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楊規)는 고려 초기의 무장(武將)으로 요나라의 두번째 침입 당시 거란군(契丹軍)에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했다. 그는 도순검사로 최전방인 홍화진을 수비하고 있던 중 맨 처음으로 요나라의 대군과 충돌했다. 하지만 휘하 장졸들을 비롯해 성 안의 백성들과 힘을 합쳐 적군을 물리침으로써 결국 요황(遼皇) 성종(聖宗)으로 하여금 홍화진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도한 양규는 후방의 지원 없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열 달 동안 일곱 번의 접전을 치르며 수많은 요나라 군사의 목숨을 빼앗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마(軍馬)와 병장기(兵仗器)를 노획하는 등 끊임없이 요나라 군사들을 괴롭혔다. 그리하여 요나라와의 강화협상(講和協商)의 전기를 마련했다. 결국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지만, 그 공로로 양규는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봉되어 영원한 고려의 충신으로 역사에 남았다.
● 오직 황명(皇命)을 받아 싸울 뿐이다.
양규의 가계(家系)나 출생 연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형부낭중을 거쳐 요나라의 두번째 침입 때 도순검사에 오른 것으로 보아 공신이나 호족의 후예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규가 도순검사로 서북방 최고의 요충지인 홍화진을 수비하고 있던 1010년, 요나라의 황제 성종(聖宗)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삼아 고려를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고정과 한기를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일으킨다는 계획을 고려에 정식으로 통보해 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참지정사 이예균과 우복야 왕동영을 요나라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고, 이어 동지사(冬至使)를 보내는 등 요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원래 목적은 송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배후에 있는 고려를 굴복시키고, 첫번째 침입 때 고려에 양보했던 강동 6주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성종은 그해 11월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고 칭한 보병과 기병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홍화진을 포위했다.
성종은 항복을 종용했으나 이때 도순검사로 있던 양규(楊規)는 성 안에 있던 장수들과 함께 끝까지 저항했다. 이튿날 최사위(崔士威) 등이 이끄는 고려군을 귀주 북쪽에서 격퇴시킨 요황(遼皇) 성종(聖宗)은 통주성 밖에서 벼를 거두고 있던 고려의 백성들을 붙잡아 군사 3백여명과 함께 또다시 항복을 권유해 왔다. 고려 백성들은 종이로 봉한 화살을 하나씩 손에 들고 왔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고려의 전 임금이 우리 대요(大遼)에 복종하여 섬긴 지가 오래되었는데, 역신(逆臣) 강조(康兆)가 전 임금을 죽이고 어린 왕족을 새 임금으로 세운 까닭에 짐이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국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이 강조를 붙잡아 어가(御駕) 앞에 보내면 즉시 군사를 돌이킬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 너희들의 처자를 잡아죽일 것이다.'
이튿날에도 성종은 "홍화진의 성주와 백성들에게 타이른다. 고려의 전 임금이 선조의 업을 계승하여 짐의 신하가 되어 우리 국경을 지키다가 갑자기 간흉에게 살해된 까닭에 정병을 거느리고 죄인을 토벌하려 한다. 간흉의 위협에 마지못해 따른 자들은 모두 용서해 줄 것이다. 너희들은 전 임금의 은혜를 받았고, 역대의 순리를 거스른 자들의 일을 알고 있으니, 마당히 짐의 뜻을 따라 훗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의 칙서를 화살에 매어 성 안으로 쏘아 보내는 등 계속해서 항복을 종용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고려군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항복하지 않았다. 결국 성종은 홍화진의 포위를 풀고 군사를 양분하여 20만명은 인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시키고, 20만명은 자신이 직접 거느리고 강조가 지키고 있는 통주로 향했다. 더 이상 시일을 지체할 수 없었던 요군으로서는 홍화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양규를 비롯한 장종들과 백성들이 일치단결하여 이루어낸 성과였고, 뒷날 요나라가 고려의 강화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다. 후방에 아직 적군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급로의 차단으로 전군이 몰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있던 강조(康兆)는 요군이 통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진을 쳤다. 하지만 초전(初戰)에서 요군의 선제 공격을 물리친 강조는 자만심에 빠져 방비를 소흘히 하다가 요군의 야습을 받고 크게 패하여 고려군의 수많은 장수와 군사들이 사로잡히거나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성종(聖宗)은 후방에서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홍화진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그리하여 강조의 이름으로 항복을 권하는 거짓 문서를 만들어 홍화진에 보내 다시 한 번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양규는 "나는 오직 황명을 받아 싸울 뿐이지 강조의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 분전(奮戰)으로 강화(講和)의 전기를 마련하다.
결국 홍화진을 포기한 요나라 군사들은 방향을 돌려 통주를 거쳐 곽주를 점령한 다음 청천강 유역을 유린하고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를 빼앗았다. 이 기세를 몰아 요군은 서경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겁을 먹은 탁사정(卓思政)은 도망쳐 버렸고, 요군에게 저항하던 대도수(大道秀)마저 형세가 불리해지자 항복함으로써 서경은 일시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애수진장 강민첨(姜民瞻)이 낭장 홍엽 및 방휴 등과 더불어 통군녹사 조원(趙遠)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추대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로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뒤 서경을 수비했다. 숙주를 함락시킨 요황(遼皇) 성종(聖宗)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서경 공략에 나섰으나, 강민첨과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의 항전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개경으로 향했다.
