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 로 요절함으로써 세자가 되었고, 5년여의 세자 생활을 거친 후 등극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한명회 등 공신들이 정사를 농단하는 공신의 시대였는데, 온건한 성품의 예종은 등극하자 의외로 강하게 공신들을 압박하였습니다.
예종은 즉위 후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공신 을 불문하고 칼을 씌워 잡아와라”, “탐오 불법이 있다면 공신, 당상관(요즈음으로 치면 장관쯤 됩니다)을 가리지 말고 구금하고, 고문을 해서라도 진상을 밝혀라”는 명을 내리는 등 공신들을 장악하는 한편,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아~간만에 임금같은 임금이 나왔습니다.
아울러 몇 년 안에 기어코 부왕인 세조를 능가하는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예종은 실제 그럴만한 재주와 배짱을 갖춘 인물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종의 이러한 꿈은~ 채 봉우리를 피워볼 수도 없었으니, 이는 예종이 그 전부터 앓고 있던 족질이 원인 이었습니다. 예종이 앓던 족질은 무좀이 아니라 지금으로 말하면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조선 8대 왕인 예종은 왕성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족질로 급격히 기력을 잃고 졸하니, 재위 1년 2월, 20세의 나이 였습니다.
한편, 예종의 이러한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는, 겨우 족질 로 젊은 청년이 그리 쉽게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 개운치 않습니다. 이는 공신세력에 대해 강경 정책을 펼친 예종의 카리스마에 불안감을 느낀 한명회 등 공신세력과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경세자의 부인이 독살한 것 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한명회라면 충분히 고따구 짓을 하고도 남지만~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습니다.
암튼, 예종이 죽은 후 후계자를 결정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3명의 대상자가 있었습니다. 먼저, 죽은 예종의 아들인 원자(제안군)인데 나이가 겨우 4살에 불과하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가 남긴 아들 중 첫째인 월산군과 둘째아들 자을산군이었습니다.
자을산군은 후계서열로는 3위이지만 결국 이 아이가 왕위 에 오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이 아이의 장인이 한명회 라는 점이 크게 고려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을산군의 어미 가 진즉에 한명회의 4녀를 며느리로 들인 덕을 톡톡히 보게 된 것입니다.
또한, 후계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대왕대비(세조의 부인)도 실질적 권세가인 한명회가 새 임금의 후원자가 되는 것이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뉘미~이씨조선이 아니라, 한씨조선입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열세 살에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 8대 임금 성종은 세종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 의 임금다운 임금이었습니다. 성종은 할머니의 수렴청정을 거친 후에도 인수대비의 간섭, 한명회 등 공신들의 득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시간은 나의 편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가다듬기에 힘쓰니,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건 자연의 이치인지라, 자연스레 성종의 치세가 열릴 수 있었습니다.
성종 치세에는 이렇다 할 외침이나 역모도 없는 가운데 수많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으나, 성종에게도 다른 선대 왕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불행이 닥쳐왔으니, 이는 우리 들이 익히 알고 있는 폐비윤씨, 그리고 연산군으로 이어 지는 잔혹사였습니다. 아이고~또 시작입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35)> 성종 2 - 폐비윤씨 그리고 불행의 전조!
성종 4년, 가난한 집 선비 윤기무(또는 윤기견)의 딸이 성종보다 2살 많은 나이에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습니다.
윤씨는 후궁 시절 대왕대비와 왕대비 등 대궐의 어른들을 잘 봉양하여 이들의 총애를 받았고, 중전 한씨(한명회의 딸)가 죽자, 성종앞에서 아랫도리를 잘 이용?? 다른 후궁 들을 제치고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짹팟을 터트리게 됩니다. 윤씨는 중전의 자리에 오른 지 4개월 만에 아들 까지 출산하니 이 아들이 바로 연산군입니다.
가난한 집 선비의 딸로 태어나 인생 역전의 대박을 터트린 중전 윤씨, 그녀의 인생이 장밋빛으로 빛날 것 같았으나, 그만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실록에는 중전 윤씨의 죄가 세세히 열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인형을 만들어 저주한 일, 음조(도움받는 사람도 모르게 넌지시 뒤에서 도와줌)의 공은 없고, 투기하는 마음만 가진 일, 몰래 독약을 품고서 궁인을 해치고자 한 일, 무자(無子) 하게 하거나 반신불수가 되게 하는 등 사람을 해하는 방법 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발각된 일, 엄소용, 정소용이 서로 통하여 중전 윤씨를 해치려고 모의 한 내용의 언문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고의로 권씨의 집에 던져 넣은 일, 왕을 바라볼 때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은 일 등이 그것입니다.
중전 윤씨는 위와 같은 일들로 폐위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사약을 받고 사사되고 맙니다.
