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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담 / 본지 편집주간 임 애 월
쓰러지지 않는 사막의 노래
박 재 화 시인
긴 산맥의 등줄기가 진초록 빛으로 꿈틀거리는
5월 어느 날.
《한국시학》 시서전이 열리는 수원의 <가빈> 갤러리에서
박재화 선생님을 만나뵈었다.
부드러운 미소로 반겨주시는 선생님과
참 오랜만에 편안한 담소를 나누었다.
임애월 : 선생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재화 : 예.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임애월 : 2016년 4월에 경기PEN 회원들과 블라디보스토크를 함께 다녀왔으니 못 만나뵌 지가 8년이 넘었네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이러저러한 핑계로 문단행사에도 나가지 못하다 보니 그때 함께 하셨던 선생님들께 죄송스러운 부분이 참 많습니다.
선생님께선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근황이 궁금합니다.
박재화 : 저야말로 이런저런 이유로 문단 행사에 별로 나가지 못해 미안하고, 아쉽습니다. 연해주 탐방 땐 정성수(丁成秀) 선생님 소개로 동참할 수 있었는데, 저로선 평소 꿈꾸던 곳이었기에 아주 뜻 깊은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의 선배님과 문우들께 결례한 셈이니…,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널리 헤아려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근황이래야 특별한 것은 없고, 1주에 한 번 강의 나가는(두원공대) 것 외에는 시 공부와 집안일에 신경 쓰는 정도입니다. 하하
임애월 : 이제 완연한 초여름이네요. 저는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여름이 좋아졌어요. 싱싱한 생명력이 사방천지에 가득하잖아요. 선생님께서는 특히 좋아하시는 계절이 있으신가요?
박재화 : 가을을 좋아합니다. 사색과 결실의 계절이니까요(웃음). 그런데 나이 들면서 차츰 겨울도 좋아지데요. 제가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데, 요즘엔 옛날처럼 춥질 않잖아요? 그러니까 적당히 견딜 수 있게 되어서인지, 가끔 눈 덮인 들판을 찾거나 눈 내리는 쓸쓸한 뒷골목을 배회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슬며시 놀라기도 합니다(웃음).
임애월 : 그러시군요, 아무래도 시를 쓰시니까 감성적인 계절에 민감하시나 봅니다.
선생님 고향이 충북 옥천이신데 요즘도 고향에 자주 가시는지요? ‘고향’ 하면 맨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실지 작은 궁금증이 생깁니다. 물론 어린 시절이나 중·고등학생 때까지 아주 모범적으로 보내셨을 것 같긴 하지만요(웃음).
박재화 : 옥천이 고향이긴 하지만, 태어난 곳은 충북 보은입니다. 그리고 6·25로 모든 것을 잃은 선친께서 제가 여섯 살 때 대전 식장산 기슭으로 이사하셨기에, 청소년시절은 대전에서 보냈어요. 모범적이라기보다는 부모님과 어른들 말씀을 잘 듣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씨받이로 태어난 4대 독자였기에 무척 외롭게 자랐고, 조금은 내성적이기도 했습니다. 고향엔 한 해 두 번쯤 들르는데, 아는 이도 거의 없고 산천도 많이 바뀌어서…… 고향이 오히려 타관 같습니다.
임애월 : 아, 보은에서 태어나셨군요.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일기를 쓰신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여전히 쓰고 계신가요?
박재화 : 예.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그건 자기 전에 쓰는 거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꿈 일기>도 쓴답니다. 혹 상상력 배양 등에 도움 될까 해서요(웃음).
임애월 : 와~ 평생 일기를 쓰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저는 농사 지으면서 중요한 것 위주로 간단하게 하루 메모를 하기는 합니다만 제대로 된 일기는 아니랍니다. 그리고 꿈일기요? 꿈 이야기만 모아도 재미있겠는데요. 꿈을 자주 꾸시나 봅니다. ㅎ
박재화 : 하, 그게 참 묘합니다. 저는 통 꿈을 안 꾸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매일 밤 여러 개의 기기묘묘한 꿈을 꿔서, 저도 깜짝 놀라곤 합니다. 일일이 되살리기도 벅찬데, 잠 깨자마자 바로 적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고 맙니다.
임애월 : 하룻밤에 꿈을 여러 편 꾸시는군요. 꿈은 심리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들 하는데 선생님의 정신세계가 다양하고 복잡미묘하신 거 같군요(웃음). 참, 중학교 때는 친구 네 명이 합동시집을 묶기도 하셨다고요?
박재화 : 그거야 치기 어린 것이니 내세울 게 못됩니다. 저를 유난히 사랑해주신 담임 樂隱學人 姜銓燮 선생님(뒤에 우송대 교수. 가사문학 연구의 권위자)의 주선으로 나온 것이란 점에서 의의가 크긴 합니다만…….
임애월 : 그때부터 문학적 소양이 남다르니까 담임선생님께서 챙겨주셨군요.
