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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놓고 휘젓고 다녀도 되는 몸으로...
내 수면 습관은 토끼잠이며 밤낮의 구분이 없다.
밤잠 시간이 짧으므로 낮에 걷다가도 졸리면 아무데서나 앉은잠을 잠시 자고 일어난다.
토기잠이기 때문에 밤에도 자주 깬다.
잠자리에 든지 얼마되지 않은 첫 새벽에 깬 김에 좁은 실내를 걸어보았다.
어제 밤에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맨 새로운 방법이 주효했나.
깬 잠이 놀라 달아나버릴 정도로 말짱했다.
지금의 나를 본 사람이라면 간헐적으로 괴롭히다가 바로 어제 아침,코카를 떠날 때부터
여기 알베르게에 들 때까지 종일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겠나.
신체적 고통의 체감 또한 상대적이다.
2번의 헤르니아(hernia/脫腸)수술에도 많이 걷는 탓인지 장이 삐어져나오려 하며 수술
부위가 수시로 적잖은 고통을 안겨주었는데 어제는 전혀 느끼지 못한 하루였다.
발의 고통이 더 강렬했기 때문이었을텐데 이 아침에 그 고통이 되살아난 것은 발고통이
잠잠해졌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실은 탈장 수술부위의 고통이 아니고 바로 인접한 맹장의 염증으로 인한 고통이었음을
알게 되기는 귀국하여 1년이 경과한 후였다.
맹장이 파열되고 복막염으로 악화되었는데,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그랬더라면 그 곳에
<KIM JIN KEY PEREGRINO COREANO FALLECIDO ** ** 2011/한국인순례자 김진기
2011. . . 사망>이라고 쓴 나무십자가 하나 서있을 뻔 했다)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출발했으나 알바는 마을을 벗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철로 위 다리를 건넌 후 철로와 동행하다가 낮은 민둥산을 넘으면 너른 들판이다.
비예기요 이후 주도(州都) 코앞까지 세고비아의 광활한 캄피냐(campina/평원)에 안내
판 하나 없이 멀찍멀찍 박혀있는 마을중 하나를 찾아가야 한다.
마드리드에서 오는 이들은 순풍에 다름 아닌 노란 화살표만 따라 가면 되지만 나는 그
화살표를 찾느라 이른 아침부터 허둥대고 있는 것이다.
온 들이 놀이터인 듯 껑쭝거리며 얼씬대는 토기들이 얄미운 아침이었다.
쌤통이라고 고소해 하는 듯 해서.
다만, 어제까지와 다른 점은 까닭을 전혀 모르니까 '그 분'의 돌보심으로 믿을 수 밖에
없는, 통증이 사라진 두 발이라 맘 놓고 휘젓고 다녀도 되는 아침이었다.
피니야 데 암브로스 마을 교회의 종탑이 보이는 길모퉁이에서 별난 청년을 만났다.
짚고 있는 지팡이와 표주박으로 보아 순례자가 분명한데 맹견인 듯 입마개(muzzle)를
씌운 검은 개와 함께 걸어오는 젊은이는 38세의 폴라코(Polaco/폴란드人).
애완견과 함께 말을 탄 이탈리아노와 야영용 장비를 실은 리어카를 끄는 포르투게스는
만났으나 맹견과 함께 걷는 순례자는 내게는 유일하며 선입견 탓인지 괴짜 이미지다.
숙식과 교통편 등 애로가 배가(倍加)될 텐데 왜 그럴까.
윤회전생을 믿은 효자가 평생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모친이 자기 집 개로 환생하였다
하여 개를 업고 관광을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피니야 데 암브로스(Pinilla de Ambroz) 마을은 지자체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
소속 14개 마을 중 하나다.
산타 마리아에서 5km라는 첫 마을(순방향에서는 끝 마을)에 2시간 반 만에 도착했으니
이 아침에도 반은 헤맨 셈이다.
주민이 40명미만으로 마드리드 길 세고비아 주에서 가장 작은 마을이며 바야돌리드 주
폰티오유엘로와 함께 마드리드 길 전 구간에서 가장 작은 두 마을 중 하나다.
그래도, 주민이 단 2명인 만하린을 비롯해 2자리 수의 미니 마을이 무수한 프랑스 길에
비해 마드리드 길쪽은 유사한 메세타 지역인데도 취락 형성이 잘 된 편이다.
양 목축이 주업이라 하지만 집도, 길도, 대대로 내려오는 살림도구도, 그것들의 주인도,
심지어 교회(Iglesia parroquial de San Juan Bautista/세례자 요한 교구교회) 까지도
빈티가 좔좔 흐르는 마을이다.
