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신분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설과 신화의 연구를 시도해 왔다.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연구에 대해서 불의 정복을 둘러싼 전설을 풀기 위한 충분하고 풍부한 설명의 소재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아직도 완전하게 체계화하지 못한 것은 --융이 그 점에 대해서 크게 공헌했지만,--그것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발견을 기초지우려는 과학적 설명, 객관적 설명의 연구이다. 이 章에서 우리는 융의 관찰을 다시 체계지워 완전한 것으로 함으로써 합리적 설명의 약점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선사의 여러 가지 발견에 아주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근대의 과학적 설명에 대해서 비판해야 한다. 이 과학적 설명은 回歸的證明에서 이익을 끄집어 내기를 주장하고 그러기 위해서 원시의 여러 가지 발견의 <심리학적> 여러 조건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메마르고 간략한 합리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의식적인 것 아래 무의식적인 것을, 객관적 증명 아래 주관적 가치를, 실험 아래 몽상을 구하는 간접적이고 또한 제 2차적 정신분석학이 등장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사람은 우선 꿈꾼 것만을 연구할 수가 있다. 과학은 실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보다는 몽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많은 실험을 필요로 하는 것은 꿈의 안개를 흩어 버리기 위한 것이 될 것이다. 특히 객관적인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 동일물질에서 작용하는 똑같은 행위는, 원시인과 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에 맞설 정도의 서로 다른 心性에 있어서는 동일한 주관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원시인에 있어서 사고란 집중된 몽상이고 교육을 받은 사람에 있어서의 몽상이라는 온화한 사고이다. 움직이는 방향은 두 경우에 있어 서로 반대된다. 예를 들면 원시인은 마른 두 쪽의 나무를 비벼댐으로 불이 생겼다는 것이 합리주의적 설명의 중심사상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 그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느냐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응용되는 <객관적인>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대개는 이 최초의 발견의 심리학을 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밝히려고 애쓰고 있는 극히 소수의 저자들 가운데도 그 대부분은 숲속의 불이 여름에 가지와 가지의 <마찰>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고발하고자 하는 회귀적 합리주의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그들은 소박한 관찰의 여러 가지 조건을 재생시키지 않고, 하나의 이미 알고 있는 과학에서 출발하여 이 推論에 의해서 판단을 내리고 있다.
현재도 사람들은 숲속의 불에 대해서 별다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할 때는, 그 분명하지 않은 것의 원인은 마찰작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현상은 자연의 양상 그대로 관찰되어진 적은 결코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이 관찰되어졌을지라도 다만 단순한 현상에 접근했을 때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찰작용은 아닐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의 <충격>으로 나무에 불이 일어나게 된 마찰과 마찬가지로, 오래 준비된 점진적인 현상을 암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결론에 이른다. 즉, 불을 낳기 위해서 원시인에 의해서 이용되는 마찰에 기초를 둔 실천의 어떠한 것도 하나의 자연현상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시사된 적은 없는 것이다.
이 난점을 실레겔(schlegel)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해결을 하지는 않았으나 합리적인 표현으로 제기된 문제가 원시인의 심리적 가능성에 적응하지 않음을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原註1) [문화라는 대건축물 전체의 초석인 불을 단순히 발견하는 일도, 프로메테우스의 우화가 그것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 거친 단계에서부터 고려하여 그것이 극복할 수 없이 곤란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불만큼 일반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몇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대지에서 불을 본 일도 없이 황야를 헤메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을 뿜고 있는 화산, 벼락에 의해서 타오르는 숲이 인간에게 인정받았다고 하자.
즉, 거칠고 불순한 계절과 마주보며 헐벗은 채로 참아온 사람이 거기서 몸을 녹이기 위해서 바로 달려간 것일까? 차라리 도망간 것이 아닐까? 불의 광경은 길들여진 생활에 의해서 거기서 익숙해진 동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동물에겐 공포를 준다. 자연이 제공한 불의 고마운 효용을 경험한 후에 인간은 어떻게 불을 보유한 것일까?
한 번 꺼져 버리면 인간은 어떻게 하여 그것을 다시 붙일 수 있었을까? 만일 마른 두 쪽의 나무가 처음으로 원시인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할지라도 어떠한 경험이 그것을 재빠르게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마찰시켜서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일까?]
2
반대로 만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설명이 원시의 정신에 의한 발견의 이유를 명백하게 하는 데 불충분하다면, 보기에 제아무리 대담한 정신분석적인 설명도 결국은 진실의 심리학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첫째로 마찰은 바로 性的인 경험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고전적인 정신분석에 의해서 모아진 심리학적 기록에 눈을 돌리면 이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둘째로 만일 열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인상의 특수한 정신분석의 여러 가지 보고를 잘 체계화하려고 하면, 마찰에 의해서 불을 낳는 <개관적> 시도가 아주 내적인 경험에 의해서 나타나게 됨을 확신할 수 있다.
불의 현상과 그 재생산 사이의 回路가 가장 짧아지는 것은 이 방향에 있어서이다. 사람은 불의 객관적인 재생산에 있어서의 최초의 과학적 가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知的 철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늠름한 熱愛者이며 신들의 질투는 복수에 몸을 태우는 자의 복수이다.
이 정신분적인 고찰을 정식화해 버리면 바로 많은 전설과 관습을 쉽게 설명할 수가 있다. 합리적 설명의 무의식 속에 흔입되어 있는 표현이 새로운 빛 속에서 해명될 것이다. 인류의 기원의 연구에 지극히 날카로운 심리학적 직관을 가지고 온 막스 뮐러는 심오한 언어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정신분석적인 직관 가까이 그것을 식별함이 없이 지나간다(原註2).
[불에 대해서는 말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여기에 그 첫 번째의 것이 있다. [불은 나무 두 조각의 자식이다.] 어째서 <자식>일까? 이 발생론적 견해에 현혹되어 있는 것은 누구인가? 원시인인가 아니면 막스 뮐러인가. 이와 같은 영상은 어느 쪽에서 더 명석해질 것인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명백한 것일까, 아니면 주관적인 것일까? 그것을 밝히는 경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조각의 나무를 비벼댄다는 객관적 경험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육체를 불과 함께 태워버리는 더 강하고 애정이 깃든 비범의 내밀한 경험인가. 불이 나무의 자식임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족하다.
