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영래 변호사 ‘평전’이라는 책이 있다. 어떤 인물의 전기적 사실을 기록하되 그것을 일정한 시각에서 ‘평가’하면서 기록한다는 것이다. 자서전, 전기, 위인전과는 다르다. 좋은 평전을 두 가지를 겸비해야 한다. 먼저 그것이 허구가 아닌 한 해당 인물에 대한 치밀한 사실 확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자료 수집이나 인터뷰를 하는 것은 마치 밥을 먹기 위해 수저를 드는 것과 꼭 같다. 다음으로 비평적 관점이 꼿꼿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 ‘비평’이란 단어가 흔히 듣는 문학비평이나 영화비평 같은 장르 비평, 곧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되는 비평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해당 인물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라는 말만으로도 부족하다.
이 평전이라는 게 특별한 예술 형식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다만 ‘동시대적인 성찰’이라는 두루뭉수리한 용어를 쓰는 수밖에 없다. 요컨대 해당 인물이 심각한 고뇌에 빠졌거나 역사적인 결행을 도모했을 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왜 그 사람은 서너가지의 다른 행로 중에서 오직 그 길을 선택해야 했는가?’, ‘그 선택에 이르게 된 개인적, 사상적, 시대적인 요소들은 무엇인가?’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를 ‘동시대적인 성찰’이라고 편의상 부르기로 하겠다. 이 점에 근거할 때 ‘평전’은 해당 인물에 대한 어이없는 사실 왜곡은 물론 자칫 범할 수 있는 그릇된 신비화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아, 물론 이런 것이 생략되어도 어떤 인물에 대한 글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평전이 아니라 전기, 자서전, 위인전, 추모사, 회고담, 주연담, 끽연담 같은 이름을 달아야 할 것이다.
국내 출판물 중에서 이 ‘동시대적인 성찰’이라는 미덕을 갖춘 평전으로는 아무래도 <전태일 평전>이 되겠다. 물론 김윤식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비롯한 문화예술 방면의 ‘연구적 평전’ 혹은 ‘평전식 연구’가 없지 않으나 일반 교양 독서의 차원에서 대략 50만 부 이상이 팔린 <전태일 평전>은 해당 인물의 역사성이나 그 집필자의 노고가 높은 수준에서 결합된 아름다운 한 장면이다.
<전태일 평전> 표지. 아다시피 <전태일 평전>은 평화시장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일생을 다룬 책이다. 이 블로그의 11월 13일자에서 ‘고 전태일 열사’에 관하여 쓴 바 있으므로 오늘은 그 책의 저자, 곧 고 조영래 변호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아참, 오늘 12월 12일은, 조영래 변호사가 지난 1990년에 폐암으로 타계한 날이다. 당시 나이 43세였다. 43세라면, 그리고 그 당사자가 조영래라면, 혹시 그 시대를 잠시 거슬러 회고해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나이가 진실로 얼마나 안타깝고 아까운 숫자인가를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전태일 평전>은 조영래 변호사가 서울대 법대 재학 당시에 선도적으로 학생운동을 했던 장기표를 통해 분신 사건을 접하는 것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운동가 장기표는 전태일의 어머니로부터 전달받은 수기를 조영래에게 긴히 부탁했고 조영래는 곧 평전 집필에 들어갔다.
평전 ‘집필’이라고 해서 어디 근사한 곳 하나를 정해서 담배 연이어 물면서 사색하는 그런 일과는 거리가 멀다. ‘전태일’이라는 아름다운 불꽃은 70년대의 YH사건이나 동일방직사건 등을 거쳐 80년대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발화점이 된 것으로 이에 대하여 집필한다는 것은 어떤 회고가 아니라 당대의 전선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저항 운동의 한 방식이었다.
