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누가 당신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쪽 뺨마저 돌려대시오. 당신을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마저 내어 주시오. 누가 당신에게 천 걸음을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시오. 당신에게 청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당신에게 꾸려는 사람은 물리치지 마시오”(마5:39-42)
때리는 것도 기술이지만 맞는 것도 기술이다. 권투 시합할 때 보면 선수가 주먹을 얼굴 앞에 들고 싸운다. 왜냐? 되도록 얼굴을 덜 맞을려고 하는 방법이다. 맞을 때 어떻게 하면 다치지 않을까? 덜 아플까? 덜 맞을까? 등등이 다 기술에 속하는 문제아다 . 실제로 군대에서 잘못 맞아서 병신 된 사람 많았다. 맞아도 우수하게 맞아야 한다. 군대에서 최고 졸병때 맞을 짓을 해서(군대윤리적으로) 고참들에게 오지게 밎아야만 할 일이 있었다. 탈영이냐 맞는냐의 갈림길에서 맞는 것으로 때우기로 결심은 했는데 막상 맞으려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정식으로 맞는 행사이기 때문에 ‘엎드려 뼈쳐’ 자세에서 곡갱이 자루로 엄살 없이 뻗을 때까지 맞아야 것이다. 내 처지가 딱했던지 바로 위 고참이 몰래 나를 부르더니 바지를 벋기고 이발소에서 쓰는 얇은 수건을 물에 적셨다가 꼭 짜서 엉덩이에 감아 주었다. 고참들이 타작을 하다가 맞은 자리에 물이 베어 나오면 피가 나오는 줄 알고 그만 때리도록 하는 눈속임인 것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농사 짓다 온 그 고참의 지혜 덕분에 고통의 연옥을 무사히 지날 수가 있었다. 할렐루야! 예수가 합기도(방어 위주의 호신술)를 가르치셨다는 것 아시는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것을 발견한 것은 내가 세계 최초일 것이다. 아니면 말고 .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마저 돌려대라.” 이거 맞는 기술의 도에 해당 하겠다. 무슨 이야기냐고? 잘 쫒아와 보시라. 전혀 저항할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매를 맞을 때 때리는 놈이 오른 빰을 때리면 얼굴이 왼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때 빨리 얼굴을 다시 돌려서 왼빰을 대지 않으면 잘못 맞아서 코뼈가 부러진다. 보라! 역시 예수는 호신술 합기도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호신술의 경지에서 보면 두 손으로 사람을 때릴 때는 구태어 왼 빰을 들이 댈 필요가 없다. 양 손으로 식성 대로 때리면 되니까. 그런데 오른 쪽 맞고 왼쪽 맞을려고 빰을 돌려대는 경우는 상대 선수가 한 손으로 때리고 내 쪽이 묵여있던지 아니면 전혀 저항 할 수 없는 권위 앞에 상대방이 전혀 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만이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그럴 때 오른 뺨을 때린 후 왼 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리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오른 뺨을 때릴 때 왼뺨을 대라는 말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을 당하게 될 때 꾹 눌러 참는 것이 한 대라도 덜 맞는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히 호신술을 넘어서 한 대라도 덜 맞는 처세술도 되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시는가? 직접 해보시라. 이것은 내가 아내와 함께 수 없는 반복 실험을 통하여 증명된 공식인 것이다. 피 나는 연구 없는 발견이 어디 있나? 말짱 황 씨의 시조가 되신 황우석 박사를 봐라? 연구를 게을리 하고 요령 피우면 그렇게 된다.
