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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백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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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철학 스크랩 사단칠정/ 격물치지/ 주리론& 주기론
양백산인 추천 0 조회 228 12.08.28 17: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단칠정(四端七情)

 

맹자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단(四端)

1.측은지심(惻隱之心)=>仁

2.수오지심(羞惡之心)=>義

3.사양지심(辭讓之心)=>禮

4.시비지심(是非之心)=>智을 말하는데, 각각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된다.

 

칠정(七情)은 〈예기 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1.희(喜)

2.노(怒)

3.애(哀)

4.구(懼)

5.애(愛)

6.오(惡)

7.욕(欲)사람이 가진 7가지 감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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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물치지 [格物致知]

대학〉의 8조목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서 가장 철학적인 조목.

 

*格 : 다가가다,연구하다(몰입)

 

격물치지에 관한 논의는 주희가 〈예기〉 중의 일편인 〈대학〉 ,

이른바 〈고본대학 古本大學〉을 개정하여 〈대학장구〉를 지으면서 활발해졌다.

 

주희는 〈고본대학〉의 순서를 세 군데 이동하고 1자를 고치며 4자를 삭제하고 134자를 새로이 지어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구성된 〈대학장구〉를 만들었던 바, 그 논의의 핵심은 특히 전 5장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이었다.

 

주희는 〈고본대학〉에는 격물치지 조목에 관한 해석문이 빠져 있는 것으로 가정하여 성즉리(性卽理)의 체계에 따라 그 해석문을 보충하였다. 격물치지 해석문의 보충, 즉 격물치지보전은 〈대학〉 원문 중 "그 뜻을 성실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아는 것을 극진히 해야 할 것이니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에 있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라는 구절을 주희가 간결하게 정리한 이론이다.

 

〈대학장구〉에 따르면 그 이론의 주된 내용은 즉물궁리(卽物窮理)로 다음과 같다.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이란 나의 아는 것을 이루고자 하면 사물에 나아가서 그 이치를 궁구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 신령한 것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에 사물의 이치가 없는 데가 없지만 오직 이치에 궁진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므로 다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대학을 처음 가르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배우는 자로 하여금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서 이미 아는 이치를 바탕으로 하여 더욱 궁구해서 극진한 데 이르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고, 힘을 쓰는 것이 오래되면 하루 아침에 확연히 관통하게 되어 모든 사물의 겉과 속, 정한 것과 거친 것이 이르지 아니함이 없고 내 마음 전체의 작용이 밝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사물의 이치가 구명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지혜가 지극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동양사고론의 근간인 3인칭 관점에서의 사고(만물의 상호작용 관계) "인식주관으로서의 마음의 이(理)인식객관으로서의 사물의 이상응"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가능한데, 오늘 한 사물의 이를 탐구하고, 또 내일 한 사물의 이를 탐구하여 지식을 확충하면 자연히 우리는 활연관통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격물치지는 결국 마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현실적 인간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 불완전한 상태를 완전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나의 밖에 있는 이를 궁구하여야 한다. 이것은 내 안에 있는 이를 아는 데 도움이 되며 기질지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일치시키는 데 유익하다.

이로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내면적 자기완성을 이루려고 했다

 

 

격물치지의 해석에 관해 주희 이전에도 많은 주석이 있었으나 주희의 즉물궁리설적 격물치지론이 오랫동안 통용되어왔으며 많은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그런데 격물치지론에 있어서 주희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명(明)의 왕수인(王守仁)이다. 왕수인은 〈예기〉중의 〈대학〉 즉 〈고본대학〉을 그대로 인정하며 주희의 격물치지보망장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격물치지의 해석문은 주희가 말하는 바와 같이 빠진 것이 아니라 〈대학〉 원문 중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왕수인은 격물치지를 심즉리 체계(서양사고인 1인칭 관점 사고) 안에서 설명하고 있다. 격물치지는 다름아닌 우리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모든 이는 내 마음에 있으며 사물의 바름과 부정도 내 마음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부정을 바로 잡아 회복하는 것이 그의 격물이요 마음을 발휘하여 모든 사물이 이를 얻는 것이 치지인 것이다.

 

왕수인이 주희의 설을 반대한 것은 격물치지설이 직접적으로 나의 마음에서 이를 구하지 않고 마음 바깥에서 이를 구하여, 외적 지식의 탐구에 급급해 결국 주체를 상실할 우려가 있는 주자학의 폐단을 시정하려고 한 것이 목적이었다.

吳興民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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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경궁리 [居敬窮理]

 

주희는 거경과 궁리를 내외 측면에서 말하면
거경 居敬은 내적 수양이요 궁리 窮理는 외적 탐구방법이다.
 
경은 주일무적(主一無適) 즉 정신을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물욕이 정신을 착란치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역〉에서 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로써 밖을 바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대학〉격물치지에 관한 주희의 이론.
 
주희의 격물치지론은 전체적으로 볼 때 거경궁리로 요약된다.
주희는 〈대학장구〉의 격물치지 보망장에서
 
격물치지를 즉물궁리(卽物窮理)로 해석하여
객관적 사물의 이()를 탐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현실적 인간은 사물의 ()를 탐구하여
이를 자신에게 보태야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물의 ()를 탐구함에 앞서
경건함이 요청된다.
 
수기치인을 그 목표로 하는 유학에서는
객관적 사물의 ()를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지식축적은
마음을 밝히고 인격을 연마하는 데로 전환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경이 요구된다.
거경과 궁리는 다같이 중요하다.
 
거경과 궁리는 주희의 격물치지론에서는 상보적(相補的) 관계에 있다.
"배우는 사람이 할 공부는 거경과 궁리를 서로 발용하는 데 있다.
 
궁리할 수 있으면 거경공부는 날로 진보하고
거경할 수 있으면 궁리공부는 날로 세밀해진다.
 
비유하면 사람의 다리와 같아서 왼쪽 발이 나가면 오른쪽 발이 멈추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실재는 한 가지 일이다"(〈주자어류〉).
 
그리고 또한 "경은 본심을 보유하는 공부인 것이다.
마음이 존재한 후에 치지할 수 있고
 
치지는 격물궁리로써 성품을 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주자문집〉)라고 했다.
 
 
 
그런데 주희의 거경궁리설은
그의 성즉리체계(性卽理體系)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즉리설에 따르면 만물 속에는 태극으로서의 ()가 내재하는데
인간 안에서의 ()(性)이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신체를 가진 인간은
 ()와 함께 기(氣)의 요소를 갖고 있다.
 
즉 현실적 인간의 性은 理로서의 性인 본연지성(本然之性)
氣의 요소를 구유한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이해된다.
 
본연지성은 그대로 완전하여 천리(天理)이지만
기질지성은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본연지성은 선하지만
기질지성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기질지성을 회복하여 본연지성과 일치시키는 방법으로써
주희는 거경과 궁리를 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객관적 理를 탐구하여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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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당파

 

1575년(선조   8년)  이조전랑 자리 때문에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고,

1591년(선조 24년)  임란 후  세자책봉 문제로 물러난 서인 영수 정철의 처벌수위 문제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1599년(선조 32년) 홍여순(洪汝諄)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었을 때 남이공(南以恭)이 반대한 일을

                         계기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1683년(숙종  9년)  서인은 숙종의 외척(광산김씨 김익훈)에 대한 처분을 두고 ‘노론’과 ‘소론’으로

1762년(영조 38년)  노론은 사도세자 문제 때문에 다시 ‘시파’와 ‘벽파’로 갈렸다

 

1804년(순조5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벽파 경주김씨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김씨-김귀주(金龜柱)의 형제)가 죽자,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을 축출하고 김조순의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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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열 가문(閥閱家門)
벌열이란,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여 오랜 동안 세력을 누리며 지체를 유지해 온 가문을 말한다
. 조선 후기의 벌열은 붕당 정치가 변질되는 속에서 정권을 오로지하며, 특히 왕실과의 통혼 관계 속에서 세도를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벌열 가문은 학벌, 인맥, 지연 등에 의해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였는데, 정쟁이 치열해지고, 마침내 노론 중심으로 일당 전제화가 추구되면서 그 모습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벌열 가문으로는 숙종 때의 청풍 김씨, 광산 김씨, 여흥 민씨, 영조 때의 남양 홍씨, 경주 김씨, 세도 정치기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그리고 고종 때의 여흥 민씨 등의 가문이 대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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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의 해석방법 차이 : 주리론(主理論) 이황 / 주기론 [主氣 論] 이율곡

 

조선시대 이이(李珥)의 성리학설 또는 그의 성리학설을 계승·지지하는 학자들의 사상을 가리키는 개념.