실제 집필 과정도 그러했다. 조영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태일 열사에 대한 전기적 사실을 확보하였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방대한 인터뷰를 진행하였으며 이 인물의 결행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검토하기 위한 작업도 충분히 진행하였다. 년도와 이력의 숫자들이 다 말해주지 못하는 한 인간의 인간적 고뇌와 결행의 역사성을 거품 잔뜩 낀 수사가 아니라 치밀한 ‘당대성’으로 서술하기 위하여 조영래는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전태일 평전> 초고 모습. 하지만 그의 저작은 국내에서 출간되기가 어려웠다. 원고를 사진으로 찍어 일본으로 보내서 그곳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물론 당대의 정황 때문에 가명을 써야만 했다. 국내에서 정식으로 출간된 것은 1983년의 일, 제목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다. 이제는 그 제목을 <전태일 평전>이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어떤 감상적인 측면에서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옛 제목의 울림이 여전히 또렷하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당대의 억압성, 은밀성, 저항성을 되새겨주기 때문이다.
국내 공식 출간된 이후에도 그 ‘저자’의 이름은 가려져 있었다. 저자의 이름이 밝혀진 것은 1991년의 일. 조영래와 가까운 거리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도 그가 그 책의 저자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을 정도로 조영래는 그것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 역사의 정황으로 남겨놓고자 했었다.
이제 바로 그 조영래에 대해 기억해보자. 그가 어디 한가로운 곳에 집필실 갖춰놓고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이 아닌 것은 앞에서 ‘변호사 조영래’라는 말로 해결된 것이지만, 또한 그가 어디 서초동 근처에 그럴싸한 사무실 열어놓고 법전으로 가득 찬 장식장에 기대어 팔짱이나 끼고 있는 변호사가 아님은, 우리 현대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조영래는 경기고를 다녔다. 똑똑했다. 그런데 그냥 다니지 않았다. 고교 3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동한 이유로 정학 처분을 당했다. 서울법대에 수석 입학했다. 하지만 반듯하게 펼쳐진 수석 입학생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법대 재학 중에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밀수 규탄, 6·8부정선거 규탄, 3선 개헌 반대, 교련반대 등에 관여하였다. 1971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이후에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무려 6년 여 동안 수배를 받게 된다. 이 기나긴 수배 기간 중에 조영래는 전태일에 대한 평전을 썼다. 20대 후반의 조영래는 당대성의 한복판으로 걸어가는 문장을 가진 사람이었다. 기묘한 수사는 그에게 없었다.
권인숙 씨를 변론할 당시의 조영래. 박정희 시대가 끝나고, 수배가 해제되고,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게 되면서 조영래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실험이 되는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1983년에 개소하면서 이른바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하게 된다. 요즘이야 ‘인권 변호사’가 마치 ‘도미 후 MBA 과정 취득’ 같은 수식이 되고 말았지만 전두환 시절에 그 용어는 아예 드러내놓고 펼쳐지는 저항 운동이었다. 그는 84년 '망원동 수재 사건', 85년 '여성 조기정년제 사건',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89년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사건' 등의 변론을 맡아 이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른바 ‘시국 사건’을 제외하더라도 ‘변호사’ 조영래가 이 사회의 일상 민주주의와 인권 향상에 바친 공로는 지대하거니와 그 한 예를 살펴보자.
만약 요즘 젊은 여성들에게, 혹은 직장 여성들에게 ‘당신의 정년은 25살이오’ 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분기탱천이 아니라 실소를 금치 못한 썰렁한 농담도 되지 못할 가당찮은 헛소리라고 할 것이다. ‘여자는 결혼하고 시집가면 직장 그만 둔다 이거지? 그러니까 정년은 입십대 중반이다? 놀고 자빠졌네.’하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중반에는 그런 헛소리가 상식처럼 통했다. 아니 상식보다 더 무서운 법정 판결로 통했다. 1985년에 당시 방일물산에 근무했던 직장 여성 이경숙 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는데, 당시 재판부는 “우리나라 여성의 결혼 평균 연령인 26세부터는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봐야 하므로 회사원으로서의 수입을 25세까지만 인정하라”고 판결했다.
