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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2025년 1월 3일, 명혜망 특파원은 뉴욕에서 파룬궁 창시자이자 션윈(神韻) 예술단 예술감독이신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장소는 페이톈(飛天) 예술대학의 한 교무실이었다.
올해 73세이신 리훙쯔 사부님은 깔끔하고 단정한 평상복 차림이었고, 예전보다 많이 수척해지셨지만 50대, 혹은 그보다 더 젊어 보였으며, 눈빛은 따뜻하고 단호하면서도 온화하셨다.
놀랍게도 교무실은 넓고 깔끔했지만 의자들은 모두 겉감이 닳아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산 위의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아낄 수 있는 건 되도록 아끼기 때문에 아직 새 의자로 바꿔야 할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는 후일담이다.
1. 대법 전파 상황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는 어떻게 사회에 전해졌을까?
사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에 창춘(長春)에서 사람들이 거기서 기공(氣功)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내가 거기서 듣고 있다가 한두 마디 했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말했어요. ‘어! 당신 말은.. 우리에게 이걸 좀 말해주세요, 저것도 좀 말해주세요.’ 다 쉬웠어요, 나는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모두 말해줬죠. ‘어! 그러면 학습반을 좀 열어주세요!’”
“그 사람들은 모두 오랜 기공 매니아들이었어요. 그래서 즉시 ‘제가 장소를 마련해 드릴게요!’ ‘제가 이걸 또는 저걸 준비하겠습니다’라고 했죠. 다 준비하고는 ‘리(李) 선생님, 빨리 와서 강의해주세요’라고 했어요. (어떤) 기공 애호가들은 기공에 심하게 빠져들어 기어코 내게 강의를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창춘 제5중학교에서 그들에게 강의를 한 번 해줬습니다.”
“강의하는 건 괜찮은데 환자들도 데려왔어요. (왜냐하면) 기공 공능(功能, 초능력) 시범 보고회는 다 이런 식이잖아요? 와, 처음부터 다 환자들이니 어떡하겠어요? 강의를 할 수 있겠어요? 거기서 ‘아이고, 아이고’하고 있으니. 링거를 맞으면서 온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다가가서 한 명 한 명씩 해결해줬어요. 아주 빨리, 몇 초 만에 모두 일어났죠. (그들이) 일어난 후에 내가 단상에서, 거기는 계단식 교실이었는데, 내가 말했어요. ‘내 말을 들으세요. 걸으세요!’ 그들이 모두 걸었는데, (원래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 반신불수였던 사람들이었어요. 내가 말했어요. ‘뛰세요!’ 쿵쿵쿵, 모두 뛰었어요. 내가 말했어요. ‘좋아요,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번에 알게 됐죠. ‘기공 대사(大師)도 이렇게 대단하지 않은데!’ 그리고 나서 내가 강의를 시작했어요. 마지막에 그들이 몇 가지 문제를 물어봤는데 그것도 모두 해답해줬죠. 이때부터 통제할 수 없게 됐어요.”
“내가 그들에게 말했어요. 강의는 했으니 연공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연마하기 시작했죠, 파룬궁을요. 나는 이렇게 ‘기공 선생님’ ‘대사’가 됐어요.”
이후의 일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명혜망에는 많은 문장이 있는데, ‘사부님 은혜를 회상하며’ 등의 메뉴에 정리되어 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과거의 글을 읽을 수 있다.
1992년부터 1993년 말까지 중국에서 학습반을 열 때, 매번 평균 9일이었고, 수강료는 25위안이었는데, 이는 사부님 일행이 기차를 타고, 식사하고, 자료를 인쇄하는 데 쓰였다. 돈을 아끼기 위해 사부님은 기차도 늘 일반석에 타셨고, 침대칸은 거의 이용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기차가 아무리 만원이어도 사부님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아 사부님은 매번 누워서 쉬실 수 있었다.
