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고 김삿갓 유적지를 찾아서
2009.6.21.
영월 하동면 옥동리까지 자주 찾아왔었지만 그 옆의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는 항상 바쁜 일정에 그냥 스쳐 지나쳤다. 사실 오늘도 바쁜 일정이었지만 영월 유지 운량 장은재 고문님의 권유로 일정을 조정하여 들르게 되었다. 막연하게 묘소 정도만 달랑 있을 것으로 착각하였는데 나름대로 잘 꾸며져 있어서 내심 잘 들렀다는 생각이 든다. 입구에는 장승 삿갓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 일행을 맞아 주신다. 김삿갓 유적지가 이렇게 훌륭한 면모를 갖추게 된 데에는 향토사학에 전념해온 정암 박영국 선생의 노력 덕분이다. 그분의 향토문화 사랑에 감사하며 후학들이 만든 정암 박영국 선생의 공적비가 입구에 세워져 있다.
유적지를 끼고 흐르는 곡동천은 여름철에는 유리알처럼 맑고 풍부한 수량이 흘러내리고 가을에는 단풍이 곁들여 절경을 보여준다 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정원사에 의해 잘 다듬어진 정원의 모습 같았다. 역적 김익순을 비난하는 글로 장원급제하였으나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조부라는 사실을 듣고 크게 낙담하여 세상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는 난고 김삿갓, 재능은 있었으나 불행한 시대를 살다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김삿갓의 슬픔이 그대로 가슴에 전이되는 듯하다. 김삿갓의 시대정신과 문화예술 혼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98년부터 매년 10월 난고 김삿갓 문화 큰 잔치가 개최된다 한다.
김삿갓 유적지 입구
김삿갓 유적지 입구에는 삿갓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님을 맞아주고 있다.
유적지 내의 곡동천
유적지 내에 흐르는 천이 곡동천이라 하며 여름에는 유리알처럼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하는데 지금은 물이 적다. 천은 작지만 정원처럼 아름답다.
정암 박영국 선생 공적비
정암 박영국 선생 공적비
정암 박영국 선생의 본관은 반남이며, 시조인 고려 호장 응주공의 24세손으로 1917년 9월 13일 영월군 주천면 용석리에서 출생하셨다. 평생을 향토사학에 전념해 오시면서 주천면 금마리 독립만세상 건립, 수주면 도원리 3공 제명석 복원, 영월읍 방절리 생육신 조여 비원 건립을 비롯하여 돌아다니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시선 난고 김삿갓이 10승지인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내력을 밝히고 그가 살던 집터와 묘를 찾았다.
또한, 김삿갓 유적 보존회를 구성 김삿갓이 방랑생활을 하며 읊었던 유시를 수집하여 「김삿갓의 유산」 책자를 발간하는 등 김삿갓 유적의 발굴과 보전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다. 이번 「제2회 난고 김삿갓 문화 큰잔치」를 개최하면서 선생의 향토 문화 사랑에 대한 큰 뜻을 후세에 오래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1999년 10월 16일 영월군수 김태수 세움
한뫼: 김해동 춘정: 이근우 글씨
* 위의 공적비 내용
김삿갓 유적지 안내
돌탑
유적지에 쌓아놓은 돌탑들이 눈길을 끈다.
시선 김삿갓 난고 선생 유적비
난고 김삿갓 유적비 앞에서
좌측부터 청완 김석님, 운량 장은재 고문님, 월강 주원규님
기념물 앞에서
명천
明川明川人不明 漁佃漁佃食無魚
밝다 밝다 하면서도 사람은 밝지 못하고
어물전 어물전 하면서도 어느 한 집 식탁에 생선은 없네
생선을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 누가 집어가면 어떻게 하나 하고
한 마리 집어 들어 보았는데 전체가 하나인 작품이었다.
소소슬슬우제제 녹기본색황유병
매곡매산혹몰계 상시구록우갱처
여조이비환상하 두우이하정박물
수풍지자각동서 일생하위낙화제
소슬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소리 없이 떨어지니
산골짜기에도 쌓이고 시냇물 위에도 떨어지누나
새처럼 아래위를 훨훨 날다가는
바람결 따라 저마다 동과 서로 흩어지네
본디 잎사귀야 푸르건만 누렇게 병들어
푸른빛 시샘하는 서리를 맞고 가을비에 더욱 애처롭구나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다지도 정이 박약하여
지는 꽃만 슬퍼하고 낙엽에는 안 우느냐
* 가을을 맞아 소슬한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려가는
낙엽의 쓸쓸함을 읊은 시
2001.6. 글씨 지구문학작가 회의회장 예광 장성연
김삿갓 묘소 안내판
난고 김삿갓 생애
선생은 안동 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순조 7년(1807) 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부 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의 이남으로 출생하였고, 본명은 병연이고 호는 난고이다.
순조 11년(1811)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부 김익순이 선천부사로 있으면서 홍경래에게 항복, 역적으로 몰려 폐족 처분을 받아 가족이 영월로 옮겨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모친은 자식에게 조부의 사연을 감추고 글을 가르쳤으며, 20세 되던 해 영월 동헌에서 백일장에 응시하여 조부를 비판하는 글로 장원이 되었다.
그 후에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집을 나서 방랑생활을 하면서 서민들의 애환을 시로 읊어 서민 문학의 큰 틀을 마련하였다. 186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작고하여 그곳에 묘를 썼으며 삼 년 후 둘째 아들 익균이 지금의 묘로 옮겨 모셨다.
* 유적지 안내판에서
난고 김삿갓 묘소에서
위에서 내려다 본 아름다운 유적지 풍경
물(水)
아향청산거 녹수이하래
나는 청산을 향해 가거니와
녹수야 너는 어디로부터 오느냐
백발여비김진사 주량정대황금진
아역청춘여옥인 세사재지백발신
허연머리 너 김진사 아니더냐
나도 청춘에는 옥인가 같았더라
주량은 점점 늘어 가는데 돈은 떨어지고
세상 일 겨우 알만한데 어느새 백발이 되었네
* 샘물을 떠 마시면서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읇은 시
제2회 난고 김삿갓 문화 큰 잔치 '휘호대회' 장원
2001.6. 글씨 윤당 김찬기 씀
난고 김삿갓 문학관 전경
첫댓글 석인들이 좋아하는 김삿갓..
멋진곳 다녀오셨군요
예. 김삿갓 유적지 입구 옥동까지 왔어도 탐석만 하고 그냥 갔었는데
정말 처음 한번 다녀왔네요.
한번은 가볼만 하더군요.^^
수고하셨어요 나도 두번가보았어요
그러셨군요.
김삿갓님은 벌써 가보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