우리 농촌처럼 폐가가 많고 온 마을에 생기가 없어 보인다.
밖에는 사람이 없어서 문을 두드려 간신히 말을 걸어도 전혀 비협조적이다.
다음 마을 아녜로 가는 길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의 6km다.
노란 화살표를 찾아 헤매다가 자포자기 상태에서 무작정 동동남으로 나아갔다.
포르투 길 폰트 드 리마에서 얻은 40만분의 1지도에 컴퍼스를 대고 그랬는데 적중했다.
확신이 서지 않아 컴퍼스 바늘만 따라 간 것이니까 전적으로 행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산재해 있는 마을 길들을 모두 버리고 무모하리 만큼 과감하게 전진했는데 갑자기 튀어
나온 언덕배기 마을이 아녜였으니까.
모로스 강(rio Moros)을 건너 보행자 전용 완만한 비탈길을 따라 마을에 올라섰다.
종적이 묘연했던 노란 화살표가 동구밖 부터 역방향으로 지천이다.
세고비아 주의 아주 작은 지자체 마을 아녜(Ane).
2004년에 126명이던 인구가 내가 통과할 때 111명(2010년 기준)으로 감소했다 했는데
최근(2012년) 자료에 의하면 107명이니까 미구에 2자리 수로 떨어질 것 같다.
작은 지자체가 순례자를 위해 숙박소를 운영하고 체육시설을 갖추는 등 소위 웰빙(well
-being)마을을 지향하는 노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같은 역동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특징이 없는 농촌마을이 농.목축업을 통
해서 발전하기란 한반도와 이베리아 반도가 공히 지난한 일이다.
이 마을에서도 단 한명의 젊은이도 만나지 못했다.
나도 사람이 그립고 누군가와 말하고 싶어하는 늙은이일 수 밖에 없는가.
아는 길도 물어 가랬다지만 뻔한 대답일 것임을 알면서도 늙은이들한테 길을 물었으니.
오던 길로 되돌아가라(그들의 뇌리에는 "데 마드리드 아 산티아고 만이 마드리드 길" 로
입력되어 있으니까) 하고 마냥 붙들고 늘어질 것이 뻔한데도.
공연히 말걸었다가 치도곤을 당할 뻔 했다.
하긴, 오죽 외로우면 동양 늙은이 붙들고 통하지 않는 말을 자꾸만 해대고 싶을까.
사도 야고보의 길 최악의 실수, 그러나...
피니야의 교회와 같은 이름인 세례자 요한교회(Iglesia de San Juan Bautista) 앞으로
해서 마을을 벗어난 후 다시 송림속으로 들어갔다.
마드리드 길은 해발700m대에서 900m대 고원의 숲이 프랑스 길의 오크, 유칼립투스와
달리 울창한 송림 일색이다.
송림 길은 예외 없이 마치 해변처럼 가는 모래길이다.
송림은 뙤약볕을 가려주는 이점이 있지만 가는 모래길은 체력 소모가 많은 단점이 있다.
아녜에서 9km, 로스 우에르토스로 가는 숲길에서 사도 야고보의 길 최악의 실수를 했다.
숲속으로 난 2개의 길에서 좌측 길을 택해야 하는데 우측으로 갔다.
지나온 마드리드 길을 돌이켜 보면 양자택일 때는 거의가 왼쪽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전방의 미니 마을에서 만나게 되리라는 예상과 달리 모두 마을에서 멀어져 가기 때문에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확인했는데도 왜 돌리지 않았을까.
500m가 넘도록 야고보의 길 전용표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의심해야 하고 1km를 넘으면
알바일 확률이 절대적인데 무슨 배짱으로 2km이상을 나아갔을까.
이제는 되돌아가는 것보다 전진하여 차량이 간간이 지나가는 도로에서 해결하는 것이
나은 방법이라 판단되어 2km쯤 앞에 있는 도로에 올라섰다.
SG-V-3312, 세고비아 주 지방도로다.
도로 주변의 건물들을 찾아갔으나 인적 끊긴지 오래된 듯 모두 폐문이고 사람의 출현을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지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차를 세우는 것 뿐이었다.
달리는 차를 세우기 위해 배낭을 멘 채 도로 한복판에 섰다.
양팔을 십자형으로 벌려 춤추듯 흔들어댔으나 정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멀리서 차가
나타날 때마다 아예 길을 막고 그 짓을 계속했다.
위험한 짓임을 어찌 모르랴만 대안이 없는 절박한 상황인데 안전도를 따지고 있겠는가.