국책은행에 수석 합격을 하고도… 보험이 정말 좋아서 보험 업계에서 오래 근무하시면서 보험전문가로서 방송에도 많이 출연하셨다고 들었어요. ‘1인은 만인을 위하고 만인은 1인을 위한다’는 보험정신이 매력적이긴 합니다만… 보험회사의 전무이사까지 거치면서 보험업을 정착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셨으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보험에 대해, 전문가로서 간단하게 한 말씀해 주시겠어요?
박재화 : 보험은 어떤 위험을 같이 느끼는 위험집단의 경제적 자구책인데, 우리 겨레의 두레나 울력이라는 공동체정신과 전통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좋게 생각하고 뛰어들었습니다. 다만 인간생활의 각종 위험(리스크)을 사후적으로 해결하는 경제수단일 뿐인데, 일부에서는 정신적·심리적인 면 등 모든 것을 보험에 의지하거나, 심지어 악용하는 사례도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암튼 기계문명의 발전과 경제의 고도화와 더불어 리스크가 증가하는 세상이므로 보험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현명한 경제생활의 지혜일 것입니다. 보험에 들면서 내는 보험료가 일명 ‘안심료’라고 불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임애월 : 네, 어떤 부분이든 일단 보험에 가입되어 있으면 어느 정도 안심이 되긴 합니다.
등단 무렵도 궁금합니다.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셨지요? 근대 한국사를 뒤돌아볼 때 7~80년대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참 어려운 시기였지요.
박재화 : 예. 당시 권위를 자랑하던 《현대문학》지에 1983년 초회 추천, 1984년 2회추천 완료되어(추천인 韓性祺) 등단하였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1970년대는 유신독재로, 1980년대는 군부독재의 연장으로 사회적인 제약과 부조리가 심했지요. 하필 그때 대학시절을 보내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 암울하고 외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임애월 : “사나웠던 연대, 찢겨져 나부끼는 깃발이 아파”서 “오뇌의 낮과 절망의 밤에 태어난 이 상처투성이들에게 따뜻한 이름 하나씩 안겨주고 싶다”는 첫 시집 ‘시인의 말’을 읽으면서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여기서는 개인의 주변이나 상황 등 그 차원을 넘어서 시대적 아픔이 읽히거든요. 1990년에 출간한 첫 시집 도시의 말 속의 시들을 읽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복사꽃 흥건하고나 누이야
잔 구름 물결치던 봄날
꽃밭 사이사이 햇살 줍던 누이야
가슴 울린 말들은 사라지고
강물도 돌아서 입 다문 모퉁이
그 언덕에 이젠 해도 앓아눕고
흙바람 속 네가 남긴 핏덩이도 누워
더는 잠을 못 이루고
다만 저무는 강 저무는 아파트 단지에
이른 별만 시름겨이 돋는고나
저녁하늘 비인 달로 걸려서
낮게 우는 누이야 목이 긴 누이야
- 「도시의 말 1」 전문
유한근 평론가는 이 시집의 해설에서 “꽃밭 사이사이 햇살 줍던 누이” “가슴 울린 말들” 등의 “비도시적 서정은 도시의 죽은 언어를 살아 있게 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폐차장과 같은 도시의 서정과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음과 같은 이 도시에서 꿈을 갖기 위”한 비유라고 하셨어요. 박재화 시인은 “다분히 유토피아적 문학관을 가지고 있는 셈”이라고도 했는데, 유토피아는 어딘가에 과연 존재 가능한가요? 불가능하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것일까요?
박재화 : 글쎄요, 제가 유토피아를 꿈꾸거나 의식했는진 솔직히 모르겠네요(웃음). 다만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매우 가난하게 보냈기에(당시는 다들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말하지만, 저는 더욱 어렵고 절망적인 형편이었습니다), 일종의 도피처로서의 유토피아를 기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일찍 받아들인 기독교신앙의 영향도 있었을 테고요.
임애월 : ‘어디에도 없는 곳’이 유토피아라니까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곳이겠지요. 현실의 절망을 견디기 위해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신앙은 절대적인 힘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목이 긴 누이”는 거친 시대를 함께 건너가던 이웃들, 즉 지난한 과정 속에서도 결코 꿈(이른 별)을 놓지 않은 선남선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재화 : 그렇지요. 이 작품은 제 등단작인데요.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현대문학》에 처음 발표할 땐 마지막 2행의 “…비인 달로 걸려서”가 원래 “…오보에로 걸려서”로 되어 있었어요. 당시 어느 고교생이 그 작품을 좋아해서 암송하곤 했는데, 7년 뒤 나온 시집(현대문학사 간 도시의 말)에서는 그 부분이 바뀐 걸 보고 실망했다고 해요. 저는 서양악기의 이름이 우리 정서·가락에 맞지 않다고 여겨 바꾼 건데……. 아무튼 그 학생은 저의 작품들 때문에 문학의 길에 들어섰고, 나중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 등단 소감에 이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독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왜 우리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작품을 쓰고 철저하게 퇴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지요.
임애월 : 아하, 대단한 시인을 좋아한 대단한 독자임에 틀림이 없네요. 이 시집에서 시 한 편을 더 읽어보고 싶네요.
