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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태종대(太宗臺)는 오륙도와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암석해안의 명승지로 영도의 남동단에 위치한다. 파도의 침식으로 형성된 100m에 달하는 절벽과 울창한 난대림, 굽이치는 창파가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특히 영도등대 아래에 발달한 융기파식대인 신선암은 태종대를 대표하는 명소로 그 형성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2만년전인 제4기의 최종 간빙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래부지』고적조에는 "태종대는 부의 남쪽 30리 절영도의 동쪽 바닷물이 돌아가는데 서쪽에 돌다리가 하나 있어 놀이 오는 사람들이 겨우 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신라 태종 무열왕이 활을 쏘아 후포를 맞힌 곳이므로 태종대라 했다고 전한다. 가뭄이 든 해에는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태종 무열왕과의 관련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태종대 전망대에 서면 해안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맑은 날엔 저 멀리 대마도까지 바라 볼 수 있는 명소로, 예부터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았던 곳이다. 그리고 등대 오른편 아래쪽에 있는 평평한 바위는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서 놀았다고 하여 신선바위라 한다. 신선바위 위에 외로이 서 있는 하나의 돌은 왜구에 끌려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여인이 돌로 변하였다고 하여 망부석이라 불리고 있다.
하마정
하마정(下馬亭)에 있는 하마비(下馬碑)는 조선 태종 13년(1413)에 최초로 종묘(宗廟)와 궐문 앞에 표목(標木)을 세웠는데 뒷날 비석을 세우게 되어 하마비라 하게 되었다. 이 하마비는 대개 왕장(王將)이나 성현 또는 명사·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져 선열에 대한 숭앙의 표시로, 가던 말에서 내려 지나가는 곳을 말한 부산진구 양정동과 연제구 거제동 경계지역에는 하마정이 있었다. 이 하마정은 오늘날의 동해남부선 거제역에서 간선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린 굴다리쯤에 있었다.
양정동의 화지산에는 동래 정씨의 시조인 정문도 공의 묘지가 있다. 이곳을 정묘라 하는데 그 정묘를 세인들은 숭앙하였다. 그래서 정묘가 있는 그 앞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정묘에 예를 표하기 위하여 말에서 내렸다. 그래서 하마정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학소대
옛날 동래에는 학이 많이 찾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과 관련지어진 지명이 많다. 동래구 칠산동 239-2번지 노송이 우거진 동산 같은 높은 대(臺)에 지금은 법륜사가 자리잡고 있지만 그 대도 학과 관련된 이름인 학소대(鶴巢臺)다. 일컬어지기는 학의 집인 학소대에서 학이 북쪽을 향해 비상을 하는데 길게 이어진 복천동 고분군이 학의 뻗은 다리가 되고 동장대가 오른쪽날개, 서장대가 왼쪽 날개가 되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목을 쭉 뽑아 동래의 진산 윤산(구월산)으로 날아오른다는 것이다.
이 학소대에는 법륜사가 들어서 있는데 오늘날의 동래구청 앞에 있었던 범어사 소속의 동래포교당이 자리를 옮겨 법륜사가 되었다. 따라서 법륜사는 범어사의 말사가 된다. 지난날에는 동래 읍내면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는 학소대에서 회의가 열렸다. 말하자면 야외집회장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해운대
해운대(海雲臺)는 소나무 숲과 수려한 사빈해안, 그리고 동백나무로 유명한 동백섬 등이 조화를 이루는 절경지로, 예부터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아드는 이름난 명승지이다. 해운대란 통일신라말기 대문호인 최치원 선생이 동백섬 일대를 거닐다가, 이곳의 절경에 심취하여 동백섬 남쪽 암벽에 자신의 자인 해운(海雲)을 따서 "해운대(海雲臺)"라는 세 글자를 새긴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석각에 새겨진 "海雲臺"라는 각자(刻字)가 최치원 선생의 자필이라고 한 기록은 없다. 해운대는,『동국여지승람(1481)』동래현 고적조에 의하면, "해운대는 현의 동쪽 18리에 있고 산이 가파르게 바다속으로 들어가 있어, 마치 누에 머리와 같고 그 위는 모두 동백, 두충, 송삼 등의 나무가 사시사철 울창하다. 또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시기에는 동백꽃이 유인마제(遊人馬蹄)에 쌓여 삼사촌을 밟게 된다"고 했다.