16세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유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본격화될 때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심성론(心性論)이다.

 

특히 오상(五常)사단칠정(四端七情)으로 포괄되는 인간의 성정(性情)을 이기론적으로 해명하려는 노력이 활발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학자가 이황(李滉)이다.

 

그는 사단칠정이라는 인간의 감정 현상을 설명함에 있

사단과 칠정에 '이(理)'와 '기(氣)'가 모두 관여하지만 그 발하는 바의 '소종래'(所從來)와 '소주이언'(所主而言)의 차이에 따라 사단은 이발(理發)로, 칠정은 기발(氣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황의 이러한 사단칠정론에 대해서는 이미 당시에 기대승(奇大升)이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후 이이는 기대승의 견해를 계승하여 이황과는 다른 이론체계를 확립했다(→ 색인 : 사단칠정논쟁).

 

그 특징은 사단칠정을 설명함에 있어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기발(氣發)만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이에 따르면 오직 기(氣)만이 능동성을 가지고 발할 수 있으며,

이때 이(理)기(氣)가 발하는 바의 소이연(所以然)·소당연(所當然)의 원리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황이 사단을 '이발기수'(理發氣隨)로, 칠정을 '기발이승'(氣發理乘)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이승(氣發理乘)'으로 설명하며

사단은 칠정 가운데서 선한 측면만을 가리키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러한 사단칠정론의 차이는 이기론·심성론·수양론을 포함하는 성리학 전체의 이론적 체계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며, 그후 이황과 이이의 제자·문인들에 의해 두 사람의 성리학이 계승·발전하면서 우리나라 성리학을 대표하는 두 계열의 학파를 수립하게 된다.

 

그 가운데 이황의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을 주리파(主理派), 그들의 이론을 주리론이라 하며,

이이의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을 주기파(主氣派), 그들의 이론을 주기론이라 한다.

 

이기론에 있어 주리론과 주기론은 모두 이(理)와 기(氣)를 세계의 근원적 존재로 인정하며, 이와 기의 상호관계에 의해 만물이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점은 같다.

그리고 이기에 관한 가치론적 설명에서 기보다 이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기의 분개(分開)와 혼륜(混淪)에 대한 강조의 차이에서 보듯이,

주리론이 '이기결시이물'(理氣決是二物)이라는 분개의 측면을 강조하는 데 반해,

주기론은 '이기원불상리'(理氣元不相離)라는 혼륜의 측면을 강조한다.

 

따라서 주리론에서 이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성격이 명백하게 드러나며, 또 이와 기의 차별성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주기론에서 이(理) 기(氣)와 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객관적 실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기(氣)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기의 법칙성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사단칠정론에서 보듯이,

이(理)에 대해 주리론에서는 형태는 없으나 운동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는 데 반해,

주기론에서는 운동능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기론에서는 이발을 부정하고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만을 인정하는데,

그것은 이(理)는 정의(情意)·운용(運用)·조작(造作)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발하는 것은 기(氣)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기론은 기(氣)의 운동을 자기 원인에 의한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사상과 동일한 내용을 갖지만,

기(氣)운동을 내면에서 규제하는 원리로서의 이(理), 즉 '소이연'으로서의 이(理)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기일원론과도 차이가 있다.

 

심성론에서도 주리론과 주기론이 모두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이(理)와 기(氣)분개를 강조하는 주리론이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별개의 존재로 파악하는 데 반해,

이(理)와 기(氣)혼륜을 강조하는 주기론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다만 기질지성 가운데 이(理)의 측면을 가리켜 본연지성이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理)운동능력을 인정하는 주리론에서는 '성발위정'(性發爲情)의 논리에 따라

사단은 본연지성이 발한 정으로, 칠정은 기질지성이 발한 정으로 설명하며,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갖춘 심(心)은 이(理)와 기(氣)의 합(合)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理)운동능력을 부정하는 주기론에서는

情을 '심지동'(心之動)으로 파악하여 '심발'(心發)·'성불발'(性不發)을 주장하게 되며,

심(心)과 성(性)의 관계는 '동하는 것은 심이고, 능히 동하게 하는 소이는 성'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心發) 심을 발하는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이(理) 이론에서는 심(心)의 허령(虛靈)한 지각작용의 본질을 기(氣)로 단정하고

성(性)은 심(心)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소이연·소당연의 원리로 이해하여 '심시기'(心是氣) 혹은 '심즉기'(心卽氣)를 주장하게 된다.

이것은 주리론에서 심을 이기합으로 파악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성리학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통일적인 세계관을 확립함으로써 유교적인 도덕적 실천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학문이다.

 

따라서 주리론과 주기론의 이기·심성론의 차이는 결국 수양론의 차이로 귀결된다.

주리론의 경우 심 내부에 존재하는 천부적인 선한 본성(본연지성), 곧 이의 존재와 그것이 발한 사단을 강조하기 때문에 수양론에서도 본연지성을 제대로 지키고 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선한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본연지성을 제대로 지키고 발현하기 위한 수양 방법을 가리켜 '거경'(居敬)이라고 했으며, 주리론의 수양론은 이 '거경'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그러나 주기론에서는 심 내부에서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은 서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모든 의식과 감정은 외계 사물의 감응에 의하여 심 내부의 기가 동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는 반드시 기를 타고서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도덕적 실천을 위해 가장 근본적인 것은 사물에 감응하는 심 내부의 기질을 선한 것으로 변화시키면 자연히 인간의 선한 본성, 즉 본연지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내용을 가진 주기론은 이이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그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 송익필(宋翼弼) 역시 주기론의 입장에서 성리학을 이해했다.

 

그후 주기론은 양인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과 정엽(鄭曄)을 거쳐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에게 계승되었다(→ 색인 : 기호학파).

 

송시열은 주리론이 근거하고 있는 〈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사단시이지발, 칠정시기지발'(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이라는 말이 주희의 정론(定論)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주자어류〉와 〈주자대전 朱子大全〉의 말을 비교·대조하여 주희의 정론을 확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 작업은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이어지고, 다시 권상하의 제자인 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져 〈주자언론동이고 朱子言論同異攷〉로 완성되었다.

<주자언론동이고〉는 주기론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 책은 성리학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주희의 언론에 차이가 있는 것을 서로 모순된 것, 서로 모순되는 것 같으나 관점이 다른 것, 실제 내용은 동일한 것 등으로 일일이 나누어 논의했다. 그 가운데 理의 동정에 대해서는 주희가 말한 "理에 동정이 있다. 그러므로 氣에 동정이 있는 것이다. 理에 동정이 없다면 氣가 어찌 스스로 동정하겠는가"라고 한 '이유동정'(理有動靜)을 '유동정지리'(有動靜之理)라고 풀이함으로써 氣는 유위(有爲)로서 발동(發動)하는 것이고, 理는 무위(無爲)로서 무발동(無發動)이라 단정하여 理發을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사단을 '이지발'이라 한 것은 주희의 정론이 아니므로 〈주자어류〉 기록자의 오기라 했다. 또 사단이나 칠정이 다 성지용(性之用)으로서 정이므로 사단과 칠정을 이기에 각각 분속시키는 것은 주희에게 있어 평일의 아언(雅言)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주기론은 한원진 단계에 오면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 불려지는 성리학의 이론적 논쟁을 통해 그 내부에서 분화가 일어났다. 권상하의 제자인 한원진과 이간(李柬)을 각각 대표로 하는 호론과 낙론은 모두 주기론의 기발이승일도설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성(人性)·물성(人物性)의 동이(同異)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가운데 '이통'의 측면을 '기국'의 측면보다 중시할 경우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낙론이 되고, '기국'을 '이통'보다 중시할 경우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호론이 된다. 이 호락 양론 가운데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별개의 성이 아니라는 주기론의 전통적인 사상을 보다 충실히 계승한 것은 호론이라고 할 수 있다.

