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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식비 낼테니 시주 하시려오?
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⑩⑪
“그 도지사란 놈 당장 목을 벨…” 서슬퍼런 호통에 일본 관원도 머뭇 바위 내려앉을 리 없단 말에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
⑩ 속인들의 탐심에 일갈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과 여러 날 째 멀리 여행을 하고 있었다. 두 스님이 길을 가는데 그만 여비가 똑 떨어졌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행장을 풀고 하룻밤을 쉬게 됐다. 다음날 여관주인이 경허ㆍ만공 스님에게 숙박비와 식대를 내라고 했다. 그러자 경허 스님이 “우리가 법당을 중수하려고 화주를 나왔습니다. 주인께서도 시주를 하시지요?”라고 말했다.
여관주인이 잠자코 있다가 답했다. “그러면 그 화주 책을 한번 봅시다.” 만공 스님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경허 스님에게 화주 책이 없었다. 화주 책도 없는데 시주하라고 말을 꺼냈으니 큰일이었다.
만공 스님이 말했다. “실은 이 주인댁에 우리가 화주를 하려고 왔으나 지난 밤 너무 극진한 대접을 받아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니 이 댁에서는 시주를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화주 책을 내놓지 않고 둘러대는 만공 스님의 말에 얼떨떨해진 여관주인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때 만공 스님이 덧붙인 한마디가 가관이었다. “그렇게 까지 괘념하시어 우리에게 시주까지 고맙게 해 주신다면 책을 꺼내 보여드리지요.” 만공 스님은 걸망 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정작 있지도 않은 화주 책을 꺼낼 기세였다. 그러자 여관주인이 “네,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스님들” 하며 책 꺼내는 것을 만류하는 것이 아닌가. 주인으로서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여관비를 받기는커녕 법당 중수 화주까지 하게 생겼다는 생각에 책 꺼내는 것을 극구 만류할 수 밖에 없었다.
여관 주인은 “스님들, 그렇다면 제가 시주를 특별히 할 수는 없고 어젯밤 두 분의 숙식비는 받지 않을 테니 그냥 가시지요”하고 정중히 말했다. 여관에서 나오자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에게 말했다. “자네 수단이 나보다 훨씬 낫네 그려” 만공 스님이 경허 스님과 만행하며 겪은 고비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고비 마다 만공 스님은 기지를 발했다.
어느 날 만공 스님이 경허 스님을 모시고 전주 인근을 지날 때의 일이었다. 어느 식당에서 점심공양울 마친 두 스님은 구한말 시대에 쓰던 은백전을 내주었다.
당시는 일제가 침략 정책에 의해 화폐개혁을 하고 새 화폐 사용을 강요하던 시기였다.식당주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허 스님이 큰 눈을 부릅뜨고 일갈했다.
“그 도지사란 놈은 당장 잡아 목을 벨 놈이로구나. 우리나라에서 내놓는 돈을 우리나라 사람이 사용 못하다니, 그런 죽일 놈이 있단 말이냐? 이 돈을 썩 받아라!” 스님의 호통에 주인은 얼떨결에 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식당 주변에는 일제 관원이 나와 있었다. 관원이 이 광경을 보고 개입하려 했지만 서슬 퍼런 스님의 야단에 관원조차 무어라 말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경허 스님은 이 틈을 타 식당을 나와 뛰기 시작했다. 만공 스님은 태연한 척 마을 사람들에게 잘 이야기 하고는 부리나케 경허 스님을 쫓아 식당을 빠져 나왔다. 얼마를 갔을까, 산모퉁이를 돌고나니 경허 스님이 쉬며 있었다.
“내가 어지간하지. 그 바람에 길을 많이 걸어왔다. 어떠냐. 내 재주가?” 경허 스님의 너털웃음에 두 스님은 만행의 피로를 잊고 다시 길을 떠났다.