비밀로 남은 사랑의 과실인 이 불순한 불이 거의 그 발단에 있어서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새겨내고 있는데 놀랄 것인가? 막스 뮐러의 표현은 이 점에 대해서 잘 밝히고 있다. 원시의 불에 대해서 말하는 제 2의 사항은 <태어나기가 무섭게 불은 왜 그 부모, 즉 자기를 낳게 한 두 개의 나뭇조각을 태워버리는가?>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처럼 묘하고 완전하게 표시된 젓은 없었다.
만일 당신에게 불이 결여될 경우 그 <타는 듯한> 좌절감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그 불이 당신의 내부에 멈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불을 낳는다면 이번에는 스핑크스가 당신을 태워버릴 것이다. 사랑이란 옮기며 전달되는 불에 지나지 않고, 불이란 농락해야만 할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막스 뮐러는 당연하게도 프로이트 시대의 심리학적 혁명이 가지고 온 새로운 지식을 이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몇 개의 모순이 그의 언어학적 명제 속에까지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원시인이 불을 思惟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였을 때, 무엇이 일어나야만 했던가?] 그는 불이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서 탕진자이거나 조명자라고 거기에 이름을 부여할 수가 있다.
여기서 막스 뮐러의 <개관적> 설명에 한한 경우, 사람들은 원시에 있어서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닿기 전에 항상 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을 이름 붙이는 것은, 결국 시각적인 여러 가지 속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막스 뮐러의 말에 의하면 <인간을 사로잡는 것은 특히 불의 재빠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민감한(le vif) 것, 날렵한(l´agile) 것, 아그니(Agnis, 불(ignis>이라고 불리워진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간접적이고 불규칙한 일련의 현상에 의한 이 호칭은 당연히 아주 인위적으로 보일 것이다. 한데 반대로 정신분석적 설명은 모든 것을 다시 세운다. 그렇다. 불은 아그니(Agnis)이고 아질(Agile)이다.
그러나 원시적이고 신속한 것, 그것이야말로 태어나게 되는 현상 이전의 <인간적> 원인이고, 더 내밀한 애무를 모방하여 도랑 속에 절굿공이를 처박는 손이다. 불은 나무의 자식이기 이전에 인간의 자식이다.
3
先史의 인간의 심리학을 밝히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방법은 아직도 존재해 있는 미개인을 연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궁극에 있어 더 완전하게 적합한 것처럼 느껴지는 <원초성>이라는 것에 대한 다른 여러 가지 예가 존재한다. 사실 적절한 객관적 태도를 취하는 일의 곤란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새로운> 현상을 고찰함으로써 족하다.
현상의 <未知>의 측면은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그 객관화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지>라는 것에 대응하는 것은 무지가 아니고 오류이며, 그 오류는 주관적 결함에 의해서 그 짐이 과중해진 오류이다.
<원시성>의 심리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본질적으로 새로운 과학적 인식을 고찰하고 다음에 유효한 과학적 발견의 방법에 무지하고 잘못 되어진 비과학적인 정신의 여러 가지 반발을 추구해 나가기만 하면 족하다.
18세기에 있어서의 電氣의 과학은 이 점에 있어 우리에게 심리학적 고찰의 끝없는 광맥이 될 것이다. 특히 <전기불>은 정신분석적 관심을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현상의 위치에까지 내려진 보통 불보다 아마도 훨씬 <성적인 불>이다.
그것은 신비적이기 때문에 명백하게 성적이다. 우리가 명료하게 제 1의 적인 성적 특성을 지적한 마찰의 관념에 관해서 우리는 불에 대해서 말한 모든 것이 전기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자연학과 역학에 관한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해서 국왕의 허가를 받은 기술자이며, 또 변호사인> 샤를르 바비코는 1753년에 《원소적 불의 광경 또는 실험적 전기론》이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 속에는 마찰에 의해서 불이 생기는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章에서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정신분석적 명제의 하나의 (換位命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찰이 전기의 원인인 점에서 라비코는 마찰의 문제에 관해서 <兩性의 전기이론>의 전개를 시도한다.
[기분 좋은 마찰은 우리가 精液이라고 부르는 精氣的物質을 포함한 물질의 통과와 탈출을 막는 공기의 정기로 된 부분을 전개한다. 이 전기를 일으키는 마찰은 우리의 내부에서 희박해지고 불의 精氣가 마찰된 장소에 축적됨에 따라 어느 감각, 즉 불의 정기의 끝의 섬세함에 의해 간지러움을 일으킨다.
이때 그 液은 분위기 속에 축적된 불의 정기의 경쾌함에 못 견디어 그 자리를 떠나, 또한 하나의 분위기에 지나지 않는 子宮속에 퍼붓는다. 膣은 이 자궁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는 종합적 貯水槽로 통하는 관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性器 안에는 성감부분이 있다. 이 부분과 여성과의 연결은 남성의 성감부분과 남성의 관계와 같다.
이 부분도 비슷한 희박한 기능, 간지러움, 감각 등을 받는다. 이 同一部分도 또 마찰작용에 참여한다. 불의 정기의 첨단은 여성의 성기 안에서 더욱더 감각적이 된다........여성의 성기는 卵巢 속에 있는 조그만 人間球體를 보관하는 것이다. 이 조그만 구체는 타성적이고 생기가 없는 전기를 일으키는 물질이다.
즉, 그것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초나 또는 생명의 불꽃을 받고자 대기하는 알, 과일의 씨, 종자식물의 씨 같은 것이다. 결국 그것은 불의 정기를 기다리는 불쏘시개나 성냥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이미 독자의 인내심을 지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넓은 범위에 걸쳐 그 수도 무수한 같은 원본이 실로 명확하게 우리에게 <純粹力學>에 열중하려는 그 정신의 밀도 있는 기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신뢰의 중심이 결코 객관적 실험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찰되어 타오르는 전기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고 생식행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고 있다.