 

낙론의 경우에는 성을 이해함에 있어 기질지성과는 구별되는 본연지성을 설정하고, 그 본연지성에 근거하여 인성과 물성이 같음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후 주기론은 임성주(任聖周)의 '성즉기'(性卽氣)의 명제로까지 발전하게 되는데, 임성주의 사상은 기일원론, 곧 유기론(唯氣論)이라는 점에서 주기론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기호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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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성리학자

 

당성(唐城)서씨 서경덕 : 1489(성종 20)~ 1546(명종 1).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했다.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

가계 및 생애

할아버지는 순경(順卿), 아버지는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호번(好蕃)이다.

송도(松都:지금의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을 부쳐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현장 중심의 지식탐구)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30세인 1519년 한양조씨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42세에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51세에 1540년 의성김씨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55세에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이해에 병이 깊어지자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선배들의 주석이 있는 것을 다시 거듭 말할 필요가 없고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글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제 병이 이처럼 중해졌으니 나의 말을 남기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 太虛說〉·〈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대상복제(大喪服制)에 대한 상소를 하여,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3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

기일원(氣一元)의 철학

서경덕의 철학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하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데 특징이 있다. 격물을 중시했던 그의 학문방법은 독창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시원을 허(虛) 또는 태허(太虛)라고 보았으며, 이를 선천설(先天說)로 설명했다.

 

 "태허는 말끔하여 형체가 없다. 이를 선천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끝이 없고 과거에 시초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한끝을 모른다. 말끔하게 허하고 고요한 것이 기의 시원이다. 끝없이 넓은 우주에 꽉 들어차서 빈틈이 없고 털끝 하나도 드나들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당기려면 허하고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실은 차 있으니 없다고 할 수 없다.

 

한계가 없는 것을 태허라 하고 시초가 없는 것을 기라고 하니 허가 바로 기이다.

 

허가 본래 무궁하고 기 역시 무궁하니 기의 근원은 처음부터 하나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한 태허는 곧 물질적인 기이며 기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물의 근원을 기로 설명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정신, 지각까지도 포함한 천지만물은 기의 취산(聚散)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담연청허하면서 보편타당한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둘을 함유하여 낳고 둘은 그 자체의 능력으로 변화의 작용을 한다. 둘은 곧 음양·동정(動靜)·감리(坎離) 등을 가리킨다. 둘을 낳는 하나는 곧 그 음양이나 감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담연주일(淡然周一)한 기이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 음양이 될 때 양이 변화를 극한 것이 하늘이 되고 음이 모이고 응결한 것의 극이 땅이 된다. 또 양의 정수가 맺혀 해가 되고 음의 정수가 맺혀 달이 된다. 나머지 기운들이 하늘에서는 별이 되고 땅에서는 물과 불이 된다. 그는 이런 과정을 선천에 대해서 후천(後天)이라고 했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기의 운동이다.

 

그런데 그는 이 기의 운동이 다른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 능히 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를 '기자이'(機自爾)라고 표현했다.

 

한편 그는 기의 취산에 따라 무형의 기와 유형의 기로 구별하여 보았다. 시원적인 기로서의 태허는 감각할 수 없는 무형의 기이며 천지만물을 형성하는 기는 유형의 기라고 했다. 즉 기가 쌓이면 유형의 기가 되고 흩어지면 무형의 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전개했다.

 

물질적인 기는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따라서 창조도 소멸도 없다는 전제로부터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는 흩어질 뿐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이를 기에 선행하는 1차적 존재라고 주장한 주희의 견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사생귀신은 오직 기의 취산에 불과하며, 그 취산은 결코 유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환의 과정임을 설명했다.

 

한편 인성론에서는 전통적인 성선설을 주장하고,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주정(主靜)을 제시했다.

 

또한 현실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대상복제에 대해 올린 상소에서 왕릉이나 기타 묘지가 무분별하게 지정되고 확장되는 데 따른 폐단과 왕릉의 축조를 위한 채석의 노역동원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학설은 당시 주조를 이루었던 정주학의 이론과는 다른 독창적인 부분이 많았으므로, 이황·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진보(眞寶)이씨 이황은 정주의 학설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으므로, 서경덕의 기론에 대해 그가 이를 잘못 풀이했다고 비판했다.

 

이황은 "그의 견해는 별달리 정밀하지 못하다. 그의 학설을 보면 1편도 병통이 없는 것이 없다"고까지 비판했다.

 

덕수이씨 이이도 "퇴계는 모방을 주로 하여 매끄럽게 꿰뚫는 맛이 없는 반면, 화담은 총명이 지나쳐서 스스로 얻은 견해가 많지만, 그 자득의 견은 더 향상이 되지 못하고 그 위에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일절(一節)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것은 방만하기 쉬워 잃는 바가 있으므로 차라리 이황의 모방을 본받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妙)를 분명하게 터득한 것으로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칭송했다. 더욱이 이이는 서경덕의 기자이설을 취하여 이를 형식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 학파에 이어져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대표하게 되었다.

 

서경덕의 학설은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최초로 기일원론의 체계적인 전개를 시도한 것이었으며, 이이 등 주기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문하에서 박주(朴洲)·박순(朴淳)·허엽(許曄)·남언경(南彦經)·민순(閔純)·이지함(李之?)·이구(李球)·박민헌(朴民獻)·홍인우(洪仁祐)·장가순(張可順)·이중호(李仲虎)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었다.

 

1567년(명종 22) 호조좌랑에, 1575년(선조 8)에는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창녕조씨 조식1501(연산군 7)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일대) 토동~ 1572(선조 5).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 어머니는 인주이씨이다.

김우옹·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사위이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창녕성씨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3년에는 경상감사 여주이씨 이언적이 만나기를 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1551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 1559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551년 오건(吳健)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북인 서산정씨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66세인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 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571년에는 선조가 식물(食物)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72세로 죽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산서원(德山書院)을 세운 뒤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晦峴書院)을 세웠고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되었다. 또한 조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이 생존했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정도로 사화가 자주 일어난 때로 훈척정치(勳戚政治)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다. 그는 성년기에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보았다.

 

기묘사화 때는 숙부 언경(彦卿)이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성우(成遇)·송인수(宋麟壽) 등 많은 친구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그는 1, 2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곧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인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 색인 : 남명학).

 

그가 늘 지니고 있던 검명(劍銘)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고 새겨놓았듯이 그의 철학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나간다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한 것이었다.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한 본심(本心)의 함양에 주력하게 되는 반면 '의'는 외적 행위의 단재(斷裁)를 통한 사욕(私欲)의 제거에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일체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했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그는 초학자에게 〈심경 心經〉·〈태극도설 太極圖說〉·〈서명 西銘〉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 방법을 비판하고,

〈소학〉·〈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이황과 기대승 등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했다(→ 색인 : 사단칠정논쟁).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기록 곳곳에 당시 폐정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준엄한 비판과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난세(亂世)에는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을 투철히 하여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식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의식을 보여주었다.

 

조식과 그의 문인들(북인)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남인)과 더불어 영남유학의 두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었으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흥 등 조식의 문인들이 광해군 때 대북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참여한 탓에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조식에 대한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그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남명집〉과 독서를 하다가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 學記類編〉이 있다.

 

행주기씨 기대승 : 1527(중종 22)~ 1572(선조 5).

기대승의 글씨

 

조선 유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이며,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했다.

관직생활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증(贈) 이조판서 문민공(文愍公) 준(遵)의 조카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22세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기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소윤 파평윤씨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31세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 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40세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이듬해 대사성에 올랐다. 1570년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기일원론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기준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이황과 정지운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지나치게 〈주자어류 朱子語類〉와 운봉호씨설(雲峰胡氏說)에만 근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색인 : 사단칠정논쟁). "자사(子思)와 맹자가 말하는 바가 같지 아니하므로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여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하여 선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와 기를 양물(兩物)로 삼는 것이니, 이는 칠정이 성(性)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사단이 기를 타지[乘] 않는다"는 것이다(→ 색인 : 이기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할 때에는 혹 이와 같은 설이 옳을지 모르나 사단·칠정은 이처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견해에 반대했다(→ 색인 : 인심도심설).

