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톤 복사차 한대로 운수사업을 하고 있던 김남일씨가 5월 19일 거래처에 갔다 오다 공수대에게 붙잡혀 부상당한 내용임.
가정주부 구타하며 창고에 숨어 있는 사람 불러내
나는 1944년 전남 나주군 봉산면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안은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남의 도움을 받을 만큼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기 전까지 시골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다.
군대에서는 운전병이었다. 제대 후 군대에서 배운 운전기술로 '일광연탄'에 들어가 운전수로 일하게 되었다. 스물다섯 살 때부터 시작했는데 처음 2년 동안은 차도 없이 고용직으로 있으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 이를테면 조수처럼 연탄 운반차를 따라다니며 연탄을 직접 차에 옮겨싣거나 내리는 일을 했던 것이다.
양동에 있던 회사가 송암동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나도 그쪽으로 집을 옮겼다. 그러다가 사업을 하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몽땅 털어 4톤 트럭을 한 대 샀다. 그때가 1979년도였다. 조수 한 명을 데리고 '일광연탄'에서 각 대리점에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다. 1980년 5월에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5월 19일 나는 시내가 시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전에 영업을 나갔다. 조수가 결근하는 바람에 혼자 나선 걸음이었다. 각 대리점을 찾아다니며 사업적 연계를 부탁하고 다니고 있었다. '서부경찰서' 앞을 지나가다 보니 경찰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그때까지도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서방-동명동-장동-도청을 거쳐 금남로로 걸어와 보니 공수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최루탄 가스에 코가 매워 아래쪽으로 쭉 내려갔는데 한일은행 사거리에도 얼룩무늬 차림에 곤봉을 든 공수들이 있었다. 그때가 오후 2시쯤으로 기억되는데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를 구경했다.
계엄군이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대여섯 명을 옷을 벗겨 두들겨팬 후 실신하자 차에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 시민들은 그저 '저래선 안 되는데' 하는 말만 여기 저기에서 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도청 쪽에서 공수들이 밀고 내려왔다. 시민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나도 가톨릭센터 3층으로 피했다. 곧 잠잠해지자 충금지하상가 공사장 부근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는 별 일이 없었는데 시민들이 여러 명 잡혀갔다고 들었다.
이날 오후 5시경 '구동시장' 옆 정류장에서 광주공원에 공수들이 밀집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피해 현재의 '꽃가마 예식장'을 거쳐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투석전을 하고 있었다. 구경을 하고 섰다가 공수대들이 시민들을 몰아붙이길래 길옆의 가정집으로 여럿이 피신을 했다. 캄캄한 창고 안으로 숨었는데 우리들이 집 안으로 숨는 것을 봤는지 놈들이 뒤따라 쫓아왔다. 그러더니 그 집 가정주부를 사정없이 구타하면서 우리더러 창고에서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 리치는 것이었다.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창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방망이 세례를 받았다.
상무대 교회에서는 사람이 포개앉을 지경
머리를 맞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머리를 감쌌더니 그 손을 또 곤봉으로 내리쳤다. 수없이 구타를 당하고 공원으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나처럼 끌려온 시민들이 많이 있었는데 우리는 옷을 벗긴 채 무릎꿇고 있다가 차에 실렸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우리는 손을 뒤로 묶이고 고개를 처박은 상태로 어디론가 실려갔다. 고개를 약간이라도 들면 사정없이 구타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통합병원에 입원
오후 7시쯤 광주 경찰서에 도착해 인원을 파악하더니 저녁식사로 빵과 우유를 주었다. 그곳에서 다시 31사단으로 실려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사람이 꽉차 있다고 했다. 저녁 늦게야 외곽도로를 타고 상무대로 들어갔다. 상무대로 가는 도중 우리는 큰 사거리마다 진을 치고 있는 공수대들에게 검문형식으로 걸려 무작정 구타를 당했다. 그때 고개를 움직인다고 개머리판으로 척추를 얻어맞은 것이 지금도 조금만 힘을 쓰면 쑤시고 결린다.
상무대에 도착하자 바로 그 옆의 교회에 수용되었다. 차 세 대에 타고 있던 인원이 모두 좁은 강당 안에 수용되어 서로 포개앉을 지경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환자를 추린다고 하길래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환자라고 자처하고 나갔다. 약간의 자상과 출혈을 호소했더니, "당신은 환자 축에 끼지도 못한다."며 퇴짜를 놨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보니 팔이 좀 심하게 부어 있었다. 팔이 뒤로 묶여 있어서 피가 안 통해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다시 나가서 '팔을 사진 좀 찍어달라'고 했더니 군의관이 보고는 후송해야 된다고 했다. 그들이 인정해 준 서너 명의 환자는 모두 어디 한군데가 부러진 사람이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통합병원으로 이송됐다. '어떻게 잡혀왔느냐?'고 추궁하길래 '위장이 안 좋아 병원 다녀오는 길에 잡혔다'고 했다. 그렇게 병원에 있으면서 집에 연락할 방법을 궁리하다 방위병에게 부탁해서 사흘 만에야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면회도 안 되던 때인데 아내가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3일 만에 면회가 되었다.
내가 통합병원에 입원한 지 이삼 일 후부터 총상환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옆 침대에 있던 총상환자는 송암공단의 '남선연탄' 옆 보일러 공장 직공이었다. 그는 담 옆에 서서 내다보다가 총에 맞았는데 그 사람 말은 하늘에서도 총을 쏘았다고 했다. 아마 헬기에서 총을 쏘았던가보다. 송암동 쪽의 사람들이 많이 다쳤고 칠면조까지도 몰살당했다는 말을 했다. 그 사람들은 시위를 한 것도 아닌데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력 잃어 사업도 그만두고
내 부상은 그렇게까지 심한 것이 아니어서 열흘쯤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퇴원한 후 처음에는 어디 가서 얼굴도 못 내놓고 다녔다. 직접 시위에 가담한 건 아니지만 폭도니 뭐니 하도 떠들어대서 그랬다. 잘못되면 또 잡혀갈까봐 부상자 신고도 하지 않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세상이 달라졌으니 신고하라고 했다. 그래서 올해 추가 신고 때 신고도 하고 부상자회에도 가입했다. 부상자회에서는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 신고 후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니 엑스레이도 찍지 않고 너무 형식적으로만 검사했다.
몇 해 전 송암동 예비군 중대장이 '김형 앞으로 보상금이 나왔는데 얼마 안 되는 금액이어서 어린이 대공원에 희사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나는 액수가 얼마였는지도 모른다. 이번에야 시청에서 융자조로 3백만 원 준 것을 받았다. 내 생각에는 보상금을 받는 것도 좋지만 죄없는 사람들을 두들겨패고 총까지 쏜 이유가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보았는데 지금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 보지 않는다.
그때의 부상으로 건강이 예전같지 않아 얼마 전에 사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다. (조사정리 양선화) [5.18언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