홰바지
홰바지는 연제구 거제리에 있었던 옛 전차정류소(지금의 거제현대APT 부근) 부근을 "홰바지"라 불러 왔다. 옛날 부산진시장은 음력으로 4·9일에 성시를 이루며 영남에서도 대구시장에 다음가는 큰 시장이었다. 그때 쯤은 상인들이 석양까지 물품을 매매하고 나면 해가 진다.
그 때부터 동래나 그 인근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짐을 싸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지금과 같이 자동차가 없었던 시대임므로 걸어서 집에 돌아 오게되자 그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이곳까지 마중 나오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다. 일설에는 관(官)에서 유사시에 동래부 관원(官員)이 이곳까지 횃불을 들고 마중 나왔다는 설도 있다. 이런 연유로 "홰맞이"라 부르던 것이 점차 음이 변하여 "홰바지"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새장터
동래구 명장동에 있는 명장정수장 앞쪽의 낮은 야산에 무덤이 많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곳을 새장터라 했다. 지금은 시가지로 바뀌었지만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은 전형적인 농촌이어서 아이들이 소를 먹이며 놀았던 놀이터였다.
이 새장터에서 동남쪽으로 가는 골짜기를 가자골이라 했는데 동래읍 사람이 나무를 하러 가는 곳은 이 골짜기가 되어 나무하러 가자의 ''가자''가 그만 ''가졸''이 되었다고 한다. 새장터는 성문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물건이나 들어갈 필요가 없는 물건이 거래되어 새장터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송도
송도(松島)는 지금「거북섬」을 가리킨다. 지금은 송림공원의 연맥(連脈)이지만, 이 섬은 낮고 작은 섬이긴 해도 맞은 편의 장군산 끝에 있는「두도」처럼 소나무가 그 섬에 자생하고 있어 송도라 불렸다. 일제강점기 송도를 중심으로 일본 거류민들이 송도유원주식회사를 설립(1913. 7)하고 송도에「수정(水亭)」이란 휴게소를 설치하면서 송도의 실체는 허물어지고 바위만의 거북꼴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거북섬에는 둘레에 남은 반석으로 옛날의 윤곽을 더듬을 수 있지만, 일본인이 지금의 거북섬에 수정을 짓고 넓은 백사장을 이용하여 해수욕장을 개발하자, 넓은 백사장과 잔잔한 물결, 얕은 수심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송림은 전국 명소인 해수욕장이 되었다. 지금은 먼 옛날의 경치와 송림, 백사장은 개발이란 이름아래 송도라는 옛 섬의 자취는 없어지고 그 이름만 전할 뿐이다.
오륙도
오륙도(五六島)는 바위섬으로 부산항의 관문을 지키는 파수병이다. 그 이름이 오륙도인 것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섬이 다섯으로 보였다가 여섯으로 보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섬들 중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우삭도(방패섬과 솔섬)의 중허리가 물이 들면 두 섬으로 나누어져 여섯 섬이 되고, 물이 빠지면 하나로 붙어서 다섯 섬이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 말은 오륙도란 이름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실증적인 면에서 본 현대적 해석으로 보이며, 그 보다『동래부지(1740)』의 오륙도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섬이 다섯으로 보였다가 여섯으로 보였다 하는 것은 보는 위치에 따라 한 개의 섬이 가려져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 말기 용주면(龍珠面)이었던 용호·용연·용당·용두촌 등 용의 전설을 가진 곳이 많다. 즉 용당동의 신선대에서 신선이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랐다고 하는 전설 속의 백마는 하늘로 오르는 용마였다. 그래서 신선대의 산을 용마산이라 하고 용당동의 동명불원이 있는 산을 용비산이라 한다.