 

이어서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입각한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성(性)과 정(情)은 미발(未發)·이발(已發)의 다름이 있을 뿐 불가분의 표리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 성(性)은 선(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정(情)도 그 성(性)이 발하여 된 것이므로 불선(不善)이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사단칠정을 이기(理氣)에 분속(分屬)시킨다면 이(理)와 기(氣)를 독립된 별물(別物)로 보게 되어 사단 속에 기(氣)가 없고 칠정(七情) 속에는 이가 없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사단과 칠정을 대설(對說)이 아닌 인설(因說)로 파악하는 것으로 결론짓게 된다.

 

그는 사단이 칠정 중의 사단인 것처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서의 순리(純理)도 겸기(兼氣)인 기질지성(氣質之性) 중의 것임을 의미한다고 하여 심성론적(心性論的)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요, 기는 이의 재료인 것이다. 이 둘은 본래 나누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물에 존재할 때는 본래 혼륜(混淪)되어 분개(分開)할 수 없다.

 

이약기강(理弱氣强)하고, 이는 조짐이 없으나 기는 흔적이 있으므로 그것이 유행(流行)·발견될 때 과불급의 차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칠정이 발할 때 혹은 선하고 혹은 악하여 성(性)의 본체도 혹 완전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기(理氣)는 논리적으로 구별되지만 실제에서는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심성론을 중심으로 사단과 칠정의 차이를 중절(中節)과 부중절(不中節)로써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은 태극도설에도 반영되었다. 태극(太極)은 이(理)로서 주재자요, 음양(陰陽)은 기(氣)로서 재료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정치사상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民利)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民本政治)·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종과 선조에 대한 경연강의(經筵講義)에 담겨 있다.

 

〈논사록 論思錄〉에 제시된 거현론(擧賢論)·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은 왕도정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었다.

 

먼저 현자(賢者)의 등용을 중시하고, "현자를 등용하고자 한다면 먼저 시비를 분명히 하여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연후에야 현자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여 윤원형 등 당시 집권층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는 거현(擧賢)이야말로 양민(養民)하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현자들이 화를 입으면 소인배들이 득세하고, 그들의 사치와 사욕으로 말미암아 민재(民財)가 약탈되므로 민심이 흩어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임금은 재용(財用)을 선처하여 민생들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이재양민이 정치의 요체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국가정치의 일차적인 근본인 군덕(君德)의 증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덕치(德治)의 두 기둥인 존현(尊賢)과 이재(理財)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禮)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예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오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었다. 특히 예는 "천명(天命)의 성(性)에서 나왔으므로 범인(凡人)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성인(聖人)만이 이를 안다. 그리하여 예법을 만들어 일세(一世)를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임금이 지성으로 현자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현자 또한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 오직 임금의 현자를 쓰려는 성의가 있느냐에 있을 따름이다"라 하여 신하의 상향적인 예뿐만 아니라 임금의 신하에 대한 예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그는 "언로(言路)는 국가의 대사(大事)이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는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는 위태롭다"라고 하여 임금이 언로를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시비(是非)를 명확히 가려 소인배의 득세를 방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景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논사록〉·〈주자문록 朱子文錄〉·〈고봉집〉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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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의 태두 광산김씨 김장생  1548(명종 3)~ 1631(인조 9). : 계구신독(戒懼愼獨)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론적 배경은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이다.

 

그의 예학론은 양란(兩亂) 이후 혼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正統]에 중점이 두어졌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관직생활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이며, 집(集)의 아버지이다.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장성하여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에게 사사했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창릉참봉에 천거되었다.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명나라 사행(使行)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이어 순릉참봉·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동몽교관·통례원인의를 거쳐 1591년 정산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다. 그뒤 남양부사·안성군수를 거쳐 1600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1602년에 청백리에 뽑히고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으나, 북인(北人)이 득세하게 되자 1605년 벼슬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잠시 회양·철원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장령에 오르고, 이어 성균사업(成均司業)·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면서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 가운데 성균사업은 그를 위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천거로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어 부호군을 거쳐 1625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다음해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워 이이·성혼을 제향했으며,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龍?衛副司直)으로 옮겼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는 한편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청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했다. 그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물러난 뒤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했다.

 

그뒤 1630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줄곧 머물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연산에서 83세의 나이로 죽어, 진잠(鎭岑)에 장사지냈다.

국가재조의 예학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당쟁으로 동서(東西)와 남북(南北)이 분당·대립하고, 한편으로는 이괄(李适)의 난과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국가체제가 위기에 빠져 토지제도·수취제도 등 여러 방면에서 누적된 폐단을 개혁해서 민생을 회복해야 할 때였다.

 

국가재조는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었으며, 특히 사상계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적 정통주의가 훨씬 강력하게 대두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국가의 위기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체계로서 예(禮)에 주목했다.

 

예 실천의 방법으로서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계구신독(戒懼愼獨)을 중요시했다. 즉 일상생활에서 항상 계구신독을 염두에 두고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그 마음이 발(發)함에 모두 예에 맞게 행하여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예 실천의 주체인 인간 내면의 심(心)을 개발하고, 천리(天理)의 법칙을 깨닫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의 강조는 〈가례 家禮〉를 통한 유교적인 가족질서 확립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는 〈근사록〉을 오랫 동안 연구하고 고금선유(古今先儒)의 여러 가지 설을 참조하여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토속과 인정에 맞추어 〈가례〉를 고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예와 효의 관계를 "예가 아닌 것은 효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라고 설명하면서 효를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여겼다. 또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시하여 "관혼상제는 가정에서의 일용(日用)의 체(體)이며 길흉(吉凶)의 수(需)에 통한다. 하나라도 폐(廢)하여 강습하지 않은 바 없다"고 하여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시행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학의 결론은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정통(正統)에 있었다.

 

가정·사회·국가에서 그 나름의 기강과 질서가 서야 하는 것이며 그 근간이 되는 것이 통(統)이며 통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였다. 이러한 예학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 사상은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서 기능했다.

예학의 이론적 배경

그가 예론에서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던 것은 율곡의 이기설(理氣說)이었다. 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반대하면서 율곡의 이기관(理氣觀)을 포괄적으로 계승하여, 이(理)와 기(氣)는 본래 스스로 섞여 있다고 하는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을 주장했다.

 

그는 이기의 관계를 불상잡(不相雜)·불상리(不相離)로 파악하고, 기(氣)의 유위유형(有爲有形)한 부제성(不齊性)이(理)의 무위무형(無爲無形)한 제일성(齊一性)의 관계에서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設)과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이해했다.

 

또한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견지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일원적으로 해석하여, 사단과 칠정이 이정(二情)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이 이심(二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심(心)이 발(發)한 때와 발하기 전의 존양성찰(存養省察)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칠정이 사단으로, 인심이 도심으로 보존되고 발양되기 위해서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절실히 요구하게 된다. 여기서 계구신독(戒懼愼獨)에 대한 강조가 나오는 것이다.

 

 

한편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서도 퇴계의 이자도설(理自到說)을 부정하고 율곡의 설을 충실히 계승했다. 격물(格物)이란 물리(物理)가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이며 물리는 내 마음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물리가 내 마음에 도래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사물의 이(理)는 인간의 지(知)와 관계없이 언제나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지를 통하여 인식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문제는 다만 나의 지(知) 여하에 따라 인식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물아일리(物我一理), 주객합일(主客合一)인 내 마음의 인식 능력으로 물리를 체득하는 이론을 추구했다.

 

따라서 격물이라는 것도 사물의 이(理)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활연관통(豁然貫通)의 체득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어서 그는 격물과 치지는 비록 구별하여 표현되지만, 물리가 일리(一理)이며 격물(格物)과 치지(致知)가 모두 활연관통(豁然貫通)의 양면이기 때문에 그 실질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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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물치지 [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규명해 자기의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뜻

  중국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으로 된 내용 중,

 

처음 두 조목을 가리키는데, 이 말은 본래의 뜻이 밝혀지지 않아 후세에 그 해석을 놓고 여러 학파(學派)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주자학파(朱子學派: 程伊川 ·朱熹)와 양명학파(陽明學派: 陸象山 ·王陽明)이다.

