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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영화’가 그리는 인생, 그리고 인간학
실천문예 편집위원 송현아
한 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으로 영예를 누리던 ‘권투’. 지금은 이종격투기, 프로레슬링 등에 밀려 예전의 영광은커녕 돈벌이 수단으로써의 가치조차 잃어버린 불행한 종목이 되어 버렸다. ‘권투’가 전성기를 누리던 당시엔 ‘권투’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 ‘권투’는 영화의 소재로 다루기엔 대중적 매력을 얻기 힘든 낡은 소재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소재와 최첨단의 기술이 넘쳐나는 2005년 현재의 영화판에서 ‘권투’를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이 유난히 눈에 띈다. 한국영화 <주먹이 운다>와 헐리우드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 이미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오스카상을 휩쓸었고 현재 DVD 대여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주먹이 운다> 또한 대종상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의 유력한 후보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소재의 낙후성(?)에 비하면 눈부신 성적이 아닐 수 없다.
예로부터 ‘권투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처절한 밑바닥 인생을 살던 주인공이 터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결국 챔피언으로 성공하는 ‘인간승리’의 쾌감에 있다. 인생의 쓴 맛을 한 번이라도 느껴 본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에겐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기도 했을 터이다. 그래서 ‘권투영화’엔 가난하고 천대받고 변변치 않은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두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양아치로 살다가 어린 나이에 소년원 신세를 지는 류상환(류승범)의 인생, 차마 눈물 없인 볼 수 없다.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죽고 할머니마저 병상에 드러눕는다. 어머니는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불행이 쌍으로 오다 못해 갓 스무 살을 바라보는 한 소년의 인생 자체를 뿌리 채 뒤흔들어 버린다. 가슴이 먹먹해 지고 열이 확 오른다.
과거 권투 은메달리스트였으나 너무나 무능한 가장인 강태식(최민식)은 가족에게 버림을 받는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인간 샌드백이 된 태식에겐 자존심조차 온전히 남아 있을 리 없다. 과거의 후배였던 ‘주먹’들에게 빚독촉을 받는 장면은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난다.
희망을 잃고 술에 취해 주정부리던 강태식에게 국숫집 주인 상철(천호진)이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날린다. “야 강태식, 이 세상에 사연 있는 사람, 너 하나 뿐이 아니야!”. 화면 속에서 두 주인공으로 압축되던 밑바닥 인생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너와 나, 우리(?)의 삶으로 확 다가온다.
두 주인공,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물들 같아서 식상한 것이 사실이지만 냉정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연 있는’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느꼈을 만한 공감대가 관객을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저런 엄마, 저런 가족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나게 만드는 매기(힐러리 스웽크)의 가족들... 진짜 현실일까봐 무섭다. 모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뚱뚱한 엄마와 버릇없는 동생을 가진 가난한 웨이트리스는 인생의 전부를 권투에 걸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이자 자기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권투였기 때문이다. 새 집을 선물하기 위해 멍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타난 매기에게 엄마와 동생은 “돈으로 주지 왜 물어보지도 않고 샀냐”며 화를 내고, 식물인간이 되어 산소 호흡기를 달고 사는 그녀에게 찾아가서는 재산을 가로 채기 위해 수작을 부리기까지 한다.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마찬가지 처지이다. 유일한 혈육인 딸에게 열심히 편지를 써 보지만 편지는 그 때마다 되돌아온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의지하는 성당의 신부는 한 번도 그에게 이렇다할만 한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어느 곳에도 의지할 곳 없이 방황하는 외롭고 무기력한 ‘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주인공이 코치와 선수로, 아버지와 딸로, 연인으로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채워 나간다. 그래서 프랭키는 친딸을 돌보듯 헌신적으로 식물인간 매기를 돌보고 매기는 친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프랭키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긴다.