위의 성경 구절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네 가지의 이야기가 밑에서부터 점차 그 요구가 더 강해져서 억압의 오르가즘 을 느끼게 해준다. 눈 비비고 자세히 봐라. 처음에 꾸어 달라고 하는 청에서 함께 가자는 강요를 거쳐 재판을 걸겠다는 협박을 하고 나중에는 뺨을 때리는 폭력으로 점점 억압이 고조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범죄자가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듯이 신변의 위협이 점점 높아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여기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을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가 이야기한 위의 네 가지 경우는 당시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당시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실재적인 일들이었다는 것이다. 우선 제일 강제성이 약한 네 번째 경우인 돈을 꾸어 달라고 하는 경우부터 생각해 보자. 고대 동방에서는 구걸을 하는 거지들 때문에 성가실 지경이었다. 소수를 빼고서 대부분의 국민의 아르바이트가 구걸이라고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오늘날의 아프리카 처럼. 거지가 졸졸 따라다니면서 졸라대는 것은 물론 기분이 썩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염치없이 조르더라도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 번째 경우를 보자. 징용. 징발이라는 말 들어는 보셨을 거다. 일제 시대 때, 6,25 기간에 많이 있었던 일이다. 평화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한번 겪어 보았다. 1971년 도에 국회의원 비서를 하고 있을 때 연말에 지역구에 달력을 돌리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에는 1장에 일 년 12달이 다 나와 있는 달력이 농촌 지역에서는 아직도 많이 쓰일 때였다. 시골의 집집 마다 벽에 국회의원의 사진이 크게 나와 있고 글씨는 조그만 달력이 붙어 있었다. 검문소 앞을 지나는데 육군 중사 한 명이 나오더니 “가까운 곳에 간첩이 나타났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협조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하더니 무조건 올라타는 것이었다. 조금 가다가 마을에서 기다리던 예비군을 두 명 더 태우고 근처에 산으로 가자고 했다. 내 입장은 빨리 달력을 돌리고 사무실로 돌아가야 했지만 도저히 거절할 상황이 아니고 거절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예수 당시 길을 가다가 로마군에게 재수 없이 물건을 지고 가라고 강제징벌을 당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안 가겠다고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닐 것이다. 할 수 없이 복종해야만 하는 경우인데 5리를 끌려간 다음에 인상 쓰다가 트집을 잡혀 한 대 맞고 5리를 더 끌려가기 전에 자진해서 10리를 가라는 말이다. 두 번째 경우는 상황이 더욱 나빠진다.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이라는그것 밖에 없는 한 벌 옷을 빼앗길 처지이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추운 밤에 겉옷을 이불을 삼아야 함으로 어떤 경우에도 겉옷은 빼앗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유대인 사이에서는 겉옷을 빼앗길 염려가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고 이민족(異民族)인 로마군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한 마디로 치사하니까 까짓 것 겉옷까지 주어 버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경우는 위에서 예를 들었다. 흔히 기독교윤리를 말할 때 “관용의 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거 정말 웃기고 자빠진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약자가 강자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게 말이 돼나? 이런 것을 보고 ‘빙신 육갑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종종 병신쪼다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어차피 거부할 수도 없는 처지에 괜히 상대방의 비위를 거슬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에 완전히 중독된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듯, 일제 시대 조선 사람이 일본 순사를, 흑인 노예들이 백인 주인에게 대하듯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든 저항하지 말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가는 적극적 복종을 하라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세계적인 군사강국 로마와 보잘 것 없는 변방 식민지 팔레스틴의 이스라엘 민족주의가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가 로마와 유대 사이의 정치 사회적 구조를 분석할 만한 식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고대인으로서 예수는 로마를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 정도로 파악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명백하다. ‘불의를 당하더라도 어떤 보복이라도 할 생각일랑 아예 말아라. 힘으로 대항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과연 누구를 상대로 이 말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당시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이 말을 한 게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리떼가 들끓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는 양 같은 입장인 제자들에게 뱀 같은 지혜를 말한 것이다. 