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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3장은 새 언약의 일꾼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의 직분이 중요한가? 소정의 과정을 거친 신분이 중요한가?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이 열매를 맺는 신분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은 신학교 졸업장의 신분이 사역의 직분이 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나의 신분을 또 자천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울의 변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이력서를 너희들에게 제출할 필요가 있는가 반문입니다.
1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바울은 외부적인 조건은 없습니다. 다메섹 사건도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계신다는 확증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총회에 바울의 신분을 조회하면 아무도 모릅니다.
고후2장에서는 향기라고 하고, 3장에서는 편지로 나옵니다. 바로 천거서입니다.
글자를 읽는 신분에 대한 천거서가 아니라 척 보면 읽혀지는 프로필입니다.
성경은 직분에 의해 되어 진 어떤 결과가 신분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신분을 내세웁니다. 이단이나 가짜를 가리려다가 그만 초등의 평준화가 되었습니다.
2절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바울은 나의 직분의 결과는 너희 안에 기록되어 있으니 알고 읽는 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을 알고 반복해서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초기에는 성경적인 결과가 성도들에게 나타나지 않아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요한복음이나 로마서와 히브리서를 통해 많은 이들의 심령 속에 편지로
씌어져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3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는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사본으로 밖으로 드러나야 된다는 말이며 성경번역이 되라 입니다.
예수의 구원과 바울의 구원이 맞다 인정한다면 이 순수성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게 바로 진짜 보수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설교기법에
교육학이 잔뜩 스며들어 수사학의 기교만 가득할 뿐 진리가 전파되지 않고 있습니다.
먹이 아니라는 말씀은 글자와의 싸움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 곧 단수로서
생명의 성령이 육의 마음 판에 새긴 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돌 판은 시내 산의
첫 번째 돌 판과 모압 평야의 두 번째 돌 판이 있습니다. 첫 번째 돌 판이
깨뜨려지고 두 번째(Deuteronomy) 돌 판이 주어진 것이 바로 새 언약의 그림자입니다.
4절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마음 판에 새긴 하나님의 영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말인데 이것이
바로 참 믿음입니다. 천사가 전해 준 돌 판의 율법으로는 아무리 잘 가르쳐도
마음 판에 새겨지질 않습니다. 아들의 영 곧 성령의 감동에 의한 진리의 복음이
아니면 결코 심령에 배어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글자를 두고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는 벼이삭을 보고 저 밥을 봐라 하는 말과 같습니다.
아니란 말을 하면 벼가 쌀이 되고 쌀이 밥이 되는데 왜 밥이 아니냐고 우깁니다.
성경이 진리(truth)가 되어 우리가 참(true)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까지는
반드시 진리의 성령이 임재하셔야만 그리스도께서 생명이 되고 영생을 얻은 자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거룩과 영광, 하나 됨과 온전함, 그리고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5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새 언약의 직분은 하나님께로 나온 만족을 가지고 있는 자만 가질 수가 있습니다.
6절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는 자 만이 새 언약의 일꾼이 됩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건 죽이는 것이며 세상 근심을 하게 만듭니다.
오직 살리는 영(요6:63)은 하나님을 향한 근심을 하도록 합니다. 어떤 목사가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야만 복을 받아 잘 산다고 말을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끊임없이 땅에서 잘 사는 복을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율법의 조문은 영이 아니라 육이라고 규정한 겁니다.
육신은 잘 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롬8:7)
7절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율법의 조문 곧 성경의 글자만 좇은 사람은 사망의 직분이며 영을 죽이는
직분입니다. 요즘 성경을 암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씀을 외우려고만 하지마세요.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토라)을 줄줄 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말씀은 영에 새겨 넣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아 성령에 잠겨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어 스며듭니다.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이 영광도 주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말은 자세히 보지 못하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대로 쉐마로 반복해서 들려주고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히11장의 믿음의 전당에 성공한 믿음의 위인들은 다 그리스도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가리듯 하나님의 계시를 가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구약과 신약의 성공한 믿음의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다시 사심에 연합이 되어 거듭남과 회개와 의와 거룩함을 얻어 항상 하나님을 그 앞에
모시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편 곧 의의 편에 두신 믿음의 인물들이었습니다.