마찰에 무의식의 성적인 倍振動이 결여될 때, 그 배진동이 윤기 없는 단단한 영혼 속에서 활홀케 하는 공명을 일으키지 않을 때, 마찰작용은 순수한 역학적인 장소로 돌아가 그 설명력을 상실한다. 이 관점에서 아마도 熱動力學理論이 맞부딪친 오랜 저항을 精神分析的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적인 표상에 있어서는 매우 명석하고 사실, 실증적인 정신에 있어서는 매우 만족할 만한 이 이론도 前科學的精神에 있어서는 깊이가 없는, 즉 무의식의 충족이 없다고 이해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일련의 서간형식으로 와트슨(G. Watson)에게 보낸 《전기의 원인에 대한 試論》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자기의 환멸을 표명하고 있다. [나는 불이 마찰에 의해서 생긴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이론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나에게는 물이 펌프에 의해서 생긴다는 주장과 똑같아 보인다.]
드 샤틀레 부인으로 말하면 그녀는 이 명제 속에서 조금 계몽되는 점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불은 하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
[가장 맹렬한 불이 외관상은 가장 냉정한 육체가 부딪침으로써 순간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야말로 의심없이 대자연의 최대의 기적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와 같이 근대 에네르기론이 가르치는 바에 기초를 두고, 부싯돌의 粒子의 충돌이 그 灼熱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을 즉시 이해하는 과학정신에 있어서는 자명한 것의 하나인 사실도, 드 샤틀레 부인 같은 前科學的인 정신에 있어서는 불가해한 대상이 된다. 그녀는 실체론적 설명, <심오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심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감추는 것이고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그것을 생각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4
만일 독자가 완고한 공리주의로부터 자기를 해방하고 선사의 인간은 불행과 필요성에 싫건 좋건 얽매어 있다고 상상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명제는 그다지 대담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여행자가 우리에게 미개인의 무관심성을 가볍게 말한다. 우리는 그 점에도 불구하고 동굴에서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 관한 생활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소름이 끼친다.
아마도 우리의 조상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에 민감하지 않았기에 더욱 기쁨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고 자신의 행복을 더 의식했을 것이다. 육체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뜨거운 기분 좋은 행복이 원초적인 경험에 가치를 부여했는지 모른다.
마른나무의 오목한 곳에 몽둥이를 넣어 그것이 타도록 하려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노동은 그 몽상이 아주 성적인 하나의 存在者에 있어서는 매우 감미로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이 노래하는 것을 배운 것도 아마 이 우아한 노동 속에서일 것이다. 하여튼 그것은 분명히 율동적인 노동이고 일하는 자의 율동에 <대답하고> 그에게 기분 좋은 여러 가지의 메아리를 가지고 오는 노동이다.
마찰하는 팔, 서로 부딪치는 나무, 노래하는 소리, 모든 것이 같은 조화, 같은 율동적인 機能亢進 속에 통일되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희망, 그 <가치>가 알려져 있는 하나의 목적에 집중한다. 사람은 마찰하는 일에 관계하기가 무섭게, 감미로운 객관적인 따뜻함을 경험하는 동시에 기분 좋은 행동의 뜨거운 인상을 가질 것이다.
리듬은 서로가 서로를 昻揚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유도하고 자기유도에 의해서 지속된다. 만일 우리가 진동하는 것에만 <시간적 실제성>을 주라고 우리에게 충고하는 핀하이로 도스 산토스씨의 리듬분석의 심리학적 여러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율동적인 노동 속에 발생하는 활력에 넘치는 다이나미즘, 조화있는 심리작용의 가치를 이해할 것이다.
향연에 가담하는 것은 바로 존재 전체이다. 원시인들이 처음에 그 자신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 자기 의식을 되찾는 것은 고통 속에서보다는 향연 속에서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방법은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이따금 더 敎示的이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마찰에 의해서 불을 일으키는 원시적인 방법을 <이해하는> 그 신선학과 그 공감에 도취되기 위해서는, 이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르지니와 생각에 잠긴 폴은 그의 친구에게 조금 자란 캐비지야자의 꼭대기에 있는 <가시가 있는 새싹>을 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도끼로도 찍기가 힘든데 폴은 칼도 갖고 있지 않다. 폴은 나무뿌리를 태워버리고자 하나 부싯돌도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이 섬은 바위로 덮여 있으면서도 부싯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서 버려져 있음을 나타내는 이 생각과 새로운 생각에 넘치는 간결한 문장에 유의한다. 이 문장은 정신분석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결심, 즉 흑인들의 방법에 의지하는 필요를 나타내고 있다. 이 방법은 그 적용에 앞서 의외로 놀랄만한 간단한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原註3).
[돌의 뾰족한 모서리로 그는 잘 마른 하나의 나뭇가지에 구멍을 뚫고 그 가지를 그의 두 다리 밑에 꽉 누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돌의 예리한 날이 된 부분으로 똑같이 메마른 質이 다른 나뭇가지의 끝을 뾰족하게 하여, 그 끝을 그가 발로 밟고 있는 나무의 조그만 구멍에 처박고, 초콜렛에 거품을 일게 하기 위해서 젓는 棒을 돌리듯 그 봉을 두 손 사이에 끼고 재빨리 돌렸다.
그러자 바로 가지가 서로 닿는 곳에서 연기와 불씨가 나타났다. 그는 마른 잎과 잔가지를 모아 캐비지야자의 나무뿌리 아래서 불을 피웠다. 이윽고 그 나무는 큰소리를 내고 쓰러졌다. 또 그 불은 새싹을 쌓고 있는 목질의 가시가 많은 긴 잎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비르지니와 그는 새싹의 일부를 날로 먹고 나머지를 잿속에 묻어 구워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것이나 맛이 있다고 느꼈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다른 성질>의 두 조각의 나무를 권한 점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시적 심성에 있어서 이 차이는 성적인 차원이다.
