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과 사위가 출근하고 나면 아내는 14개월 남짓한 손자를 돌본다. 우유랑 아침밥을 행여 먹이고 기저귀를 가는 등……내 모습은 내가 봐도 가관이다. 날씨가 따뜻하니 반바지 차림에다 앞치마를 둘렀다. 설거지가 내 몫이기 때문이다. 내 나이 올해 일흔넷이라 저승에 가서 머물러도 될 터인데, 이러고 있다니 억지 논리를 내세우면 이건 은총이다. 모래 바닥에 혀를 꽂고 있어도 이승이 좋다는 말, 더러는 기억하리라.
그러다 틈난다 치자. 식탁 앞에 앉는다. <<성경>>과 4백자 원고지, 네임카드 펜이 얹혀 있으니 집안 일 하다가도 언제나 필사를 할 수 있다. 좀 좋은가? 바야흐로 <마르코 복음>과 씨름하는 (불경스런 표현이지만) 중이다.
정말 깜짝 놀랐다. 우연의 일치 치곤 너무나 신기한(?) 단어가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다. 세상에, ‘곧바로’라는 부사(副詞)가 1장 18절/ 20절/ 21절/28절/ 29절/ 31절에 퍼부어져 있으니 하는 말이다. 딱 두 쪽인데, 자그마치 다섯 번이라면, 의도든 실수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참고로 <<영한대역(英韓對譯) 성경>>을 펼쳐보았더니, 18절, 20절과 21절은 ‘곧바로’가 Then으로 적혀 있다. 28절에는 ‘곧바로’에 해당되는 영어 단어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29절도 마찬가지. 1980년도에 나온 개신교 <<한역성경전서>>와 괌에 갔다가 호텔 객실에서 슬쩍해 온, 일본에서 같은 연도에 펴낸 <<성경>>을 펼쳐 들었다. 거기엔 있었다! 28절은 Immediately, 29절은 As soon as로. 어쨌든 ‘곧바로’가, 이토록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어찌 혼란이 아닐 수 있으랴. 그래 그만큼 예수님이 급박하게 움직이셨다고 해석하자.
어쨌든 부끄러운 고백 하나. 난 여태껏 <<성경>> 필사를 하다가 그만두기를 여러 번 반복한 전력이 있는 것이다. 영세(領洗) 전 <창세기>에 손을 대서 거의 몇 달 만에 <탈출기>까지 필사를 했다. 그러다가 부산 평협 회장을 지낸 이규정 교수의 충고에 따라, <구약>은 일단 접기로 하고 <신약>을 펼쳐 들었다. <마태오 복음>을 거쳐 <마르코 복음>을 거의 인쇄하듯 한글 궁체로 베껴나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시신경이 함몰되기 시작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는다. 전신을 죽음의 그림자가 휩싸고 있는데(거의 사형 선고 직전), 엄마 따라 나도 시각장애인이 된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어느 스님이 그렇게 하루 몇 시간씩 시각을 <<불교 경전>>과 백지에 붙박아 두었다가, 마지막 얻은 것은 실명이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난 통탄하면서 수북이 미리 사 두었었던 필기구를 몽땅 버렸고말고. 소리는 없지만 속이 뒤틀리도록 울부짖기도 했다. 그런데 두어 해 쉬고 나서 같은 안과에 갔는데, 기적처럼 시신경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
그 뒤로 다시 ‘필사 ‧ 포기’를 여러 번 거듭했다. 마침내 겪은 황당무계한 일. 나는 좀체 구하기 힘든 난 4백자 원고지에다 한글 궁체로 성경을 옮겨 썼는데, 쪽수를 표시하지 않은 치명적 실수를 범한 것이다. 뒤죽박죽이 된 두 권 분량의 복음서(루카복음서/ 요한복음서), 제본이 불가능해 마침내 버려야만 했다. 그 심경? 그 또한 차라리 참담했다 하자. 2004년 일이라 이제 망각의 늪에 깊이 빠져 있을 텐데도, 가끔은 아픈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참, 그 때엔 ‘일과 놀이’에서 펴낸 <<성서>>(가톨릭과 개신교 공용)를 볼 때였지.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성경>> 1판 1쇄를 내놓은 게 2005년 9월이니, 그 전에 필사한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필기구를 잡게 된다.
물론 필사 노트가 따로 있긴 하다. 그걸 활용하면 효과적일 것 같으나, 나와는 연때가 맞지 않은 게 확실하다. 작은 글짜(글씨)를 써 넣어야 하는 데에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갖는 것이다. 아니 두렵다. 시신경 어쩌고저쩌고 라는 말? 나도 사람인데, 다시는 그 근처에라도 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다시 4백자 원고지를 구하러 다녔다. 문구점마다 문을 두드렸던 이유다. 수요가 공급에 못 미친다고 엄살이나 그래 한 번 떨어 보자.
이런 저런 이유로 몇 달 쉬다가 성당에 나갔더니, 큰손자 4학년 바오로의 첫영성체 교육 시작 찰나다. 제 어미아비 대신 외할아버지인 내가 뒷바라지를 하기로 했다. 젊은 자모(자매) 사이에 늙수그레한 형제(?)가 끼어들려니 민망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때? 대신 과제가 있다. 학부모 교육에 빠졌으니, 독후감/ 복음서 두 권 필사 등.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일찌감치 해치웠다. 독후감은 책을 주문한 상태라 도착하면, 착수할 예정.
가장 큰 게 두말할 나위 없이 <마르코 복음>이다. 총 48쪽이다. 4백자 원고지로 치면 150쪽 안팎. 정성을 쏟아 쓰면 4백자 원고지 한 장에 20분은 잡아야 한다. 총 ‘3,000분(分)+ 몇 백 분’ 이상의 투자다! 50시간 훨씬 넘게 걸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란 말을 실감하면서 바야흐로 땀을 흘리는 중인 것이다. 이미 상당히 진척이 되었다. 본래 두어 달 말미를 달라고 졸랐으나, 앞으로 열흘 정도면 제본까지 가능하다. 스스로 채찍질한다.
난관이야 왜 없으랴. 이러다가 또 글자가 둘 셋으로 겹쳐 보이면, 낭패이고말고. 중도 포기란 생각도 않는데…….2004년 생각이 난다. <<성서(지금의 성경)>>의 서문에 기록된 언급이다. 행간에 성령님이 존재하신다고. 세월도 흘러 이래저래 더 잃을 것도 없는 나를 성령님이 해코지하시지 않을 거란 믿음으로 맞선다. 필사적이란 수사(修辭)를 동원한 이유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우여곡절을 겪게 해 준 주일학교 교사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내친김에 여태까지의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고, 앞으로 얼마나 더 필사할까 가늠해 보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원칙. 정자(正字)로 쓰기/ 원고지 칸 밖으로 획 벗어나지 않기/ 맞춤법 띄어쓰기 오류 없기/ 틀리면 그 원고지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쓰기(화이트 사용 않기) 등등이다.
(* 200자 원고지 1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