이 사이 양규(楊規)는 홍화진의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요군에게 함락된 인근 고을을 수복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백성들을 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먼저 군사 7백여명을 거느리고 홍화진을 나온 양규는 통주에 흩어져 있던 군사 1천여명을 수습하여 요군이 주둔하고 있는 곽주로 향했다. 그는 곽주에 있던 요나라 군사들을 모두 사살하고 성 안에 잡혀 있던 민간인 7천여명을 구해 통주로 이주시켰다.
그러자 성종은 불리한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키기 위해 개경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을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한창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경에서 도망쳐온 지채문(智蔡文)의 패전(敗戰) 보고를 듣고 크게 동요한 조정의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자 끝까지 항복에 반대한 강감찬(姜邯贊)의 건의에 따라 황제 현종(顯宗)은 채충순(蔡忠順) 등과 함께 금군(禁軍) 5십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남쪽으로의 피난길에 올랐다.
현종의 피난 행렬이 양주에 이르렀을 때 하공진(河拱辰)이 현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요(遼)가 침범한 것은 오직 강조(康兆)의 죄를 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들이 이미 강조를 붙잡았으니, 만약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다면 틀림없이 군사를 되돌릴 것입니다."
이와 함께 아예 강화사(講和使)를 자처하고 나선 하공진은 창화현에 도착해 "저희 임금이 와서 뵈옵기를 진실로 원하오나, 군대의 위엄이 두렵고 또 내란으로 인하여 강 남쪽으로 피난했기 때문에 대신 하공진 등을 보내 사유를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하공진 등 또한 두려워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오니 빨리 군사를 거두기를 청합니다."라고 적힌 표문을 보내 요군의 반응을 떠보았다. 그러자 성종은 현종의 친조(親朝)와 함께 하공진(河拱辰)과 고영기(高英起)를 붙잡아두는 조건으로 강화를 허락함으로써 요군의 진격은 중단되었다.
이때 요나라의 황제 성종이 순순히 강화를 받아들인 것은 양규를 비롯해 김숙흥(金叔興), 강민첨(姜民瞻) 등이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가지 저항하며 끊임없이 후방에서 요군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 죽어서 얻은 영광
고려와 화친을 맺은 요나라의 성종(聖宗)은 퇴로를 보장받기 위해 먼저 서경에 군사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탁사정(卓思政)은 이에 응하지 않고 적병 1백여명을 더 죽인 뒤 철군하는 요나라의 기병 1천여명을 물리쳤다. 이와 같이 요나라 군사들의 철군이 시작되자 고려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곳곳에서 반격에 나섰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귀주, 통주, 곽주 등지에서 교란작전(攪亂作戰)을 계속해 왔던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비록 강화(講和)가 맺어졌지만 국토를 유린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요군을 온전히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먼저 1011년 1월 17일, 귀주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더불어 요군을 공격하여 1만여명의 적병을 참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다음 날에는 양규가 인주의 무로대를 습격하여 요군 2천여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가던 고려 백성 3천여명을 구해냈다. 이어 양규는 이수에서 요군과 접전을 벌인 뒤 석령까지 추격한 끝에 적병 2천 5백여명을 무찌르고, 적군의 포로가 되었던 고려 백성 1천여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22일에는 여리첨에서 요군 1천여명을 무찌르고 붙잡혀가던 고려 백성 1천여명을 구해냈다. 특히 이날 양규는 세 차례의 교전에서 모두 승리하여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처럼 용맹을 떨치며 요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던 양규에게도 운명의 날은 다가왔다. 1월 28일, 양규는 김숙흥과 함께 애전에서 퇴각하는 요군 선봉대와 전면전(全面戰)을 벌여 적병 1천여명을 침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성종(聖宗)이 이끄는 요군 본진의 갑작스런 기습 공격으로 그만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지고 말았다. 적군의 포위망에 갇혀 압박 공격을 받고 군사들이 거의 전멸되자 양규와 김숙흥은 환도(環刀)를 높이 쳐들고 적군의 진중으로 돌격하여 처절하게 싸우다가 마침내 장렬히 전사했다.
양규는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서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지원군 하나 없는 가운데 홀로 외로이 버티며 열 달 동안 일곱 차례의 교전을 벌여 일곱 번 모두 승리한 양규는 제2차 요여전쟁(遼麗戰爭)에서 최고의 수훈을 세웠다. 그는 수많은 적군의 목을 베고 포로로 잡혀가던 고려의 민간인 3천여명을 구해냈으며, 그 외에도 군마(軍馬)와 병장기(兵仗器)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리품을 빼앗았다. 양규와 같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해 싸운 수많은 장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요나라의 침입으로부터 나라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죽은 뒤였지만 양규(楊規)는 눈부신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1011년 2월 공부상서에 추증되었다. 또한 같은 해 4월, 현종(顯宗)은 은율군부인(殷栗郡夫人) 홍씨에게 직접 쓴 칙서를 보내 곡식을 내리고 아들 양대춘(楊帶春)을 교서량에 임명했다. 1019년에는 공신녹권에 내려진 데 이어 1024년 4월에는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봉되었고, 그 후 1046년에는 김숙흥(金叔興),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영정이 공신각에 걸리는 영광을 누렸다.
양규는 살아서는 비록 황제를 직접 곁에서 모시지는 못했지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냄으로써 역사에 그 이름을 길이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