《아르카디아 기행》 속에서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는 전혀 아무런 이유 없이 송악(liere)과 월계수(laurier)를 열거할 것이다. 마찰봉과 초콜렛에 거품을 일게 하는 얼레봉의 비교가 이 과학적인 주장에 눌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언제나 읽고 있던 놀레수도사의 <물리학> 속에서 되찾게 된다.
이 꿈과 독서의 혼돈은 그것만으로도 이성화의 징후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이 작가는 자기의 이야기의 부조리를 눈치챈 것 같지 않다. 도취시키는 공상이 그를 싣고 가고 그의 무의식은 서로 사랑하는 감미로운 신뢰 속에서 고통 없이 커지는 태초의 불의 기쁨을 되찾는다.
마찰운동이 충분히 기분 좋게 계속되는 것이라면 활발한 마찰운동의 <리듬의 조화>가 <황홀감>을 일으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간단할 것이다. 심한 가속도가 가라앉고, 다른 리듬이 준비되고, 일하는 자의 얼굴에 미소와 편안함이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 기쁨은 객관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특수한 감정의 힘의 표시이다. 어느 주부들의 지나치게 섬세한 마음씀 속에서도 그 충분한 설명을 찾아낼 수 없는 마찰, 닦고, 갈고, 윤을 내는 일의 기쁨도 이처럼 설명되는 것이다. 발자크가 《고브섹크》 속에서 노처녀들의 <차디찬 실내>가 가장 윤기로 둘러싸여 있다고 지적했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청결함은 불결의 하나의 형식이다.
어느 정신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초과학적인 이론 속에서 아주 몽상 속에 있는 고독한 사랑의 상태를 넘어서 육체적인 상호간의 사랑의 단계에 이르는 마찰의 <價値附與作用>을 주저함이 없이 강조한다. 그의 저작이 수없이 판을 거듭한 J·B·로비네는 176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빛을 주기 위해서 닦여진 돌은 자기 속에서 무엇을 구하는가를 이해한다.
고로 그 빛은 겸양의 표시이다......나는 광석이 선행의 으뜸가는 그리고 최대의 보수인 달콤한 충족을 享有함이 없이는, 스스로의 미덕에 의해서 우리에게 그처럼 많은 좋은 일을 해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객관적으로는 매우 부조리한 의견이라도 깊이 뿌리박은 심리적 원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때로는 로비네는 <과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글을 멈춘다. 정신분석가라면 <자신을 배반하는 것이 두려워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긴장은 이미 아주 명백하다. 긴장이야말로 해명되어져야만 하는 심리적 실재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여러 가지 결과에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과학사가 하는 것처럼 그것을 묵살할 권리는 갖고 있지 않다.
요약하면 우리는 구스타프 칼 융이 한 것처럼 일체의 원시적인 활동 속에 리비도의 구성요소를 체계적으로 탐구하기를 제안한다. 실제 리비도가 승화되는 것은 예술에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행위적 인간의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어떤 사람이 인간을 손과 언어로써 규정지을 때,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매우 잘 그것을 표명할 것이다.
그러나 <도움이 되는> 동작이 <좋은> 동작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손은 목소리가 노래하는 기관인 것처럼 애무하는 기관이다. 처음 애무와 노동은 서로 연결된 것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걸리는 노동은 상대적으로 기분 좋은 노동이다. 어느 여행자는 우리에게 두 달 동안이나 계속되는 노동에 종사함으로써 비로소 물건을 연마해서 형성하는 미개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완성시키는 도구가 부드러우면 부드러울수록 그 연마하는 일은 더욱 아름답고 섬세한 것이 된다. 좀 역설 같지만 우리는 새겨진 돌의 나이를, 애무를 받은 돌의 나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난폭한 사람은 부싯돌을 부숴버린다. 그는 그것을 잘 쓸 줄을 모르는 것이다. 부싯돌을 잘 쓰는 사람은 부싯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여성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을 사랑한다.
우리가 잘 닦은 부싯돌의 날을 응시할 때, 말할 수 없이 멋지게 생긴 그 잘리는 면은 힘의 <환원>에 의해서 억제되고 함축이 있는 방향지워진 힘에 의해서, 즉 <정신분석된> 힘에 의해서 얻어졌다는 생각을 누를 수가 없다.
닦여진 돌과 더불어 우리는 간헐적인 애무로부터 계속적인 애무로, 기분 좋게 감싸는 율동적이고 매혹적인 운동으로 옮겨간다. 모든 경우에 이처럼 힘차게 일하는 사람은 추억과 희망의 양자에 의해서 힘을 얻는다. 고로 우리는 그의 몽상의 비밀을 감정의 여러 가지 힘의 영역에서 구해야만 한다.
5
축제의 신호는 언제나 마찰에 의한 불의 생산과 연결된다. 중세에는 매우 유명하고 미개한 부족들에 거의 보급되어 있는 불의 축제 속에서도 때로는 그 始原의 관습에의 回歸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불의 <탄생>이 그 숭배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A·모오리에 의하면 게르마니아 지방에서는 노스포이에르 또는 노드픠르라는 두 개의 나무쪽을 비빔으로써 불을 붙이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샤토브리앙은 나체쯔 지방에서 행해지는 <불의 의식>에 관한 기술을 길게 하고 있다. 그 축제의 전날 밤 1년 동안 계속 타던 불은 꺼지도록 내버려둔다.
새벽이 되기 전에 사제는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우면서 두 개의 나무쪽을 천천히 마찰시킨다. 새해의 태양이 나타나면 사제는 그 운동의 속도를 빨리 한다. [대사제가 성스러운 외침을 지르는 순간 불은 마찰에 의해 열기 띤 나무에 붙는다. 유황을 칠한 불씨가 불을 받는다. 주술사가 갈대굴레에 불을 옳긴다. 그러자 불꽃은 그 굴레를 둘러싸고 나선형으로 타오른다.