용소
용소(龍沼)는 지금의 부경대학교 대연동 캠퍼스의 정문 주위 일대를 용소라고 불렀다. 이곳의 남쪽에는 언덕이 있고, 북으로는 황령산 산자락이 둘러싸 조그만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 만의 서쪽은 황령산에서 내리는 토사와 바닷물이 밀어 올린 모래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예부터 갯등이 있어서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남쪽으로는 덕숭산(德崇山), 서쪽으로는 얕은 구릉이 있어 북서풍을 막아주었고, 북쪽은 황령산 줄기가 바람을 막아주어 아담한 늪지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 용소는 지세가 마치 용이 늪에서 일어나 승천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용소라고 불렀고, 이곳의 마을 이름은 용소마을이라고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말기 용주면(龍珠面)이었던 용호·용연·용당·용두촌 등 용의 전설을 가진 곳이 많다. 즉 용당동의 신선대에서 신선이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랐다고 하는 전설 속의 백마는 하늘로 오르는 용마였다. 그래서 신선대의 산을 용마산이라 하고 용당동의 동명불원이 있는 산을 용비산이라 한다.
율리알터바위
북구 금곡동 율리마을에서 당산 쪽으로 약 200m에 자리잡고 있었던 화강암의 노출암으로 크고 작은 구멍이 여러개 뚫려 있는 바위이다.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이 바위는 높이가 1.5∼2.5m로 표면에 직경 16∼18㎝, 깊이 12∼20㎝의 이른바 ''풍혈''이 여러개 나있고,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성기와 같다하여 ''성혈'' 또는 ''알터''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각종 건축공사의 석재로 사용됨에 따라 지금은 그 모습이 거의 사라진 율리의 알터바위는 예부터 여인들이 아들을 얻기 위해 이곳에 찾아와 길쭉한 돌로 구멍을 갈면서 기도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애기소
북구 화명동 대천천의 종류 산성골에 있는 작은 폭포로 경관이 빼어난 경승지이다. 애기소(沼)란 옛날 젊은 아낙네가 애를 데리고 이곳에 왔다가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되어 애기가 물에 빠져 죽는지도 몰랐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금실이 좋은 젊은 부부가 오랫동안 태기가 없어 걱정이 되었다. 부부는 천지신명께 백일기도를 올리기로 하고 계곡의 넓은 소(沼)가 있는 이곳에서 정성껏 빌고 빌었다. 백일째 되던 날 한 선녀가 나타나 하늘의 법도에 두 부부에게 아기가 없으나 선녀의 노력으로 점지해 주되 태어난지 3년만에 하늘로 데리고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약속을 하면 얻을 수 있다고 하여 부부는 이를 약속을 하였다 한다.
이후 귀여운 옥동자를 분만하여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어언 3년이 되는 날까지 아기가 무사했으니, 이제는 아기를 데려가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선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 아기를 업고 소로 갔다가 주위의 경치에 정신을 팔려 시간 가는줄 몰랐던 것이다. 정신을 차려 주위를 보니 아기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흔적이 없었다. 달려온 남편이 아내를 달래고 있을 때 선녀가 아기를 안고 나타났다. 아기를 돌려달라고 했으나, ''하늘의 법도는 어길 수 없는 일'' 이라며, 아기가 보고 싶거든 밤마다 이곳으로 나오면 선녀와 아기가 목욕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말한 후 사라졌다 한다.
그후 이곳을 사람들은 애기소라 불렀다 한다.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애기소에는 150평이 넘는 넓이에 5m 깊이의 웅덩이가 있었고 여기에 떨어지는 폭포는 4m 이상으로 경관이 수려했으나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산성골 상류로부터 흘러내린 토사로 옛 자취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기대
이기대(二妓臺)는 장산봉이 바다로 면한 동쪽 바닷가에 있는 대(臺)로 용호3동에 속한다. 용호하수처리장에서 고개 하나를 넘은 곳이다. 장산봉(225.3m) 동쪽 바닷가는 기기묘묘의 바위 절벽으로 경관이 뛰어났지만 사람이 오가는데는 위험하다. 그래서 바다서 배로 그 경관을 즐긴다. 그러나 이기대 자리는 바다에 접한 암반이 비스듬한 경사로 기울어져 바다로 빠져드는 자리다. 그 자리는 거의 평면에 가깝다. 그렇게 평면이 가깝게 된 곳이 산을 따라 2㎞ 정도 바닷가를 이었다. 그 바위반석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경관과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는 경관이 빼어났을 뿐 아니라 낚시꾼의 낚시터로 아주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바다너머 동해에서의 일출과 월출의 경관 또한 일품이다. 그동안 작전지구가 되어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1993년에야 민간인에 개방되었다. 이기대라는 명명은『동래영지』의 기록에 보인다.
