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단원(13-17) 하나님의 전신갑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
둘째 단원의 주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사도는 먼저 어찌하여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말씀한 후에, “전신갑주의 6
가지 목록들”을 제시합니다.
전신갑주의 필요성
첫째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13상) 합니다. “그러므로”, 즉 첫째 단원에서 언급한 대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사 11:6-8) 한, 예언이 성취되는 그 날에는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는 “악한 날”이기 때문에 전신갑주로 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하) 합니다. “행한 후에, 서기 위해서”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여호수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앞 부분은 전투하는 교회의 예표요, 뒷부분은 안식하는 교회의 예표인데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즉 “행한 후에, 안식”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로마 옥중에서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잘 훈련된 로마 군사들과 그들이 입은 갑옷을 눈여겨 보았을 것입니다. 승전고를 울리면서 개선하는 군사들의 늠늠한 행진도 보았을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선한 싸움을 싸우다” 옥에 갇힌 사도가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바로 저것이다. 저들은 혈과 육에 대하여 싸움을 하고 있지만 십자가 군병들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저와 같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필요를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 군사들의 무장인, “허리 띠, 흉배, 그들이 신고 있는 신, 방패, 투구, 검” 등을 영적 군사들에게 하나하나 적용시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은 완전무장을 하라는 말인데 군인들에게 무기가 지급이 되듯이 영적 군사들에게도 전신갑주가 지급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합니다. 그러나 입어야 하는 것은 군사인 우리의 책임입니다.
바울의 서신인 디모데전후서에 보면 군사 용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싸움”을 마치려는 사도가 “성령의 검”을 후임자인 디모데에게 물려주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관이 부하에게 말하듯 “명하노니, 엄히 명하노니” 하고 명령이 하달됩니다. 그 명령의 권위가 장엄한데,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합니다. 얼마나 장업하고 엄숙합니까! 이 명령을 받는 디모데의 자세가 어떠 하리라고 생각되십니까? 차렷 자세입니다.
차렷 자세
그렇습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은, “그런즉 서서”라 말씀합니다. 어깨를 떡 펴고 서 있는 그 자세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의 자세인 것입니다. 형제는 영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까? 어깨를 펴고 담대함과 당당히 서 있는 차렷 자세입니까? 아니면 작은 시련에도 흔들리는 어깨를 축 늘어 뜨리고 고개를 숙인 그런 모습입니까?
구약교회가 그러 했는데 스바냐 선지자는,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습 3:16) 합니다. 하나님깨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시기를 원하실까요? 사도는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3:12) 합니다. 하물며 사탄과 전투하러 출전하는 군사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런즉 서서” 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다”(출 12:41)고 어제까지 바로의 노예였던 그들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군대에게 유월절을 어떻게 먹으라고 명하시는가를 보십시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1) 하십니다. 이것이 출전하려는 여호와의 군대의 자세인데, 지체 없이 뛰쳐나갈 수 있는 만반의 준비 태세인 것입니다. 이 자세가, “그런즉 서서” 하는 본문의 자세인 것입니다.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14). 드디어 무기 창고의 문이 열리고 십자가 군병들은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하여 영적 무기를 공급받게 됩니다. 그들은 전신갑주를 입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머지 않아 영광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만 그러나 지금은 갑옷을 입어야만 하는 군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 합니다. 로마서에서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6가지 목록으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서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이 “전신갑주”는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롬 1:17)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같은 원리로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전시갑주”라 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왜 이처럼 강조하느냐 하면 “전신갑주”를 우리가 마련해야 하는 것인 양 해석하는 견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14상) 합니다. 병사가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게 되면 솟아오르는 힘과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이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하면 “허리 띠”를 질근 매는데 이것이 임전태세인 것입니다. 저는 강단에 설 때 우선적으로 허리 띠를 질근 매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야 힘 있게 선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날에는 실제로 군인들의 권총반도를 맨 적이 있습니다. 반대로 “허리 띠”가 느슨해서 바지가 흘러내린다면 “서서” 있지를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전신갑주 중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는 군사의 “허리 띠”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진리의 허리 띠”라고 “진리(眞理)”에 비유합니다. 비진리의 세력인 사탄을 대적하려면 우선적으로 진리로 대항을 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분들은 “마음의 진실성”이라 합니다. 진실한 마음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되지 못하다면 어떻게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대항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리의 허리 띠”가 우리가 마련해야 할 우리의 “진실성”이라면 마귀의 공격을 막아낼 완전한 갑주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신갑주”는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점을 힘을 주어 강조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고 물은 이 “진리”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한 그리스도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1:13) 한 진리의 말씀으로 보아야만 안전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6번째 목록에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전신갑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말씀으로 마치는” 구조인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허리 띠와, 성령의 검”이 어떻게 다른가? “성령의 검”은 때마다 단
칼에 물리치는 요절과 같은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고, 허리 띠에 비유한 “진리”는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뻗혀 있는 성경신학, 즉 구속사적인 말씀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점을 3:9절에서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허리 띠”는 단편적(斷片的)인 말씀이 아니라, 창세기 3장에서 죄기 들어오자 하나님께서 “내가 하리라”(창 3:15)고 시작하셔서, 마지막 계시록에서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 21:6)고 완성이 되는 “허리 띠”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는 골조(骨組)가 부실한 건물과 같아서 환난 날에 서지를 못합니다. 특히 이단사설에 허약합니다. 구속사(성경신학)적인 “진리의 허리 띠”로 질끈 맨 자만이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3:17) 신앙이 되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형제는 진리로 허리 띠를 띠고 있습니까? 교회가 “평안의 매는 줄”(4:3)로 결속해야 하듯이 군사들이 “진리의 허리 띠”로 질끈 동여 매야만 마귀의 간계를 대적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