 

주자는 격(格)을 이른다[至]는 뜻으로 해석하여 모든 사물의 이치(理致)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앎에 이른다[致知]고 하는, 이른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확립하였고,

 

왕양명은 사람의 참다운 양지(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物欲)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여, 격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풀이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확립하였다.

 

 즉, 주자의 격물치지가 지식 위주인 것에 반해 왕양명은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고 있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이라 하고,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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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은 이이에게서 주자학을 전수받아 그 학통을 계승했다. 특히 그의 성사상(誠思想)을 이어받아 학문의 요체로 삼았으며, 이기심학관(理氣心學觀)을 계승하여 일원적(一元的) 이기심학관을 견지했다. 격물치지설에서도 율곡의 설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율곡은 박문(博文)의 공이 많지만 약례(約禮)에서는 오히려 지극하지 못하다"고 했듯이 예학에 더욱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예학의 계승

송익필에게서 배운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당시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상에 의문이 있으면 그에게 자문할 정도로 예학에 정통했다.

 

또한 학문을 아들 에게 이어받게 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했.

 

그의 문인으로는 아들 집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이시직(李時稷)·최명길(崔鳴吉)·이덕수(李德洙)·최명룡(崔命龍) 등이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가 크게 성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루었다.

 

연산 돈암서원(豚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 도기서원(道基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상례비요 喪禮備要〉·〈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답 疑禮問答〉 등 예에 관한 것과,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 沙溪先生全書〉가 남아 있다.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사계 김장생 묘역

 

 

 

김장생의 묘역에는 김장생의 묘가 가장 윗자리에 있고, 그 아래는 광김의 중흥을 이룬 양천허씨묘, 선생묘의 바로 오른편 능선에는 김선생(金善生), 그 아래는 김철산(金鐵山)과 부인, 그 아래는 김겸광(金謙光), 그 아래는 김공휘(金公輝) 등의 묘소가 있다. 또한 김겸광과 김장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양천허씨 부인의 재실(齋室)인 영모재(永慕齋), 김국광(金國光)의 종가 및 김장생 사당(祠堂)과 재실인 염수재(念修齋)가 있다.

 

이곳 묘역의 사계선생 묘에서 주위를 살펴보면 동남쪽인 손방위(巽方位)에는 대둔산(大屯山), 북쪽인 임방위(壬方位)에는 계룡산(鷄龍山), 북서쪽인 건방위(乾方位)에는 칠갑산(七甲山)이 장엄하게 시립하여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선생의 묘소는 충남기념물 제47호로 충남 논산군 연산면(連山面) 고정리(高井里) 산7-4에 위치하고 있다.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4번 국도를 타고 논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1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1번 국도를 갈아타고 계속 논산 쪽으로 가면 도로가에 "사계 선생 유적지 입구"라는 푯말이 나온다.

 

그 아래쪽으로 난 농로 길을 따라 곧장 들어가면 고정리가 나오고, 마을 끝 고정산 자락의 광산김씨 선영에 사계 선생묘가 자리하고 있다.

 

김장생 선생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인 광산김씨(光山金氏)다. 광산김씨를 흔히 광김(光金)이라고도 하는데 달성서씨(達成徐氏), 연안이씨(延安李氏)와 함께 조선 3대 명문에 속한다.

 

이들 문중 중에서도 광김은 사계 김장생, 달성서씨는 약봉(藥峰) 서성(徐省), 연안 이씨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가문을 가장 명문으로 꼽는다.

이들 가문을 명문으로 꼽는 것은 정승판서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대로 석학(碩學),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특히 광김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이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예를 안았다.

더구나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 한 가문에서 2명이 배향되기는 송시열과 송준길을 배출한 은진송씨(恩津宋氏)광김뿐인데 부자가 나란히 배향되기는 김장생, 김집이 유일하다 

 

김장생 가문이 조선의 3대 명문을 이루기까지는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인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녀는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양천허씨 허응(許應)의 딸로 한림원의 벼슬을 하던 광김20世 김문(金問)과 혼인을 하였지만 그가 일찍 사망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딸의 신세를 가엾게 여긴 친정 부모(양천허씨 허응)는 몰래 다른 곳으로 개가(改嫁)를 시키려고 혼처를 알아보고 다녔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 길로 개성을 떠나 유복자인 아들 광김21世  철산(鐵山)을 데리고 김문의 아버지 광김19世 김약채(金若采)가 광김으로는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고 있는 연산(논산) 고정리의 시가(媤家)까지 걸어서 내려 왔다고 한다.

 

 

그 뒤 그녀는 시부모를 모시며 아들 철산을 사헌부 감찰로 훌륭히 키웠고, 광김21世 철산은 좌의정을 지낸 광김22世  국광(國光), 겸광(謙光) 등 아들 4형제를 낳았다.

<광김22世 김국광 좌의정김공묘역>

 

 

                         <재실 [齋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

 

 


 

철산의 아들 중 광김22世 김국광은 좌의정(세조 때) 시절 8개월간 혼자 의정부(議政府)를 맡았는데 이 점을 부끄럽게 여겨 그의 맏아들 이름을 극히 부끄럽다는 뜻으로 광김23世극뉴(克杻)라 지었다고 한다.

   전북 순창군 인계면  광김23世 김극뉴(金克?,1436-1496)의 묘 :  조선 8대명당)

 

바로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조선8대 명당이라 불리는 곳에 묻힌 주인공으로 이 명당의 발복으로 인해  많은 풍수가들은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조선조에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이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정승 5명, 대제학(大提學) 7명, 왕비 1명(숙종비 인경왕후)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신현관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광김23世극뉴는 종윤(宗胤)을, 광김24世 종윤은 호(鎬)를, 광김25世호는 계휘(繼輝)를, 광김26世계휘의 아들이 바로 광김27世 사계 김장생이다.

그러므로 광김이 명문을 이룬 것은 양천허씨의 정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사계로 인해 명문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다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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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까지 연상하게 만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가문과 일생

송시열은 은진(恩津) 송씨로 그의 가문은 역대로 충남 회덕이 세거지였다.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 곽씨이다. 그의 집안이 회덕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9대조인 송명의(宋明誼)가 회덕으로 장가들면서부터다.

 

그 후손들은 이후 회덕 백달촌에 송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그로 인해 이 지역을 송촌(宋村, 현재 대전시 동구 중리동)이라 불렀다. 백달촌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한 땅이었다. 

 

은진 송씨가 회송(懷宋)이라고 불릴 만큼 지역사회에 깊은 연고를 가지게 된 것은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8-1446)부터이다.

 

1432년(세종 14년)에 송유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백달촌에 쌍청당을 짓고 살았는데, 뜻을 받든 후손들이 쌍청당을 정성껏 지켜내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은진 송씨 집안은 송유 이후 크게 현달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벼슬길이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와 은진 송씨 가문은 송규연, 송규렴, 송상기, 송준길, 송구수, 송시열 등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송시열은 외가가 있는 옥천 적등강가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선산 곽씨 집안은 옥천에 세거지가 있었으며, 외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조헌과 함께 목숨을 바친 의병장 곽자방이다.

우암을 낳을 때 어머니 곽씨는 명월주를 삼키는 태몽을 꾸었고 부친은 공자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인 성뢰(聖賚)는 부친이 꾼 태몽에 따른 것이다.

 

송시열이 친가가 있는 회덕으로 간 것은 여덟 살 되는 1614년이다. 이 때 친족인 송이창 집에서 송이창의 아들이자 쌍청당의 7대손인 송준길(宋浚吉,1606~1672)과 함께 수학하였다.

 

11세가 되던 해인 1617년(광해군 9년)부터는 아버지 송갑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은 송시열의 성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친 송갑조는 광해군 시절, 사마시에 함께 합격한 이들이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에 인사하지 않겠다는 것에 반발하여 홀로 서궁에 찾아가 절을 할 정도로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이 일로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어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그 뒤로 두문불출하며 학문과 아들 교육에만 전념했다.

 

송시열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자율곡이었다. 그렇게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송갑조는 송시열이 열두 살 때 “주자는 훗날의 공자다.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며 주자와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쳤다.