물오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포구를 메운 통통배 같다
군화처럼 성큼성큼 다가서는 겨울
자맥질 끝에 시름시름 앓아눕는 새들
한강의 사랑은 이제 0.5ppm을 넘는다
저녁 햇볕처럼 소매를 내리는
밤섬의 갈대들 관목들도 이제는 무방비다
몇 해를 두고 벌서고 있는 교각들
날려 보내지 못한 종이학의 꿈
아우슈비츠 담장 같기도 하고
휴전선에 박힌 6·25 같기도 하다
자꾸만 치사량의 수면제를 원하는
서울 한 모퉁이.
- 「밤섬」 전문
밤섬은 도심 속의 섬이지만 따뜻한 낭만은 보이지 않고 “군화처럼 성큼성큼 다가서는 겨울” “아우슈비츠 담장” 등에서 전이되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폭력이 난무하는 서울의 이미지, 새들도 “시름시름 앓아 누”으며 “치사량의 수면제를 원하”지만, 그래도 ”날려 보내지 못한 종이학의 꿈“은 판도라 상자 속 희망처럼 아직 남아있는 유토피아적 꿈일지도 모르겠네요.
박재화 : 밤섬의 파괴는 어찌 보면 환경·생태 파괴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겠지요. 밤섬 위를 가로지르는 서강대교는 오랫동안 교각만 박아 놓은 채 공사가 중단되어 더욱 볼썽사나웠고요. 서강대교는 결국 1997년 완공되어, 위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의 밤섬 모습과는 달라졌습니다. 다만 그 뒤 민관이 합동으로 밤섬 생태계의 보존에 힘을 기울여, 요즘엔 생태관광(특히 새 관찰)의 명소이기도 하다니, 반갑기만 합니다.
임애월 : 네, 그나마 다행입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파괴된 환경으로 인해 한강의 새들도 당시에는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었을 것 같아요.
1996년에 출간하신 두 번째 시집 우리 깊은 세상에서 “세상 한끝에서 갈수록 작은 것들과 미물들에게 눈길이 간다. 거창한 것, 요란한 것, 겉으로 보이는 것에는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네 모가지 비틀어
제자리 맴돌음
즐기며 숲속을 휘젓던
어린 날들을 사죄한다
내 안일과 철없음을
그 막막함을 비틀지 못하고
내 곁의 너를
오히려 짓밟은 무지를 용서해다오
그것이 실은 네 속의
내 가녀린 꿈이었음에
그것이 실은 네 안의
내 막다른 출구였음에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이제는 탐욕과 속됨을
하루에도 몇 번씩 비틀어버린다
- 「풍뎅이」 전문
제가 이 시에 시선이 깊게 꽂힌 이유는 작은 미물들에 대해 담백하게 사과를 하는 낯선 이미지 때문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끼리도 사과하기를 싫어하는데 한갓 미물들에게 사과를 하겠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모두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 걸 아는 ‘시인’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요.
박재화 :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웃음) 암튼 시인은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과 여린 마음의 소유자 아니겠습니까! 저는 ‘자연 보호 운동’이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교만이 느껴져서요. 대신 ‘자연 감사 운동’ ‘자연 존중 운동’이란 표현을 즐겨 쓰곤 합니다.
임애월 : 네… 백번 공감합니다. 앞으로 ‘자연 존중 운동’이라는 표현을 꼭 쓰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한 말씀이니까요.
인간은 생물 다양성을 혐오한다던 어느 교수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지구상의 동물들 중 인간이 차지하는 비율이 95% 이상이랍니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의도된 결과랍니다. 그 작고 보잘것없다고 생각되는, 나머지 5%도 안 되는 생명체들이 이 지구 생태계를 유지하게 하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박재화 : 몰염치성이 자본주의의 한 특징이라 하더군요. 돈은 사람과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초지일관 무표정·무감정·무차별적이라는 겁니다. 돈의 얼굴은 한편으론 공정하고 평등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양적 가치만을 드러내기에 인간성과는 무관하다고 하고요. 신자본주의든 뭐든, 지구와 인간성의 파괴를 가져오는 여러 현상에 대한 절대적인 각성과 초국가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애월 : 옳으신 말씀입니다. 단순한 편인 제가 생각해 봐도,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무덤을 파고 있다고 봅니다.
박이도 시인은 “풍뎅이를 통해 나를 되살리고 확인해 보는 시점이다. 일종의 윤리적 각성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고 평하셨는데, 우리들 모두는 대자연에 대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고 있잖아요. ‘발전’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브레이크 없이 직진만 고집해온 인간들 때문에, 지금 지구는 기후 위기로 인한 재난이 이젠 정말 무서울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이곳저곳에서 홍수, 가뭄, 지진, 산불 등 자연재해가 갈수록 대형화되고 있으니 당장 이 여름부터 걱정이 크게 됩니다.