⑪ 동굴에서 비를 피하며
경허 스님을 모시고 만공 스님이 어느 산중 깊은 길을 가다 갑자기 비를 만났다. 두 스님은 큰 바위 동굴에 몸을 피했다. 조용한 가운데 경허 스님이 단단한 바위로 된 동굴 천장을 자꾸 올려다 보는 것이 아닌가. 만공 스님이 이런 경허 스님에게 의아해 말했다.
“스님은 왜 그렇게 천장을 올려다 보십니까?” 경허 스님이 조용히 말했다.“이 바위가 내려 앉을까 염려되서 그러네.”
만공 스님이 “스님 이 끄덕없는 바위가 내려 앉을 리가 있겠습니까?”하고 다시 묻자 경허 스님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네.”
허망한 줄 알면 그대들도 참모습 볼수 있네
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⑫⑬
막걸리 한 동이를 단숨에 비우니 상주 “무애행의 도높은 스님들망인의 명당을 잡아주십시오”
“썩을 고기 덩어리에 명당이라니…”
⑫상여 가로 막은 무상설법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과 함께 먼 길을 나선 어느날이었다. 한 낮에 민가는 눈에 띄지 않는 첩첩산중의 길이었다. 두 스님은 시장기가 들기 시작했다. 굽이진 산길을 돌아 어느 산마루턱에 당도했을 때 길 저편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색 포장과 깃발 같은 것들이 늘어져 있는 상여의 행렬이었다. 고개 마루턱에서 쉬는 상여 행렬로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을 이끌고 다가갔다. 경허 스님이 상여 앞에서 염불 한 다음 음식을 청했다.
“시장해서 음식을 좀 청합니다.” 한 상여꾼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행상(行喪) 길이니 술 밖에 더 있겠습니까?” 상여꾼의 장난에 경허 스님은 태연히 말했다.
“술이 있으면 술을, 고기가 있으면 고기를 주시지요.” 술을 달라는 말에 상여행렬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따 참, 별 중들을 다 보겠네.” 어떤 사람은 두 스님을 보며 빈정거렸다. 이때였다. 점잖은 상주가 나섰다.
“아니 큰 스님들이 어찌 술을 달라하십니까? 곡차라고 하지도 않고….” 경허 스님은 상주를 보며 답했다. “시장한데 한잔 하면 되지, 굳이 다른 말할게 뭐 있겠소.” 어이가 없어진 상주는 술 한 대접을 듬뿍 떠서 내 놓았다. 막걸리였다. 헌데 경허 스님이 술잔을 받지 않고 손을 내젓는게 아닌가.
“잔이 너무 작소. 차라리 바가지나 동이채로 주시오.” 기가 막히면서도 기이한 스님의 행식에 흥미를 느낀 한 사람이 “어디, 동이 통째로 내 줘보지”하며 술이 가득 담긴 동이를 들어 경허 스님 앞에 내 놓았다. 경허 스님은 막걸리 한 동이를 단숨에 비워냈다.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던 상주는 이 스님들이 틀림없이 도가 높은 스님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주가 경허 스님에게 공손히 물었다.
“무애행(無碍行)을 하시는 도가 높은 스님들 같사온데 스님들의 자비로움으로 망인이신 우리 아버님의 명당을 하나 잡아 주실 수 없는지요?”
상주의 말에 경허 스님은 느닷없이 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명당을 써서 뭣하게? 죽으면 다 썩은 고기 덩어리 밖에 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도 혹시나 망자를 위한 영험함을 보일까 기대했던 상주의 동생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울화가 치밀었다. 상제들은 주정꾼의 주사 같은 경허 스님의 말투에 어이가 없어 모두 달려들었다.
“아니, 어디서 떠돌던 중놈들이!” 상장(喪杖; 상주의 지팡이)을 들고 당장에 후려칠 기세에 경허 스님이 맞섰다.
“네 이놈들!” 스님은 두 팔을 걷어 올리고 딱 버티고 섰다.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은 모두 육척이 넘는 건장한 체구였다. 스님들의 위세가 매우 당당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뜻밖의 사태에 상여꾼들과 회장꾼들은 그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 때였다. 상주가 상제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스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남화경(南華經)>에도 있듯 사람이 죽으면 까막까치나 구더기의 밥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모자라서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손의 도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상주는 행상길을 재촉해 떠날 차비를 했다. 잠자코 있던 경허 스님은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다 허망할 뿐이니 죽고 사는 것 원래 그러하므로 만약 모든 것이 참으로 허망한 줄 알면 그대들도 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일세.”