<전태일 평전> 원고 내용을 사진을 찍어 일본으로 보낸 묶음들 (사진 안창규). 이에 여성계는 ‘25세 조기정년제 철폐 운동’을 펼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조영래 변호사를 찾게 되었다. 조영래 변호사는 무시무시한 시국 사건의 변론뿐만 아니라 1984년의 '망원동 수재 사건'을 맡아서 한국 법 역사에서 가히 공익 소송의 효시가 되는, 무책임한 행정편의주에 맞서 시민 집단 소송의 공익성과 필요성을 이끌어낸 적 있었다.
‘여성 25세 조기정년제’ 사건에 참여하게 된 조영래 변호사는 조기정년제의 이론적 배경, 가사노동의 가치, 여성의 사회적 역할 등을 연구하고 관련 법을 샅샅이 검토하였다. 그는 단순히 법조항의 허점을 찾아내는 노회한 변호사가 아니라 오랜 가부장의 유습이 어떻게 현실의 법으로 고착화되어 ‘여성 차별’을 합법화 하는가, 나아가 이러한 폐악이 어떻게 ‘보편적 인간’의 권리를 억압하는가를 고뇌하고 또한 해결하고자 하였다.
<불꽃이여 나를 감싸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출간된 전태일 평전. 가명의 저자 이름 '김영기'의 영이 조영래를 뜻한다(사진 안창규). 그와 가까이 했던 사람들은 고 조영래를 단순히 ‘인권 변호사’라고 표현되거나 어느 한 때의 기록을 부각시켜 ‘서울법대 수석입학생’ 같은 부실한 틀로 얽어매는 것을 꺼려했다. 이런 표현들은 민중과 함께 한 ‘명석한 엘리트’라는 부유하는 이미지일 뿐이고 이런 이미지는 인간 조영래의 본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미지’를 조성하고 또한 널리 확산하는 것은 이 사회의 최고 지배집단이자 권력층이자 지배 담론의 생산자들인 서울법대 동창들이다. 그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라는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서 유무형의 모든 권력을 누려온 집단들이다. 그런 그들에게도 일말의 감정이 왜 없을까. 하지만 누구도 그 아래 층으로 내려오기를 꺼려했다. 그런데 조영래가 있었고 그밖에 또 몇 명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권력과 삶 자체를 부정했던 조영래를 ‘서울법대 동창’으로 끌어안아 버린다. ‘동창’이라는 인간적 연민으로 감싸안아 버림으로써 한순간에 ‘역사적 동질화’도 이끌어낸다.
그들에게 조영래는 한 시대의 가장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간 인간이 아니라 ‘동창’이 된다. ‘내 후배 중에 영래라고 괜찮은 녀석이 있었지.’, ‘우리 선배 중에 조영래라고 참 위대한 인물이야.’ 그런 말의 성찬으로 인간 조영래를 끌어들임으로써 현대사에 대한 그들의 콤플렉스를 슬쩍 닦아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게 ‘전태일의 친구’ 조영래는 ‘송년 연찬회’를 빛내주는 ‘마리아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전태일 열사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절규하였으되 어쩌면 우리는 '어느 변호사의 삶을 헛되이 말라'고 외쳐야 할 지도 모르겠다.
권인숙 씨는 <조영래 평전>을 비판했다. 그래서 지난 2006년에 권인숙 씨는 <인물과 사상>에 실망을 넘어 분노에 가득찬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에 조영래의 서울법대 1년 후배 되는 서울법대 안경환 교수가 <조영래 평전>을 집필하여 발간하였는데 이 책 속의 조영래는 그와 가까이 지냈고 또한 활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조영래와는 판이하게 다른 조영래였기 때문이다.
안경환 교수의 <조영래 평전>에 비단 권인숙 씨만이 비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 평전이 집필되는 과정을 잘 알고 있고 또한 그 초고를 미리 검토했던 유가족 측은 출간 자체에 반대 입장을 갖고 있었다. 맨 앞에 적었듯이 평전이란 ‘폄하’도 문제고 ‘신비화’도 문제인데, 이 책은 그 두 문제를 다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사실 왜곡’이라는 결정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는 의견이었다.