참나무 껍질이 제단 위에서 불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불이 마을 집들의 꺼진 화로에 새로운 불씨를 준다.](原註4) 이와 같이 하여 나체쯔 지방에 있어서의 태양신 숭배의 제사를 겸한 이 의식은 특히 불의 <播種>의식이다. 그 불씨는 씨로서의 완전한 힘을 갖기 위해서, 불을 일으키는 마찰도구에서 태어난 그 최초의 강렬함으로써 잡아야 한다. 여기서 마찰하는 방법은 자연의 방법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인간이 거기에 자기의 독자적인 자연을 통해서 도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 번 더 되풀이하자. 진실로 불은 천계로부터 훔쳐오기 전에 우리의 내부에서 발견된 것이다.
프레이저는 마찰에 의해서 점화된 祝火에 매우 많은 예를 제공하고 있다. 그 중에서 벨르텐 제사의 스코틀랜드의 불은 <神불> 혹은 <淨火>에 의해 불태워진다(原註5). [두 개의 나무쪽을 심하게 비벼댐으로써 불이 생겨나며, 불씨가 흩어지면 그 틈을 타서 참나무 고목에서 자라는 매우 잘 타는 버섯의 일종을 거기에 댄다.
이 불은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것처럼 보이고 여러 가지 공덕이 나타난다. 그들은 그것을 인간이나 가축을 위해 마귀를 제거하는 힘이며, 염병에 대한 최량의 약이라고 믿는다.] 프레이저가 <하늘에서 이 神불이 직접 내려온다>고 말했을 때 그는 도대체 어떠한 출현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부터 프레이저의 모든 설명체계가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프레이저는 실제로 그의 설명의 모티브를 유용성에 둔다. 그러기 때문에 祝火로부터 아마밭·밀밭·보리밭들을 풍부하게 하는 재가 나오는 것이다.
이 최초의 입증은 탄산염과 또 다른 화학비료의 효용을 간단히 믿고 있는 오늘날의 독자를 그릇되게 하는 일종의 무의식의 이성화를 도입한다. 그러나 깊고 모호한 가치로 빠지는 것을 더 가까이서 보자. 신불에서 얻은 이 재는 수확을 가져오게 될 대지에 기여할 뿐아니라 동물을 살찌게 하는 사료에도 혼합된다.
또 때로는 그것은 가축을 늘이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결국 그 습관의 심리학적 원리가 명백해진다. 동물이 살찌건 전답이 비옥해지건 명백한 유용성 저쪽에는 더 내밀의 꿈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다시없는 性的인 형식을 취한 다산성의 꿈인 것이다. 축화의 재는 동물과 전답들을 수태시킨다.
<그런 까닭에> 이 재들은 여성들을 수태시킨다. 객관적 귀납을 위한 기초를 형성하는 것은 불꽃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다. <유용성>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은 기분 좋음이라는 설명에 양보해야 되며, 합리적 설명은 정신분석적인 설명에 양보해야 된다는 것을 거듭 말해둔다.
우리들은 그러기를 제안하지만 그 중점이 기분 좋은 가치에 놓일 때 설사 불이 후에 <유용>할지라도 그것은 그 준비 속에서 이미 <기분 좋다>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나중보다는 그 전이 더 감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만일 미개인이 축화, 즉 始原의 불은 모든 종류의 효력을 갖고 힘과 건강을 준다고 믿더라도, 그것은 그 불이 번쩍이고 그의 여러 가지 욕망을 충족하려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사는 인간의 행복, 그 內密의 그리고 거의 이겨낼 수 없는 힘을 그가 체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더 밀고 나가서 그 모든 세부에 있어서 프레이저의 설명을 역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이저의 경우 축화는 식물의, 특히 숲속 식물의 신성한 죽음과 관계가 있는 제사로 되어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식물의 신성이 미개의 영혼 가운데서 이다지도 큰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도대체 나무의 최초의 <인간적> 기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모의 보잘것없는 과일인가? 아니면 그것은 불이 아닌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생긴다. 즉, 프레이저가 믿고 있듯 그들은 나무를 예배하고자 불을 일으키는가, 또는 보다 깊은 애니미즘적인 설명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불을 숭배하고자 나무를 태우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이 후자의 해석이 프레이저의 해석에서는 설명되지 않은 채로 있는 <불의 축제>에 관한 세부에 대해서 많은 빛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왜 옛날부터의 관습으로 이따금 젊은 남녀가 함께 또는 그 마을에서 막 결혼한 남자에 의해 祝火의 불을 붙이도록 권하는 것일까?
프레이저가 우리에게 <그 해에 풍작을 구하고 또는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 또는 몸이 아픈 것을 막기 위해 잿더미> 위를 뛰어넘는 젊은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 열거한 세 개의 동기 가운데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명백하게 압도적인 무엇은 없는 것일까? 왜 갓 결혼한 마을의 새색시가 불 위를 뛰어넘어야 하는가? 왜 아일랜드에서는 <젊은 아가씨가 앞뒤로 세 번씩 불 위를 뛰어넘으면 바로 결혼하고 행복해지고 자식 복을 받는 것일까?> 왜 어떤 젊은이들은 <세례 요한 축제의 불은 자기들을 불태우지 않는다고 믿는 것일까?>
아주 다른 신뢰성을 기초잡기 위해서 그들은 개관적이라기보다는 훨씬 내밀한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브라질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몸을 태우는 일 없이 입 속에 불을 넣는 것일까?> 도대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무모한 일을 하도록 하는 근본적 경험은 무엇일까? 왜 아일랜드 사람들은 <새끼를 낳지 않는 가축을 내몰아, 夏至 때 불 밑을 지나가게 하는가?>
게다가 레크(Lech)계곡의 다음과 같은 전설도 역시 명확하다. [젊은 남자와 아가씨가 함께 夏至 때 불을 뛰어넘는 순간 불에 타지 않는다면 그 아가씨는 일 년 이내에는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즉, 불꽃이 그녀에 닿지 않아 잉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 몸을 태움이 없이 불과 희롱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프레이저는 이 후자의 실례에 대해서 <에스토니아 사람들 사이에서 하지 때 축제를 특징짓는 것처럼 보이는 저 방종한 광경>을 연결할 수 있는지 어떤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에게 되는대로 참조를 늘어놓은 책에서 이 불의 향연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는 북부 인도에 있어서의 불의 축제, <음탕하지는 않지만 방종한 노래와 춤이 동반된> 축제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우리에게 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 최후의 평은 설명방법의 어떤 단절을 나타낸다. 우리는 프레이저의 이론 속에서 해덥을 얻지 못하지만 그러나 불의 원초적 性化作用이라는 사고방식에 의해서 해명되는 문제를 많이 들 수가 있다. 사회학적 설명의 불충분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카알 융의 리비도를 병행해서 읽는 것이 좋다.