생멸의 실상을 설하자 이를 듣던 상여 일행은 조용히 고개를 넘어갔다. 고개 너머로 상여의 구슬픈 소리가 바람결에 멀어져 가고 있었다.
⑬ 밀씨와 파씨
청양 장곡사(長谷寺)에 경허 스님이 잠시 주석하던 때였다. 경허 스님이 곡차를 잘 드신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 마을 사람들이 곡차와 파전을 비롯한 여러 안주거리를 정성껏 마련해 공양을 올렸다. 마을 선비들과 술자리가 무르익은 뒤 옆에 있던 만공 스님이 선비들에게 법문 한 소절 해주십사하는 마음에 경허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저는 혹 술이 있으면 들기도 하고, 없으면 들지 않습니다. 이런 파전도 굳이 먹으려고도 하지 않고, 또 생기면 굳이 안 먹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법문 한 소절….”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의 말을 끊고 대꾸했다.
“허어, 자네는 벌써 그런 무애 경계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렇지 못하여 술이 먹고 싶으면 제일 좋은 밀씨를 구해 밀을 갈아 김을 매고, 가꾸어 밀을 베어 털어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고, 걸러 이렇게 먹을 테네.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해 밭을 일구어 파를 심고, 거름을 주며 알뜰히 잘 가꾸어 이처럼 파전을 부쳐 먹어야 하겠네.”
이 말에 만공 스님은 등에서 땀이 나면서도 오싹해지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때 만공 스님은 경허 스님의 무애행 도리를 깊이 깨달았다.
청정한 체 하는 것은 ‘나와 남’ 속이는 것
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⑭⑮
스승의 무애행에 질색한 행자 곡차 안주에 비상가루 뿌려 경허, 비상 털고 태연히 드신 후 함구 후일 행자는 만공에게 고백 참회
⑭ 행자 관섭의 흉계
경허 스님을 모시던 관섭(寬燮)이라는 행자가 겪은 일이다. 행자 관섭은 짧은 식견이지만 경허 스님의 법문을 좋아했다. 하지만 스님의 무애행 만은 질색했다.
행자 관섭이 경허 스님의 곡차 심부름을 몹시 귀찮게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다. 경허 스님이 안주를 사오라며 돈을 건넸다.행자 관섭은 안주를 사고 나머지 돈으로 몰래 비상(砒霜)을 샀다. 행자 관섭은 술심부름에 시봉에 너무나 힘들어 경허 스님이 비상을 먹고 죽었으면 하는 막된 생각으로 흉계를 꾸몄다. 행자 관섭은 비상을 빻아서 구운 닭고기 안에 골고루 뿌려 넣었다. 그리고는 곡차와 닭 안주를 경허 스님에게 천연덕스럽게 가져다 올렸다.
행자 관섭은 경허 스님이 닭 안주를 먹으려 하자 막상 겁이 덜컥 났다. 관섭은 방을 빠져 나가 뒷문에서 문구멍으로 숨을 죽이고 경허 스님의 동정을 가만히 지켜봤다. ‘저걸 자시나 안자시나, 드신다면 곧 쓰러질 게 아닌가. 쓰러지신 이후에는 어떻게 하지’
관섭은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을 직접 확인하려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경허 스님이 먼저 곡차를 한잔 쭉 따라 마시고 닭 안주를 먹기 시작했다. 경허 스님이 닭 안주를 먹는데 안에 무엇인가 버석버석 한 것이 있었다. 스님이 가만히 살펴보니 비상을 빻은 것이었다.
경허 스님은 비상 가루를 씹히는 것만 털어버리고 아무 말 없이 계속 먹었다. 비상가루를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골라 털어버린 닭안주를 모두 먹은 경허 스님은“아, 참 잘 먹었다”며 방에서 드러누웠다.
