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은 대중화가 될 수 있을까?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곳에서 VR의 대중화는 시작된다.
'가상현실'의 시작
가상현실로 번역되는 Virtual Rality(혹은 VR)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7년 가상현실의 아버지로 불리는 자론 래니어Jaron Lanier에 의해서이다. 이때부터 머리에 쓰는 HMD(Head Mounted Display)와 손동작을 입력받는 데이터 글러브로 상징되는 가상현실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이 이때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1960년대에도 이미 가상현실 경험을 제공하는 센소라마Sensorama라는 기계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개념으로만 본다면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VR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7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말에 등장한 VR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중 미디어와 VR을 소재로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들의 덕택으로 대중적으로나 사업적으로 큰 기대를 받게 된다. 당시 VR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치를 한껏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할리우드 영화로는 1992년에 개봉했던 론머맨The Lawnmower Man을 들 수 있다. 그리고 SF소설이 외면받는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거의 없지만 1992년에 출간된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라는 SF소설도 VR이나 가상사회를 그린 중요한 초기 소설로 기억된다. 지금은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아바타'란 용어를 현재와 같은 뜻으로 쓰기 시작한 소설이다. 하지만 VR은 아직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소수만이 경험할 수 있는 고가의 최첨단 기기가 필요한 기술이었다.
1995년에 이르러 대중 미디어와 영화 등을 통해 형성된 높은 기대들로 인해 일반인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보급형 VR 헤드셋들이 등장하게 된다. 저렴한 가격의 보급형 HMD 헤드셋의 등장은 VR 대중화의 큰 걸림돌을 제거하고 대중 시장을 형성하리라고 기대되었다. 필자도 이듬해1996년 E3 전시장에서 당시 보급형으로 출시된 VR용 HMD 중 하나를 직접 체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반 사용자를 위해 출시된 보급형 HMD는 외형으로도 낮아보이는 성능이었고, 실제 착용해서 체험해 본 결과도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냥 한 번쯤 체험해보는 신기한 눈요기 경험 이상의 역할은 기대할 수 없었다. 작고 낮은 해상도의 LCD 패널이 주는 한계와 당시의 조악한 컴퓨터 그래픽으로는 실감 나는 가상현실을 구현하기에 한참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VR을 위한 대중 시장은 형성되지 못했고, 큰 기대만큼 큰 실망을 남긴 채 대중들의 시야에서 거의 사그라지게 된다.
가상현실을 구현해주는 실제 기술은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사그라졌지만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는 계속 발전하여 1999년에 개봉한 [13층]이나 [매트릭스]에서 정점을 이룬다. 돌이켜보면 가상현실이란 소재를 가장 반겼던 것은 영상을 매개로 재미난 스토리를 전달하는 영화였다. 그만큼 가상현실은 인간의 시각에 크게 의존하는 기술이다. VR 회사명이 오큘러스인 이유도 눈 혹은 둥근 창문이라는 뜻을 어필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 : www.oculus.com>
보는 것을 믿는다
인간은 80%의 감각을 시각에 의존한다. 시각에 많이 의존하는 만큼 신뢰도가 높다. 하지만 시각에 대한 커다란 신뢰와 달리 우리의 시각은 상당히 불완전하고 눈으로부터 전달되는 시각 정보는 뇌에서 처리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가짜로 꾸며지거나 메워진다. 사실 우리가 육안으로 보고 있는 것들은 실제 현실이 아니라 뇌를 통해서 형성된 일종의 가상현실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동굴의 우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이 사실은 전혀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얻어진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뇌에서 적절하게 가공하고 통합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하나의 내적인 모델을 만든다. 이 모델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다. 플라톤이 만일 이 시대에 살았다면 '동굴의 우화' 대신 VR의 우화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VR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상태의 시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시각은 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어서 너무 잘 안다고 여기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시각은 늘 우리를 속이고 있지만 시각을 신뢰하는 만큼 속는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어렵다. 우리가 가진 시각의 불완전함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착시 현상이나 맹점 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각 세포가 집중되어서 사물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망막의 영역은 전체 시야에서 아주 좁은 영역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 대상은 뻔히 눈앞에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이나 인상착의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사진적인 시각 정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각이 우리를 속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이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대표적인 시각 기능이 있다. 안구가 움직이는 동안 눈에서 뇌로 전달되는 영상 신호가 차단된다는 사실이다. 눈의 망막에 맺히는 영상은 외부 세계에 전혀 변화가 없어도 고개를 돌리거나 안구를 움직이면 변화가 생긴다. 우리의 뇌에서는 머리나 안구의 움직임으로 생기는 망막 상의 영상 변화를 적절하게 상쇄하는 과정을 통해서 시각 정보의 공간적인 항상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머리를 움직이는 정도의 변화는 우리의 뇌가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지만 안구가 움직이는 경우는 그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뇌도 영상 신호 처리를 포기하고 아예 신호를 차단해버린다.