『동래영지』는 경상도 좌수사였던 이형하(李亨夏: 1849, 12.30∼1950.8.21 재임)가 종전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보충 수집하여 좌수영의 역사와 지리에 소상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 책 산천조에는 이기대라 적고 ''左營南十五里 上有 二妓場 云(좌수영에서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위에 두 기생의 무덤이 있어서 그리 말한다)''고 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씌어 있지 않다.
향토사학자 최한복(崔漢福 : 1895∼1968 : 수영출신)씨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는 경치 좋은 이곳에서 축하잔치를 베풀었는데 수영의 기녀 두 사람이 잔치에 참가하였다가 왜장에 술을 잔뜩 권하고 술 취한 왜장과 함께 물속에 떨어져 죽었다는 데서 이기대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인생문고개
인생문(人生門) 고개는 동래구 칠산동과 명장동을 왕래하던 옛 고개로 지금은 차량들의 왕래가 많은 포장도로로 변하였다. 이 고개는 동래읍성 동장대를 따라 옛 북장대로 이어지는 능선이었다. 인생문 고개란 ''임진왜란 때 동래부 사람들이 이곳 성문을 통해 피난하여 모두 목숨을 건졌다'' 라고 하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또 ''이 고개에 죽은 자가 나아가는 유일한 문이 있었다''는 설과 당시 성내에는 무덤터를 둘 수 없어 동래성내에서 지금의 명장동에 있었던 공동묘지터로 나아가는 유일한 문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인생무상이란 말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적기
감만동은『동래부지(1740)』에는 ''감만이''로 기록되어 전하는데 이를 또한 ''가마이'', ''가마니''로도 불렀다고 한다. 이는 가마포의 ''가마''를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추정된다. 감만포의 남쪽끝 홍곡산 산등성이가 부산만으로 돌출한 작은 곶을 적기(赤崎)라 한다.
이 곳은 암반의 오랜 풍화작용으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적기라 명명하였다는데 그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제8부두가 들어서 그 모습이 사라지고 없다.
절영도
절영도(絶影島)란 명칭은『삼국사기』에 보면, 절영도 또는 절영산(絶影産)으로 기록되어 있다. 절영도는 예부터 명마의 산지로서 후백제 왕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절영마 한 필을 보냈다가 그 말을 왕건에게 주면 후백제가 망한다는 어느 술사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도로 찾아왔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동국여지승람(1481)』김해부 인물조에 보면,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에 관한 기록이 있다. 김윤중은 성덕왕 때에 대아찬의 벼슬을 지낸바 있었다. 그런데 중추절에 왕이 월성봉두에 올라 달을 구경하며 술잔을 나누게 되자 윤중을 불러오라는 어명을 내리고 윤중을 가까이 앉혀 술을 권하며 오늘날 과인과 경들이 무사태평한 것은 모두 윤중의 조부덕이라 하고 밤늦게 돌아갈 때 절영산(絶影産) 말 한 필을 하사하여 군신들의 결망(서운하게 여기는 뜻)을 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효종조 기록을 보면, 제주도말 12필에 목자일인(牧子一人)을 둔데 대해 절영도 말은 4필에 목자일인을 두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절영도 말의 가치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절영도는 삼한시대부터 말의 명산지로서 목장이 있었으며,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말이 당시 절영도에서 사육되었던 말로 절영도에서 사육한 말이 빠르고 총명하여 천리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데서 생긴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내기고구마
오늘날의 영도 청학동 바닷가에 "조내기"라 불린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서 난 고구마가 맛이 있어 조내기 고구마란 이름으로 유명했지만 그 조내기 고구마는 조내기 뿐 아니라 동삼동 뒷산의 황토밭이나 오늘날 태종로로 가는 산등성이인 일산배기에서도 많이 생산된 고구마를 모두 조내기 고구마라 하였다. 이 고구마는 붉은 색깔을 띠어 비교적 작으면서 밤 맛이 났다.