1625년(인조 3년) 송시열은 19세의 나이로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이씨는 문정공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1627년 이후 송시열은 연이은 큰 슬픔을 당하게 된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그만 맏형인 송시희가 운산에서 전사했고, 22세인 1628년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마친 뒤인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 들어갔다.

 

1633년(인조 11년) 송시열은 27세의 나이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시제(試製)로 논술하여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송준길과 영남을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635년 11월에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1년간에 걸친 사부생활은 효종과의 깊은 유대와 함께 북벌계획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에게 북벌을 당부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은 송시열의 전 생애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절친한 동문인 윤선거(尹宣擧)와도 갈등을 빚었고, 윤선거의 아들이면서도

그가 총애한 제자 윤증과도 결별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의 분쟁도 일어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자 송시열은 관직 생활의 뜻을 접고 충북 황간으로 낙향하여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북벌계획을 구상하며 강학에 힘을 기울였다. 낙향한 그를 인조가 여러 차례 불렀지만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송시열이 인조의 계속적인 부름에 응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모양새로는 그가 벼슬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경세(經世)에 뜻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송시열의 나이 43세인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대군으로 있을 때 사부였다는 인연으로 송시열을 불러 곁에 두고 싶어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병자호란으로 중국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몸소 겪은 왕이었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山林)들을 대거 중앙 정계에 등용하고자 했고, 대표적인 인물이 스승인 송시열이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국가 원로들을 궁궐로 초빙했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와신상담할 것을 밝혔다. 화답이라도 하듯이 송시열은 1649년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의 합당(친명배청)함을 제시하고 북벌이야 말로 국가대의라는 것을 표방하였다.

 

[기축봉사]는 밀봉한 채로 효종에게 바쳐졌다. 모두 13개조로 되어 있는 이 봉사에서 송시열은 ‘대일통(大一通)’의 큰 뜻을 밝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조목은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할 것(節哀以保身)부터 정사를 바르게 하여 오랑캐를 맞설 것(修政事以禦外侮)’에 이르기까지 군왕으로서 지켜야할 내용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오랑캐란 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친명배청)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청이 아닌 명이었다. 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송시열에게는 패륜이자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은 현실로 굳어진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유교적인 가르침대로 명을 위해 복수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했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지극했다. 왕이 청에 대한 북벌을 계획할 때면 사관이나 승지마저 멀리한 채, 독대로 의논할 정도였다. 효종의 총애를 받은 송시열이지만, 인조에게 그랬던 것처럼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70이 넘은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예의와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조정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효종은 거듭해서 송시열에게 관직을 내렸고 송시열은 그때마다 사양했다. 효종의 끊임없는 구애는 계속되었다.

 

효종 9년(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털옷)를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화양동 생활과 제자 윤증과의 불화

송시열은 주자(朱子)를 신앙으로 삼을 정도로 ‘주자제일주의자’였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입버릇처럼 되내이자, 효종이 “경은 말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정도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주자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믿은 인물이었다. 내우외환이라는 주자가 당면했던 문제가 조선의 당면 문제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고, 그로 인해 주자가 제시했던 대책은 지금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조선이 건국된 상황은 송(宋)과 똑같기 때문에 그 말류(末流)의 폐단 또한 서로 비슷합니다. 국력의 강하고 약함도 비슷하고 지방 관리들의 부패도 비슷하며, 호강(豪强)한 자가 제맘대로 난폭하게 구는 것도 비슷합니다. 주자는 당시에 눈으로 이런 것들을 보았으므로, 말한 바가 매우 절실하고 정성스러워 그 병에 꼭 들어맞는 처방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이 약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숙종실록] 권 14, 숙종 9년 6월 경자일)

 

송시열은 유학의 정맥이 윤휴 등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했고,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반감은 훗날 그가 총애하던 제자 윤증과 불화하는 이른바 회니시비라는 노소분당으로까지 비화되었다.

 

회덕에 살던 송시열과 니산(尼山)에 살던 윤증은 사제지간이었고,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는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생전에 율곡의 연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윤선거가 윤휴의 논지를 인정하는 뜻을 비춘 적이 있었는데, 윤선거는 송시열과 윤증 사이를 원만하게 이끌려는 것이었지만,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에 피난해 있었는데, 강화가 함락되려 하자 부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순절하였다. 이때 윤선거는 부친 윤황을 만나기 위해 강화도를 탈출하였고, 부득불 혼자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 일을 부끄럽게 여긴 윤선거는 폐인을 자처하며 벼슬길을 사양하고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은둔생활을 했다.

 

윤선거가 1669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그의 아들 윤증은 박세채가 써준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갈명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윤증의 부탁을 받은 송시열은 마지못해 박세채가 윤선거를 칭송하는데 나는 박세채를 믿으니 그의 말을 술이부작(述而不作)한다’고 했다. 박세채의 말을 인용하되(述而), 윤선거를 칭송하는 글을 쓰지 않겠다(不作)는 말이었다. 송시열은 묘갈명을 지어 윤선거를 칭송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몇 차례에 걸친 윤증의 간곡한 부탁에도 송시열은 글자 몇 자만 고칠 뿐이었다. 윤선거의 묘갈명을 계기로 스승인 송시열과 제자 윤증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영욕의 삶

효종의 스승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던 송시열이지만, 효종의 죽음과 함께 영욕의 삶도 저물어갔다.

 

1660년 송시열은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았고,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감으로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으로 은거했다.

 

1666년 8월에 화양동으로 거주지를 옮긴 송시열은 이후 1688년까지 화양동을 출입하며 산수를 즐겼고, 강학을 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화양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에도 1668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하였고, 1674년 2월 효종비 인선왕후의 복제문제로 실각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듬해 송시열은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지 석방되었다.

 

송시열의 나이 76세 되던 1682년에 청푼김씨 김석주 등 훈척들이 남인들을 일망타진하려 하려는 작업을 했다. 이 때 송시열이 주동자 중의 한명인 광산김씨 김익훈을 두둔했는데, 김익훈은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였다. 실망한 젊은 선비들은 송시열을 비난했고, 제자인 윤증과도 반목이 더욱 심해졌다. 이 일로 송시열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으로 다시 은거하였다.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붓으로 세상을 움직인 노론의 영수, 신화가 되다

송시열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개인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송시열과 관련한 대표적인 지역을 꼽으라면 ‘화양동’일 것이다.

 

1803년 가을 음성현감이 된 성해응이 부친 성대중과 화양동을 답사하고 지은 [화양도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 송시열과 관련한 일화가 전한다.

 

우암 송시열은 태어날 때 산천의 정기를 타고 나 하루는 세자가 그의 안광을 보고 기절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우암이 기거하던 초당에 매년 봄이 되면 활짝 만개하던 홍매(紅梅) 한그루가 있었는데 1689년 사약을 받은 해에 갑자기 말라 죽었다. 그러다가 갑술년(1694)에 경술환국으로 송시열의 관직이 회복되자 죽었던 매화가 다시 살아나 꽃을 활짝 피웠다고 전한다.

 

그는 『조선왕족실록』에 3천 번 이상이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기에, ‘정계의 대로(大老)’, ‘동방의 주자’ 등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당쟁의 화신’, ‘사대주의 신봉자’ 등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송시열은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우암의 학맥을 기록해 놓은 『화양연원록(華陽淵源錄)』에 의하면 그의 제자는 총 827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우암이 평생 존경해 마지 않은 주자(朱子)의 제자도 442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과연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에 우암이 누렸던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알게 하는 일면이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계녀서(戒女書)』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1717년에 간행된 『우암집(尤庵集)』 167권과 1787년에 출간한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이 있다.

 

송시열 유적과 만동묘

 

 

 

 송시열 유적 안내도와 안내문

 

 

 

* 만동묘 소개

 

  1703년(숙종 29)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里)에 세운 사당.

 

만동이란 물이 만 구비를 꺾어 흘러 마지막에는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로서 존명의식(尊明意識)을 표현한 것이다.

 

만주족인 청(淸)은 명(明)을 정복하기 이전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을 일으켰는데, 이 사당은 명을 정벌하고 조선까지 침략한 이민족 청을 사상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숙종대 문인인 민정중(閔鼎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최후의 황제인 의종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글자를 얻어 송시열에게 주었는데, 송시열은 1674년(현종 15) 이것을 화양리의 석벽에 새긴 뒤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기 전에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서면으로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부탁했다. 만동이란 이름은 권상하가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취한 것이다.