<겨우살이의 문제>와 같이 극도로 명확한 점에 관해서도 정신분석가의 통찰은 결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또 사람들은 융의 책 속에서 마찰과 원초적인 불의 성적인 성격에 관한 우리의 이론을 지지하는 많은 논증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들 여러 논증을 체계화하고, 거기에 깊이는 없어도 객관적 인식과 가까운 심성의 고뇌에서 끄집어낸 여러 가지 기록을 덧붙인 데 지나지 않는다.
6
《불의 기원에 관한 신화》라는 제목이 붙은 프레이저의 특수한 책은 페이지마다 정신분석이 실제에 있어서 불필요한 정도로 명백한 성적 흔적을 암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시도하는 우리의 목적은 근대의 心性을 연구하는 데 있으므로 우리는 프레이저에 의해 연구된 미개의 심성을 상세히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로 우리는 사회학자의 해석을 정신분석적 의미로 정정하는 필요성을 나타내고자 두세 개의 예를 들기로 한다.
이따금 불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의 특성인 붉은 표지를 꼬리에 단 또 한 마리의 조그만 새이다. 어떤 오스트레일리아의 부족에 있어서는 그 전설이 매우 불쾌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는 차라리 그 새가 불을 훔치는 데 성공한 것은 그것이 유쾌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는지도 모른다.
[귀머거리의 殺母蛇가 옛날에 불을 독점했었다. 그는 자기 몸속에 그 불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새나 모두 그것을 훔치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조그만 매가 갑자기 날아와 아주 재미있는 광대놀이를 하자, 그 살모사는 그 찡그린 얼굴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어 웃고 말았다. 이때에 불은 그에게서 도망쳐 마침내 共有의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왕왕 불의 전설은 방종한 사랑의 전설이었다. 불은 무수한 농담과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불은 <도적>맞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창조적인 모든 동물에 대해서 산재해 있다. 불을 훔치는 것은 대부분 새, 즉 굴뚝새·울새·벌새 등 조그만 동물들이다. 때로는 그것은 꼬리 끝으로 불을 나르는 토끼·오소리, 또는 여우일 때도 있다.
다른 곳에서는 여자들이 서로 때리고 싸우는 일도 있는데 <마침내 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전투용의 굵고 짧은 몽둥이를 부러뜨린다. 그러자 여기에서 불이 생겨난다.> 불은 또 <나무에서 두 개의 몽둥이를 잘라 그것을 서로 심하게 비벼댐으로써 자기의 분노를 위로하는 노파에 의해서 생겨난다.>
수없이 불의 창조는 심한 힘에 연결되어 있다. 즉, 불은 내적인 분노가 타오르는 손에 의해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하나의 객관적 발견의 근원으로서 감정성을 강하게 띤 심리상태에 언제나 부딪친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때 우리는 몇 종류의 불을, 즉 온화한 불, 음험한 불, 반역적인 불, 난폭한 불이라는 구별을 지어 그것을 욕망과 정열의 기초 심리학에 따라서 특징지을 수가 있다.
어느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은 어떤 토템 신앙의 동물인 유로(Euro)와 같은 동물이 그 몸 속에 불을 넣고 다닌다는 것을 되새기고 있다. 한 남자가 그것을 죽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 동물이 불을 만드는가, 또는 그것이 어디서 오는가를 알기 위해서 몸을 주의 깊게 조사했다. 그리고 매우 긴 수놈의 생식기를 뜯어내어 그것을 둘로 잘라 거기에 붉은 불이 있는 것을 알아내었다.]
만일 어느 세대나 그것을 믿을만한 내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와 같은 전설이 어떻게 계승되었을까?
다른 부족에 있어서는 [남자들은 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여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숲속으로 사냥을 나간 사이에 여자들은 자기들이 음식물을 익혀서 자기들끼리 먹었다. 여자들이 자기의 식사를 마쳤을 때 그녀들은 멀리서 남자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불에 대해서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빨리 불씨가 남아 있는 재를 긁어모아 남자들이 그것을 볼 수가 없도록 자기들의 음부에 감추었다. 남자들이 돌아와 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나 여자들은 불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연구할 경우 사람들은 <실재론적인 설명의 전면적 불가능성>을, 그리고 바로 그때 반대로 정신분석적 설명이 직접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에 있어서는 <실재적인 불>, <객관적인 불>을 많은 신화가 말하고 있듯이, 몸의 내부에 감출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명료한 사실일 것이다.
또 사람들이 이처럼 쉽게 거짓말을 하고 어떠한 명백한 증거에도 거역하여 가장 내적인 욕구를 부정하면서 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의 평면에 있어서라는 것도 동등하게 옳을 것이다.
남미의 신화에서는 어떤 영웅이 불을 얻고자, 한 여자를 추적한다. [그는 그녀를 달려가서 붙잡았다. 그는 그녀에게 만일 네가 나에게 불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면 너를 약탈하겠다고 말했다. 몇 마디의 구실을 붙인 후에 여자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여자는 땅에 누워 두 발을 벌리고 배 위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불덩어리가 본래 달려 있는 수로를 통해 大地로 굴러 나왔다. 그것은 오늘날 알고 있는 불은 아니다. 그것은 타고 있지도 않았고 물건을 익히지도 못했다.