그러나 오늘날 그 조내기 고구마가 나던 곳은 모두 주택지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조내기 고구마는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 재배된 고구마로 동래부사 조엄에 의해 수입되었다. 조엄은 1757년 동래부사에 재임했고 1758년 경상도관찰사, 1763년 통신사가 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그가 통신사가 되어 일본으로 가는 길에 대마도에 머물 때 대마도에서 재배되고 있던 고구마를 보고 우리 나라에서도 이것을 재배하면 대체 식량으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다시 고구마 재배법을 소상히 익힌 뒤 종묘(種苗)를 가지고 와서 옛날 부사로 있었던 동래의 영도(당시의 영도는 동래부 소속)와 거제도에 재배케 했다. 그렇게 섬에 재배케 한 것은 두 섬이 모두 대마도와 비슷한 조건의 섬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엄은 동래에 고구마 재배와 함께 종묘를 준 1764년당시의 동래부사는 강필리였다. 강필리는 선대(조엄은 강필리 보다 6대 앞의 동래부사였다) 부사의 말씀이라 성심 성의를 다해 고구마재배에 힘썼다. 그러한 성의로 고구마재배가 영도에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재배에 성공하였다. 당시 강필리는 고구마에 싹을 틔워 줄기가 뻗게 한 뒤, 그 줄기를 끊어 땅에 심는 고구마 재배법을 쓴『감저보』를 남겼다.
청사포
청사포(靑砂浦)는 해운대와 송정사이에 있는 포구로서 갯바위로 된 해안에 수려한 모래가 펼쳐지고 배후에 송림이 우거져 보기 드문 해안 경승지를 이룬다. 앞바다에서 잡히는 생선은 일찍부터 맛 좋기로 이름나 있고 이 때문에 청사포에는 오늘날까지 횟집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청사포에는 여인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는 곳으로 갓 시집온 여인이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몇 달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해난사고를 당한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 여인이 멀리 수평선을 향해 눈물지으면서 기다리던 큰 소나무와 그 아래 바위가 지금의 수령 350년의 망부송(望夫松)이요, 망부암(望夫岩)이다. 청사포(靑砂浦)의 본래 이름은 청사포(靑蛇浦)로 전해진다. 남편을 간절히 기다리던 여인을 용왕이 보낸 푸른뱀(靑蛇)이 찾아와 여인을 용궁으로 안내하여 남편을 만나게 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량
초량동은 조선시대 동래부 사천면 구초량리였는데, 1910년 이후의 일제시대에는 부산부 사중면 초량동으로 바뀌었으며, 해방 후에는 초량출장소 관내로 있으면서 1982년 무렵에는 법정동인 대창동3가를 흡수하였다.
동국여지승람과 동래부지의 기록에 초량항은 절영도 안쪽에 있다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영도안의 부산항 해변은 모두 초량항이었다. 초량은 우리말로 샛뛰라 불렀는데, 샛뛰는 억세 갈대라는 뜻의 초(草)자와 뛰 량(梁)자 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개항전의 대마도 문서인 <다구찌집서(田口集書)>에도 초량의 원명은 사수도라 기록하여 샛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의 구관과 영주동 사이의 초량은, 그 일부가 속칭 초량 반상촌이라고 불리긴 하였지만, 그 대부분은 해정리라 하였다. 영주동 일대는 왜관시대 끝까지 초량 반상촌이라 불렀다.
신초량, 구초량이라는 이름은 개항 전후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06년 시구개정에 의해 구초량의 명칭이 부평동, 부민동등으로 바뀌고, 신초량은 초량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풍수상으로 부산의 지형을 엎드려 있는 소의 모습인 여와우형(如臥牛形)이라하여 풀밭이 있어야 하기에 초량(草梁)이란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한편 초량동은 조선후기 해정리하고 하였으며, 이 지대에는 고분(古墳)이 있었고 해정리 해변은 노송이 울창하여 이곳을 일인들이 기석빈(棋石濱)이라 불렀다 한다.
이는 바로 물로 씻은 깨끗한 돌들이 널려 있어 흡사 바둑돌과 같았다는 데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고종 2년(1885년)청관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의 고분은 철거되었다고 전한다.