서행으로 다가와 멎으려는 듯 하다가 달아나버리는 얄미운 차.
귀찮다는 듯 전혀 도움되지 않는 건성 대꾸를 하고 가버리는 야속한 사람.
사도 야고보의 마드리드 길 자체를 모르거나 성의있게 설명을 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아
따를 수 없는 안내 등으로 낙담이 커갔다.
왕래 차량이 워낙 드물어 반대방향에서 오는 차라도 세워야 했다.
간신히 세워 내가 페레그리노임을 말하고 세고비아 쪽으로 가는 마드리드 길을 물었다.
운전자는 내 물음을 알아들은 듯 설명을 하는데 이번에는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답답하기는 양쪽이 매한가지지만 절박하기는 나 뿐이다.
한데도 쌍스런 우리말이 왜 튀어나왔는지 내가 나를 모르는데 그가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러나 젊은 그는 선량한 사람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 역시 답답함을 참지 못하겠는지 3명의 청년이 타고있는 자기 차에 나를 거의 강제로
태운 후 차를 돌려 오던 길로 달렸다.
2km쯤 지나 세운 다리 옆에는 그저께 건넜던 에레스마 강 푯말이 서있고 다리 난간과
가드레일, 커브길 바닥 등에는 노란 화살표가 무수히 그려져 있다.
차안의 물건들과 행색으로 보아 어느 공사장에 가는(오는?)중인 듯한 그들은 나를 내려
놓고 합창하듯 아니모(animo/cheer up/힘내세요)를 외치며 가버렸다.
막막궁산(寞寞窮山)과 유곡(幽谷)을 나홀로 헤맨 적이 한 자리수였는가.
더구나 철석같이 믿었던 플래시 마저 꺼진 밤에도 순응의 원리와 시각장애인의 지혜를
빌어(메뉴'백두대간과 아홉정맥' 7. 8번글 참조) 하산하기도 했다.
높고 깊은 산속, 밤에도 119구조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기 2번이나 되지만 여기는
먼 외국 이베리아 반도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솔로(solo)인 나의 해결사는 변함 없이 신념이었다.
막다른 코너에서도 반드시 길이 있다(窮則通)는 믿음이다.
"나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무서울 것 없음은 '그 분'이 내 곁에 계심이라"
스스로 해결할 힘을 주시거나 해결사를 보내주시는 분이 날 돌보신다는 믿음 말이다.
동남쪽 세고비아로 가는 마드리드 길은 어차피 가로놓인 도로를 피해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오직 도로 위에 길(방법)이 있다는 확신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다만 V자 형으로 어긋난 거리가 얼마나 벌어졌는가가 궁금했는데 2km쯤 멀어진 것.
아녜 발 9km인 로스 우에르토스를 2.0km 우회한 것이지만 그 길을 차로 달렸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긴장했을 뿐 육체적 대미지를 입은 것은 없다.
세고비아의 외곽마을 우에르토스와 발세카
순항이 시작됨으로서 긴장이 풀린 탓인지 시장기가 고개를 들었다.
경사진 목장지대의 그늘 없는 길가에 앉아 딸기잼 바른 빵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나무그늘이 있는 벤치에 앉아 품위있는 자세로 식사를 하려면 세고비아까지 15km쯤 더
가야 함은 그 길을 걷고 나서 비로소 알았다.
사도 야고보의 길을 걷는 동안 400~500g들이 딸기잼통이 내 배낭안의 상비품이었다.
시장할 때마다 손쉽게 구하는 바게트(baguette)에 잼을 발라 먹기 위해서 였으며 75일
동안 하루도 걸르지 않았으니까.
누가 나를 위해 산해진미, 진수성찬을 준비한다 해도 김치가 빠지거나 그 맛이 시원치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 내 식습관에 한시적이나마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하긴,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겠지만 이같은 적응력에 스스로 경탄해 마지 않았다.
메르카도(mercado/마켓)에서 최초로 딸기잼을 살 때 스페인어 '메르멜라다 데 프레사
mermelada de fresa/strawberry jam)'를 몰라 설명하느라 진땀빼기도 했다.
어디에 진열되어 있는지 보이지 않고'잼'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종업원에게 빵에 바르는
시늉을 했더니 버터, 치즈 등 엉뚱한 것들을 내놓아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어를 아는 한 젊은 여인의 도움으로 해결되기는 했지만.
세고비아 주도에서 서북쪽으로 12km쯤 못미쳐 있으며 인구수170여명의 작은 지자체인
로스 우에르토스(Los Huertos)를 통과했다.
