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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
울분 삼키며 유물·자료 10년 수집…한일 근대불교사 다시 쓸 터!
고2때 해인사 행자 1년, 2000년 내장사로 출가
동국사 자료 수집하며, 일제강점기 현실 직시
일본 오가며 모은 5000점, ‘군산역사관’ 건립 원동력
“우리는 용서할 수 있지만, 일본은 준비 안 돼 있어”
과거 청산·잊음 넘어선, 극복·기억에 ‘방점’ 찍어야
종걸 스님은 “일본 제국주의 야욕 사실을 뒷받침할
학술적 자료 수집을 간과하면
우리는 ‘경술국치’ 수모를 또 당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았다.”
한국 대법원이 내린 이 판결(2018.10)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개인 손해배상청구권이 지금도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던 아베 일본 총리는
지난 8월 “강제징용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불만을 터뜨리며 백색국가(수출심사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경제도발이나 다름없다. 한국 정부는 한일 사이에 체결된
지소미아(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를 연장하지 않고 종료했다.
일본 행태에 공분한 시민들의 일본산 불매운동이 전국을 강타한 가운데
반일 감정은 날이 갈수록 최고점을 찍고 있다.
일본 조동종이 창건한 동국사를 침략·지배야욕을 직시하는
‘역사의 산실’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이다.
일본 조동종(曹洞宗)이 직접 세웠다는
참사문(懺謝文)을 품고 있는 군산 동국사(東國寺)로 향했다.
한일갈등 해결의 실마리가 그곳에서 풀릴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1876년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을 체결 했다.
일본에게 조선침략의 길을 열어준 이 조약을 기점으로
임제종, 일련종 등의 일본불교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는데,
일제 식민지 정책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 조동종이 대표적이다.
일례로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암살사건에 가담했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는 일본으로 돌아간 후 이토 히로부미의 고문을 맡았던
우치다 료헤이에 의해 조동종의 조선 포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조선불교를 와해시켜 조동종으로 병합시키려고까지 한 인물로 불교사에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 땅에 지어진 포교당·사찰은 약 1060개.
그 중 지금까지 사원역할을 수행하며 남아 있는 절은 조동종이 조성한 군산 동국사가 유일하다.
군산시 금동 구영1길에 개설(1909) 된 조동종 포교당은
1913년 현재의 금광동 자리로 옮겨왔고,
3년 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사찰로 인정받아 금강사(錦江寺)로 문을 열었다.(1916)
동국사는 조선불교 분열, 황민화 교육 강화, 내선일체를 앞세운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궤를 같이 하며 증·개축을 거듭해 사세를 확장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되었던 금강사(錦江寺)를 전북종무원이 매입(1955) 했고,
전북종무원장 남곡(南谷·아호, 석문윤명石門允明) 스님이 인수한 후
‘해동 대한민국의 절’이라는 의미로 동국사(東國寺)로 개명했다.(1970)
목재는 물론 기와 한 장도 일본산으로 건축된 동국사다.
일제잔재 건물철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동국사를 일제의 침략·지배야욕을 직시하는 ‘역사의 산실’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 동국사 주지 종걸(宗杰) 스님이다.
함양 덕유산 영각사 아랫마을에 태어 난 청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출가를 단행됐다.(1973)
가족들도 처음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더랬다.
어려서부터 며칠 씩 절에서 보내는 건 다반사였기에 곧 돌아올 줄만 알았던 것.
열흘이 지나도 보이지 않자 전 가족이 나서 거창, 함양 일대부터 크고 작은 사찰들을 탐문해 갔다.
해인사 길상암에서 행자로 산 지 1년쯤 되었을까!
도량 한 복판에서 가족들과 맞닥트렸다. 아버지가 일렀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절에 있나? 공부는 마치고 출가 해야지!”
산을 내려와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에 입학했다.
김동화 박사의 ‘불교학 개론’, ‘법정 스님의 시국강연’ 등
틈만 나면 불교 특강에 귀를 기울였던 청년. 섬유공학을 전공하면서도
철학 강의를 들으며 인간과 삶의 본질에 접근해 갔다.
캠퍼스 벤치에 앉아 눈을 감으면 꽃향기 대신 전각에서 피어오른 향이 코끝에 닿았고,
바람결에 흩날리는 장삼자락이 스쳐갔다.
원광대 교육대학원까지 마친 후 직장생활을 영위했지만 가야할 길은 따로 있었다.
어느 날, 오래간만에 거창고등학교 동창 친구를 만났다.
“내 여동생은 출가 해 비구니의 길을 걷고 있다네!”
잔잔했던 마음에 깊고도 큰 파문이 일었다.
내장사에서 벽송재훈(碧松在焄·1937∼2010) 스님을 은사로 다시 출가했다.(2000)
동국사 정문 기둥에 새겨진 ‘차문불문(此門不門)’.
‘문이 아니다’라는 건 ‘누구든 들어설 수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차문불문(此門不門)!’
동국사 정문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 직역하면 ‘이 문은 문이 아니다!’이고,
의역하면 ‘누구든 들어설 수 있는 문’이다. 차별 없는 문이요 소통의 문이다.
