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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6:1-22
찬송가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져 압제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타개할 사사로 ‘삼손’을 세우셨고,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사사로 지낸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그의 인생 마지막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말미에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삼손의 두 번째 여인(1-3절)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삼손은 자신을 과신(過信)했습니다. 삼손이 도착한 ‘가사’는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 최남단에 위치한 곳으로 가장 부유하고 힘 있는 도시였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의 가장 깊숙한 지역까지 스스럼없이 다닐 정도로 자기 능력을 과신했습니다. 그에게 신중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삼손은 가사에서 보았습니다. ‘보다’라는 동사는 삼손의 행동 결정 기준을 설명해줍니다. 그가 사사로서 처음으로 행동을 개시했던 14장 1절에서도 그는 ‘한 여자’를 보았고, 16장 1절에서도 ‘한 기생’을 보았습니다. 삼손은 눈으로 보고 나자 불일 듯 일어나는 정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에게로 들어가 동침했습니다. 이처럼 삼손은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대로 행동했습니다. 삼손은 욕심에 핸들링 당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의 공급을 받으며 형성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을지의 선택은 우리 인격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하루를 시작할 때 무엇을 보는지는 하루의 길을 냅니다. 찬송가 85장의 ‘구주를 생각만해도 이렇게 좋거든’ 가사처럼 하루의 시작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과 동행하는 길을 내기를 소망합니다.
삼손의 욕심은 화를 불러왔습니다. 2절에 보니 부유하고 힘 있는 가사 사람들이 삼손을 죽이려고 떼로 몰려와 기생의 집을 에워쌌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발각된 장소는 기생의 집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것도 하나님께 헌신되었다는 나실인이 기생의 집에서 발각된 것은 분명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자리가 대적들에게 비방거리를 제공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속히 정리하기를 바랍니다.
가사 사람들은 삼손과 전면전을 펴기보다 그가 잠들거나 새벽에 성문을 나설 때 기습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3절에서 삼손은 그들의 계획을 알고, 날이 새기 전 한밤 중에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최후의 방어 수단이자 국력의 상징인 성문과 그 구성물들을 뽑아서 자기 어깨에 멨습니다. 그리고 가사로부터 약 60km 떨어져있고, 해발 고도가 900m 넘는 헤브론까지 그것들을 들고 갔습니다. 이는 삼손의 괴력을 보여줍니다. 초인적 힘을 받았음에도 삼손은 그것을 오로지 자기 정욕을 해소하고, 그로 인해 벌어진 화를 해결하는 데에 썼습니다. 그는 사사로 처음 활동할 때나 마지막에 이르러서나 욕심에 핸들링 당하며 살았습니다.
삼손 개인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도 수치가 된 기생 사건 후 일정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금붕어처럼 과거 기억을 잊었는지 동일한 수치스러운 죄를 반복합니다.
삼손의 세 번째 여인(4-22절)
(4)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삼손은 바른 대상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게다가 하나님께 일평생 구별된 자,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이방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심지어 이전에 이방 여인을 사랑한 결과가 수치와 화를 불러왔음에도 멈추지를 못했습니다. 이처럼 대표자 삼손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 자기 욕심에 이끌려 살아간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독한 우상숭배의 실태를 그림 언어로 보여줍니다. 호시탐탐 삼손을 죽일 기회를 노리던 블레셋 사람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5)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네게 주리라 하니
방백은 도시 국가의 군주를 뜻합니다. 다섯 개의 도시 국가 연합으로 이루어진 블레셋의 군주 다섯 명은 민족의 원수, 삼손을 죽이기 위해 단합했습니다. 그들은 들릴라를 돈으로 매수하려 했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금액은 각자 은 천백 개씩이니 다섯 명을 다 합하면 은 5,500 세겔이었습니다. 한 세겔은 당시 노동자의 나흘 치 임금이었기에 오늘날 하루 평균 임금을 10만원으로 잡는다면 40만원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은 5,500 세겔은 약 22억으로 블레셋 다섯 군주가 얼마나 삼손을 체포하여 죽이고 싶었는지 그 갈망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거액을 제안받은 들릴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백들의 제안을 수락하고,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했지만, 들릴라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들릴라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삼손을 쥐락펴락하며 그의 힘의 근원과 그를 굴복시키기 위한 방법을 알아내는 데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가 흔들어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들릴라의 집요한 질문에 3번은 거절했으나 4번째에 넘어갔습니다.
6절부터 14절까지 이어지는 들릴라와 삼손 사이의 상호작용은 다음의 네 가지 패턴 주기를 가집니다. 첫째, 들릴라는 삼손에게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둘째, 삼손은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셋째, 들릴라는 삼손이 알려준 방법을 시도합니다. 넷째,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다고 외칩니다.
