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손글씨가 주는 감격
대학시절 학과 사무실 앞에서는 학생들의 우편물을 수령할 수 있는 나무 통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각 학년별로 칸이 있어서 학교로 발송되는 개인 우편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선후배나 친구들이 가끔씩 학교 신문을 보여주곤 했는데, 여대에 다니는 친구들이 학보를 보내주면 친구들의 관심을 받게 되죠.
학교 신문을 세로로 접어서 하얀색 종이로 띠를 두르고 그 종이에 주소와 받는 사람, 우표를 붙여서 보내주는데, 하얀 띠에 적힌 글씨가 화제가 되곤 합니다. 대학 3학년때 이화여대 화학과에 다니던 교회 동기가 거의 매주 학보를 보내줍니다. 처음 한 두 번은 당시 학보를 주고받는 것이 유행이었으니...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횟수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혹시 이 친구가 나에게 마음이 있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은 제가 여대생과 연애를 하는 것을 감췄다고 야단을 떱니다. 친구들을 동원해서 소개팅을 주선하라는등, 친구들에게 여자친구 소개를 해달라는 등.... 특히 학보를 보내준 친구의 글씨와 띠종이 안쪽에 한 마디씩 적어주는 글들이 화제가 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글들이죠.
"양이 작은 나무를 먹는다면 꽃도 먹을까?"
이렇게 손글씨로 한 마디 적은 표현들이 언제나 화제가 되곤했습니다. 이 문장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어디에 등장하는 문구인가? 이 문장을 학보의 띠종이에 적어서 보낸 의도는 무엇일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 학교에서 학보보내려고 하는데, 공고판에 붙어 있는 <어린왕자> 연극 포스터에 그 글귀가 있어서... 그냥 멋있어보여서 적었어."
'혹시 무슨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닐까?' 친구들이 잔뜩 바람 넣은 것처럼 '혹시 나를 좋아하고 있나?' 하는 오랜 고민이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알게되었을 때, 허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머쓱함 보다 '이 문구가 <어린왕자>에 나오는 문장이구나, 그렇다면 이 문장의 의미가 뭐지?'라는 의문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어린왕자>를 읽기시작했죠.
요즘 처럼 '구글 검색'이 불가능했던 시절이라, 새로운 문장을 만나게 되면 그 출처가 어딘지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소 책을 가까이 했던 사람들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멋진 문구, 강한 감동을 준 문장들을 저 역시 엽서나 학보 띠종이에 적기 시작했죠. 손글씨로 누군가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최소한 그 글을 적고 있는 순간 동안에, 그리고 그것이 전달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상대를 생각한다는 묘한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이처럼 작은 글로 시작한 손글씨 쓰기는 엽서쓰기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독일 친구가 알려준 방법인데, 이 친구는 학교 주변에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공부하기를 유난히 즐기는 친구였습니다. 개인 공부나 과제 뿐 아니라 소규모 스터디 모임도 구성해서 공부했는데, 언제나 교내 카페를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가방에는 늘 예쁜 엽서들이 있었고, 가끔 카페에서 고향의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즉흥적으로 엽서를 쓰곤 하더군요.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답장을 받을 주소를 자신이 즐겨 드나들며 공부하는 카페로 한다는거죠. 물론 카페 사장님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사장님이 이러한 간단한 수고를 마다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엽서를 쓰기 위해, 또 받기 위해 카페를 방문해야 하고, 그러면 카페의 매출은 올라갈 테니까요.
점점 개인의 주소를 사적인 영역으로 생각하게 되는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동네의 카페를 우체국 사서함과 같이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 친구의 모습을 보고 시작한 동료들의 엽서쓰기는 급기야 카페에 엽서 판매대를 등장시켰고, 그곳은 여러 지역에서 발행하는 멋지고 예쁜 엽서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그 친구가 저에게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글자를 예술화할 수 있어서 참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되는 글자를 멋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게 신기하다는 거죠. 넓직한 한지 위에 먹을 한 껏 머금은 붓으로 몇 개의 글자를 써서 족자로 만드는 것을 '알파벳 문자'를 가진 사람들은 부러워할 수 밖에 없겠죠. 고사성어나 멋진 한글 문장을 온 힘과 정성을 다해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적어 벽에 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손글씨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선생님들과 훌륭한 학자들 대부분이 손글씨로 적어내려간 두툼한 노트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죠. 하버드 대학의 옌칭 연구원 서고에 소장되어있는 많은 자료들이 이미 당시에 여러 활자체 인쇄 방식이 있었음에도 대부분 '손글씨'로 작성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란적이 있습니다. 범접하기 힘든 대학자들의 손이나 옷의 소매, 심지어 셔츠 앞쪽이나 바지에게 잉크 자국이 있는 것은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손글씨...필사...
경제학의 큰 스승인 밀턴 프리드먼과 미국의 중국학(Sinology)의 장을 연 페어뱅크 하버드대학 교수는 공교롭게 시대와 전공에 차이가 있음에도 너무나 비슷한 필사의 경험과 유용성을 이야기합니다. 이 분들은 멋진 글이나 논문을 보면 그 전체를 마치 저자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필사를 한다고 합니다. 필사를 하면 최소한 세 번 정도(네 번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음) 읽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더우기 한 자 한 자 적어가는 과정에서 그 시대, 그 환경에서 이 저자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 글을 적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고 하죠. 당연히 그 이해도와 분석, 행간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저자와 근접할 수밖에 없고,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선천적 능력이 부족하면 모방하는 열심이라도 가져야 한다고 늘 말씀하신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에, 저 역시 직접 노트에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필사를 하다가 지치면 그림도 그리고, 필사한 내용위에 첨부할 내용이 있으면 포스트 잇을 붙여 보충을 하기도 합니다. 피가 안통해 져려 오는 손을 비비며 백지위에 채워넣은 '손글씨'를 바라보면, 그 내용은 물론 그 글 속에 담긴 저자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마치 어떤 의미와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를 생각하며 적어 내려간 학보 띠종이, 예쁜 그림엽서, 손편지들 처럼 말이죠.
이런 점에서 최근 성경 필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참 좋은 현상입니다. 하지만 너무 모양을 그럴듯하게 하려다 보니 약간의 부작용이 있기도 합니다. 글은 멋있게 썼는데 저자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거죠. 병풍이나 족자로는 좋을 수 있지만... 써놓은 내용이 뭔지 모르면 이건 분명 필사의 부작용입니다.
혹은 부적이나 알아듣기 힘든 주문과 같은, 혹은 팔만대장경을 깍는 '수행'의 의미로 필사를 하는 것은 제가 말하는 '손글씨' 즉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성친구의 야릇한 손글씨, 사랑의 대상이나 마음을 나누는 친구와 나누는 엽서나 편지의 손글씨, 그리고 저자의 마음을 읽어 내려가며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학자들의 '손글씨'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저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메시지를 앞에놓고, 그 계시의 의미를 생각하고 이해하기 위해 필사를 한다면 반드시 그 어떤 손글씨보다 더 두근거리는 마음, 감사와 기쁨의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눈도 침침하고, 손가락 마디도 많이 아프고, 점점 필체의 멋도 덜해지지만 오늘도 노트를 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