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설교(80)
탕자의 비유(1)
본문 : 눅 15:11-24 (신 122)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탕자의 비유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잘 아는 이야기를
읽을 때에든지....
메시지로 접할 때......
종종 ‘알지, 알아’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이 보다
깊이 있게 묵상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잘 아는 본문이라는 선입관을 갖지 않고
처음부터 진지하고 꼼꼼하게 읽어가다 보면.....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매력이고
성경의 깊이입니다.
<동기>......
우리는 눅15장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비유를 만날 수 있습니다.
- 곧 ‘잃은 양 비유’와....
- ‘잃어버린 은전(드라크마)의 비유’,.....
- 그리고 오늘 본문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세 비유는 한 가지 공통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온 산을 찾는 목자와 같은 분이시고,.....
-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를 찾아
온 방안을 뒤지는 여인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혹시 앞의
두 비유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아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두 비유를 들으면서 ......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 “그러면 죄인은 가만히 있어도
좋은 것인가?” ....
-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러면 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세 번째 비유가 첨가된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
우선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눅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이 광경을 가장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2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왜 자신이 그들(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으시는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잃은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오늘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포기하지 않고 찾으시는,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분깃을 챙겨 집을 나간 둘째 아들>.....
<눅15:11-16 읽어라>
11절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절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절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절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졸라
자기 유산을 먼저 받아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재산을 잃은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결국 남의 돼지를 치는 지경까지 떨어졌는데,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음식(쥐엄열매)을
먹으려 해도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탕자의 회개>.........
결국 탕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스스로 돌이켰다”는 말은
영어 성경에 보면 “he came to himself"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탕자의 회개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
자신 자신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을 참으로
바라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의 비극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맹목성에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사도 요한의
안타까운 권면이 나옵니다.
<계시록 3:17-18 읽어라>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엇이 탕자의 눈을 열게 하였습니까?
무엇이 자기 자신을 실존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은 탕자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흉년과 궁핍, 그리고 고독이라는
환경을 이용하셨습니다.
그의 주머니가 불룩할 때,....
주변에 친구들이 몰려 있을 때,...
장사가 한창 잘되고 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돈도 떨어지고 친구도 떠나고...,
그리고 홀로 남겨졌을 때
바로 그 고독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젠 죽었구나’하는 죽음의 실존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죽음과 마딱드린 인간실존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때로 우리가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면....,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입니다.
성도님들이 한없이 깊은 절망과
고독 속에 있다면.....
지금이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얻었음을 알고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성도님들의 영안이 열려
우리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인지를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탕자의 계획>
아버지를 생각한 탕자는
혼자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18-20절a 읽어라>
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는 이제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최후의 소망은....
아버지 밖에 없음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떠나 올 때
아버지께 한 짓이 생각나서
양심상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요청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20절a).
그리고 아버지를 만났을 때
계획한 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21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고,....
감히 아들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회개는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가 아닙니다.
과거를 정리하는 일에 대하여....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은 두 가지로 우리에게 충고할 것입니다.
- 하나는 “그게 왜 죄야?
그거 가지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
그 정도 죄짓고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
라는 충고입니다.
즉 일반화된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우리 삶에 적용하라고 유혹합니다.
- 또 하나는 “그냥 잊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죄인 것은 틀림없지만....
자꾸 생각하면 너만 괴로우니
그냥 잊는 것이 최선이라는 충고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충고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탕자의 모습을 보세요....
참으로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선
자신의 부끄러운 죄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의 벌거벗음과 곤고하고
가련한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변명은 삶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새로운 삶은
참된 회개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히 회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회개의 결과>.......
아들의 돌아옴은 .....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까?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20절b “...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상식을 벗어난 모습입니다.
오히려 아들의 생각이 더 상식적이요 합리적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으니
나를 종으로 받아달라”는 그의 말은 옳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그가 아버지 집의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몇 날 몇 일을 백배사죄하는 것이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의 몇 일 후
아버지가 젊잖게 나와 아주 엄격한 얼굴을 하고...
“네가 이제 정신을 제대로 차렸구나.
이제 용서해 주마”해도 아버지의 사랑이
훼손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세요...
보수적인 유대 문화권에서
온 동네로부터 존경받는 지체 높은 양반이 .....
뛰뚱거리며 동네 한 가운데를 뛰어가는 모습은
온 동네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민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누가 보건 말건,
체면이야 구겨지던 말던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율법적으로 보면
얼마나 흠이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기준으로 맞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
사랑으로(은혜로) 맞아주십니다.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의롭게’ 맞아 주십니다.
본문을 유심히 보세요....
탕자는 아직 아버지 앞에서
회개하기 전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가
아들을 껴안습니다
(20절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시고 기다리십니다.
그가 회개하였기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용서해 놓으시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을 내어보내 놓고는
분명히 거지가 되어 돌아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보나마나 저 애가 가서는 다 없애고
거지가 되어 돌아올텐데 ....
“어쨌든 제발 살아서 돌아만 와다오”하는
심정으로 기다려온 것입니다.
이미 과거를 용서하시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 돌아오는 순간
이미 하나님은 용서를 해놓으시고
우리를 맞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의 음성을 듣기도 전에
이미 “그래, 잘 왔다. 내 아들아!”하고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맞이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있는 모습 그대로 맞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풉니다
.<본문 22-24절 읽어라>
22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제일 좋은 옷’은.....
아들로서의 새로운 신분을......
나타냅니다.
‘가락지’는 .......
새로운 언약을.....
‘신발’은.....
새로운 삶의 출발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
곧 용서받은 자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은 오늘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는 분이시오 ......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