<주먹이 운다>의 결말은 누구나 예측 가능할 만큼 뻔하다 못해 심심하기까지 하다. 두 주인공의 고단한 인생역정을 숨죽이며 쫓아가던 관객들에겐 허무함이 느껴질 정도다. 이 지점에서 감독의 역부족을 논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결말은 선뜻 동의가 되지 않을 만큼 끔찍하지만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노숙한 연출가의 실력이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주먹이 운다>의 결말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 사실이다. 쇼킹한 반전이나 자극적인 기술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 영화의 결말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사회적 통념인 ‘희망’이 담겨있고, ‘가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감독의 마음이 녹아 있으며, 힘겨운 몸부림을 통해 어두운 과거와 결별한 두 주인공의 ‘승리’가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비참하게 파괴되어 버린 가정, 처절한 소외감 속에서 버티고 싸우고 견디며 결국 가족을 되찾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는 그 결말은 매우 신파적임에도 따뜻하다. 그래서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주먹이 운다>의 결말은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너무나도 ‘착한’ 결말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두 주인공의 비극적이고 궁상맞은 삶이 삽시간에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장면으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제 현실에서는 그런 ‘인생역전’의 기회를 결코 호락호락하게 만날 수 없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절박한 상황의 두 주인공에겐 링 위의 멋지고 폼 나는 결전보다는 오히려 영화 <똥개>의 마지막과 같이 질퍽하고 끈적거리고 망가지는 싸움의 연출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보다 더 처절한 장면을 매일 매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결말, 색깔로 표현한다면 잿빛과도 같다. 섬짓할 정도로 냉정하고 침착한 시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을 그려낸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권투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 매기는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몸은 욕창으로 썩어가고 가족들은 돈 챙기기에 바쁘다. 아무런 희망도, 견디어 낼 용기도 없다. 프랭키는 정성을 다해 그녀를 간호하지만 그녀에게 또 다른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아주기엔 역부족이다. 그녀는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하고 프랭키에게 아름답게 떠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고뇌하던 프랭키는 결국 그녀를 죽인다. 그녀를 위해서라는 구실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사랑, 내 핏줄”이라는 말을 외치며 말이다. 슬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매우 감명 깊게 봤다고 평한다.
‘안락사’에 대한 논란을 하고 싶지는 않다. 프랭키의 고뇌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코치와 선수의 사랑을 뛰어 넘어 친아버지와 친딸의 사랑 그 이상을 보여주는 듯했던 두 사람의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 되묻고 싶을 뿐이다. 관객들을 엄청나게 숭고한 감정에 빠지게 하더니 결국 그 사랑의 선택이라는 게 상대방을 죽이는 거란다. 그 선택, 그 결론, 참으로 싸늘하다.
우리의 바램대로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맞다. 권투를 영영 못하게 되었더라도,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더라도, 또 다른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적어도 그럴 수 있도록 노력이라도 해 보아야 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 영화의 결론은 우리의 바램을 철저히 외면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적어도 미국사회에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삶의 의미와 생존의 방식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암울한 현실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산소 호흡기를 떼버려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사람들... 사회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용기와 희망도 주지 못한다. 철저히 개인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인 것이다. 아무리 숭고한 사랑을 하고 싶어도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 너무나 사실적인 상황을 아주 침착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 속의 매기와 프랭키보다 더 절망적이고 더 가슴 아프고 더 속수무책인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속으로 눈물 흘리며 노력하는 위대한 사랑의 주인공들이 우리의 현실 속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위대한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오히려 두 주인공의 ‘위대한 사랑의 높이’보다는 두 주인공이 뛰어 넘지 못한 ‘사회적 장벽의 높이’를 그린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 쓸쓸하고 찝찝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게 인생이고, 사람과 그 인생을 다루는 학문이 인간학이다. 영화는 인간학이다. 살아있는 인간과 그의 삶을 생동하게 형상화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과 그들이 더욱 아름답고 씩씩하게 승리할 수 있도록 희망과 용기와 힘을 주는 영화, 그게 바로 인간학이다.
밑바닥 인생을 그려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현실을 단적으로 담아낼 수밖에 없는 ‘권투영화’. 이제 처절한 밑바닥 인생의 현실을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 수많은 ‘밑바닥 인생’들이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는 진정한 ‘인간학’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