그래서 우리 눈은 안구가 움직이는 동안은 순간순간 장님이 된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신호가 차단되는 동안에도 이전의 영상으로 이를 메꾸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말 그대로 눈뜬장님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마술사의 속임수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소 자연상태에서도 시각에 속고 있기 때문에 VR 헤드셋의 LCD 패널에 표시된 가짜 영상으로도 우리의 감각을 쉽게 속일 수 있지만 사실 완벽하게 속이기란 결코 쉽지 않다.
VR의 재발견
1995년 대중에게 처음으로 보급형 HMD를 선보인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VR 기술이 다시금 대중과 산업의 큰 기대를 불러 모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2015년 VR 붐을 촉발하게 시킨 장본인은 다름 아닌 오큘러스의 창업자 팔머 럭키이다. 그는 가상현실 오타쿠로서 지구상에 출시된 거의 모든 VR 헤드셋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대로 맘에 드는 것이 없었기에 저렴하면서도 더 나은 성능의 헤드셋을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저렴하면서 훌륭한 성능을 갖춘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Rift)'라는 VR 헤드셋이 나올 수 있도록 뒷받침된 최근의 기술은 3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1. 적절한 크기의 고해상도 디스플레이
2. 뛰어난 성능의 GPU
3. 정밀하고 저렴한 각종 센서
이 3가지 기술은 모두 아이폰 같은 스마트 기기와 게임을 위해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이폰의 출시와 함께 시작된 스마트 기기의 눈부신 발전과 그동안 게임에서 더 나은 그래픽을 위해서 발전해 온 GPU의 뛰어난 성능은 팔머럭키가 뛰어난 VR 헤드셋을 만들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이 된 것이다.
이런 시도에 존 카막같은 게임계의 구루같은 존재가 호응하자 마니아를 중심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페이스북이 2조 원이 넘는 거액으로 오큘러스를 인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페이스북의 인수로 인해 소수 마니아층에서 머물던 관심이 이제는 대중적으로나 사업적으로 크게 확대되고 있다. 2016년으로 예약된 일반 소비자용 제품의 출시와 함께 멋진 VR의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대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VR 기술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기술이다. 그래서 VR의 대중화를 위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보았다.
