아 주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정화하실 수 있게 하십시오. 어린이다운 마음만이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형제여, 주님께서 새롭게 만들어 주신 마음만이 비로소 열려서 귀 기울여들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간청하는 이에게 ‘새 마음을 주시겠노’라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무디어졌음을 인정하고 하느님 앞에 다시 서는 이의 마음을, 당신 말씀의 기울어지게 하겠노라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그분은 매일 우리에게 소리쳐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굳은 마음에게는 말씀도 굳어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이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이 모질구나, 누가 참아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현자 솔로몬이 주님께 청했듯이 ‘넉넉한 마음, 들을 귀가 있는 마음’을 청할 일입니다. 거룩한 독서를 할 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당신 말씀의 씨를 뿌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대는 말씀이 떨어지는 땅과도 같습니다 돌 밭일 수도 있고 온갖 일이 다 생기는 길일 수도 있으며, 가시밭일 수도 있고 좋은 땅일 수도 있습니다. 말씀은 좋은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는 선량하고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는 그것을 간직하여 참고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정화된 마음, 하나로 통합된 마음, 굳건해진 마음이라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오시어 머무시며 거룩한 독서를 친히 거행하시는 곳이 됩니다. 마음은 말씀을 위해 있는 것이고 말씀은 마음을 위해 있습니다. 시편 119장 111절의 노래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분의 말씀은 나의 것이 되고, 내 마음은 그분의 것이 되어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혼인잔치”라고도 할 만합니다.
형제여, 이렇게 될 때 그대의 마음은 하느님의 일들을 유순히 따르는 제자의 마음이 되어 설명도 필요없이 말씀을 바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정녕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그 뜻을 되새길 줄 알던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귀담아들을 줄 알던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마음을 드높이”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기 시작하면 서 하는 이 외침은 동시에 거룩한 독서를 시작하면서 우리 안에서 솟아나야 할 외침이기도 합니다.
5. 성령의 청원
형제여, 이제 성서를 들고 삼가는 마음으로 그대 앞으로 모셔 오십시오 왜냐하면 그대는 그리스도의 몸을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청하십시오. 말씀의 탄생을 주지 한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예언자들과 현자들, 예, 그리고 복음서 저자들을 통, 말씀, 글로 기록되게까지 하셨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말씀을 교회에 건네 주셨듯이 우리에게까지 온전히 전해 오도록 하셨습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은 단지 성령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그대 안에 내려오실 수 있기 온갖 채비를 다 갖추십시오.
오소서, 창조자이신 성령님! 그리하여 그분의 힘이 그대의 눈에서 너울을 거둬, 그대가 주님을 뵈올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을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반면 성령 없이는, 문자는 죽을 따름입니다! 그대가 청하는 성령은 동정 마리아께 임하셔서 당신의 능력으로 감싸 주시고 그의 아내 로고스가, 즉 말씀께서 몸이 되게 하신 바로 그 성령이십니다. 사도들에게 내리셔서 진리를 온전히 알도록 이끌어 주신 바로 그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이 성령께서는 그대 안에서도 같은 일을 이루셔야 합니다. 즉, 그분은 그대 안에서 말씀을 탄생시켜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를 온전한 진리로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영적 독서, 즉 성.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성령과 함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쉬이 오시지 않더라도 그분을 기다리십시오. 곧 오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확신을 지니십시오. “그대들이 악해도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텐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효력을 발생시키는 말씀을, “열려라(에파타)”라는 그 말씀을 그대 안에서 들으십시오. 그러면 성서 본문 앞에서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계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읽던 에티오피아 내시는 필립보를 만나기 전까지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필립보가 오순절에 받은 성령으로 그에게 성서 본문의 뜻을 밝혀주고 그의 마음을 열어주었을 때 비로서 그는 말씀을 알아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청원 없이 하는 거룩한 독서는 인간적 수련의 지나지 않습니다 지적 노력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잘해야 인간적 지혜를 배울 수 있을지 모르나 신적 지혜는 어림도 없습니다. 성서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알아보지 못하면서 읽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단죄를 읽는 것과 같습니다 (1코린 11,29참조). 그대의 능력대로 주님께서 그대에게 허락하신 그만큼 기도하십시오. 혹은 다음과 같이 기도해 보십시오.