일국의 왕비가 폐비되고 사사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인데, 폐비 과정에 궁궐 여인네들의 암투가 다소 있었다 하더라도, 이 외에 특별한 정치적 긴장관계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폐비 윤씨에게 실제로 상당한 문제가 있었던 여자인 것은 틀림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폐비 윤씨가 끝내 사약까지 받게 된 것은 만약 폐비 윤씨가 살아 있는 가운데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를 경우, 폐서인 과정에 관련된 자들이 보복을 당할 것이 분명해 보이므로, 이들이 이를 두려워해 사약을 내리도록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일반적 관점입니다.
그러나 폐비를 사사했어도 이와 관련해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이는 중전 윤씨를 폐서인하여 사사하면서도 정작 그 아들을 그대로 원자의 자리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한명회 등 여러 신하들은 장차 폐비 윤씨의 아들이 왕이 되어 어머니의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것을 당연히 예상했으나, 그 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성종에게 대놓고 원자를 폐하라는 불경한 주장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어린 원자에게 폐비 윤씨의 일을 알리지 말 것과 누구도 이때의 일을 입에 올리지 말 것을 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종의 생각일 뿐, 성장하여 어미의 일을 궁금 해 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으며, 그러한 자식의 효심을 이용해 정치적 성공을 거두려는 자들의 출현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성종과 그 어미인 인수 대비의 판단은 실로 아둔하고 그 이후의 일은 자업자득 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성종은 배꼽 밑의 작은 종기에서 비롯된 병으로 갑자기 기력을 잃고 1494년에 죽으니 재위 25년에 향년 38세였습니다. 임진년 왜란(1592년~) 98년전 입니다.
성종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착하고 여린 그 아들이 아비의 뜻에 반해 어미의 일로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킬 것을 예측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에휴~죽어봐야 저승맛을 알지요~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36)> 연산군일기 1 - 연산의 초반 모습
세자시절의 연산은 양녕대군 같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아버지 성종 같은 모범생도 아니었으며, 그저 소리 없이 적당히 하루를 보내는 특별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얼굴에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입안이 헐거나 눈병 이 걸리는 등 잔병치레가 잦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왕자같지 않고 삐리한 모습에 생긴건 좀 별로였다고 합니다.
연산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었다고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세자 시절에 이미 어미의 일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연산이 이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조정의 경계심 자극으로 인해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 있으 므로, 일부러 모른 척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와신상담했던, 그만큼 지혜로운 왕자 였는데~
연산의 아비 성종은 모범군주답게 대간(고려~조선시대 감찰임무를 맡은 대관과 국왕에 대한 간쟁업무를 맡은 간관의 합칭으로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군주, 백관의 과실 을 간쟁,탄핵하는 등 실세중의 실세였다)들의 입바른 간언 (전하 아니되옵니다~~)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연산은 성종이 대간 등 신하들을 억눌러 제압하지 않는 것 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거 보면 연산이 성질 머리는 있어 보인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연산은 성종이 대간들에게 굴복으로까지 보이는 부드러운 통치에 대한 반감과 아직은 가슴속에 눌러만 가지고 있는 폐비 윤씨의 일로 인해 속은 늘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산은 즉위하자마자 불교식 제사를 지내는 문제, 성종의 묘호를 정하는 문제 등에서 신하들 특히 대간들과 대립 하였고, 이 과정에서 ‘왕을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강경책을 폈는데, 연산의 이러한 말이 갖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이때는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연산의 강경책에 대간들은 연산의 버르장머리를 잡겠다는 듯이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집단사직 등 더욱 강한 초 강경책을 펴니, 아직 힘이 미미한 연산으로서는 분통 터지지만 대간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휴~대간들이 다리를 뻗을 자리를 보고 뻗어야지~
연산은 즉위 4년까지 대간들과 사사건건 부딪쳤고, 그 때마다 대간들의 집단 사직, 복직이 이어지는 양상 이었으며, 비록 겉으로는 대간들에 밀리는 것처럼 보였 으나, 이와 같은 시간은 연산의 힘과 내면의 의지를 점점 강하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연산은 곧 터질 무오사화 전까지만 해도 권세는 임금에게 있어야 한다는 왕권에 대한 인식, 할머니인 인수대비의 눈치를 봐야 하는 등의 현실적인 힘의 관계를 잘 이해했고, 신하들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도록 힘쓰는 한편, 국정 운영에도 꽤 신경을 쓰는 등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 그리고 뚝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제법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가 될 자질을 보였던 것이지요.
그동안의 연속극 등을 보면 연산군이 즉위하자마자 자기 어미의 복수를 한다고 마구잡이로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기 라도 한 것처럼 묘사를 하나, 연산군은 실은 상당한 기간 동안 보통 이상의 선정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힘을 바탕으로 무오사화 등의 기회를 이용하여 절대군주의 자리에 자력으로 오르는 등 고도의 정치력을 보유한 군주 로 보는 것이 적정합니다.
물론 연산군이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에 대한 복수를 시작 함으로써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택하게 되나, 이는 연산군 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미인 중전을 나가리 시키고, 사사까지 하면서 그 아들을 그대로 세자로 둔점은 성종과 인수대비의 업보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