그 아래 동국사의 옛 이름 ‘금강사(錦江寺)’가 또렷하다.
소녀상이다!
소녀상 건립 역사는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기도 광명 ‘나눔의 집’에 처음 소녀상이 세워지고(1997),
수요집회 1천 회 기념으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두 번째 소녀상이 세워졌다.(2011)
그 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기리고
일본군 성 노예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소녀상을 잇달아 세웠다.
현재 전국에는 약 111개의 소녀상이 있다.
소녀상이 세워진 사찰은 동국사가 유일하다.(2015)
일제 강점기 말의 17세 전후 여학생 사진 3천여 장을 검토한
고광국 작가가 제작한 ‘평화의 소녀상’이다.
한복차림에 단발머리 차림의 맨발로 서 있는
158Cm의 소녀상의 시선은 “용서를 빌라!”는 듯 일본 쪽을 향하고 있다.
소녀상 앞 연못의 사각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대한해협을 상징한다.
소녀상 바로 뒤, ‘참회와 사과의 글’ 참사문(懺謝文)을
돌에 음각한 비석 두 개(한국어·일본어)가 서 있다.
‘... ...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라는 폭거를 범했으며 조선을 종속시키려 했고,
결국 한국을 강점함으로써 하나의 국가와 민족을 말살해 버렸는데,
우리 종문(조동종)은 그 첨병이 되어 한민족의 일본 동화를 획책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 ... 우리는 다시 한 번 맹세한다.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그리고 과거 일본의 억압 때문에
고통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면서 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이다.’
참사문으로부터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동국사 옆에 자리한
‘일제강점기 군산 역사관’이 보인다.
개관 특별전인 ‘수탈의 기억 군산전’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문화·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각종 희귀 유물을 비롯해
벼 공출명령서, 군산미계요람 등 당시 군산의 쌀 수탈과 관련한 자료 등 30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월평균 5,000여명이 방문하는 이 역사관은 문화·경제적 강제 수탈의 아픔을
마주할 수 있는 1만여 점을 보유한 일제강점기 자료 국내 최다 보유 역사관이다.
이 중 절반은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이 수집해 온 유물·자료들이다.
역사관 건립도 스님의 원력에서 비롯됐다.
유독, 한국의 근·현대 불교사에 집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내장사 주지 소임을 마친 은사 스님께서 동국사 주지로 부임하셨습니다.(2005)
큰 스님 시봉하며 절을 호지했는데 의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사찰 관련 자료가 전무한 겁니다.
조선총독부에 보낸 사찰지정 요청공문 정도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패전 직후 관공서, 사찰, 신사 등에 보관된 서류 등을 소각했다.
종걸 스님에 따르면 “서류문서 등을 불태우며 피어오른 들판의 연기가
15일 동안 군산 하늘을 뒤덮었다”고 한다.
동국사는 물론 군산 지역관련 자료도 보기 어려웠다.
동국사 주지를 맡았던 자료부터 파헤쳐갔다.
“조동청(조동종 본산)에 가서 동국사 역사를 확인하러 왔으니 관련 자료를 보여 달라 했습니다.
한 때 조동종 소속 사찰이었으니 적극 협조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마루에 앉아 버티었습니다. 한참 후에야 ‘해외 전도사’라는 자료를 보여주더군요.
살펴보니 1쪽짜리의 한 구석에 동국사 건립기록과 초창기 사진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국에는 전무한 동국사 자료가 일본에는 남아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맞아 떨어졌음을 확인한 순간이다.
동국사와 군산시 관련 사진 한 장이라도 소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으면 곧장 바다를 건넜다.
동국사 소장 유물자료 대부분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에 걸쳐 대한해협을 오가며 수집한 것이다.
글 한 줄, 사진 한 장은 일제 강점기의 시련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팠습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하지만 눈물만은 삼켰습니다.
동국사 창립목적을 단박에 알 수 있는 유물이 있습니다. 소녀상 옆에 있는 범종입니다.
이런 글귀가 새겨 있습니다. ‘천황의 은덕이 영원히 미치게 하니,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복이 일본(내)이나 한국(외)이나 같이 굳건히 될 것이다.’
내선일체 야욕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요.
분노를 일으키는 범종이지만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을 증명해 낼 수 있는 자료가 있어야
그들의 과오를 정확하게 질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을 뒷받침할 학술적 자료가 없으면 우리는 ‘경술국치’ 수모를 또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김호성 동국대학교 교수의 도움으로
조동종의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 스님과 첫 인연을 맺었다.
아오모리현(靑森縣)의 운쇼지(雲祥寺) 주지이자
‘인권·평화·환경’운동단체인 촉광(燭光) 이사장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조동종이 일본 제국주의의 스파이 노릇을 한 것에 분개한
쇼코 스님은 그 실상을 세상에 전하고자 자료를 모으고 있던 차였다.
김호성 교수로부터 한국에 조동종 사찰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사절단을 꾸려 동국사를 방문했다.(2011)
쇼코 스님은 한국에서 조동종이 행한 악업을 정리해 내겠다며
자료수집과 답사 안내 도움을 청했다.