행자는 음식에 묻은 비상을 보고서도 태연히 드신 경허 스님의 경계를 지켜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행자 관섭은 겁이 나고 무서워 이 사실을 가슴 속 깊이 숨겨두었다가 후일 만공 스님에게 고백해 참회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 전까지 경허 스님은 다른 이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개심사 주지 부자로 소문 났으니 모아 놓은 쌀을 몰래 가져오너라” “정직하지 못한 일을 지시하십니까” 쌀자루 올리니 ‘막걸리 사 오너라’
⑮ 나와 남을 속이는 무서운 도구
경허 스님이 서산 개심사 조실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개심사 주지 동은(東隱) 스님은 세간에 부자스님으로 소문나 있었다. 해마다 들어온 쌀을 조용히 모아 사찰이름으로 논을 샀기 때문이다. 경허 스님이 하루는 시자인 사미승 경환을 시켜 동은 스님이 모아놓은 쌀을 모두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소문일 뿐 확인되지 않은 쌀을 가져오라는 지시에 사미승 경환은 어리둥절했다.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환의 질문에 경허 스님은 그저 다시 동은 스님의 방에서 쌀을 가져오라고 지시할 뿐이었다.
경환은 “남의 물건을 몰래 가져오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짓인데 어찌 그런 일을 스님께서 지시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경허 스님은 경환에게 “이놈아, 너무 정직하기만 하면 못쓰는 것이니라. 정직한 체, 청정한 체 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무서운 도구가 되느니라. 알겠느냐?”고 경책했다.
경허 스님은 경환에게 다시 주지 방에 둔 쌀을 몰래 훔쳐올 것을 지시했다.경환은 할 수 없이 쌀을 가지러 가기 위해 주지 동은 스님의 방으로 갔다. 주지스님 방에는 큰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또 주지스님이 좀처럼 자리를 비우지 않아 쌀이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곳 근처조차 갈 수 없었다.한 나절 동안 주지실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경환은 주지스님에게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주지스님, 실은 조실스님께서….”
그 사실을 전해들은 동은 스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동은 스님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쌀을 내어주며 경환에게 말했다.
“조실스님의 장난은 이제 이런 짓까지 서슴지 않으시니, 참 알 수 없는 일이구나. 어찌됐든 노스님께 갖다 올려라” 경환은 묵직한 쌀자루를 지고와 경허 스님에게 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허 스님이 말했다.
“그 쌀을 가지고 아래 마을에 내려가 막걸리를 사오너라.”
달 밝고 바람 맑으니 이것이 본래면목
경허 선사 수행일화 ?
바랑에서 돼지 뒷다리 꺼내니 황소만한 호랑이 법당 난입 경허 스님 법당 밖 바위에 가부좌 호랑이들 설법 듣듯 스님 앞에 엎드려
경허 스님의 명성이 방방곡곡을 울릴 즈음 송광사에서 스님을 청했다. 경허 스님을 불사 점안, 즉 불상이나 탱화를 조성하고 불상의 안정에 점을 찍는 의식의 증명법사로 초청한 것이었다.
경허 스님의 무애행이 파격적이라 스님을 초청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많았지만 스님의 경지를 알고 있는 대중들에 의해 초청된 것이었다.자연히 송광사 점안법회는 큰 관심을 끌었다.
송광사에서는 증사단(證師檀)을 호화스럽게 꾸민 후 경허 스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경허 스님의 점안을 보기 위해 대사찰인 송광사와 그 주변의 말사, 암자에서 수많은 대중들이 법당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경허 스님이 나타났다. 그러나 경허 스님은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 소리 죽여 말하는 이들은 경허 스님을 초청해서는 안 된다는 측이었다.
“아니 어쩌시려고…….”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측은 경허 스님을 초청하자던 대중들이었다. 법당 안에 들어선 경허 스님은 대중 앞에서 성큼 단상으로 올라갔다. 스님은 먼저 공양주를 불렀다. 그리고 메고 온 바랑에서 난데없이 술병과 돼지 뒷다리를 끄집어냈다.