앞선 세 번의 시도 즉, 6-9절에 나오는 새 활줄 일곱으로 한 결박, 10-12절에 나오는 새 밧줄로 한 결박, 그리고 13-14절에 나오는 삼손의 머리털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짠 결박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첫 번째 시도였던 새 활줄 일곱은 새번역 성경처럼 ‘마르지 않은 칡 일곱 매끼’ 즉, 칡 덩굴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덩굴 줄기는 습기가 있어서 끊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완전수를 뜻하는 7개를 사용했기에 삼손의 초인적 힘을 잠재울 신비한 힘을 지녔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도였던 새 밧줄로의 결박은 첫 번째 결박 때 블레셋 방백들이 직접 새 활줄 일곱을 가져다주었던 것과는 달리 들릴라가 직접 새 밧줄을 준비하여 결박을 시도했습니다. 이는 들릴라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삼손 파멸에 개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도였던 삼손의 머리털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짠 결박은 이전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음에도 감행했을 정도로 들릴라가 갈수록 삼손 파멸에 열심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결박 방법이 머리털과 관련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갈수록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지 않으면 갈수록 죄와 손잡기 수월해집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에 자리를 뜨며 단호히 거절한 것은 유혹에 대처하는 좋은 본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 장사 없습니다. 유혹의 자리인 줄 알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면 죄의 유혹에 넘어가고 싶다는 마음의 중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유혹이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결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리에 머무릅니다(시 1:1-2). 머무를 자리와 떠야 할 자리를 분별하고 파멸이 아닌 생명의 자리에 머무는 지혜와 용기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 번의 시도가 실패하자 들릴라는 강하게 삼손을 책망합니다.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들릴라는 사랑을 들먹이며 삼손의 마음을 흔들어댑니다. 삼손은 바르지 못한 대상을 사랑하며, 사랑받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봅니다. 자신의 배우자가 외도하는데 그 외도의 대상에게 사랑조차 받지 못하면서도 자기 삶을 송두리째 갖다 바치고 있다면 이를 지켜보는 신실한 배우자의 속은 썩어 문드러질 것입니다. 자신을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자 흔들어대는 들릴라를 사랑하는 삼손의 모습은 하나님 대신 온갖 피조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혀놓고 사랑하며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의 죄 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추궁과 책망에 맥을 못 춥니다.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들릴라의 집요한 추궁은 삼손의 마음을 거의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처럼 죄는 우리를 근심케 하고,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마음을 생명으로 채우고 더 풍성케 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손잡아야 할 대상은 도둑인 사탄이 아니라 목자이신 예수님입니다. 결국 삼손은 들릴라의 유혹에 항복하고, 나실인의 비밀을 밝힙니다.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삼손은 나실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부여받은 나실인의 정체성보다 자기 정욕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이 나실인의 비밀을 유지하며 정체성을 지킨 것이 아닌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간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을 머리털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적으로 보이는 머리털이 자기 힘의 근원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여전히 자기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착각했습니다. 우리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첫 시작은 우리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망각할 때입니다.
삼손은 자신을 구별해주는 표인 긴 머리털을 상실하도록 들릴라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삼손은 들릴라의 품 안에서 머리털이 잘렸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자 삼손은 초인적 힘을 상실했고, 결국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잡혀 참혹한 심판을 당했습니다.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행동하던 정욕의 사람, 삼손은 두 눈이 뽑혔습니다. 그리고 성문을 뽑으며 큰 수치를 안겨주었던 가사 성읍으로 자신이 수치스러운 모습이 되어 끌려갑니다. 그러고는 놋 줄에 묶여 짐승이 돌리던 대형 맷돌을 돌립니다. 그런데 그토록 삼손에게 달콤하게 다가오던 들릴라의 이름은 21절부터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달콤한 환상을 약속하던 그녀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삼손이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굴러떨어졌건만 삼손에게 도움이 가장 절실할 때 들릴라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적 쾌락을 좇은 삼손에게 남은 것은 오직 상처와 모욕, 죄책과 자책, 그리고 허무와 외로움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성적 쾌락을 목적 삼고 살아가면 처음 의도했던 지점보다 훨씬 더 먼 곳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으로 보이는 나실인으로 부름받았던 삼손의 인생 말로가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성경 속 모든 인물 중 가장 힘이 센 초인이었음에도 그 정욕을 통제하지 못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삼손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지 않았습니다.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삼손에게 ‘다시’가 허락됐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밖에 짓지 않은 삼손에게 ‘다시’의 은혜가 허락됐습니다. 삼손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인 우리에게도 ‘다시’의 기회가 값없이 허락됐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아들 예수님의 피를 흘리는 무한한 대가를 지불한 결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소중한 은혜의 선물을 들고 무엇으로 채워갈지 신중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삼손은 칼집 없는 칼이었습니다. 삼손이라는 칼은 출중한 능력으로 아주 예리했지만 칼집이 없었기에 자기 자신을 찌르고 남도 찔렀습니다. 칼이 중요한 만큼 칼집도 중요합니다. 칼집 없는 칼은 살인 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빛을 잃어가는 것은 또 한 명의 삼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은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가 더 나은 삼손이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뛰어난 능력을 칼집 없이 자기 정욕을 위해 쓰다보니 그 어느 누구도 조국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며 바른 방향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칼집 없는 칼은 자기 자신과 남을 해칠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 백성들과 구별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피를 은혜로 우리 심령에 발라주셨기 때문입니다. 삼손에게 머리털이었던 성별의 표인 아들의 피를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능력을 사용할 때 대한민국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백성과 동일하게 능력의 크기에 주목하기보다 그 능력이 하나님의 영, 성령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고, 그 능력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도록 힘쓰십시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맹렬한 진노의 심판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유월(逾越)시키신 아들의 피의 능력을 믿고, ‘다시’ 복음에 헌신하여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맑히고 밝히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기도
다시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사랑하며 진노의 심판을 자기 머리 위에 쌓았던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고백합니다. 이 진노의 잔을 독생자에게 부으사 그 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크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제는 아들 피를 심령에 바르며 성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또 한 명의 삼손이 되기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칼집을 마련하고 주신 능력을 바른 방향으로 온전히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대한민국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힘쓰며 오늘 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요즘 주로 무엇을 보고 듣고 있는지 눈과 귀의 사용처를 점검해 봅시다.
2. 두 눈이 뽑히고 놋 줄에 묶여 맷돌을 돌리는 파멸의 자리로 걸어가는 삼손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묵상해 봅시다.
3.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강점, 능력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시는지 생각해 봅시다.
4. 나에게 주신 ‘다시’의 은혜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5.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강동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