 

만동묘의 위치는 동천구곡(洞天九曲) 중 제3곡인 읍궁암(泣弓巖) 위쪽에 낙양산(洛陽山)을 배후로 북향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명에 대한 보은의 의리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만동묘를 보호해주었다.

 

즉 묘우(廟宇)의 수호와 제향(祭享)에 관심을 표명했고, 수직사(守直使)를 임명하거나 전결(田結)을 급여해주기도 했다. 봄과 가을의 제향에는 큰 성황을 이루어 유생을 비롯한 촌민·수령 등 각계 각층이 참여했다.

 

그러나 반면에 만동묘의 위세가 날로 증대해 그 폐해가 막심했다. 제사 지낼 때 자성지폐(?盛之弊)는 물론이고 면세전이 확대되어 국가의 경제적 손실이 컸고, 면역이 인정되는 수직사를 자원하는 자가 늘어 군역의 기피현상이 나타났다. 이후 대원군 집정기에 철폐되었으나 얼마 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일제시대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하지만 근래 만동묘의 묘정비가 출토되어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했으며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밖에서 본 풍천재 뒤 모습.

 

만동묘 입구에 들어선다.

 

입구에 들어서니 자기자리를 찾지 못한 옛 부조물들이 널려 잇다.

 

풍천재 모습

 

존사청이라고 안내문에 소개되어 있다.

 

중반청

 

숭삼문 모습 

 

안내문에는 사당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화양서원

 

안내문에는 외삼문으로 기재되어 잇는데 현판에는 양화문이라고 되어 있다.

 

돌에 음각되어 있는 알수 없는 돌

 

성공문 저 뒤로 만동묘 사당이 있다.

 

만동묘의 흙돌담

 

만동묘정비 전각 모습

 

안내판과 만동묘정비 전각

 

 

만동묘정비 모습

 

천장처마와 흙돌담 모습 

 

성공문이라고 만동묘로 들어가는 문인데 굳게 잠겨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3,000회나 올랐다고 하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

선생을 선양하기 위해 대전광역시에서 조성한 우암사적공원에는 문화재로 송자대전판과 남간정사 등이 있으며, 시설로는 남간사 및 주요 건물들과  유물전시관, 장판각 등이 있습니다.
 

 

유물전시관 내에 있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초상화입니다.
노구의 모습인데도 안광에 힘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유물전시관 내에는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볼 수 있는 연표 및 전시품들이 잘 정리되어 있으며,
점심 시간을 피한다면 문화유산해설사의 친절하고 자세한 안내도 받을 수가 있답니다.

 

 

송시열 선생이 유림과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익히던 곳인 남간정사의 모습입니다.
비가 막 그친 때라 연못의 물은 탁했지만 초록으로 우거진 주변 풍광들을 오롯이 담아내기엔 충분하였네요. 연못 가운데의 둥근 섬은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남간'이란 양지바른 곳(남쪽)에 졸졸 흐르는 산골물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선생이 평생 흠모하던 주자의 시'운곡남간'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해요.
대청 밑으로 개울물이 흘러 내려 눈앞의 자연 연못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곳입니다. 흐르는 물 위에 건물을 짓는다는 발상 자체도 열정적인 선생의 모습을 잘 말해주는 듯 합니다. 

남간정사는 송시열 선생의 사후에 유림들이 목판을 새겨 송자대전을 펴냈던 장소이기도 하지요.

'송자'라는 칭호는 그의 학문적 업적이 얼마나 대단했는 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송자대전판은 선생의 문집과 연보 등을 집대성한 판목으로 현재 사적공원 내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주차장 쪽에서 본 장판각의 모습입니다.

 


기국정은 우암 선생께서 손님맞이를 위해 세운 정자로  소제호 주변의 소제동에 세워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소제호가 매몰되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연당'이라 불렸으나 주변에 구기자와 국화가 무성하여 기국정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지요.

 


기국정 누마루 난간의 문양이 참 단순하면서도 멋스럽네요.
위쪽의 문양은 박쥐 모양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박쥐를 다산이나 복을 주는 행운의 동물이라 여겼다고 합니다.  궁궐에서도 박쥐 문양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유물전시관 내에 있는 많은 전시물 가운데에서 '치,부끄러울'라는 한자가 눈에 뜨입니다.

송시열 선생은 주자학의 대가로 이이의 학통을 계승,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예론에 밝으셨던 분입니다. 송시열 선생이 추구하셨던 예학의 실천, 그것을 이 뜨거운 한 글자가 대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별당 동춘당의 주인이셨던 송준길 선생의 성정이 봄과 같고 仁을 추구하셨던 분이라고 말한다면

남간정사의 주인이신 우암 송시열 선생의 성정은 여름과 같고 여름(남방)의 덕성인 禮를 추구하셨던 분이라고 개인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던 삶의 주인공인 송시열 선생의 자취를 따라 둘러본 우암사적공원에서의 여름 한낮은 왠지 모르게 뜨겁고도 시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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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 1606(선조 39)~ 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송준길

송준길의 서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18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서인 노론을 이끌었다. 본관은 은진.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아버지는 영천군수를 지낸 이창(爾昌)이다.

어려서부터 친척인 송시열과 함께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면서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각별한 교분을 맺어나갔으며,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내시교관·동몽교관·시직·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1633년 잠시 동몽교관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20여 년 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서인세력)에 속했으며,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을 이조판서에 기용하는 등 척화파와 재야학자들을 대거 등용할 때 송시열 등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진선·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임명되었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집의로 있으면서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하는 한편,

인조말 이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의 핵심인물인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가 효종의 북벌정책을 청(淸)에 밀고하여 그와 송시열 등 산당(山黨)은 청의 압력으로 모두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뒤 집의, 이조참의 겸 찬선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다.

 

1658년(효종 9) 대사헌,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이듬해 병조판서·지중추원사·우참찬에 임명되어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필했다.

 

1659년 효종이 죽은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그는 송시열의 기년복(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 주장을 지지하여 논란을 거듭한 끝에 남인의 윤휴(尹?)·윤선도(尹善道)·허목(許穆) 등의 3년설(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어 이조판서·우참찬·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기년제를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공격으로 1665년 원자(元子)의 보양을 건의하여 보양관(輔養官)으로 잠시 봉직한 것을 제외하고는 관직에 발을 끊고 회덕에 머물러 살면서 여생을 마쳤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예학에 밝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분이지요.
우암 송시열 선생과 함께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두 분은 학문적 경향이 같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성정은 서로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먼저 송준길 선생의 별당인 동춘당과 고택을 둘러보며 선생의 인품이 어떠했을 지를 엿보자구요~ 

동춘당이라는 이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직접 써서 걸어둔 것이라고 해요. 同春이라 하면 '봄과 같다'는 것이지요.

동양의 오행사상에서 봄의 덕성은 인(어질 仁)으로 분류합니다.

겨울을 지나온 봄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롭게 설레임으로 다가오는 계절이지요.
만물을 생하고 생하는 계절인 봄의 덕성처럼 송준길 선생은 늘 仁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동춘당이라는 '호'를 통해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처마선이 참 아름다운 건물이지요?
동춘당은 보물 제209호로 지정된 우리 고장(대전)의 대표적 문화재입니다.

그것은 유사한 별당 건축 중에서도 가장 대표될 만한 정갈함과 균제감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춘당은 동춘당의 아버지인 송이창이 세웠으며, 당의 일부가 허물어지자 송준길 선생이 38세 되던 해(1643년)에 중건한 건물입니다.

건물 경내에는 어떠한 조경없이 담장 주변으로 몇 그루의 나무만 심어져 있는 간결한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꾸미지 않은 모습이면서도 단아한 멋이 풍겨나는 이 별당 건물은 송준길 선생의 인품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동춘당은 온돌과 마루가 함께 구성되어 있는 건물입니다.
온돌이 있는 이 작은 공간에서 추운 겨울에도 주자나 이이의 학문을 연구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듯 합니다.