박재화 : 그러게 말입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예측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현대에 와서 새로운 리스크가 생기거나, 이전의 리스크가 변형·확대되는 바람에 한편으론 예측 불가능성이 외려 높아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할지 걱정입니다. 지구가 겪은 다섯 차례의 대멸종 가운데 소행성충돌로 인한 공룡 대멸종을 제외한 네 차례 멸종이 온실가스에 의한 기후변화와 관계 있다고 하더군요. 최악은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도를 5° 높이며 시작된 세 번째 멸종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10배나 빠르게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있어서 2050년엔 지구에서 거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유발 하라리의 지적처럼,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을 피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지식인과 여론지도층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하겠습니다.
임애월 : 네. 선생님… 지금 이 상태로 계속 가면, 지구인들의 생존 기간이 이제 30년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 세계인들 모두 제대로 자각하고, 현명하고 발 빠른 대처를 해나갔으면 합니다.
2004년엔 세 번째 시집 전갈의 노래를 상재하셨네요.
자서에서 “우리의 진정한 삶이 빠진 노래는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사막을 다녀왔다”고 하셨어요. 사막에서 “삶은 아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고, 얻는 게 아니라 버리는 일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으셨다고요? 극한 상황의 체험을 통해 비로소 선명하게 깨달아지는 게 분명 있겠지요.
박재화 : 사막은 극한의 공포뿐 아니라 다른 면에선 우리 내면의 탐구나 절대정신에의 갈망을 맛보게 하는 신성하고 독특한 공간이라 하겠지요. 짧은 여행들이었지만, 금수강산을 자랑하는 한반도에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고요하디 고요한 달밤에 낙타 타고 시나이산 정상에 오를 땐 그야말로 환상적이고 낭만적이며 청렬(淸洌)한 감정으로 느꺼웠는데, 다음날 낮에 걸어서 산을 내려올 땐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는 점입니다. 무언가 역경을 뚫고 몸부림치며 오체투지로 구도의 길에 들어서는 느낌이었어요. 시나이산 기슭에 오래 전부터 성카타리나 수도원이 자리잡은 게 다 이유가 있다 하겠습니다.
임애월 : 사막이 보여주는 두 개의 얼굴인가요? 사막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느낌”과 “버리는 일” 사이에서 또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박재화 : 솔직히 고백하면,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언덕을 바라볼 땐 관능미를 느낄 정도로 전율했습니다. 그리고 바위산과 자갈길로 이어진 황야에선 그 원시의 자연이 주는 장엄함에 압도당하기도 했고요. 여행자는 커다란 기대와 약간의 불안을 안고 어떤 공간에 도착한다는데, 과연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 숙소에 돌아와, 밤에 그날 일을 메모하고 생각과 감흥을 정리하다 보면, 한편으로 ‘나는 너로 인해 완성된다’는 점도 절감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생명현상에서 ‘홀로’라는 건 없다는 점도 수긍하게 되고요.
임애월 : ‘나는 너로 인해 완성된다’ …… 참 멋집니다.
벼랑이다
이제 더 떨굴 것 없는 거리다
속도를 부르짖는 너
굴종을 손짓하는 너
나오라
정체를 드러내고
일 대 일로 하자
언제나 한 덩어리 피를 노리는 배후
오늘은 돌아서 총을 겨눈다
밤새 추스른 내 뼈로 장전된
이제 더 떨굴 것 없는 거리다
오라, 일 대 일로 하자
- 「사막」 전문
사막은 단호한 사고를 요구하는가 봅니다. 물렁거릴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밤새 “뼈”를 깎아 장전해 둔 “총”으로 바로 대상을 겨누어야 하는 막다른 “벼랑” , 그게 사막에서의 느낌인가요.
박재화 : 그렇지요(웃음).
임애월 : 백인덕 시인은 ‘사막은 태양의 영역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띠는 바, 이때의 사막은 지상의 에너지를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神의 현시와 결합된 순수하고 축복받은 빛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와는 달리 불타는 가뭄, 혹은 사막은 특히 영혼의 구원을 위해 육체를 소모하는 순수한 금욕적인 정신성을 상징하기도 한다’면서 ‘사막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책 밖의 책”을 구하려는 구도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혜안을 얻기 위해서 극한 상황인 설산과 사막을 헤매던 성인들의 깨달음의 길을 실제로 밟아보셨으니, “쓰러지지 않”을 만큼 거기에서 받은 지혜와 위안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박재화: 아, 그때는, 실은 새로 얻은 직장에서 부당한 외압으로 쫓겨나게 되어, 막막하고도 울분에 찬 시간이었기에 급히 떠난 것이었는데….(웃음). 암튼 어느 만큼은 가라앉아서 돌아오게 됐달까요. 신이 선물을 주실 때엔 늘 고통이라는 보자기에 싸서 주신다는 말에 공감하면서요. 세상엔 언제나 지독한 고통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일단 견뎌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경이로 가득 차게 된다(프랑수아 볼테르)는 말도 떠올랐습니다.
임애월 : 네, 맞아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넘어섰을 때 느끼는 행복이 더 배가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사막뿐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을 자주 가시는데 최근에는 ‘시칠리아 한 달 살기’도 하셨다고요?