식사는 라면이었고, 가끔 식단을 개선한다고 해도 길거리 작은 노점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는 정도였다. 숙소도 가장 저렴한 곳을 찾으셨다. 사부님 일행이 짐 가방에 들고 다닌 것은 라면이 아니면 미리 인쇄해 둔 자료였다. 2년간 54회 학습반이 열리는 동안 수행원들은 라면을 보기만 해도 두려울 정도였지만, 학습반에 참가한 수련생들은 이런 리훙쯔 사부님의 노고와 은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돈이 없는데 어떻게 책을 출판하셨을까? 사업을 해서 돈을 번 한 베이징 수련생이 사부님께 몇천 위안을 빌려드렸다. 서점에서 《중국 파룬궁》이라는 책을 발행하기 시작한 후, 그 수련생이 사부님께서 돈을 갚지 않으실까 봐 걱정하자 사부님은 책을 판 돈으로 빨리 빚을 갚으셨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전법륜(轉法輪)》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사부님을 따라다니며 학습반 개최를 도와드렸던 한 수련생은 관직에 있던 사업가였는데, 사부님께 자주 여비를 보태드렸다. 이 수련생이 사부님께 말했다. “사부님, 좀 보세요. 다른 기공사들은 지갑을 한 번 열면 몇만, 몇십만(위안)씩 꺼낼 수 있는데, 사부님은 여관을 찾을 돈도 없으시네요.”
당시 중국에서 몇만 위안은 굉장한 금액이었다. “그 시절은 ○○○씨 덕분에 지나온 거예요.” 지난 일을 회상하시며 사부님은 쾌활하게 웃으셨다.
파룬궁이 중국에서 영향력이 점점 커지자 서둘러 박해를 계획하는 중공 관리들이 있었다. 하지만 뒷조사를 해보니 리훙쯔 선생님은 돈도 없고 호색하지도 않으셨다. 사부님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는데 구실은 찾을 수 없고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사부님은 그당시를 이렇게 회고하셨다.
“(1996년) 누가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상무부의 한 여자 국장이 날 식사에 초대했어요. 당시 식사 자리는 병 치료를 위해 부르는 것이라 나는 갔죠. 만난 후 그 관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최후통첩을 했어요. ‘리 선생님, 선생님은 중국에서 영향력이 너무 크십니다. 중국을 떠나셔야겠어요.’ 대놓고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듣고 생각했어요. 그래, 장(江)아무개(장쩌민)가 화나서 죽을 정도겠지. 창안(長安)거리 양쪽에 파룬궁 수련생들이 꽉 찼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러겠다, 외국으로 가겠다고 했어요.”
중국에서는 어떤 종교 신앙이든 공산당 지부를 설립하지 않고 ‘공산당의 이익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구실을 잡혀 탄압받고 심지어 발 디딜 곳도 없게 된다. 파룬궁은 진선인(眞·善·忍) 법리로 수련을 지도하여 수억 중국인을 건강하게 하고 도덕을 향상시켰으며 정부의 막대한 의료비를 절약하게 했음에도 중국에서 안정적으로 생존할 공간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97년, 사부님은 ‘특출한 인재’ 이민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이주하셨다. 1998년 짐을 정리해서 다시 미국으로 오셨을 때, 사부님 가족은 돈도 없고 머물 곳도 없어서 샌프란시스코로 가시려고 했지만, 도와주던 수련생이 거처를 구할 수 없다고 해서 애틀랜타에서 다른 한 수련생이 빌린 좁은 빌라에서 함께 지내시게 됐다.
이후 도저히 생활할 수 없어서 뉴욕으로 가셨다. 하지만 당시 뉴욕 거주지는 낡고 허름했으며, 총소리, 낙서, 모히칸 헤어스타일, 오토바이가 폭주하는 참혹한 곳이었다. 결국 사부님은 한 수련생이 어퍼 맨해튼에서 빌린 스튜디오(부엌, 거실, 침실이 하나로 된)에 머물게 되셨다. 1999년 7월 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된 후 중공은 이 스튜디오가 있던 건물을 ‘리훙쯔의 건물’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2. 사부님의 자원봉사
최근 미국 뉴욕타임즈가 리훙쯔 선생님이 ‘추종자들의 충성심과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해 2억 6600만 달러의 재산을 모았다’고 주장한 데 대해 리훙쯔 사부님은 대답하셨다. “그들이 보도하지 않았다면 저는 션윈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몰랐을 겁니다. 저는 늘 걱정합니다, 아이들(션윈 단원과 페이톈 학생들)이 쓸 돈이 충분하지 않을까 봐요.” 말씀을 마치시고 사부님은 웃으셨다.
“우리는 여기에 아무 기반도 없습니다. 다른 예술단은 정부나 기업에 의지하죠. 기업들은 우리에게 (돈을) 주지 않을 겁니다. 다들 중국에서 사업하니까요. 정부도 우리에게 애매모호한 태도입니다. 누구도 우리를 돕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션윈예술단 예술감독으로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행정적인 일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나에게 보고하지 않고요. 재무는 비밀이어서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도 묻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션윈예술단의 한 회계사는 “재무는 관련 규정과 절차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동운전(Autopilot)입니다”라고 확인했다.
