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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의 문학 향기] ``정말 미안해요``
1938년 3월10일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순국했다. 안중근의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 관련 혐의로 3개월 동안 구속되었던 안창호는 중국 망명을 앞두고 `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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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3월 10일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타계했다. 안중근의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의거 관련 혐의로 3개월 동안 체포되었던 안창호는 중국 망명을 앞두고 〈거국가去國歌〉를 지었다. 곡이 붙여진 〈거국가〉는 지사 · 청년들에게 애창되면서 독립정신을 북돋우는 민족예술이 되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중략)
일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 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안창호보다 19년 앞선 1919년 3월 10일 독립운동가 김란사가 중국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김란사는 우리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세계평화회의가 열리는 파리로 가던 중이었다. 북경에서는 먼 길 가는 지사들을 격려해 환송연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김란사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두산백과 : "베이징에 도착한 뒤 교포들이 마련한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결국 죽었는데, 단순한 병사나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운명 당시 김란사는 고종의 둘째아들 의친왕이 세계만방에 호소하려고 작성한 독립운동 밀서를 품고 있었다.
김란사는 의친왕과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언Wesleyan 대학교를 함께 다녔다. 김란사는 우리 나이로 28세이던 1897년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역시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미국 학사 학위를 취득한 김란사는 귀국 이래 이화학당 교수로 재직했다.
김란사는 1916년 미국 전역 순회 강연을 하면서 교포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그런 그가 이화학당 학생자치활동 이문회以文會를 지도했으니, 이문회의 성격이 어떠했을지는 쉽게 가늠이 된다. 이문회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날마다 조국 독립 기도회 · 시국 토론회 · 외부인사 초청 강연회 등을 개최했다. 유관순도 이문회에 들어 활발히 활동했다.
3월 1일 이후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도모하러 고향 병천으로 가고, 김란사는 파리를 향해 북경으로 떠났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김란사는 3월 10일 '의문사'했고, 유관순은 이듬해 9월 28일 옥사했다. 안창호는 “나 간다고 설워마라 / 나의 사랑 한반도야”라고 노래했지만, 김란사도 유관순도 모두 잃은 ‘나의 사랑 한반도’는 ‘설워’ 몸부림쳤다.
1954년 3월 10일 태어난 대중가요 가수 권성희의 노래 〈나성에 가면〉에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 함께 못 가서 정말 미안해요 / 안녕 안녕 내 사랑”이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김란사 · 유관순 · 안창호 · 윤봉길 같은 분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첫댓글 김란사,유관순,안창호,윤봉길이름을 불러봅니다.
우리 정만진선생님.고맙습니다.이름조차 기억하지못하는 분들에게 죄송한마음 가득입니다.이름을 기억하고 그분들이 치열하게 행하신 일들을 알아나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