박재화 : 오래전부터 막연히 시칠리아를 돌아보고 싶었어요. 서구문명과 자연이 잘 어우러진 매혹적인 공간으로 여겼던 거지요. 제가 일찍이 그런 생각을 꺼내자 동료교수 한 분이 적극 찬동하면서 이를 밀어붙인 겁니다. 그분은 요리 솜씨도 대단하여서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건강문제로 마지막까지 시칠리아행이 불투명했기 때문에 준비 소홀 등의 문제가 있어서, 제대로 시칠리아의 구석구석을 맛볼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도 몹시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임애월: 시칠리아에서 한 달 동안 살기 전과 살아본 후, 달라진 느낌이라면요?
박재화 : 글쎄요. 질문 취지와는 거리가 있는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이탈리아가 쇠퇴하고 있는 듯하여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1981년 영국 CII COLLEGE OF INSURANCE로 연수 떠날 때 가장 먼저 찾은 곳이 그리스와 이탈리아였습니다. 그만큼 이탈리아를 동경했던 건데, 마흔두 해 만에 다시 찾은 이탈리아의 장래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더군요, 관광지에도 온통 애완견의 배설물이 널려 있는 등 불결했다는 것, 지하철의 잘못된 행선지 표시를 여러 날 방치하는 등 무질서했다는 것, 경찰 말고도 국방부 소속의 ‘카라비니아리’ 순찰차가 곳곳에 보여도 치안이 불안했다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한편 무엇보다, 시칠리아 안에서도 팔레르모·카타니아·시라쿠사·타오르미나·아그리젠또 등이 각각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조금씩 다른데, 그에 대한 공부 없이 급하게 떠났고, 게다가 먹는 것과 걷는 것에 조심해야 해서……, 외국여행의 진수를 즐길 수 없었던 점만 아프게 남아 있습니다.
임애월 : ㅎㅎ 그것 또한 여행의 한 부분 기록으로 남겠네요. 세계 곳곳을 다니셨는데, 가장 마음에 오래 남아있는 곳은 어디이며, 왜 그러한지 말씀해 주세요.
박재화 : 스페인을 꼽고 싶습니다. 1981년 런던의 켄싱턴영어학교에서 사귄 마놀로라는 스페인 청년 덕에 당시 마드리드·톨레도·세비야 등을 여행했는데, 역사유적·풍광·인심·음식 등이 모두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몬세라테 등을 다시 찾았었는데, 마흔 해가 흘렀어도 여전히 정열과 역사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매혹적인 곳이었습니다. 요즘엔 세계 곳곳에서 특색 있고 멋진 여행을 즐기는 우리나라 문인들이 많으시니까, 저의 이런 경험은 별로 얘기꺼리가 못될 겁니다.
임애월 : 아닙니다. 경청하고 있습니다. 같은 곳을 다녀와도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잖아요. 선생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여행지들 속으로 저도 함께 상상 여행하는 중입니다. 하하… 우리나라도 아름다운 곳이 참 많은데 여행을 좋아하시는 선생님께서는 두루두루 다니셨겠지요? 국내에서는 어느 곳을 특히 좋아하시는지요?
박재화 : 예. 나라 안 곳곳을 많이 돌아다닌 편입니다. 사정상 대개 혼자 짧게 여행했지만… 아무튼 안면도를 특히 좋아합니다.
임애월 : 아, 안면도요? 좋은 곳이지요.
박재화 :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습니다. 세곡선의 안전운항 등의 필요에서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운하를 파려고 고려조부터 500여 년간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1638년에야 안면곶 운하 건설에 성공한 거지요. 그곳 암반이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라 깨기 쉬운 편마암이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섬이 된 안면도엔 왕실의 건축목재를 공급하는 송림이 조성되는 등의 이유로 사람들의 거주가 금지된 아프고 슬픈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1970년 연육교가 놓였으니,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돈달까요? 저는 1965년 중학교 학생회장 때 안면도에서 열린 충청지역 학생간부 해양훈련에 참가하느라 그곳에서 1주일 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받은 이색적이고도 강렬한 인상·느낌은 말도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그 뒤 이런저런 사유로 마음 정리가 필요할 땐 으레 그곳을 찾았습니다. 장모님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그곳 바닷가에서 며칠 모시고 지내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임애월 : 네, 안면도에 그런 역사적 사연이 담겨있었군요.
몰랐습니다.
건기의 끝 이른 비가 오시네
꿈결인 듯 설렘인 듯 비가 오시네
그 빗방울 부겐베리아 적시네
때 맞춰 호수를 건너오는 바람
달고 시원하네
덧없는 시름
적막조차 겨운 날
돌집 사이
인간의 마을마다
깊은 사연 잠들고
깃발이나 외침 아닌 그윽한 힘이
빈 들을 적시네
그 아득함 가운데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에게 건너가네
다가가서 따뜻하게 감싸네
깊디깊은 눈길이
부겐베리아 향기 새로 피워내네
그 꽃잎 흔들리는 소리
가득한 저녁에
- 「부겐베리아, 갈릴리의」 전문
갈릴리 호수도 다녀오셨네요. “비가 오시네” “그윽한 힘” “깊디깊은 눈길” 등에서 화자가 느끼는 영적인 “존재”는 “부겐베리아 향기 새로 피워내”는 “따뜻”함을 가진 존재인가 봅니다.