“이거 얼른 삶고 데워 와!” 법당 안에 모인 스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증명법사로 오신 스님이 술과 고기라니? 특히 증사단에는 가당치도 않은 것들이었다.이런 경허 스님에 대한 불만은 특히 젊은 스님들 사이에 더욱 크게 일었다. 젊은 스님들 사이에서는 ‘증사고 뭐고 미친 주정뱅이를 쫓아내자’는 공론마저 일었다. 이런 동요는 노장 스님들의 만류로 겨우 진정됐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황소만한 호랑이들이 법당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증사단 앞에서 경허 스님을 끌어 내리려던 스님들에게 호랑이들은 눈앞에서 시퍼런 안광을 내뿜었다. 경허 스님은 주장자를 끌고 법당 밖 넓은 바위 위로 올라갔다.
바위에 올라앉은 경허 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앉았다.여러 마리 호랑이 중에 두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경허 스님이 앉아 있는 바위로 다가왔다.
바위에 올라간 호랑이들이 경허 스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경허 스님은 여전히 묵연 삼매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호랑이들은 이런 스님 앞에서 마치 설법을 듣는 듯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본 대중들은 사태 변화를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경허 스님은 한참 만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다 물러가 해탈문에 들도록 하여라.”
경허 스님의 우렁찬 말이 떨어지자 호랑이들은 모두 일어나 조계산(曹溪山) 깊은 산속으로 사라졌다. 경허 스님은 그 후 증사단으로 올라 무상의 묘법을 설했다.
“술과 고기 맛이 기가 막히니 이곳이 고불(古佛) 도량임을 알겠다. 분명 물은 맑고 산은 푸르리라. 달은 밝고 바람이 맑으니 이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소식이 아니겠는가. 천상에서 내려오는 부처들이 곧 그대들의 불성(佛性)이로다. 그 불성에 눈뜨지 못한 자 오늘에야 눈을 뜨리라.”
경허 스님은 그렇게 말한 뒤 불상에 점안으로 생명을 불어넣고 조계산 속으로 호랑이처럼 사라졌다. 대중은 사라져가는 경허 스님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방광불화엄경>의 소식하루는 경허 스님이 오대산 월정사를 지나게 됐다.
당시 월정사 방장으로 있던 인명(寅明) 스님이 경허 스님에게 〈화엄경〉 설법을 청해 3개월간 월정사에서 화엄경 법회를 진행됐다.1000여 명에 달하는 승속이 청법하는 자리에서 경허 스님은 의연히 법좌에 올라 말했다. “〈대방광불화엄경〉이라.” 경허 스님은 먼저 대(大) 자에 대해 설법했다.
“대들보도 대(大)요, 댓돌도 대요, 대가사도 대요, 세숫대도 대요, 담뱃대도 대니라.”
경허 스님은 곧이어 방(方) 자에 대해 설하길
“근 방도 방이요, 지대방도 방이요, 질방도 방이요, 동서남북 사방도 방이니라”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광(廣)자로 법문을 이어나갔다. “쌀광도 광이요, 찬광도 광이요, 연장광도 광이요, 광장도 광이니라.”
불(佛) 자에 대해 “등잔불도 불이요, 모닥불도 불이요, 촛불도 불이요, 화롯불도 불이요, 번갯불이도 불이요, 이불도 불이며, 횃불도 불이니라.”고 말했다. 화(華) 자에 대해 “매화도 화요, 국화도 화요, 탱화도 화요, 화병도 화요, 화살도 화요, 〈화엄경〉도 화니라”고 설법했다. 엄(嚴) 자에 대해서는 “엄마도 엄이요, 엄살도 엄이요, 엄정함도 엄이요, 화엄도 엄이니라.”또 경(經) 자에 대해서는 “면경도 경이요, 구경도 경이요, 풍경도 경이요, 인경도 경이요, 안경도 경이니라”고 말했다. 경허 스님의 자유로운 노래에 대중은 모두 흥미를 느꼈다. 경허 스님은 이어 〈화엄경〉에 대한 심오 무변한 대의진수(大義眞髓)를 3개월 간 설했다.
