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檀紀年號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에서 정통성에서 '단기연호'와 '개천절', '어천절'등, 민족의 뿌리인 단군 사상만 경시하고 있다.
[언제가는 꼭 '단기연호'를 다시 되살리고 싶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가장 먼저 제도 속에 정착한 것은 단기 연호(檀紀 年號)이다. 단기는 단군의 건국으로부터 시간을 기산하는 연기법으로의 ‘단군건국기원’의 줄임말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연호는 천자(天子)를 자처하는 패자가 천명을 계승한 존재로의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내부를 통합하기 위한 의도에서 제정하며, 제3자가 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편의상의 용도를 넘어 그 천자의 통치권을 수용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중원(중국)을 장악한 제국이 천하의 주인이자 중심임을 자처하며 그 우세한 문화력과 군사력으로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 위에 군림하던 고대와 중세에 있어서는, 어떤 연호를 사용하는지의 문제가 국가적ㆍ민족적 자주의식과 관련하여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독자적인 연호를 표방한다는 것은 자신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천명을 받은 자주적인 지위에 있는 존재이며 중국과도 대등한 관계임을 천명하는 행위이다. 거꾸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데 동의하고 제후국으로의 지위를 수용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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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는 한 무제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며, 한국사에서는 사대모화사상과 중국의 영향 하에 중국의 연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사례도 적지 않은데,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영락’이나 ‘건흥’ 같은 연호를 사용하였고, 신라도 법흥왕 때(536)부터
진흥왕ㆍ진평왕ㆍ선덕여왕ㆍ진덕여왕 때까지는 ‘건원’ㆍ‘개국’ㆍ‘건복’ㆍ‘인평’ㆍ‘태화’ 등의 독자연호를 사용하다가 진덕왕 때(650)부터 당의 연호를 따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헌덕왕때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킬 때는 ‘장안국’이라는 국호에 ‘경원’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후삼국의 궁예도 ‘마진’ㆍ‘태봉’ 등의 국호와 함께 ‘무태’ㆍ‘성책’ 같은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고려 태조나 광종도 ‘천수’나 ‘광덕’ 같은 독자적 연호를 쓰기도 하였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도 ‘대위’라는 국호에 ‘천개’라는 연호를 내세웠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민족문화대백과사전(15)(1990), 15권, 「연호」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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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중국에 대한 사대를 대외관계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출발하였으므로 명과 청의 연호를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한말에 와서 개화사상의 보급과 함께 국제사회의 대등하며 자주적인 구성원으로의 국가정체성이 자각되면서 독자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개국기원(1894)이나 건양(建陽 1886)ㆍ광무 (光武 1897 대한제국)ㆍ융희 (隆熙1907, 순종) 등이 그것인데, 그러나 이런 것들은 왕권국가 차원의 독자성을 천명한 것이지 민족적 차원의 독자성이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왕권국가 차원의 연호가 아니라, 민족적 차원의 정체성인식을 반영하여 대두된 연호가 바로 단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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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건국으로부터 기산하는 ‘조선건국 ○년,’ ‘단군개국 ○년’ 또는 ‘단군기원 ○년’ 식의 연기법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5년경부터이다. ‘황성신문’은 판형을 개량한 1905년 4월 1일자(1905호)부터 ‘단군개국’ 연기를
기자원년ㆍ대한개국ㆍ광무ㆍ서기ㆍ음력ㆍ일본명치ㆍ중국광서와 함께 병기하고 있는데, 이같은 연기방식은 ‘대한매일신보’(1905.8.11.)나 ‘만세보’ㆍ‘경남일보’ㆍ‘예수교회보’ㆍ‘공립신보’ㆍ‘신한민보’ 등 국내외에서 발간되던 다른 신문들도 따르고 있다. 이후에는 단군기원만으로 연대를 적는 방식이 점차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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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연호를 써야하는 당위성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사람이 단재 신채호 선생인데, 그는 한말에 쓴 한 논설에서 조선의 역사가 단군에서 시작되었음을 지적한 뒤, ‘아건국성조단군’에서 시작하는 기원을 사용하면 역사를 대함에 있어 ‘동조동족’의 관념이 생겨나 애국심을 환기시키는데 유익하리라 주장하며단기 연호사용을 역설하였다. 신채호의 애국계몽운동과 역사연구는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고 그를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한 데에 실천적 목적이 있었다 할 수 있는데, 단기사용에 대한 그의 주장은 이 같은 문제의식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단기는 조선왕조가 문을 닫은 이후 왕실차원의 융희 연호를 대체하면서 급속히 확산되게 되는데, 삼일운동 무렵으로 오면 발표된 독립선언서들이 그 발표일을 대개 단기를 사용하여 적게 된다. 