그들에게 상대방에게 감동을 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방법 즉, 상대방은 가지지 못한 도덕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역시 군대에서의 사건이었다. 훈련소에 입소해서 주일날만 기다리는데 토요일 밤에 눈이 많이 내렸다. 내무반장 오 하사가 휴가를 가서 중대 행정반에서 일병이 내려와서 임시 내무반장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놈이 눈을 치워야 하니까 교회 못간다 는 것이다. 맞아도 교회는 가야한다는 생각에서 교회 갔다. 물론 많이 맞았다. 그 다음 주 심술궂게 또 눈이 왔다. 못가게 한다. 또 갔다. ‘죽이기야 하겠냐?”는 비순교자적인 정신으로 . 임시 내무반장, 35 년이 지난 지금도 이름도 안 잊어 버린다. 전명규 일병이 완전히 돌아 버렸다. 내무반장 중에 제일 쫄병 일병이라고, 임시 내무반장이라고 자기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나를 복날 개패듯이 패더니 “다음 주에 또 갈거야? 안 갈거야?” 다구친다,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아예 복을 받아놓자는 것이다. 갈거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가만 있었더니 이번에는 대답 안한다고 때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모기만한 소리로 “갈 겁니다”하고 대답 했더니 이 친구 완전히 인사불성이되어버렸다. 무식해서 ‘신앙 때문에 죽음도 불사하는 예수쟁이들의 곤조’를 도무지 모르는 놈이었다. 파르르 떨더니만 매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웃통을 벋으라더니 밖에 나가 국기게양대 위에 ‘교회 안가겠다고 생각들 때까지”부동자세로 서있으란다. 영하 10도에 날씨에. 할 수있나? 군덴데. 몇 개월 먼저왔다고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야만사회 아니던가? 그날 따라 바람은 왜그렇게 부는지? 어금니 꽉다물고 배에 힘을 주고 버텨보는데 별 생각 다했다, 역시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최고였다, 그거 생각하니 참을만 했다. 아마 예수가 부처처럼 방에서 요깔고 편안히 돌아가셨으면 못 참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구봉서인데 몸은 구본승’이라고 몸뚱이는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영화 10도의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 칼바람을 맞으며 서있으려니! 성경에 예수도 추위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는 없던데. 내 머리위에서 국기가 펄럭이면서 기관총 소리를 내던 것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싶어서 그만 항복 할까 하는 찰나에 전 일병 보다 고참이 그만 내려 오란다. ‘저러다가 사고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내무반으로 뛰어 들어가려니 갑자기 후근 후끈후근한 내무반에 들어오면 동상 걸릴 염려가 있으니 연병장 한바퀴 돌고 들어오란다. 맞는 것만 기술이 아니고 기압 주는 것도 기술이었다. 내무반에 들어갔더니 창 밖으로 보고 있던 동료들이 담요로 몸을 감싸더니 비벼주고 맛사지 해주고 난리났다. 모두들 악질 폭군 임시 내무반장 전명규 일병을 이긴 것을 마음으로 축하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다음에는 나 뿐만 다른 사람도 교회 가는 것에 아무 구애를 받지 않았다. 이것는 사나운 복종이 억압을 이겨내는 도덕적 승리의 작은 예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러데 웃기는 일은 정식 내무반장 오하사가 휴가에서 돌아와서 전말을 전해듣고 어깨를 두두리며 “고생했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꼭 혹독한 시집살이 하던 며느리가 친정 아버지 품에 안긴 기분이었다. 아마 이 세상 고난 다 지나고 예수를 다시 만날 때가 그럴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신파조로 흘렀다. 그러나 사실이니까. 물론 오하사가 전 일병을 정식으로 패주었다는 전설과 함께.
첫댓글오매~ 지는 기독교 믿는다고 부대원을 교회로 총출동시키던 대대장님 밑에 있었는디요.. 지는 당시 부대밖 인근 절로 일요일마다 행진했었지요. 제대한 다음해인 1997년 부처님 오신날쯤, 부대를 방문했더니 당시 포대군종이 하는말, "어제 야간교육했시요~" 당근 지쳐자빠진 사병들 대부분은 잠에 골아떨어져서 절에는 얼씬도 안 했지요..교육이야 대대장 소관이것지만, 어째 좀 꽤씸하더군요. 아무튼 간에, 기독교든 불교든 꼴통들이 문제지요.
제가 제대하기 직전 마지막 예불을 드리러 갔을 때, 후임병들이 그간 고마웠다며 절 근처 계곡에서 술판을 준비했더군요. 저는 "니들 마음은 고마우나, 제대하면 나는 언제든 마실 수 있으니, 니들이니 들키지 말고 티 안나게 마셔라."고 하고 그냥 겨울계곡 물소리만 듣다 부대로 돌아갔지요. 근대 저보다 1주일 늦은 말년병장 한 놈이, 어떻게 그날 술에취해서 당직중사한테 현행범으로 걸려버렸지요. 눈 치운다고 다들 집합했는데 그놈만 내무반에 술냄새 풍기며 널부러졌으니..저빼고 절에간 사람 전원이 완전군장으로 군복이 황토로 염색이 될 지경으로 뺑뺑이를 돌았지요. 지는 도와줄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지요...
첫댓글 오매~ 지는 기독교 믿는다고 부대원을 교회로 총출동시키던 대대장님 밑에 있었는디요.. 지는 당시 부대밖 인근 절로 일요일마다 행진했었지요. 제대한 다음해인 1997년 부처님 오신날쯤, 부대를 방문했더니 당시 포대군종이 하는말, "어제 야간교육했시요~" 당근 지쳐자빠진 사병들 대부분은 잠에 골아떨어져서 절에는 얼씬도 안 했지요..교육이야 대대장 소관이것지만, 어째 좀 꽤씸하더군요. 아무튼 간에, 기독교든 불교든 꼴통들이 문제지요.
제가 제대하기 직전 마지막 예불을 드리러 갔을 때, 후임병들이 그간 고마웠다며 절 근처 계곡에서 술판을 준비했더군요. 저는 "니들 마음은 고마우나, 제대하면 나는 언제든 마실 수 있으니, 니들이니 들키지 말고 티 안나게 마셔라."고 하고 그냥 겨울계곡 물소리만 듣다 부대로 돌아갔지요. 근대 저보다 1주일 늦은 말년병장 한 놈이, 어떻게 그날 술에취해서 당직중사한테 현행범으로 걸려버렸지요. 눈 치운다고 다들 집합했는데 그놈만 내무반에 술냄새 풍기며 널부러졌으니..저빼고 절에간 사람 전원이 완전군장으로 군복이 황토로 염색이 될 지경으로 뺑뺑이를 돌았지요. 지는 도와줄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