“큰스님, 법은이 망극합니다”
경허 스님 수행 일화 ??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 물으니
? 곡차 동이의 법력 보은 법주사에서 진하(震河) 스님과의 일화다. 법주사에서 강백으로 이름을 크게 떨치던 진하 스님은 평소 경허 스님을 좋지 않게 평하고 있었다.
진하 스님은 학인 스님들로 하여금 경허 스님을 혼낼 작정을 하고 있었다. 이러던 중 우연히 경허 스님이 법주사를 찾았다. 벼르고 벼르던 학인스님들은 경허 스님에게 봉변을 줄 계획을 짜 놓고 있었다. “자고로 종사(宗師)가 선사(禪師)에게 이런 법이 없다!” 경허 스님의 한마디에 진하 스님은 그만 아찔해졌다. 평소에 경허 스님의 무애행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겨 불만에 찬 비평을 늘어놓던 진하 스님은 경허 스님을 친견하자 첫 눈에 존경심이 나게 됐다.
부산 범어사에서 경산(擎山) 스님과의 일화다. 경허 스님이 어느 날 범어사에서 경산 스님과 부산진을 거쳐 해운대를 돌아보고 오게 됐다. 경산 스님은 기골이 장대하고 그 힘이 장사였으며 한때 걸승으로 유명한 스님이었다. 경산 스님은 경허 스님을 모시고 일부러 주점 인근을 다니며 스님이 곡차를 마음껏 드실 수 있도록 했다.
? 정 처사와의 사제인연
“차처해우벽지(此處海隅僻地)로 구불견룡사(久不見龍蛇)려니 금일래자(今日來者) 시룡야사야(是龍耶蛇耶)?”
“이 곳은 바닷가의 구석진 벽지로서 오랫동안 용도 뱀도 보지 못했는데, 오늘 온 것은 용인가? 뱀인가?”란 뜻이었다.
“석가불배 석가불(釋迦佛拜 釋迦佛)이요, 미륵불배 미륵불(미륵불배 미륵불)입니다.
정 처사의 말은 경허 스님에게 절하는 자신은 경허 스님을 알만하며 경허 스님 또한 자신을 알 만 하다는 것이었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문답
“여하시(如何是)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이니꼬?” 달마 조사가 서쪽 인도에서 온 참 뜻이 무엇이냐는 선문답이었다. 태평 스님에게 경허 스님은 아무 대꾸 없이 주장자를 들어 냅다 후려 갈겼다. 주장자를 맞은 태평 스님이 다시 입을 열기를 “때리기는 때렸어도 조사서래의는 아닙니다”고 말했다.
“사자는 사람을 물거늘(獅子咬人), 어찌 한나라 개는 흙덩이만을 쫓는고(韓盧逐槐)?”
그 소리를 듣고 태평 스님은 공손히 경허 스님에게 아뢨다. 경허 스님은 웃으며 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00리 길 걸음이 행선,한마음 내는 순간 부처
경허 스님 수행일화
100리 오가며 탁발 굶는이들 도와 군자와 광녀는 모두 같은 도반 묵향과 썩은내 구분할바 있으리 말하지 않음 속에 법거량 있고 한데 뒤엄킴 속에 불법 나퉈 탁발과 보시행은 다르지 않아 굶주림 앞엔 부처도 없어
?묵군자(默君子)와 광녀(狂女)
해인사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경허 스님은 경상도 지방에서 유명한 묵군자(默君子)의 소문을 듣게 됐다. 경허 스님은 그가 있다는 한 암자를 찾아갔다.
경허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암자의 방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묵군자는 방 안에 혼자 묵묵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경허 스님이 들어가 앉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벽을 보듯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몇시간을 두 사람은 나란히 보며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을 서로 말없이 앉아 마주보기만 할 뿐이었다. 묵 군자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마주 앉아있던 경허 스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묵군자, 묵군자. 내 그대의 이름을 들은지가 오래더니, 과연 헛된 이름이 아니로군.” 묵군자가 곧 대답했다.