박재화 : 하하. 그렇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동경하면서, 예수를 노래한 것입니다.
임애월 : 이 시는 2004년 미국에서 개최한 제18차 세계시인대회에서 B.H.Givens 대회장이 한국의 영문시집 poetry korea를 소개하면서 마음에 든다고 직접 낭독한 작품이라고 들었어요. 명예로운 일입니다.
박재화 : 예. 저는 나중에 국제PEN 한국본부 김용재 이사장(최근 작고)이 전해주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 사실을 어느 지면에서도 소개했던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얼떨떨하고 실감이 안 납니다.
임애월 : 네 번째 시집 먼지가 아름답다는 2014년에 출간하셨네요.
이덕주 평론가는 이 시집 해설에서 ‘그의 시는 원형을 복원하려는 의지를 그만의 언어로 드러내려 한다. 그 자리에는 그의 천진성과 대상에 대한 통찰력이 공존한다’면서 또 ‘박재화 시인은 실체적 경험을 중시한다’고도 하셨어요. 사실 예술가는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체험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저도 생각합니다. 그래야 “소음”이 아닌 “진정한 삶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테니까요.
박재화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체험이 뒷받침된 상상력과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 중요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기가 겪지 않은 일은 절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소통만을 위한 시, 소비를 위한 시,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이 없는 시는 사라지기 쉽다는 점을 명심해야겠지요.
임애월 : 「깨달음의 깨달음」 이라는 시를 읽어볼게요.
걸핏하면 무얼 깨달았다는 사람들 두렵다 무언가 알아냈다고 목청 높이는 사람들 무섭다 나는 깨달은 적이 없는데 어떡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닫기로 말하면 대체 무엇을 깨닫지? 이것인 듯하다가 저것인 것 같은 생의 한복판에서 깨달음까진 몰라도 바람 흘러가는 쪽이나 좀 알았으면… 유난히 긴 밤 잠 못 들면서도 깨달음은 아니 오고 깨달음은 왜 나만 비켜갈까 나의 깨달음은 대체 언제일까 깨달음의 깨달음에 매달리는 밤…
- 「깨달음의 깨달음」 전문
‘깨달음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이라는 이덕주 평론가의 말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무한 반복의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우리들의 삶인가 봅니다. 진짜 깨달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므로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이 반드시 깨달은 자가 아닐 수도 있겠네요. ㅎㅎ.
박재화 : 위 시는 과거 <광수 생각>으로 유명한 만화가 박광수가 엮은 시집에도 실렸는데, 아마 조금은 냉소적인 접근법이 공감을 얻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저는 참말로 깨달음은커녕 아무데서도 일가견을 갖추지 못한 부끄러움에 젖어 있습니다. 뭐 ‘무지는 행복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모든 것을 안다면 우린 삶을 한 시간도 견뎌내지 못할 것’ (아나톨 프랑스)이란 말도 있긴 합니다만(웃음).
임애월 :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타인들로부터 인정받아야 의미 있는 건 아니지만, 선생님께서는 독자들에게 작품으로 인정 받으셨잖아요. 또 선생님께서는 여행을 자주 하셨으므로 낯선 곳에서 만나는 대상들을 통한 “깨달음”이 있었잖아요? 사막에서처럼요.(웃음)
박재화 : 하이고, 별 말씀을요. 누가 말했던가요. ‘아는 것은 희미해지고 모르는 것은 허다하다’고. 저야말로 그렇습니다.
임애월 : 세상 모든 일을 다 안다면 그것도 재미없을 겁니다. 하하, 3년 전에 상재한 시집 비밀번호를 잊다의 표제시를 가져왔어요.
내게 무슨 비밀이 있다고 비밀번호를 만들라니 아내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 정돈데 비밀은 무슨… 그러나 비밀번호 없으면 현관도 못 열고 돈도 못 찾고 이메일도 못 본다 오나가나 비밀번호다 그런데 비밀번호가 바뀌어야 한단다 바꾸지 않으면 혼난다 자주 바꾸라고 호통까지! 뭐라? 잦추 변경하라고? 바뀌면 그게 무슨 비밀인가 오래오래 변치 않는 게 비밀 아닌가! 그래도 바꾸란다 아무튼 바꾸란다 바꾸지 않으면 내가 바뀔 것 같다 하, 이거야 원… 때 없이 바꿔야 하는 비밀번호 앞에 한참을 갸웃하다 그예 돌아서는……
- 「비밀번호를 잊다」 전문
한복용 평론가는 이 시에서는 ‘문명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엿보인다. 문명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을 쓰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할까? 그래도 그의 작품들에서는 세상과의 불화에서 비롯되는 증오나 절망은 없다. 그는 증오와 절망을 오히려 해학으로 승화시킨다’고 평했는데, 비밀 하나 없는 요즘 세상에서 가는 데마다 비밀번호를 강요하는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하죠. 디지털로 바뀌면서 세상이 편하게 변하고는 있지만 그로 인해 불편해지는 부분이 생겨나기도 하네요.