빛이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에 당신의 말씀을 보내셨나이다. 이 말씀은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지혜로써, 땅 위에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시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이 지혜로 하여금 이스라엘 안에 머물게 하셨으며 모세와 예언자와 시편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또한 메시아이신 예수에 대해 아버지의 백성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버지와 함께 계신 영원한 말씀이신 아드님 예수께서 몸소 사람의 몸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당신 장막을 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이제 저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어 말씀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마음을 지니게 하소서.이 거룩한 성서 안에서 말씀을 만나 그분께서 제 안에 탄생하실 수 있게 하소서. 아버지의이 거룩한 성령께서 제 눈에서 너울을 벗겨 주시고, 저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게 하소서 저에게 이해력과 항구함을 주소서. 이 모든 것을 영원히 찬미 받으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형제여, 이런 시작 기도를 하면서 특히 시편 119장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편은 말씀 경청의 시편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독서의 시편입니다 사랑하는이가 사랑받는 이와 나누는, 그리고 믿는이가 그의 주님과 나누는 정담의 시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읽읍시다
형제여, 이제 성서를 펼쳐 본문을 읽으십시오. 결코 손 가는 대로 펼쳐서 읽지는 마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눈에 띄는 대로 주어 들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전래 독서집에 순서를 따르거나, 교회가 그대에게 정해 주는 성서 본문을 받아들이십시오. 아니면 성서 중 한 권을 택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 독서를 하십시오. 전래 독서집에 흐름에 순명하는 것이나 한 책의 연속 독서 원칙에 순명하는 것은 일상의 순명을 위해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거룩한 독서의 연속성을 위해서도 중요할 뿐더러, 마음에 들거나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단락을 선택하는 주관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이 엄정한 원칙에 그대는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 전통이 여러 전례 시기에 정해 놓은 성서를 선택할 수도 있고, 평일 독서집에 나오는 성서 중 한 권을 선택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성서 본문을 많이 읽는 것도 능사는 아닙니다. 한 단락이나 다만 몇 구절이라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일 성서 본문들로 거룩한 독서를 할 경우 제1 독서(구약)와 세 번째 독서(신약,복음)는 내용상 병행함으로 두 가지가 다 기도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주일 독서집은 커다란 선물입니다. 이것은 깊은 영적 지혜의 산물입니다. 이에 비하면 평일 독서집은 연속성이 좀 부족합니다. 이 점 때문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성서의 다른 한 권을 택하여 거룩한 독서를 연속 독서로 진행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성서 본문을 단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그리고 소리 히브리어나 그리스도 원으로 본문을 읽을 수 있으면 좋습니다. 이른바 70인 역본(Septuaginta)이나 라틴어 번역본(Vukgata)을 사용하는 것도 좋겠지요. 이들은 교회가 오랜 세월 동안 존경해 온 번역본들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독서를 위해서는 사실상 국어 번역 뿐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읽을 단락이 거의 외울만큼 잘 알고 있는 것이어서 부리나케 읽고 지나가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급하게 피상적으로 읽는 것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방편들을 주저없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예컨대 성서 본문을 필사하는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주석학자 친구가 있는데, 그는 거룩한 독서 때에 성서 본문을 필사한다고 합니다. 외우고 있는 것과 기록된 것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그는 자주 이 방법을 쓴다고 했습니다. 단지 눈으로만 읽지 마십시오. 극히 주의 깊게 살피면서 성서 본문을 마음에 각인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병행 구절들이나 여백에 참조하라고 적힌 구절들도 함께 읽으십시오. 이것은 특히 예루살렘 성서나 불어판 공동번역 성서를 사용할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참으로 유익한 책들입니다 메시지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보충하며, 그날의 다른 성서 본문과 연결되는 다른 단락들을 대조해 가며 읽으십시오.
왜냐하면 말씀은 스스로 해석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금언이 하나 있는데 ‘성서는 스스로의 해석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독서를 하면서 랍비들과 교부들에게 공통된 일대 원칙이었습니다. 독서는 경청이 되어야 하고 경청은 순명이 되어야 합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독서에 몰두하십시오. 읽는 것은 주의 깊게 듣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지, 이슬람에서처럼 책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읽기’는 단지 ‘귀 기울여 듣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이것은 성서 본문으로부터 솟아 내게로 향해 오는 하느님의 우렁찬 음성인 것입니다.