종걸 스님도 일본에서 구할 수 있는 동국사·군산 역사 자료와 함께
일제 강점기를 조명할 수 있는 유물·자료 정보를 수집해 전해 달라 했다.
일제 강점기 역사에 시선을 둔 두 스님은 의기투합해 ‘대한역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시너지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이 보유하고 있는
불교유물·자료 1천여 점은 종걸 스님과 쇼코 스님의 합심해 맺은 결과물이다.
모두 동국사 소유다.
그런데, 종걸 스님은 첫 만남 때 유물·자료 수집과 함께 하나 더 요구했다고 한다.
“조동종 종무원장 명의로 발표(1992) 한 ‘참사문’이 한국에 올곧이 전해졌을 때
진정한 참회와 사과가가 이뤄진다고 전했습니다.
핍박 받은 사람은 한국 땅에 살았었고, 지금도 한국 땅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참사문, 돌에 새겨 세우고 동국사를 자유로이 왕래 하세요!’
공간은 제가 내어준다고 했습니다.”
1년 후, 쇼코 스님은 참사문을 세웠다.(2012)
그리고 ‘조선침략 참회기-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나’(2012-일본어판, 2013-한국어판)를
연이어 출간했다. 동국사 ‘평화의 소녀상’건립에도 물심양면의 힘을 보탰다.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획책에 가담한 단체가 조동종 뿐만은 아니었다.
종걸 스님은 동국사가 소장하고 있는 ‘익산주재 36년사’에 담긴 일화를 전했다.
일본정부에 의해 ‘한국 장학생’으로 파견(1910. 10)된
일련종 소속의 오하시(大橋) 스님이 1910년 10월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익산에 머물며 쓴 일기형식의 책자다.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군산항이 개항됐습니다.(1899. 5.1)
주요 지역에서 징수로 빼앗아 온 곡물은 모두 군산으로 집결했습니다.
군산에는 ‘장미’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의 마을이 아닙니다.
쌀을 저장하는 마을, 장미(藏米)입니다.
일제 강점기 군산의 농지 가격은 일본의 10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누가 땅을 샀을까요? 1930년대 통계를 보면 군산의 토지 중 80%가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일본인들의 농지수탈로 인해 소작농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의 아픔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익산의 농지 가격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하시는 헐값의 익산 땅 수만 평을 사들였습니다.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가을 벼는 농부들이 직접 가져오니 힘들지 않은데,
소작농 집을 일일이 돌며 도장 찍는 일(계약)이 힘들다.’
오하시는 파견 직후 내선일체를 주도하고자 ‘일본어 학당’을 연 후
익산초등학교, 익산여고, 익산 농업고등학교를 세우고,
금융대부 사업도 벌였던 인물입니다.”
‘익산주재 36년사’는 광복 당시 상황도 전하고 있다.
‘내일(8월 15일) 천황께서 옥음(玉音)으로 중대한 발표를 하신다는 연락이 왔다. ... ...
8월 15일 12시. 우리는 라디오 앞에서 군인과 함께 부동자세로 들었다.
천황께서 종전을 선언하셨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36년 동안 익상 땅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오하시는 8월15일 쫓겨 갔다.
“오하시는 임종을 앞두고 후손들에게 일렀습니다.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해외재산 환수법’이 통과되면 익산에 두고 온 내 전 재산을 찾을 수 있다.
너희들은 이 법을 추진하는 정치인을 끝까지 밀어라!’
조선 소작인들의 고혈을 빼 제 잇속만 채워가며 한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오하시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종걸 스님은 폴란드를 향한 독일 정부의 진정성을 전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치의 만행을 반성해 온 독일 정부는
1952년 이후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피해자들에게
총 800억달러(약 97조원)를 배상했습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일찍이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1970)
최근에도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비엘룬(Wieluń)에서 열린
2차 대전 발발 80주년 행사에서 ‘비엘룬 공격의 희생자와 독일의 압제에 희생된
폴란드인에게 용서를 구한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반면, 반인권적ㆍ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한 일본은 지금까지도 진솔하게 반성한 적이 없습니다.”
종걸 스님은 지금까지 수집하고 연구해온 자료를 토대로
‘한·일 근대 불교사’를 다시 쓰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집필 기간만도 3년을 잡고 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인지하고 있다.
일제 잔재에 숨은 의미를 밝혀 후손에게 역사적 교훈으로 전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려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인식의 대 전환이 선행돼야 한다.
청산 보다는 극복, 잊음을 넘어 선 기억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종걸 스님은 그 선두에 서 있다.
“한국은 언제든 일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용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此門不門(차문불문)!’
누구든 들어설 수 있는 문이었다.
그러나 “참사문을 세우고 자유롭게 들어오라” 했다.
동국사(東國寺)와 운쇼지(雲祥寺)는 그렇게 소통했다.
언제든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어린 참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일 양국이 소통할 수 있다. 평화를 향한 종걸 스님의 일갈이 귓전을 울린다.
“우리는 용서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2019년 9월 11일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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