그러한 특성은 여자가 그것을 놓았던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지제코는 그것을 본래의 상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고 태울 수 있는 나무껍질·과일·붉은 후추의 열매를 모았다. 그리고 그것들과 여자의 불로 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불을 만든 것이다.]
이 例는 우리에게 <비유에서 실재로> 옮겨가는 명석한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이 이동은 실재론적 설명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실재에서 비유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주 반대로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이론의 착상과 일치하여 주관적 기원의 비유로부터 객관적 실재로 가는 것이다.
사랑의 불과 후추의 불이 결합하여 마침내 마른 풀을 태우는 것이다. 불의 발견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 不條理性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그 실재론적인 설명의 부족함에 대해 놀라지 않고서는 프레이저의 풍부하고 매혹적인 그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연구되어 있는 전설의 수는 아마 1천 개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다만 성과 연결된 것은 2,3개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로 말하면 그 바닥에 있는 감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객관적 설명을 주기 위한 목적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불의 기원에 관한 하와이의 신화는 많은 같은 형의 오스트레일리아 신화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종류의 새의 특정한 색깔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곳에서는 토끼에 의한 불의 도난은 그 꼬리의 짙은 갈색 또는 흑색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객관적 細部에 사로잡혀 있는 이와 같은 설명은 감정적 관심의 원초성을 고려에 넣지 않게 된다.
원초의 현상학이란 감정의 현상학이다. 그것은 몽상에 의해서 투사되어 있는 환상으로부터 객관적 존재를, 욕망으로부터 이미지를, 신체적 경험으로부터 물질적 경험을, 사랑으로부터 불을 창조한 것이다.
7
다소 원초성의 영속적인 경험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낭만파의 사람들은 그것을 추호도 의심함이 없이 성적인 가치를 부여받은 불의 주제를 재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폰 슈베르트(G.H. von Schubert)는 불의 정신분석에 의해서만 해명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原註6).
[우정이 우리에게 사랑을 길러주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몸을 서로 비빔으로써 향수(열기)가 태어나고 사랑(불꽃)이 솟는다.] 향수란 보금자리의 따뜻한 추억이며, <안에 넘치는 따스함calidum innatum>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지는 사랑의 추억이라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보금자리나 잠자리에서의 詩想은 다른 어떠한 근원도 갖고 있지 않다. 수풀 근처의 보금자리 속에서 얻어진 어떠한 객관적인 인상도 보금자리의 쾌적함, 감미로움, 따뜻함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이 수많은 형용사의 풍부함을 그토록까지 풍부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연의 따뜻함을 마치 2배로 하는 것 같은 인간에 의해 따뜻해진 인간의 추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자기들의 조그만 보금자리에 대해서 말하는 연인들을 마음에 그릴 수 없을 것이다. 보드랍고, 따뜻한 느낌은 이와 같이 행복의 의식의 근원에 있는 것이다. 더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행복의 의식의 기원이라 말할 수 있다.
노발리스의 시상은 모든 것은 우리가 만일 거기에 불의 정신분석을 가하려 한다면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詩란 <원초성>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다. 노발리스에 있어서 이야기란 언제고 다시 우주발생론이다.
그것은 태어나는 영혼과 세계와의 공시적인 존재인다. 이야기란 <자유의 시대이며, 자연의 원시상태이며, 우주에 선행되는 시대>(原註7)라고 그는 말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데서 우리는 그의 명백한 양극성 속에 불과 사랑을 낳으려 하는 <마찰의 신>을 본다.
즉, <비단 이불에 누워 있는 아르크루르왕의 아름다운 딸은 거대한 유황을 결정으로부터 솜씨 있게 조각된 옥좌에 기대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의 시녀들이 우유빛과 붉은 색이 혼합된 듯 보이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날씬한 손발을 열심히 주무르고 있다.>
<그러자 시녀들의 손이 닿는 곳은 어디나 영혼을 뻗는 듯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빛에 의해 온 궁전이 이상하게도 번쩍였다.>
이 빛은 내부의 빛이다. 애무당한 것은 행복으로 빛난다. 애무란 상징화된 마찰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장면은 계속된다.
<그 용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당신의 방패를 만지게 해주세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자 그는 동의는 했으나,
<그의 갑옷과 투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생생한 힘이 그의 온 몸에 솟아오르고 있었다. 두 눈은 빛나고 심장이 투구 아래서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아름다운 프라이아는 쾌활하게 보이고 그녀에게서 스며 나오는 빛은 더욱더 광채를 띠었다.>
<[왕폐하 출두!]하고 한 마리의 멋진 새가 외쳤다.>
만일 이 새야말로 <不死鳥>로, 이 불사조는 순간 가라앉은 욕망처럼 잿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새라고 덧붙인다면, 우리는 이 정경이 불과 사랑의 이중의 原初性에 의해서 특징지워짐을 충분히 알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랑하는 자에게 불을 붙이는 것이라면 우리가 불을 붙일 때 그것은 우리가 사랑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너무나 기뻐서 황홀해진 에로스가 잠자는 프라이아에게 접근했을 때 갑자기 무시무시한 음향이 울려나왔다. 한 줄기의 강한 불이 왕녀에게서 나와 칼 쪽으로 달려갔다.> 정확한 정신분석적 영상이라면 노발리스로 하여금 <칼에서 왕녀로>라고 말하게 했을 것이다.
하여튼 <에로스는 그의 칼을 버리고 왕녀에게로 달려가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에 불의 입맞춤을 했다>(原註8)
만일 우리가 노발리스의 작품에서 원시의 불의 직관을 깎아낸다면 모든 시상과 모든 꿈은 동시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노발리스의 경우는 거기에서 특정한 콤플렉스의 형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특징적이다. 정신분석의 영역에서는 사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침전물을 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명칭 앞에는 型이 없는 흐린 溶液管이 있다. 명칭 뒤에는 結晶을 액체 밑에서 볼 수 있다. 노발리스 콤플렉스는 이때 마찰에 의해서, 즉 서로 나누는 열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불을 향한 추진력을 종합까지 한다. 이 추진력은 그 원초성에 있어서 불의 先史的인 정복을 재구성할 것이다.