당시 조영래 변호사의 동생인 조순경 교수(이화여대 여성학)는 ‘고인의 사상이나 인물됨이 왜곡돼 있고 그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 왜곡이 수인 한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비판한 적 있다. 한국 출판문화사에 가장 빛나는 ‘평전’을 쓴 당사자에 대한 ‘평전’ 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에 여러 신문에서 사실 보도 기사가 나갔고 또한 <서울신문>을 비롯하여 몇몇 신문에서 비판적인 글도 게재된 바 있는데, 아래에 <한겨레신문>의 당시 기사를 링크로 걸어본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0112.html
고 조영래 변호사. 이는 그 누구에게도 좋은 기억이 되지 못하는 일을 다시금 긁어보려는 의도가 아니라 ‘평전’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되새겨보기 위함이다. 맨 앞에서 ‘동시대성의 성찰’이라는 두루뭉수리한 표현으로 ‘평전’의 기본 사항을 적었으되 어쩌면 ‘평전’만큼 대단히 위험한 글쓰기도 달리 없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로 긴장하기 위하여 링크를 걸어보는 것이다.
평전은 소설도 아니고 위인전도 아니다. 허구도 아니고 찬양도 아니다. 한 인물을 ‘평가하면서 기록’하는 것이다. 평전이란 ‘폄하’와 ‘신비화’라는 구덩이가 양쪽에 커다랗게 패어있는 아슬아슬한 볼링 경기와 같다. ‘사실 왜곡’은 저자와 해당 인물을 그 두 개의 구덩이로 처박히게 한다. 이렇게 되면 ‘동시대의 성찰’이라는 스트라이크는 꿈도 못 꾸게 된다. 이 점을 되새겨보기 위해 비록 이태 전의 일이지만, 위의 기사를 링크하였다.
다시 읽어보는 아름다운 평전
전태일평전 | 조영래 지음 | 돌베개 이 책의 성취에 대해서는 본문에 쓴 바와 같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죽음>을 몇 차례에 걸쳐 보완하였다.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가 제 몸을 던져 역사의 비틀린 축을 바로 잡아가는 과정을 결코 ‘신비화’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책의 미덕이 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전태일이 책 속에 있다. 기나긴 잠행 중에도 이 책의 집필을 위하여 애썼던 인간 조영래가 슬며시 비치는 책이다. ☞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 /
평전의 한 모범 - 근대의 경우
천재와 광기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장영은 외 옮김 | 예하출판 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문장가는 그 자신이 허구의 소설가로 정평이 나있지만 동시에 위대한 작가의 내면 세계를 파헤친 뛰어난 평전 작가였다. 이런 비유가 가능하겠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노련한 외과 의사다. 그는 날카로운 메스에 최첨단 MRI 장비에 현미경까지 갖췄다. 그런데 정작 문장을 써나갈 때는 경력 수십 년의 중장비 굴착기 기사같다. 한 인물이, 그리고 한 시대가 조망되는 책이다.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가 드러난다. ☞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 /
평전의 한 모범 - 현대의 경우
수잔 손택 지음 l 홍한별 옮김 l 이후 조영래 변호사와 관련된 서책을 뒤져보았으나 꽤 오래 된 책들이 많았다. 우선 까치출판사에서 나온 변론집이 있다. 말의 진실한 뜻에서 귀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박상률 시인의 전기적인 책도 사계절에서 나왔다. 박원순 변호사가 조영래를 비롯한 지난 시대의 인권 변호 운동을 다룬 책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두레)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정판 조영래’는 아직 미간인 듯싶다. 그래서 ‘평전’의 한 모범이 되는 수전 손택의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야말로 시야가 확 트인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롤랑 바르트, 발터 벤야민, 앙토닝 아르토 등이 다뤄지고 있거니와 특히 ‘매혹적인 파시즘’을 기억할 만하다. 히틀러 시대의 영상가 레니 리펜슈탈을 다룬 이 글은 ‘동시대적인 성찰’이라는 평전의 기준이 어떠한가를 수전 손택이 확실하게 보여준다. ☞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