기술적인 문제
보급형 VR 기기가 첫 등장하고 20년이 흐르는 동안, 현재 VR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하드웨어 기술이나 3D 엔진 등의 소프트웨어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뜻하게 해결되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들이 있다. HMD 착용자들이 눈이 시리거나 머리가 어지럽거나 멀미를 느낄 수 있는데 이 문제는 아직 하드웨어 성능만으로는 해결하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각종 센서로부터 검출된 자세한 정보가 화면 갱신에 반영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20밀리 초 이내여야 착용자가 어지러움 등의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현재의 고성능 GPU에서도 도달하기가 쉽지 않은 목표이다. 콘텐츠의 세심한 준비에서부터 연출이나 소프트웨어 최적화 등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VR 콘텐츠 문법의 문제
영화가 나름의 영상 문법을 찾기까지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의 초창기에는 가장 유사한 매체인 연극을 단순히 카메라에 담기만 하면 영화가 된다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인물의 전신을 보여주지 않고 일부만 보여주거나 시간적으로 연속되지 않은 사건을 실제 시간과는 다르게 이어서 보여주는 몽타주 기법이나 카메라의 움직임 등 영화만의 고유한 문법이 만들어지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긴 시간을 거쳐 제작자와 관객이 공유하는 표준적인 문법이 만들어진다. VR도 정보나 스토리나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나름의 고유한 문법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단번에 정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VR 콘텐츠 제작자와 관객 사이의 피드백을 통해서 꾸준히 모색되고 정립되어야할 문제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큘러스가 2014년 말에 스토리 스튜디오를 새롭게 설립하고 픽사 같은 관련 업계의 베테랑들을 데려와서 VR스러운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라 볼 수 있다.
컨트롤러의 문제
얼른 생각하면 VR에 가장 적합한 콘텐츠는 1인칭 시점으로 플레이 하는 FPS 게임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FPS 게임은 모든 VR 콘텐츠 중에서 VR화 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장르이다. 이는 1인칭 시점의 게임이 움직임도 빠르고 거친 액션 탓도 있지만 주로 FPS 게임의 콘트롤 방식에 기인한다. FPS 게임의 콘트롤 방식은 단번에 정립되지 않고, 수년의 시간을 거쳐서 현재의 조작 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PC의 기본 입력 장치인 키보드와 마우스, 콘솔의 게임패드가 현재처럼 조작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편의적인 약속일 뿐 실제 플레이어가 몸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몸의 이동에 대한 시각적인 감각과 실제 몸으로 느끼는 감각의 불일치로 인해 심하면 멀미를 유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실제 몸을 움직이는 것에 가장 가까운 방법으로 입력할 수 있는 트레드밀 스타일의 옴니같은 입력 장치가 있지만 이는 개인이 쉽게 갖출 수 있는 장비는 아니다. 그래서 이런 장비 없이 저렴한 컨트롤러만으로도 게임을 원활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 적합한 조작 방식의 정립이 필요하다. 순간이동식의 이동 방법이나 3인칭으로 플레이하는 VR 게임의 등장 등이 이런 노력이다.
그리고 VR 헤드셋을 착용했을 때 현실로부터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처럼 컨트롤러를 더듬어 조작해야 하는 문제도 해결해야할 필요도 있다. 최근 선보인 오큘러스 터치 같은 새로운 형식의 컨트롤러나 카메라로 잡은 손의 영상을 인식해서 가상으로 재현해주는 기술을 가진 페블스같은 회사를 오큘러스가 인수한 것이 이런 예라고 볼 수 있다.
대중화로의 기대
그렇다면 VR이 마니아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화로 가는 길에 큰 힘을 보태어 줄 것으로 기대되는 것들은 무엇일까. VR이 대중화가 되려면 앞서 언급한 다양한 기술적인 문제 등을 잘 해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일반 사용자들이 VR 기기를 통해서 가상현실을 체험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도 필요하다. 잠시 경험하는 눈요기보다 높은 퀄리티의 가상현실의 느낌을 만족시켜주는 체험 환경도 필요할 것이다.
초기 VCR의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포르노물 같은 성인 콘텐츠가 어쩌면 VR 기기의 초기 보급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개인이 갖추긴 어려운 고급스러운 VR 체험 환경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준비 중인 것도 긍정적이다. 아마도 VR 대중화의 초기에는 VR 체험방이나 VR 체험 테마파크 같은 형태의 서비스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6년 여름에 VR 체험 테마파크 개장을 예고하는 한 미국업체가 [The Void]라는 이름으로 유튜브에 공개한 데모 영상은 VR 체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6년은 일반 소비자를 위한 VR 기기들이 출시되어 VR 대중화의 원년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모든 VR 콘텐츠 개발자들이 가슴에 새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옛 위인의 명언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가슴으로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 헬렌 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