여기서 사부님께서는 한 가지 일이 생각나셨는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처음에 에포크타임스와 NTD는 돈이 부족해서 날 찾아왔어요. 돈이 좀 생기니까 날 찾지도 않더군요. 나도 그들이 돈이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어떤 항목에서든 한 푼도 가져가지 않았어요. 어떻게 운영하는지도 모릅니다. 명혜망, 에포크타임스, NTD, 깐징월드를 포함해서 그들이 어떻게 운영하는지, 인원과 재무가 어떤지 전혀 모르고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들이 (스스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수련의 길이기 때문이죠. 내가 계속 이래라저래라하면 그들의 다리(橋)를 부수고 그들의 길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것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오직 수련만 관리합니다.”
“션윈은 말이죠, 그들의 수련을 관리하는 외에 무보수로 의상 디자인을 돕고 기술적인 향상을 돕고 있는데, 아무도 나에게 원고료를 주지 않습니다.” 사부님은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아무도 나에게 돈 한 푼 주지 않아요, 월급도 없고요.”
기자는 또 다른 몇 개 항목 관계자들을 인터뷰했다. 예술 영상 플랫폼 ‘션윈쭤핀’(神韻作品, Shen Yun Creations)의 재무 책임자와 ‘션윈 의류회사’(Shen Yun Dancer) 사장은 모두 경영과 비즈니스를 독립적으로 하고 재무도 독립적으로 관리한다며 “사부님께서는 전혀 보지 않으시고 우리도 보고드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에포크타임스 재무 책임자와 희망지성(希望之聲, SOH) 라디오방송국 사장도 모두 같은 답변을 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글자가 새겨진 청색-노란색 양면 패딩은 사부님께서 무보수로 디자인하셨는데, 가부좌하기 편한 상하 지퍼와 방수 소재에 방한 기능, 몸에 잘 맞는 디자인으로 대형 활동에 매우 적합하다. 면재킷은 120달러, 다운재킷은 168달러로, 이 가격으로는 시중에서 같은 품질의 동종 제품을 살 수 없다. 왜 이 가격일까? 이에 대해 ‘션윈의류’의 사장은 “이 두 가지 하프패딩은 수련생들에게만 판매하기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최대한 가격을 낮추기를 바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맞아요, 가능하다면 수련생들에게 무료로 주고 싶어요.”
‘수련생들에게 무료로 주고 싶다’는 이 말씀은 매우 익숙하다. 대법(大法) 서적의 가격과 판매에 대해서도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이 말씀을 하셨다. 실제 페이톈 학생들의 학비, 숙식비, 교재, 의상, 여비 등은 계속 무료였는데, 이는 학교가 매년 학생 한 명당 5만 달러의 장학금을 주는 것과 같으며, 학부모들은 학생의 학교 밖 레슨비만 내면 되었다.
3. 소박한 생활, 강인한 의지력
사부님은 수련생들 눈에는 어떤 분이실까?
사부님을 20년간 따른 한 수련생은 깊이 생각한 후 천천히 말했다. “의지력이 비범하시고, 생활이 단순하며, 목표가 명확하십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사원[용천사(龍泉寺)]에서나 여행 중이나 사부님께서는 아침에 직접 빨래를 하시고, 아침을 드시지 않거나 물과 커피만 조금 드시며, 점심에는 용천사 식당에서 간단히 드시고, 저녁에는 밀가루 수제비 한 그릇이나 끓인 물에 찬밥을 말아 장아찌와 함께 드십니다.”
또 다른 수련생은 말했다. “한번은 아침 식사 때 사부님께 삶은 계란을 많이 가져가 크고 좋은 것을 고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보시더니 가장 심하게 깨진 것을 고르시며 ‘나는 이거면 돼’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부님과 함께 뷔페에 갔던 한 수련생은 말했다. “정말 그날은 기뻐서 음식을 담아다가 빨리 식탁에 앉고 싶었어요. 줄을 서서 차례가 왔을 때 사부님을 찾아보니, 사부님께서는 좀 떨어진 곳에 조용히 서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음식을 담아가기를 기다리셨어요. 저는 손을 멈췄어요. 제자가 사부님보다 먼저 음식을 가져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곧바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제게 먼저 가져가라는 의미셨죠.”