박재화 : 말씀하신 대로, 곳곳에서 하많은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세상이 불편하고 거북하기 짝이 없습니다(웃음). 그런데 이 시는 ‘비밀’이 ‘비밀’로 취급되지 않거나 ‘비밀’의 참뜻이 왜곡되는 가치관의 전도현상을 꼬집기도 한 작품입니다.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거꾸로 취급되고, 심지어는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임애월 : 네… 비밀스럽지 않은 비밀들이 많아지고 진짜 중요한 것들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혼란의 시대를 생각 없이 저도 살고 있답니다.
‘박재화의 새로운 시집이 우리 시대의 결핍을 노래하면서도 그가 결코 화를 내거나 시대를 과도하게 탓하지 않는’다는 한복용 평론가의 말처럼 세상과는 불화하지만, 그렇다고 ‘증오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게 요즘같이 급변하는 시대에 어느 정도 보폭을 맞추고 사는 현명한 방법인 것도 같고요. ㅎ
박재화 : 글쎄요. 증오와 절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지 않을까요? 끝까지 견디면서 사랑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태도라고 믿습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삶이 잔인한 이유는 정서와 삶의 형식이 일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누군가를 죽인 체제를 향해 분노할 수는 있지만, 빨리 그 분노를 정리하고 다시 일터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고갤 끄덕이고 있습니다.
임애월 : 그러니까요. 힘이 곧 정의가 되기도 하나 봅니다.
등단하신 지 40년인데 시집이 다섯 권이면 8년에 한 권 묶은 셈인데 비교적 과작인 셈이지요?
박재화 : 예. 제 역량이 모자라고 성실치 못한 탓이지요. 굳이 변명하자면, 아주 오랫동안 직장에서 이렇게 저렇게 시달린 탓이 큽니다. 또한 아내가 많이 아파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기에 돕기도 해야 했고……. 아울러 교회생활(정통 보수교단인 ‘예장 합동’측 시무장로였습니다)을 하다 보니 시간적·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습니다. 외로워야,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야,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야 작품이 나오는 법인데……. 암튼 시를 생활에서 제일 순위로 두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임애월 : 무슨 말씀을요. 그만큼 숙성이 되어 나오느라 늦어지는 거겠지요. 이상하게 제가 좋아하는 시인들은 거의 과작을 하시더라고요. 하하. 참, 사모님께서는 많이 편찮으신가요?
박재화 : 아, 1994년에 자동차사고로 크게 다쳤습니다. 시력을 상당 부분 잃어서 물체식별이 어려운 데다 디스크·관절염이 겹쳐 잘 걷지를 못합니다. 두 팔과 두 손도 다쳐서 물건을 집는 게 불편하고, 상악골 골절과 치아(아홉 개)의 파절로 음식물섭취에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자연히 외출을 못하고 집안살림에도 지장을 받아서…, 어떻게든 통증감소와 신체기능 유지를 빌고 있는데, 잘 안되네요. 아무튼 새벽마다 아내를 위해 기도 올리면서, 평소 약간의 집안일을 돕고 있습니다.
임애월 : 아…… 저런저런…… 그러시군요. 저도 사모님의 쾌유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요즘 시 쓰는 것 외에 주로 하시는 일은요?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요?
박재화 : 한 주에 하루이틀 학교(두원공대)에 가서 학생들과 최대한 어울리고 있습니다. 아내가 주 사나흘만이라도 한 1km는 걸을 수 있도록 적절히 도우려 애쓰기도 하고요. 또, 잘못 알려졌거나 덜 알려진 우리 역사에 대한 공부도 조금 하고 있습니다.
임애월 : 네, 끊임없는 공부네요. (웃음)
바쁘실 텐데 긴 시간 내주시고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언제 조금 한가하실 때 선생님의 여행 이야기를 더 듣고 싶네요.