마을 이름 '우에르토'는 텃밭 또는 정원을 뜻한단다.
이름이 암시하듯 세고비아의 교외 전원마을인 셈이다
중세 때의 이름은 '산크타 마리아 데 로스 우에르토스(Sancta Maria de los Huertos)'
였다는 이 마을이 마드리드 길에 포함된 것은 1993년 부터란다.
마드리드 길의 역사가 오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로스 우에르토스를 건성으로 지나친 것처럼 발세카(Valseca)도 그랬다.
동남쪽으로 4km를 더 가며 세고비아 8km못미쳐 있는 지자체 마을이다.
옛(1247년) 문서에 기록된 최초의 마을 이름은 바예 세코(Valle Seco)였다는데 이름에
담긴 뜻으로 보면 당시의 이 지역은 건조한 분지 또는 물 없는 계곡이었던 듯.
발세카도 300명대를 유지하던 인구가 결국 200명대로 떨어졌단다.(2012년)
두 마을 모두 주도(州都) 세고비아로부터 10km 안팎에 불과한 외곽 마을인데도 성장은
고사하고 왜 퇴락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우에르토스 교회와 같은 이름인 성모 몽소승천 교회(Iglesia de Ntra. Sra.de la Asun
cion) 앞을 지나 너른 비포장 농로를 통해 사마라말라로 가는 중이었다.
근접하여 오는 세고비아 시가지 뒤로 멀리 북동에서 남서로 길게 뻗은 과다라마 산맥이
위용을 과시하려는 듯 했다.
아마도 모레 오전에는 저 산맥을 넘어야 할 것인데 벌써 겁주려 하는가.
내가 가는 방향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한 승용차가 내 옆에서 멎었다.
운전자는 조금 전에 발세카에서 세고비아 길을 안내해 주었던 스마일 형 젊은이.
그는 세고비아까지 가는 길이라며 타겠느냔다.
오전 내내 알바를 비롯해 극단적 쇼(?)까지 하며 25km 이상 걸었는데도 발이 사보타주
(sabotage)를 전혀 하지 않아서 인지 몸이 아직 싱싱하며 시간도 넉넉해 걸으려 했다.
젊은이에게 동양 늙은이가 기인으로 보였는가 적선의 대상이었는가.
저만치 가다가 다시 정지하고 그는 나를 기다렸다.
국내에서도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는데.
2002년 이후, 코레아노를 모르는 젊은이가 거의 없다는데 그에게 동양인이란 하포네스
(Japones/일본인)와 치노(Chino/중국인) 밖에 없는 별난 청년이다.
한.일 월드컵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가 모두 코레아와 대결해 패함으로서 한국을
또렷이 기억하게 되었다건만 그는 왜 모를까.
그가 한국을 모르는 까닭은 본인의 말대로 축구에 무관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축구에 무관심한 모두가 한국을 모른다 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 무지한 사람은 예외없이
축구에 무관심한 사람이라고 단정해도 될 것이다.
사마라말라 ~세고비아 간의 좁은 도로가 위험하기 때문에 승차를 권했다는 젊은이.
이틀 전(6월 6일)에 비예기요 ~ 코카에서 만난 루이스와 흡사한 경우다.
달리는 차안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능력은 비록 적은 수의 단어를 나열하는 정도지만 그가 충분히 이해하는 듯 해서.
내가 걸어온 사도 야고보의 길들 이야기를 들은 그역시 코레아는 모르지만 한국 비에호
(viejo/할아버지)의 루타(ruta/여정)는 감동적(impresionante)이라고 말했다.
사탄의 꼬드김에 홀린 것이다
젊은이가 내려준 아쿠에둑토(Acueducto/水道橋) 아래, 아르티예리아 광장(Plaza de
la Artilleria)에서 우선 찾아간 곳은 아소게호 광장(Plaza del Azoguejo)의 관광안내소.
푸엔테 두에로 알베르게에서 젊은 자전거 순례자가 알려준, 세고비아 중앙 광장(Plaza
Mayor)에 있다는 페레그리노 우대 오스탈(hostal/여관)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팜프로나와 로그로뇨, 부르고스 및 레온 등 프랑스 길의 주도에는 훌륭한 알베르게들이
있는데 반해 마드리드 길의 주도 바야돌리드와 세고비아에는 없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사도 야고보의 여러 길 중 가장 늦게 개설된 루트다.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순례길 친구들협회(Asociacion de Amigos de los Caminos de
Santiago de Madrid), 사도 야고보의 바야돌리드 협회(Asociacion Jacobea Valliso
letana)를 비롯해 여러 지역단체가 공을 들였다는 길이다.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일정 간격으로 저가 또는 무료 숙소(Albergue, Acogida)를
설치한 그들이건만 모순되게도 주도에서는 고가의 오스탈을 이용하라는 것인가.