“네, 경허 스님, 경허 스님. 성망(盛望)을 들은지가 오래인데 바로 경허 스님이 아니시오.” 생면부지의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묵군자는 경허 스님을 바로 알아보았다. 묵군자가 하인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묵군자는 하인을 시켜 주안상을 한상 차려오도록 했다. 법담의 상대를 만난 서로는 백년지기와 같이 함께 음식을 들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몇일 동안 경허 스님과 묵군자는 한방에 묵으며 법을 논하며 지냈다.
경허 스님의 경지가 드러난 일화는 또 있다. 그 대상은 군자로 이름을 날린 묵군자와 반대인 광녀였다. 경허 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있던 어느날이었다. 경허 스님은 만신창이가 된 광녀를 데리고 와 조실방에서 같이 식사하고 자곤 했다. 이 광녀는 스님이 자신을 예뻐하는 줄 알고, 가지도 않고 조실 방에서 계속 기거하며 숙식을 함께 했다.만공 스님은 이런 모습을 대중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문 밖에서 혼자 지키고 있었다.
누군가 경허 스님을 뵈러 오면 “스님께서는 지금 주무십니다”하며 돌려보내곤 했다.만공 스님이 몇일 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경허 스님은 광녀에게 팔베게를 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에게 다리를 걸치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 광녀를 자세히 보니 코도 눈도 분간할 수 없었으며 손가락도 없었다. 또 걸친 옷은 고름과 소변에 쩔어서 올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씻지도 않아 몸에서는 송장 썩는 악취까지 풍겼다.
만공 스님은 경허 스님의 경계를 한참 서서 생각했다. 자신이 만약 저 여자를 저렇게 같이 데리고 잘 수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도저히 할 수 있는 자신이 없었다.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공 스님은 열 번을 고쳐 생각해도 경허 스님의 법력을 따를 수가 없구나 하여 존경심이 더욱 깊어 졌다.
? 지리산 기슭에서의 자비행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마천(馬川)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천 마을이 자리한 심산 유곡은 실상사(實相寺)ㆍ백장암(百丈庵)ㆍ벽송사(碧松寺)ㆍ상무주(上無住) 등지로 갈 수 있는 길목이지만 무성한 숲 속 오솔길로 높고 험한 재로 인해 이따금 길손이 찾을 뿐이었다.
어느해 초여름 무렵이었다.모진 흉년 끝에 마천 마을 주민들은 보리고개를 넘다 못해 굶주려 아사할 직전에 이르게 됐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로 어지럽고 어렵던 암흑시기여서 어느 누구도 두메산골의 가파른 민생고를 해결 할 수 없었다.
경허 스님이 우연히 그 곳을 지나게 됐다. 스님은 지리산 마천 마을의 참상을 보고는 가던 길을 멈추었다. 한동안 생각에 젖어 있던 스님은 가던 길을 되돌려 남원 쪽으로 향했다.
스님은 단숨에 100리 가까운 길을 걸어 남원 땅에서 탁발을 하기 시작했다.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스님은 가까스로 바랑 가득히 곡식을 모을 수 있었다.
경허 스님은 그 짐을 짊어지고 걸음을 재촉해 100리 길을 다시 걸어 마천 마을로 돌아왔다. 스님은 집집마다 손수 돌며 굶주린 주민들에게 손수 식량을 나눠주면서 자비 보시행을 베풀었다.여러 차례 걸쳐 스님은 100리를 걸어 탁발을 하고 또 100리를 걸어 자비행을 베풀었다.
굶어 숨넘어갈 고비에 놓인 두메 사람들을 계속 이처럼 살려놓은 뒤에야 스님은 이렇다할 말도 없이 비로소 가던 길을 다시 걸어 산중 오솔길로 접어들어 홀로 자취를 감추었다.지금까지도 지리산 기슭 마천 마을 일대에는 굶주려 죽게 된 산골 사람들을 구원한 경허 스님의 자비행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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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