박재화 : 아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부족한 사람을 찾아주셔서 영광이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조용한 저녁에 강물을 바라보면서 또는 달빛 어린 성곽 곁 선술집에서라도 잔잔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빨리.(웃음)
박재화 선생님이 풀어내시는
시와 여행과 지구환경과
진솔한 일상의 이야기 등을 들어보는 시간…
지구인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지구인들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 시인의 자선시
안시성(安市城)* 외 4편
박 재 화
중원을 차지하고 티벳 돌궐 등을 제압하여 기세를 떨치던 당 태종 이세민, 그러나 643년 황제의 위신이 떨어져 태자도 마음대로 못 세우고 신하들 앞에서 자살소동도 벌이다가 권위 회복차 644년 2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니
유목민 기마병을 앞세운 그의 50여만 대군은 개전 초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점령하며 기고만장, 드디어 645년 6월 20일엔 안시성 가까이 이르렀으니
이때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수도를 지키면서 대대로(大對盧) 고정의(高正義)로 하여금 군사 15만을 이끌고 이세민과 맞서도록 하였으니
고정의는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에게 군사 4만을 주어 수비위주로 싸우면서 적을 피곤케 하고 보급망을 끊어라 당부했건만 젊은 고연수는 당의 유인책에 넘어가 정공법으로 싸우다 6월 23일 주필산전투에서 그만 패하고 항복했으니***
신중한 고정의가 10만여 군사를 독려하며 게릴라전법으로 당군을 공략하니, 이세민은 7월 15일엔 안시성 동쪽으로 8월 10일엔 안시성 남쪽으로 부대를 옮기는 등 쫓길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7월 13일에는 특별히 아끼는 부하들의 시체를 수습하지도 못한 채 도망치기 바빴으니
이처럼 두 달이나 허비한 뒤 안시성을 포위한 이세민이 토산(土山)을 쌓으면서까지 함락시키려다 실패하자 애꿎은 말단 장수 부복애(傅伏愛)를 참수하는 등 몸부림쳤으나 자신도 눈에 화살을 맞아 645년 9월 18일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니
도망가면서도 고정의의 추격이 두려워 심복이자 종친인 이도종(李道宗)에게 4만 대군을 맡겨 후방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핵심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전통이었던 고구려의 1차 고당전쟁 당시 전방 총사령관 고정의****의 대활약 덕이었으니
668년 9월 26일 통탄스럽게도 평양성이 무너진 뒤 안시성은 기어이, 오랫동안 고구려 부흥운동의 중심지였으니!
*安寸忽이라고도 함. 오늘날 중국 요녕성 海城市 英城子屯 英城子村으로 비정됨
**광개토태왕 때부터 스스로 국호를 高麗라 함
***그는 당으로부터 鴻臚卿에 봉해지고 나중 고구려 공격의 앞잡이가 되었으나 645년 자신의 행동과 처지를 비관하다 죽음
****당시 안시성주가 楊萬春이라고 잘못 알려진 것은 16세기 明의 소설 <唐書志傳通俗演義>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어디까지나 승리의 주역은 고정의라 하겠음
목도리
누군가에게 안겨본 사람만이
누군가를 가만히 안을 수 있지요
어느새 안길 데도 없고 안아볼 이 없어
목이 멥니다
시옷에 기대다
얼굴도 모르는 생모가 스며들어 살던 곳, 상주(尙州)
참꽃과 아그배 따먹기, 토끼몰이……, 천방지축 헤집던 날들의 뒷배, 식장산*
삼선개헌 반대로 퇴학 당할 걸 막아주신 이, 성선생님
무작정 상경한 젊은 날을 가만히 품어준 판잣집, 삼양동
기다림에 바자워 정녕 떨리던 것, 사랑
. . . . . . . .
굽이굽이
시옷에 기대어 일흔 해가 흘렀다
*大田과 沃川의 경계를 이루는 산(食藏山, 높이 598미터).
한때 미군부대가 있어 정상 접근이 금지되었음.
사람이 위안이다
살다보면
사람에 무너지는 날 있다
사람에 다치는 날 있다
그런 날엔
혼자서 산을 오른다
해거름까지 오른다
오르다 보면
작은 멧새 무리 언덕을 넘나든다
그 바람에 들찔레 흔들리고
개미 떼의 나들이도 보인다
그림자 없이 내려오는 숲속
순한 짐승들
어깨 비비는 소리 가득하여
사람에 무너지는 날에도
사람은 그립고
사람에 다치는 날에도
사람은 위안이다
복서
비틀대며 여기까지 왔지만 많은 주먹을 맞았지만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나 여기 서 있다! 심판도 관중도 내 편이 아니지만(야유가 차라리 내겐 힘이다) 수없는 터널을 지나 예까지 왔는데 누가 수건을 던지라 하느냐 마지막 라운드에 타월이라니? 비록 체력은 바닥났지만 정신은 말짱하다 말해보라 내 주먹이 허공만 가른 건 아니잖느냐 가끔은 카운터 펀치도 날렸지 않으냐 그러니 내게도 박수를 보내다오 박수까진 몰라도 끝까지 지켜는 보아다오 여기서 흰 수건 던지면 누가 내 대신 링에 오르겠느냐 네가 아무리 주먹을 휘두르고 일방적 응원을 받아도 나를 이길 수는 없다(나도 나를 이기지 못했는데 네가 나를 이긴다고?) 좋아하지 마라 너의 손이 올라가기 전 나는 링을 내려갈 것이다 축하는 해주겠다 나를 이만큼 버티게 해준 링사이드의 특별관중과 모처럼의 찬스에서 나를 제지한 레퍼리에게도 목례는 하겠다 그러나 잊지 마라 네가 승자라면 나도 승자다!
*박재화(朴在和) 시인 약력
1951년 충북에서 출생.
대전고(大田高)와 성균관대(成均館大)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4년 ≪현대문학≫에 「도시의 말」 연작으로 2회 추천 완료, 등단.
시집으로 『도시의 말』 『우리 깊은 세상』 『전갈의 노래』 『먼지가 아름답다』 『비밀번호를 잊다』 등.
기독교문학상, 성균문학상, 다산금융상(茶山金融人賞) 등 수상.
현재 두원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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