7.묵상합시다
형제여, 묵상이란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한마디로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전해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 독서를 심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쓰고 공을 들여야 합니다 독서는 주의 깊고도 심오한 사색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색이 쉬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듣거나 읽은 말씀을 참으로 수월하게 마음으로 되풀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서를 외우고 다녔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각자의 지성적 수준이나 능력, 그리고 갖추고 있는 참고 자료 등에 맞추어, 이런 사색이 전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학식’이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음’, ‘학문이 아니라 의식’, ‘성서의 문자가 아니라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원칙을 우선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즉 진지한 추구라면 으레 요구되는 엄격함도 또 이해를 돕는 보조 자료도 없이 독서가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다면 성서의 여러 권들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나 어휘 색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성서로서 성서를 주해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또한 여러 주석서나 영적 주해도 참고하십시오. 그러나 제대로 된 연구라고 내세우거나 영성적이라고 자처하는 수많은 책들의 질을 잘 살펴야 합니다. 성서 본문에도 또 전통에도 충실하지 않은 이런 책들은, 한낱 개인적인 견해나, 아름답다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른바 “말씀의 새로운 응용” 인 양 내 놓으라 하는 책들을 조심하십시오. 이런 책들에서는 말씀이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평일이나 축일용 미사 독서집에 영성적 해설서들도 주의 깊게 살펴 선택해야 합니다. 성서 본문과 별 관련도 없는 즉흥적인 단서들을 작의적으로 짜 맞추어 늘어놓거나,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글쓴이의 말이 훨씬 더 설치고 있는 내용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경청은 주어진 성서 본문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말씀의 한 없는 의미를 점점 더 깊이 꿰뚫어 보며 이해하려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영적 성숙의 정도와 (말씀의 의미를 다각도로 적용하려는) 집요함에 비례한다.”오리게네스의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주석학적이고 교부적이며 영성적인 참고 자료들이, 묵상과 이해의 성장을 위해 유익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독서에는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때 개인적이라는 말은 사사롭다는 말과는 구분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적 노력은 공동체 체험이 있거나 형제적 단체 혹은 동아리 생활에 체험이 있는 사람의 경우, 분명히 더 풍요로워집니다. 여러 형태의 이런 공동체들은 말씀의 제자로 사는 법을 배우는 진정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단지 말씀을 함께 읽을뿐만 아니라 함께 체험하고 함께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인적 노력을 통하여 성서 본문의 정곡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더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구절보다는, 중심되는 메시지, 다시 말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건과 더 긴밀히 연결되는 메시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를 찾으십시오. 주석과 교부들의 해설, 그리고 성서로서 해석된 성서 독서 사이에 연속성과 일관성이 있게 하십시오. 나아가 주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으십시오. 이미 알고 있는 바를 독서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은 주제넘은 일입니다. 현재 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더 마음에 드는 것을 찾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독서의 주체인 자신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성서 본문 전부가 항상 그리고 즉시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별로 알아들을 바가 없다는 사실을, 혹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할 필요가 종종 생깁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한 것은 나중에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겸손 역시 순명입니다. 그대가 아직 젖을 먹어야 한다면,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형제요, 어떤 것을 다소나마 알아들었다면 이제 말씀을 마음속에서 되새김질 하십시오.( 교부들은 되새김질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그대와 그대의 현재 상황에 적용하십시오. 이때 유념할 것은 심리 관찰이나 내관 주위에 빠지거나 양심 성찰로 끝나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대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아야지, 그대 자신에게 시선이 묶여서는 안됩니다. 그대의 한계나 부족함 따위를 세심하게 분석함으로써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말씀은 단지 그대의 주의 깊음을 요구할 따름입니다. 물론 말씀이 그대의 마음을 간파하고 심판하신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대의 죄에 대해 확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대의 양심보다 더 크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찔러 통해를 불러 일으키실 때에는, 언제 자비로써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느님 자신이 바로 그대 안에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언제나 구원의 도움이 되는 풍족한 양식에 놀라워 하십시오. 말씀이 그대의 마음에 위탁되었다는 사실에, 그래서 그 말씀을 찾기 위해 하늘 위로나 바다 밑으로 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경탄하십시오. 말씀께서 그대를 매혹하시도록 마음을 허락하십시오. 말씀은 그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대를 하느님 외아들의 모상으로 변모시킵니다. 그대가 받아들인 말씀은 생명이요 기쁨이, 평화요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십니다. 놀라워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마치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며 이집트를 탈출하던 히브리인들처럼, 혹 “권능을 떨치시는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도다, 그분 이름 거룩하도다” 하고 노래하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에게 스스로를 드러내십니다. 그분의 형언할 수 없는’이름’을 모셔 드리십시오. 연인이신 그분의 얼굴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대는 지금 신앙의 영역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훈육하십니다. 그대의 삶을 당신 아드님의 삶에 맞추어 빚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를 그대에게 건네 주십니다. 스스로를 당신 말씀 안에서 넘겨 주십니다. 어린아이처럼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맺는 친교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거룩한 입맞춤을 해 주십니다. 연인들의 혼인 잔치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죽음보다 강하고 세올Sheol보다 강하며 그대의 죄보다도 강한 그분의 사랑을 그대의 마음 안에서 경하하십시오. 하느님은 그대를 ‘로고스’로 탄생시키십니다’ ‘말씀’으로 ‘아들’로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바로 그분 자신이 되기 위해 그대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처소가 되기 위해… 묵상과 되새심은 정확히 이 지점으로 그대를 인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이 전례의 장소場所입니다. 그대의 전 인격이 성전입니다. 그것은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실재, “신-인적( teandrica)’실재입니다.