노발리스 콤플렉스는 항상 빛의 순수하게 시각적인 지식을 능가하고 있는 내부의 열의 의식에 의해 특정지워진다. 그것은 열감각의 충족과 열을 내는 행복성의 깊은 의식 위에 기초한다. 열은 하나의 재산이며 하나의 소유이다.
그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며, 당연히 서로 접하고, 서로 녹기에 어울리는, 융화되고, 선택된 것에만 주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희롱하고 웃는다. 다만 열만이 침투한다. 실레겔의 편지 속에서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데 [당신은 나의 얘기 속에 빛과 그늘의 희롱에 대한 나의 반감과 명확하고도 뜨겁고 또한 침투적인 에테르(Ether)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침투하는> 것, 사물의 <내부>까지, 존재의 내부에까지 뚫고 들어가려는 이 희망은 내부의 심오한 열에, 직관에 하나의 牽引作用을 한다. 눈이 닿지 않는 곳과 손이 닿지 않는 곳, 거기에 열은 넌지시 스며든다. 내부에서의 이 교감, 이 열의 공감은 노발리스의 작품 속에서 산의 따뜻함과 동굴과 광산에서의 下降에 있어서 그 상징을 되찾을 것이다.
열이 확산되고 균등해지고 꿈의 윤곽처럼 몽롱해지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노디에(Nodier)가 지극히 절실하게 인정한 것처럼 지옥에의 타락의 어떠한 기술도 꿈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原註9). 노발리스는 다른 것들이 하늘의 차디차고 찬란한 확산을 꿈꾸듯 대지의 뜨거운 내부를 꿈꾸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광부는 <거꾸로 선 점성학자>인 것이다. 노발리스는 빛의 放射에서보다는 차라리 집중된 열 속에서 산다. 얼마나 많이 그는 <무명의 深淵家>로서 명상을 한 것인가! 그는 광산의 기사였기 때문에 광물의 시인은 아니다. 그는 시인이기는 했으나 땅속의 부름소리에 복종하기 위해서, <내적으로 넘치는 따뜻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기사가 된 것이다.
그가 말하듯 광부는 <신의 선물을 받고 세계와 그 비참성의 저쪽으로 쾌활하게 자기를 昻揚시키는> 태세를 갖춘 심오한 영웅이다. 광부는 대지를 노래한다. [그야말로 대지와 맺고 다정스럽게 정을 나누고 새 부인을 그리워하는 뜨거운 생각으로 대지를 휩쓴다.] 대지는 어린이의 무의식의 마음속, 어머니 가슴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어머니의 유방이다.
그 똑같은 열이 암석과 광부의 마음에 생기를 준다. [사람들은, 광부는 그를 대지를 파고 나가도록 하는 대지의 내적인 불을 그의 혈맥 속에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中心에는 싹이 있다. 즉, 중심에는 낳도록 하는 불이 있다. 싹튼 것은 타고, 타는 것은 싹트는 것이다. [나는 불속에서 자란 꽃이 필요하다.
亞鉛이여! 하고 왕(原註10)은 외쳤다. 꽃을 달라......꽃 지배인이 群臣 속에서 나와 불꽃이 가득 든 분을 가지고 와 찬란하게 빛나는 種粉을 그속에 뿌렸다. 이윽고 꽃들이 솟아나왔다......]
아마도 실증적인 정신의 소유자라면 여기서 <꽃의 제조술적>인 해석을 전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실증주의자는 우리에게 亞鉛에서의 반짝이는 불꽃이 공중에 그 산화물의 흰, 눈부실 정도의 엷은 조각이 분출하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그는 산화작용의 공식을 쓸 것이다. 그러나 이 <객관적> 해석은 그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현상의 화학적 원인을 발견하면서도 우리를 결코 영상의 중심에 노발리스적 콤플렉스의 핵심에 동반하지는 않는다. 이 해석은 시인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종류의 이미지가 우위를 차지하는가에 대한 분류에 대해서는 우리를 기만하기라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해석에 따르면 노발리스와 같은 시인에 있어서는 느끼는 욕구가 보는 욕구를 압도하고 있는 것, 그리고 괴테의 빛에 앞서, 존재의 모든 자질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모호하고 부드러운 열이 놓여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도 없이 노발리스의 작품 속에서는 더 완화된 면도 있다. 이따금 사랑은 폰 슈베르트의 의미 그 자체에 있어서의 향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열의 특성은 사라짐이 없이 멈추어 있다. 당신들은 그래도 노발리스는 <조그만 파란 꽃>의 시인이고, 파멸의 극에서 죽음의 그늘 속에 빠지는 일이 없는 추억의 담보로서 던져진 망각된 시인이라고 반대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의 심층에까지 내려가 시인과 함께 원초의 꿈을 찾아보라. 그러면 당신은 명확하게 조그만 파란 꽃은 붉다는 진리를 볼 것이다.
<原 註>
1. 오귀스트 기요므 실레겔(Auguste-Guillaume de Schlegel)의 《프랑스語 作品集》
2. 막스 뮐러(F.Max Muller)의 《宗敎의 起源과 發展》
3.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Bernardin de Saint-pierre)의 《自然硏究》 34章
4.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의 《美國紀行》 P.123-124
5. 프레이저(J.G, Frazer)의 《金葉枝 제 3권 p.474
6. 알베르 베겡(Albert Beguin)에 의한 引用 《낭만적 혼과 꿈》 제 2권 p.191
7. 노발리스(Novalis)의 《헨리 오프터딩겐》 p.241, p.191의 註
8. 노발리스의 前揭書 p.237
9. 노디에(Charles Nodier)의 《스마라Smarra》 중 제 2의 序文 참조
10. 노발리스의 《헨리 오크터딩겐》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