‘목표가 명확하시고 의지가 비범하시다’는 것에 대해, 사부님을 20년간 따른 대법제자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사부님께서는 끝까지 해 나가십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돈의 개념도 없으세요. 해야 할 일이면 하시죠. 매일 그렇게 하시는 것을 보다 보면 별거 아니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매우 신기해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은 모두 이뤄졌어요. 우리와는 다르세요, 우리는 가끔 일을 하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포기해버리거든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인데 사부님께서 해내신 사례가 있다면요?”라는 기자의 물음에 그들은 대답했다. “그런 일이 많았는데,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사부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시고 계속 그 방향으로 밀고 나가셨고, 나중에 결국 해내셨어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 사부님의 의지력과 몰입력은 정말 대단하세요.”
“제가 보기에 사부님에게는 ‘어렵다’는 개념이 없으세요. 우리는 어떤 일이 어렵게 느껴지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사부님은 어려움에 가로막히지 않으세요. 예를 들어 신체적인 어려움, 발목을 삐셨을 때도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평소처럼 해야 할 일을 하십니다.”
용천사 건축 당시의 수련생들은 사부님께서 쉬지 않고 계속 일하시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공사장에서 가장 어려운 곳에 사부님이 계셨고, 가장 위험한 곳에도 사부님이 계셨다. 목재를 나를 때도 사부님은 가장 무거운 쪽을 드셨다. 공사장의 쓰레기도 자주 치우셨는데, 다른 사람들은 사부님만큼 동작이 빠르지 않아서 조금만 늦어도 사부님께서 다 치우셨다. 아무도 치우려 하지 않은 더러운 물웅덩이도 사부님께서 한마디 말씀도 없이 손수 치우셨다.
또 길에 자갈이 보이면 차바퀴에 눌려 도로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로 주워서 길가에 던져 놓으셨다. 공사장과 길에 못이 보이면 바로 주워서 분류하여 창고에 맡기셨다. 사부님께서는 또 예술단의 미술 창작을 지도하시고, 의상과 소품을 디자인하시고, 성악을 가르치시고, 프로그램을 제작하시고, 공연 품질을 관리하시는 등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틈틈이, 이동 중에 시간을 짜내 평범한 종이 서류철에 가사를 쓰고 작곡하셨다.
리훙쯔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분을 이끌어 수련하니 당연히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돈과 관련된 교훈이 너무 많아서 나는 어떤 돈도 받지 않습니다.”
“모든 항목에서 나는 (월급을) 한 푼도 받지 않아요. 내가 본보기가 되어야 제자들도 절약하기 때문이죠. 그 돈은 정말 이렇게 짜고 짜서 나온 거예요.” “공연 장비와 조명도 나는 반드시 할인된 제품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일이 많아서 나는 자주 용천사 기숙사에서 지냅니다. 나는 여기서 아이들(션윈 단원들과 페이톈 학생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와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나는 또 학부모들에게 말했어요. 당신들에게 가장 좋은 자녀로 만들어 주겠다고요, 이것이 내가 전념하는 일입니다.”
4. 모든 사람을 보살펴주시다.
용천사는 2000년 처음 세웠을 때 돈도 없었고, 주변을 둘러싼 산림과 당시에는 그다지 아름답지도 맑지도 않았던 호수 하나,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목조 단층집 하나만 있었다. 그 단층집은 허름한 방 세 개와 거실 하나가 전부였는데, 이것이 용천사가 처음에 갖고 있던 전부였다.
주차장도 없었고, 숲속 길은 비나 눈만 내리면 바로 진흙탕이 되어버렸다. 당시 자원봉사하러 온 수련생들은 힘도 보태고 돈도 보탰는데, 모두 대법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고, 파룬따파(파룬궁)로 인류에게 혜택을 주시다가 중국공산당(중공)의 박해를 받으신 사부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중공은 리훙쯔 선생님이 여러 채의 집과 호화로운 저택, 고급 자동차와 요트가 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지만, 나중에 리훙쯔 선생님에게 돈도, 집도, 차도 없고, 모든 항목에서 월급을 받지 않았으며, 수련생들이 가져온 돈도 모두 산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시인했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돈이 필요 없어요. 돈이 있어서 뭐 하겠어요? 나는 걱정 없어요. 내가 평생 어디를 가든 말이죠, 누구든 나한테 밥 한 끼는 줄 겁니다. 그러니 돈이 있어서 뭐 하겠어요? 굶을 일이 없을 텐데요.”