8-9절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정죄의 직분은 갈라놓는 직분이며 심판의 기능입니다. 의의 직분은 영의
직분으로서 살리는 직분입니다. 그러나 검사가 변호사보다 더 힘이 센 것 같이
지금도 정죄의 직분들이 영으로 살리는 직분보다 더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롬5장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칭 비교합니다. 사도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은 바울을 극단론자이며 흑백 논리자라고 몰아 부칩니다. 그러나 죄와 의,
사망과 생명, 어둠과 빛, 마귀와 하나님, 지옥과 천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양극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끝이 다르니 극단이며 선은 하나님뿐이시니 독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이 어두움 쪽이냐? 밝음 쪽이냐? 석양이 어두움 쪽이냐? 밝음 쪽이냐?
이 판단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느냐 어둠에 밀리고 있느냐를 보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하고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긍정입니다.
12-13절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바울이 왜 담대하냐면 수건을 쓴 것같이 아니하고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화는 그 당시에는 감추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주목하지
못하도록 하는 천국의 1급 비밀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심도 보안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너희가 때가 되면 알 것이다’고 하셨는데 진리의 성령이 오신 때였습니다.
14절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구약을 읽을 때에’ 라는 말은 반복해서 되새김질하는 것입니다. 달달 외웠지요.
수건으로 덮어 놓고는 말씀을 입술에 담고 이마에 붙이고 목에 달고 다닐 정도이죠.
그러나 이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집니다. 계시가 임하면 수건은 무효화 됩니다.
율법의 조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진리로 실상이 되어 체화가 됩니다.
‘오늘’까지 바로 세메론입니다. 바로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이 날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위에 있는 신령한 양식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요6장에서 광야에서는 만나를 먹었으나 지금 주께서 주시는 양식은 생명의 떡입니다.
오늘 날의 말은 히브리서에서 많이 나옵니다. 히1:5절 ‘오늘 날’ 히브리서적인
오늘 곧 아들을 낳는 날입니다. 독생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생자의 날입니다.
히3:7절 ‘오늘 날’ 너희가 그 음성을 듣거든 바로 이 오늘 날은 계시의 날입니다.
율법 조문같이 성경이 글자로만이 아니라 아들로 말미암아 말씀하시는 때입니다.
히13:8절 예수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동일하신 그 말씀이십니다.
어제(구약) 오늘(새 언약) 내일은 영원세계입니다. 계시록적인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루어진 날을 말합니다. 완성되어 가는 날입니다.
그래서 무 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성령의 때 교회시대를 천년 기간으로 봅니다.
15-17절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주는 영이시니...현재 동사입니다. 상태적으로 항상 성령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도 영이시고 아들도 영이십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영은 제한이 없습니다. 그 곳은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없습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으므로 육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영은 자유이나 육은 법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법을 가르치므로 죄를 알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는 선생노릇을 하지만 이제 장성한 자들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 영광을 봅니다. 요17장 주께서 창세전의 영화를 빋아
저희에게 주셨다고 하십니다(요17:22) 아들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그래서 이제는 요13장의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요14:21절)
구약에는 법궤를 덮어서 운반을 했습니다. 그 영광에 나아가면 죄인은 죽습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법궤의 실체이신 주께서 우리 안에
오픈이 되셨습니다. ‘저와 같은 형상’(copy)으로 화하여 그 영광으로 영광에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시고
주 예수그리스도 영 안에 있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발견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광으로부터 영광에 이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변화됩니다.
몸이 변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되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편지가 됩니다.
롬1: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씀처럼 복음에 의한 믿음의 성장을 말하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입니다.
오늘 아침 개인의 기도이자 첫인사가
"성령님 안녕하세요." 입니다. 😂
성령님께서 임재하셔야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나의 모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실 때에 마지막 센텐스는 다시 오마 하시고 진리의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