이는 선언서들이 궐기의 주체이자 자주독립의 주체를 ‘반만년 역사’를 가진 ‘단군배달겨레’라 표현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단기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집단적 정체성을 단군의 자손으로 인식하고 있고, 거사의 의미 또한 단군 이래 반만년 민족사의 호흡 속에서 찾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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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의 확산경향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심화되고 사회주의자들의 계급주의적 세계관이 확대됨에 따라 일정하게 제약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고 민족의식의 분출을 억압하던 식민권력이 사라지자 단기는 곧바로 전면으로 부활하게 된다. 해방 후 복간된 신문과 잡지들은 대거 단기를 이용하여 발간일을 표기하였고, 미군정하에서는 호적을 단기로 교체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5ㆍ10선거로 개원한 제헌국회는 헌법전문에 그 공포일을 ‘단기 4281년 7월 20일’이라 표기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단기연호를 법제화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단기는 한달여의 심의과정 끝에 「연호에 관한 법률」(법률 제4호, 1948.9.25)이 공포됨으로써 정부의 ‘공용연호’로 지정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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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는 개원 때부터 단기를 사용하였지만, 그러나 뒤에 조직된 이승만 정부는 1919년 임정 수립에서 기산하는 ‘대한민국30년’을 사용하였고, 뒤이어 취임한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서기를 사용함으로써, 국가적으로 연호를 통일해야 할 필요성이 제고되었다. 어떤 연호를 사용할지를 두고 전개된 국회에서의 논쟁은 주로 ‘단기’와 1919년 임정수립에서 기원하는 ‘대한민국’ 두 가지 사이에서 어떤 것을 사용할지를 두고 전개되었는데, 결론은 단기 연호가 채택되는 것으로 정리된다. 심의과정에서는 학계와 언론계 지도층에 대한 의견청취도 거쳤으며, 최종적인 찬반표결 (1948.9.12) 때는 재석 133인 중 찬성이 106인이고 반대가 5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의
국회논의 과정은 서영대(편), 「단군관계자료」, 서울대종교문제연구소(편), '단군, 그 이해와 자료'(서울대출판부, 1994), 608~6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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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단기 연호의 산정방식은 서기연도에 2333년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이같은 관례는 한말 이래 정착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나 단기의 기준이 되는 단군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문헌기록마다 다소간씩 차이가 있다. 단군건국에 대해 전하는 문헌들에서는 단군의 건국시기를 중국 요임금의 즉위시기와 비교하면서 적고 있는데, 그 유형은 대개 (1) ‘여고동시’ 곧 요임금과 같은 때 즉위했다고 기록한 경우와, (2) ‘당요25년무진’ 곧 요임금 25년 무진년으로 기록한 경우, (3) ‘당요무진세’, 곧 요임금 때인 무진년이라고만 표기하는 경우, (4) 요임금 50년 ‘경인’으로 적은 경우 등으로 다양하다. 단군의 건국연대에 대해 이 같은 차이가 있는 것은, 단군관련 전승이 다양했고, 연대산정의 기준으로 삼은 당요의 즉위년에 대한 이론이 서로 달랐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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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연호는 공용연호로 제정된 지 13년 만에 폐지되고 서기로 대체되게 된다. 5ㆍ16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는, 단기 연호가 외교 및 행정에 많은 애로와 낭비를 결과하고 있는 데다, 유엔을 비롯한 모든 국제기구와 대부분의 선진제국에서는 서기연호를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결정으로 단기를 서기로 교체하게 된다. 단기를 서기로 바꾸는 새 법률안에 대한 「제안이유서」에서는, 대내문서가 단기를 쓰는데 대해 대외문서는 서기를 사용하여 서로 통일을 기하지 못하고 있고, 서기를 단기로 바꾸는데 불필요한 낭비와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국수주의적이고 국제협력에 등한한 듯한 인상을주기 쉽다는 점 등을 변경이 필요한 이유로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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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부가 연호를 변경을 급하게 단행한 배경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정은 모른다. 다만 쿠데타 주도세력이 친미ㆍ친서방의 노선 하에서 지지기반을 확보하려한 사정과 관련하여 일정한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5ㆍ16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은 ‘조국근대화’를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우선의 구호로 제시하였으며, 반공ㆍ친미ㆍ친서방의 노선에서 대외적 지지기반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근대화개혁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과시하고 미국과 서방제국으로 하여금 혁명정권의 친미ㆍ친서방 성향을 확인시키기 위한 정책적 고려에서 연호를 바꾸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군사정부의 단기폐기 결정이 국민의 여론수렴을 거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당시 상황이 군부가 삼권을 장악한 억압 상황이었던 만큼 일반의 반대나 저항은 별반 없었던 것 같다. 일부 신문들이 연호문제가 ‘경박하게 처리된 것’을 비판하였지만[ ‘조선일보’, 1961.11.12. 사설.] 물리력을 장악하고 있는 군사정부의 조치를 번복시키기에는 무력한 것이었다. 이후 단기 연호 부활을 촉구하는 시민운동 차원의 요구들이 지속되고 있지만, 서기를 다시 단기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