 

온돌방 아래 뚫어진 이 구멍은 뭘까요? 아궁이처럼 보이지만 굴뚝이랍니다.
굴뚝이 건물 뒤쪽에 있지 않고 측면 방 아래 낮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지요.

이것은 은폐를 통해 '따뜻한 온돌방'이라는 본능적 행위를 억제하고자 하는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굴뚝으로도 본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는 기술적인 이해가 뒷받침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동춘 선생의 고택은 사랑채, 안채, 그리고 두 채의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안채 마당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내외담의 모습입니다.  이곳 고택의 사랑채는 송준길 선생의 명성에 비해 매우 협소한 편이라고 합니다.

 


사랑채 굴뚝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지요? 자세히 살펴보니  팔괘와 태극 문양이네요.
굴뚝에 그려진 팔괘태극도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언제 누군가에 의해 어떠한 의미로 조각된 것인지 참 궁금한 마음입니다.
 

 

 

송씨가묘의 모습입니다. 송씨가문 4대조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지요.

 

이곳은 별묘로서 동춘당 선생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동춘당과 고택은 마치 고고한 선비의 자태와 같이 단아하며 품위가 있는 것이 자랑할 만한 부분입니다.
화려하지 않은 검소함과 자연과 동화하려는 공간의 심성이 잘 드러나는 건축물이라고 평하는데요,
송준길 선생의 소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품 또한 건축물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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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윤씨 윤휴 1617(광해군 9)~ 1680(숙종 6).

 

  윤휴 초상.

 

진정한 북벌론자인 윤휴는 사대부의 각종 특권을 폐지해 민생을 강화한 뒤 광활한 요동 지역을 수복하자고 주장했으나
호응하는 사대부는 거의 없었다.

 

주자학이 지배하던 17세기 사상계에서 주자의 학설·사상을 비판·반성하는 독자적 학문체계를 세웠다.

 

예송(禮訟) 때 남인으로 활동하며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계와 맞섰으며, 숙종 즉위 후부터 경신대출척 때까지 많은 개혁안을 제기하고 실행하려 했다.

 

송시열 서인계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받고 끝내 처형당했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 초명은 정(?)이었으나 25세 때 휴로 고쳤다.

 

아버지는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효전(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627년(인조 5) 후금의 침략이 있자 보은 삼산(三山)에 있는 외가로 피난하여 외할아버지 김덕민에게서 학문의 기초를 익히고, 조식(曺植)과 학문적으로 가까웠던 성운(成運)의 서실(書室)에서 독서했다.

 

이때 〈황극경세서 皇極經世書〉를 접했다. 이후 이수광(李?光)의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와 이원익(李元翼)에게서 배웠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치욕을 씻을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과거 준비를 포기했다. 1639년 공주 유천(柳川)으로 내려와 지내면서 〈논어〉·〈맹자〉 등 사서(四書)와 시·서·삼례(三禮)·역(易) 등 경서 학습에 몰두했다.

 

이때 권시(權?)·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 등과 막역한 관계를 맺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했다. 1656년(효종 7) 세자시강원자의로부터 1659년 사헌부지평까지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1660년(현종 1)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송시열 등 서인이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여 시행하자, 삼년상을 지내자는 참최설(斬衰說)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기해예송).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국에서 참최설은 남인의 서인 공격에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는데, 기년복제는 왕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사대부의 예(禮)를 왕에게 잘못 적용하여 '왕의 지위를 낮추고, 왕의 법통을 둘로 나누어버리는'(卑主二宗) 논리이므로 어떤 경우든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675년(숙종 1)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일어난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한 뒤,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자,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을 이끌며 활동했다. 이해 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헌·성균관좨주 등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했다. 이후 대사헌·좌참찬·우참찬·형조판서·우찬성 등을 번갈아 역임했다.

 

1680년 영의정 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여했다고 하여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5월에 처형당했다.

 

재직중 지패법(紙牌法)·호포법(戶布法)·상평법(常平法) 등 부세제도 개혁안을 여러 번 제기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지패법을 변형한 호패법(戶牌法)만이 시행되어 개혁의 뜻이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한편 도체찰부(都體察府) 설치와 무과인 만과(萬科)의 시행을 주장하여 북벌을 위한 준비를 주도했다.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간관(諫官)과 과거제, 그리고 비변사를 혁파해야 한다고 보고, 〈주례 周禮〉를 원용한 〈공고직장도설 公孤職掌圖說〉을 숙종에게 올려 그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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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평윤씨 윤증 1629(인조 7)~ 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학자. 소론의 영수

윤증 초상과 고택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에 의해 소론 영수로 추대됐다.

노론과 소론의 분립과정에서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활동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했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三宗의 혈맥 숙종⑤ 서인의 분열 계속

 

이런 상황에서 과천까지 올라온 윤증(尹拯)은 정세를 관망하며 입경(入京)하지 않았다. 박세채가 과천까지 내려가 윤증을 만났는데,

 

『숙종실록(9년 5월 5일)』과 『당의통략』은 이때 윤증세 가지 출사 조건을 내걸었다고 밝히고 있다.

서인과 남인의 원한을 풀 수가 없고, 삼척[三戚: 광산김씨 김만기·청품 김씨 김우명(김석주)·예흥 민씨 민유중의 세 외척 가문]의 문호를 막을 수 없고, 지금의 세태는 자신의 뜻과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같이합니다. 이런 풍조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터인데, 공이 할 수 있겠소?(『당의통략』)”

박세채는 한참 침묵하다가 “모두 불가능합니다”라고 답했고, 윤증은 “세 가지를 고칠 수 없다면 나는 출사하지 않겠소”라면서 귀향했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은 윤증을 새 영수로 삼았다. 세 가지 조건은 정치공작 기획자 처벌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인과 남인 사이의 원한도 풀리고 외척(김석주)의 세력도 퇴조하면서 공존의 정치가 회복될 수 있었다. 숙종이 이 길을 걸었으면 분열의 정치는 통합의 정치로 전환되고, 증오는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지만 그는 정치권을 분열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패도(覇道) 정객에 불과했다.

 

출신 및 학통

할아버지는 유황(煌)이고, 아버지는 유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장백(長白)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외손이다.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權?)와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광산김씨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1663년(현종 4)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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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 박세채1631(인조 9)~ 1695(숙종 21). 소론의 영수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소론의 영수로 당쟁의 근절을 위해 노력했고,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본관은 반남.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박의(?)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1649년(인조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효종 1)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했을 때, 영남의 유생 유직(柳稷)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여러 유생들과 함께 유직의 상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효종이 비답(批答)에서 박세채를 꾸짖자, 이것을 계기로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은거하여 경학에만 전념할 뜻을 세웠다.

 

 1651년 안동김씨 김상헌(金尙憲)· 광산김씨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주로 성리학을 연구했고 송시열과도 교류했다.

 

1659년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해 5월 효종이 죽고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자의대비가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인에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1년간만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예경기년설(禮經朞年說)을 지지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들이 축출당할 때 삭탈관직당하고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에서 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다시 기용되어 집의·이조참의·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무렵 서인들 가운데에는 훈척파(勳戚派)와 청의파(淸議派)라는 두 갈래의 흐름이 생겨 서로 반목했다.

이른바 노론·소론의 분쟁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훈척파는 김수항·민정중·김석주·민유중 등 남인을 내쫓는 데 공이 많고 나이가 많은 고관들이었고, 청의파는 조지겸·오도일·박태보·박태유·한태동 등 연소한 관료들로 남인들의 완전 제거와 훈척파의 전권(專權)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1682년 김익훈·김석주가 남인을 밀고하여 옥사가 발생하자, 청의파에서는 이를 무고라 하여 탄핵했다. 이때 송시열이 훈척파를 옹호하여 청의파와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는 입장에 있었으나, 1683년 송시열이 태조의 위화도회군을 존주대의(尊周大義)라 하여 시호를 높일 것을 주청한 것을 계기로 송시열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때 송시열·김석주·김익훈 등을 추종하는 사람은 노론으로, 박세채·조지겸·한태동 등을 따르는 사람은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그는 윤증 등 소론계 학자들과 함께 학문교류 및 정치활동을 했다.

 

1689년 소의 인동장씨(昭儀張氏)의 희빈 책봉문제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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