골목을 누비듯 해서 간신히 찾아낸 오스탈 아라곤(Aragon)은 순례자 여권(Credencial
del Peregrino)을 확인한 후 15유로를 받아갔다.
내게 배정된 1평 남짓되는 방에는 삐걱대는 싱글베드 하나가 있을 뿐 콘센트도 없으며
외관은 고색창연한 빌딩이지만 내부는 판자집에 다름 아니다.
내가 묵은 이베리아 반도의 방들 중에 가장 비싼 방이지만 가장 저급한 방이다.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서깊은 도시, 화려한 관광도시의 중앙통에 있는
오스탈의 이같은 실체에 경악하고 실망했다.
그렇다 해도 일반 투숙자(22유로) 보다 3분의 1의 높은 우대를 받고 있지 않은가.
지금껏 거쳐온 알베르게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실망이기 때문에 비교의 대상을
다른 투숙객으로 돌리면 나는 산술적으로 3분의 1만큼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망이 아니라 우쭐댈 일이다.
더구나, 내가 이 방에 머물 시간은 한밤의 8~10시간에 불과하며 취침시간을 빼면 단지
2~4시간인데 방에 대해 일희일비하며 경박하고 치졸하게 군대서야 말이 되는가.
차량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두 다리만으로 당당하게 실컷 걷기 위해서 왔을 뿐인 사이비
순례자일지라도 영적 수련에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다고 믿었는데 도루묵이 되었는가.
사탄의 시험에 걸려든 것일 게다.
15유로는 내가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이때껏 지불한 방값중 최고액일 뿐 일반 숙박시설
이용료로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최하급 여인숙 값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15e라는 거액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사탄의 꼬드김에 홀린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산야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등짝을 받아줄 만큼만 편편한 곳이면 1급 잠
자리가 되며 통비닐 하나가 전천후 집인 늙은이에게 불평 불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침부터 부닥친 곡절들에도 불구하고 왠지 좋은 일들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이 포기
되지 않았는데 두 젊은 사마리아인(신약 누가복음10:30~37)을 연속으로 만났다.
그 기대가 아직 유효할 것 같은데 침체되어 가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겠는가.
지체 없이 밖으로 나가 맨 먼저 들른 곳은 중앙광장 서쪽에 위치한 산타 마리아 대성당
(Catedral de Santa Maria).
겨우 한 밤 머물다 갈 그까짓 방 때문에 심란했던 자신을 경멸하고 자조(自嘲)하며 잠시
반성과 묵상의 시간을 가지려 했으나 관광객들로 들끓는데다 내부에는 유료입실이란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신약마가복음11:17)에도 입실료를 내야 들어간다?
하도 어이없어 그냥 나오려다가 세요를 받으려고 여직원에게 순례자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에 세요(sello/stamp)를 찍으려던 젊고 예쁘장하며 선량한 인상인 여직원이 내가
어리둥절하도록 격하게 반색하며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알아들은 것을 요약하면,
"어머, 산타 마리아에서 주무셨군요. 저의 집이 거긴데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아마도, 이제껏 마드리드에서 출발하는 순방향 순례자들만 상대하다가 거의 불가능한
역방향 순례자를 보게 되어 저러나 싶었지만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한 뉘앙스를 느꼈다.
옆에 있던 나이든 여직원이 지체없이 설명을 했다.
그 곳 알베르게의 관리인 하비에르 고살로가 그녀의 파파(papa/dad)라고.
자기 마을에서 묵고 자기 아버지를 만나고 온 유일한 순례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어찌 반갑지 않겠느냔다.
세고비아 다음 숙소인 까닭에 역행(逆行) 순례자 외에는 만날 수 없는데 산타 마리아를
거쳐온 순례자는 이제껏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
그녀는 영광스럽게도 오늘 그 최초의 순례자를 만난 것이다.
아뿔싸, 부정적으로 평했더라면 많이 서운해 할 뻔 했다.
이날 밤, 그녀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기록했다.
"고향에 대한 자긍심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선하고 부유로운가 보다." <계 속>
첫댓글 잘 읽고 상념에 잠깁니다. 저도 올 4월 포르투갈로 떠납니다. 리스보아에서 이틀 놀고 파티마 들러서 뽀루뚜에서 부터 카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