8.기도합시다
형제여, 이제 하느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분께 응답하십시오. 그분의 초대에, 그분의 부르심에, 그리고 그분이 주신 영감과 일깨워 주신 생각들에 응답하십시오. 나아가 성령을 통해 말씀 안에서 그대에게 전해진 메시지의 응답하십시오. 이제 그대는 삼위일체 영육 안으로 깊숙히 받아들였음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대는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 사이에 형언할 수 없이 신비로운 대화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더 이상 사색하느라 걸음을 멈추지 마십시오. 곧바로 대화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친구가 친구에게 하듯 그렇게 주님께 여쭈십시오. 그대의 생각을 그분의 생각과 같게 하려고 애써지도 마십시오. 곧바로 그분 자신을 찾으십시오. 묵상의 목표는 바로 기도였습니다. 이제 이 목표에 도달한 것입니다. 영적인 잡담에 빠지는 일 없이, 그분과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나누십시오. 신뢰의 찬 자세로 두려워 말고 말씀드리십시오. 자신으로부터는 모든 주의를 거두어 드리고. 단지 성서 본문에서 솟아오른 주 그리스도의 얼굴에 마음을 빼앗기십시오. 감수성과 감정 그리고 정서적 충동과 같은 모든 창조적 힘을 자유로이 풀어 놓으십시오. 그것들을 주님께서 쓰시게 하십시오. 저는 이 지점에서 많은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각자가 자신이 하느님과 가지는 만남이 어떠한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로는 옮겨 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독서에 말미末尾인 ‘기도-관상’에 잠긴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불타는 가시덤불과도 같아서 자신은 타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태우고, 믿는이의 심장에 불을 놓아 사랑의 불덩어리가 되어 버리게 한다는 것뿐입니다.
형제여, 거룩한 독서는 하느님 현존 체험의 형언할 수 없는 예술입니다. 거룩한 독서는 그대로 하여금 ‘사랑받는 이’가 되어 자기를 잊어버리고 기쁨과 놀라움으로, ‘사랑하시는 분’의 말씀을 관상하고 또 되풀이하여 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정이 늘 쉽고 단순하게 이루어진다고 여기지는 마십시오. 이 여정은 또한 늘 끝까지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두려움과 열정적 사랑, 감사와 영적인 건조함, 흥분과 육체의 무기력증, 말씀하시는 말씀과 묵묵하기만 한 말씀, 나의 침묵과 하느님의 침묵 … 매일에 거룩한 독서에는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존재하고 끼어듭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만남의 시간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러면 조만간 말씀은 스스로 돌파하고를 마련하여, 신앙과 기도의 여정에 노산 있게 마련인 우리의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마음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말씀과 열심히 접촉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는 충실한 분이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며 잊지 않고 우리 마음에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더러 하느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리는 시기가 오지만, 그 뒤에는 하느님의 현현顯現이 이어지는 법입니다. 나아가 힘들고 때로는 좌절감을 맛보는 영적 건조함의 시기는 은총으로서,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지식을 지니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형제여, 선사된 말씀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이 말씀을 그대에게 선포하고 설명해 주는 이들을 위해서도 감사드리십시오. 그리고 성서 본문이 그대의 마음에 떠올려 준 모든 형제들, 곧 그들의 덕행으로 말미암아서든 혹은 너무 짐으로써이든 성서 본문을 통하여 그대가 기억하게 되는 모든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형제여, 거룩한 독서에서 보고 듣고 맛본 것을 간직하고 마음으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사람들과 동행하기 위하여 떠나십시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대가 얻은 그 평화와 축복을 겸손히 나누어 주십시오. 그대는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직업적인 일상의 모든 영역 속으로 육화시키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형제여, 그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쓰시는 세상 안에 도구입니다. 하느님은 그대를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난 후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뵙는 날이 또한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대의 오늘이 과연 그리스도께서 새기신 살아있는 글인지 아닌지, 그날 그대는 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형제들을 위한 거룩한 독서인지, 하느님의 외아들 자신인지 아닌지, 그날 그대는 보게 될 것입니다. -엔조 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