인터뷰 동안 사부님께서는 계속 온화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웃으셨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정진요지-경지)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했다.
용천사의 페이톈학교와 션윈은 19년 만에 교실, 무용실, 식당, 극장, 사무실, 도서관, 음악홀, 다양한 휴식 공간을 갖추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수련인들이 사부님의 인도 아래 벽돌 하나 나무 하나씩 쌓아 올려 이뤄놓은 것이다. 많은 대법제자들에게 있어 이것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맹세한 서약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션윈예술단은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처음에는 수련생들을 찾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데, 키도 제각각이고 무용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그 후 점차 한 걸음 한 걸음 발전해 왔죠. 하지만 당시에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참여자들이 자비(自費)로 마련했죠. 모든 선생님들도 부족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사서 썼어요. 나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건 모두 자비로 샀어요.” “모두 순수하게 봉사한 거죠.” “공연을 하게 되어서야 수입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걸어온 겁니다.”
기자의 기억으로 처음에 무용실이 하나밖에 없었을 때 사부님께서 직접 학생들에게 공중제비를 지도하셨다. 산 위의 오래된 수련생들도 기억하고 있다. 학생들이 처음 만주족 춤을 출 때 화분 모양의 굽을 가진 만주족 신발을 본 적이 없어서, 사부님께서 직접 한 명 한 명 신발을 신겨주시고 신발을 정리해주셨다.
학생들이 직접 만들어 사부님께 드린 사랑이 담긴 선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션윈에서 나간 후 중공과 결탁하여 파룬궁과 션윈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그 아이들은 모두 스스로 션윈에 오려고 한 게 아니라 부모가 강요해서 온 겁니다. 그런 아이들은 여기서 모두 잘하지 못했어요.” 반면, “스스로 ‘나는 수련하겠다’ ‘나는 사부님의 정법을 돕겠다’고 말한 아이들은 모두 특별히 잘했어요.”
지난 10여 년 동안 페이톈 학교 학생들은 사부님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는데, 사부님의 딸도 이런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사부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당시 아이들이 좀 어렸어요. 나에게 맡겨줬으니 그들을 부모처럼 대해야 했죠.”
지난 10여 년 동안 사부님은 또 매일 산 위의 수련생을 한 명 한 명 보살피셨고, 또 매일 밤 학생들에게 간식 봉투를 만들어, 학생들이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서 직접 한 봉지씩 나눠주셨다. 사부님은 아이들이 연공하느라 힘들고 또 성장기여서 밤에 배가 쉽게 고플 것을 아셨다.
산 위의 수련생들은 말한다. 사부님에 관한 이야기는 매일 말할 것이 있고, 매 사람 모두 말할 것이 있어서 끝이 없다고 한다. 리훙쯔 사부님은 페이톈 재학생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졸업생들에게도 신경을 쓰셨다. “(자금을) 좀 모아두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어요?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졸업했는데, 또다시 전염병이라도 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세 식구 가정에는 세 식구의 가사와 지출이 있고, 천 식구의 가정에는 천 식구에게 필요한 비용이 있다. 리훙쯔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사실 산에는 돈이 매우 많이 듭니다. 매달 자동차 기름값, 난방비, 냉방비,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의 식비에, 모든 학생이 여기서 학비를 면제받고 무료로 먹고 자며, 학교는 또 그들에게 약간의 보조금도 주어야 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엄청난 부담이에요. 게다가 우리는 학생들을 키워서 인재로 만든 후 떠나게 하면 안 되니까, 그들이 졸업하고 결혼하면 월급을 올려줘서 남을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에 다 돈이 필요합니다.”
수련인들은 모두 알다시피 파룬따파는 다른 건강차원의 기공과는 완전히 다르다. 파룬궁은 병 치료를 위한 것도,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며, ‘낮에는 가사를 입고 밤에는 퇴근하는’ 식이 아닌 진정한 불법(佛法) 수련으로, 사람들에게 우주의 특성인 眞善忍에 동화하여 반본귀진(返本歸眞, 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하게 한다.
파룬궁이 공산당에게 박해받은 지 4반세기가 넘었지만, ‘진선인’은 여전히 우뚝 서서 수련자들의 마음을 밝게 비추고 정념을 다져주고 있다. 파룬궁 수련생들의 강인함은 진선인에 대한 바른 믿음에서 오고, 근기(根基)에서 오며, 리훙쯔 사부님의 말씀과 몸으로 직접 보여주신 가르침에서 온다.
원문발표: 2025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