초량은 현재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59년 동제 개편에 의해 초량 1,2,3,4,5동으로 나누어졌다가 1970년에 초량4동이 초량 4,6동으로 분동되었고, 초량 5동은 부산역 주변으로서 실거주 인구가 매우 적었던 까닭에 1985년 10월 17일 초량3동에 흡수 폐지되었다.
고리장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말(馬)의 수요가 많았다. 특히 조선 정부에서는 승마(乘馬)·역마(驛馬)·군마(軍馬) 등으로 많이 쓰였다. 그 말은 방목으로 길러야 했는데 내륙에서 방목을 하려면 우리 나라에는 말의 천적인 호랑이가 많아 방목하기 어려웠다. 지금의 영도를 절영도라 했는데 절영도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내려오는 가운데 가장 좋은 국마장 이었고, 이 곳에서 나는 말을 절영마(絶影馬)라 했다.
영도의 국마장으로 1년에 한번 또는 두번 중앙에서 목자(牧子)가 내려와서 말을 검사하여 쓸만한 말에는 낙인을 찍었다. 낙인이 찍힌 말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징발되었다. 그렇게 말을 검사하는 곳을 고리장〔環場〕이라 했다. 둘레에 둥글게 고리〔環〕모양 말목을 쳐서 그 안에 말을 가두어 검사를 할 수 있게 한 장소였다. 당시 고리장이 있었던 곳은 신선동과 봉래동 경계지역으로 오늘날의 봉래동로터리 부근으로 보인다.
(구)고관
부산에 왜관이 설치된 것은 여말선초 남해연안에 왜구들의 잦은 약탈로 인해 남해연안 일대의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없었다. 이에 조선정부에서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으나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이에 조선 태종 7년(1407)에 일본과의 교섭과 통상교역을 위하여 일본인의 거주제한지역으로 왜관을 설치하였다.
부산왜관은 처음(1407년) 오늘날의 범일동 부산진시장 일대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폐쇄되었다가, 1603년 절영도에 임시왜관이 잠시 있다가 1607년 두모포왜관(현 동구 수정시장 일대)이 설치되었다가 1678년 초량왜관(현 용두산 일대)으로 옮겼다. 따라서 두모포왜관이 있었던 곳을 구관 또는 고관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포
구포(龜浦)라는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는 구포의 구(龜)에 대한 풀이로 인한 것이다. 하나는, 구(龜)를 검〔神〕으로 해석하여 구포는 ''굿개''로 곧, 고대(古代)의 제사인 ''굿을 하는 나루''라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양산군지』에 나오는 구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감동진 일명 구포''라 하는데 여기서 구포를 감동나루라고 한 것에서 구포는 굿개로 볼 만하다. 또 하나는 구(龜)는 ''갑우, 거뵈''를 훈차한 것으로 보아 구포를 ''갑우내 또는 거뵈 개''이며 ''갑우, 거뵈''는 현재 ''가운(데)''라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낙동강은 갑우내가 되며, 구포는 갑우내에 있는 개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낙동강의 본 이름은 갑우내이며 낙동강의 상하류에 구천·구미와 같은 지명이 있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강 이름인 ''낙동''은 어떻게 명명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낙동''이란 낙양의 동쪽에서 온 말이다. 낙동강의 상류인 상주가 해동(海東)의 낙양으로 불리었는데 ''강''이 상주의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여 ''낙동강''이라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달맞이 고개
해운대 해수욕장 동쪽의 미포에서 청사포로 넘어가는 와우산 능선으로 송정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짙은 산림으로 드리워진 이 고개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풍광이 빼어난 경승지이며 대한팔경의 하나로 해운대 저녁달의 월출 경관을 보기 위하여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절경이었다. 또한 이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바다에서 뜨는 달의 경관이 어찌 해운대 뿐일까 마는 해운대는 동해와 남해의 어울목으로 월출의 장관에서 월몰의 경관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지금도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면 달맞이고개와 해운대 백사장에 달구경을 위해 전국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대낫들과 시시골
명륜동은 조선시대 동래부 읍내면의 신향교동·객달동·범어동으로 불리었다. 1906년에는 3개동을 합하여 교동(校洞)으로 불리다가 광복 이후 명륜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교동은 동래향교가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것이고, 명륜동은 향교의 중심 건물인 명륜당에서 명명된 것이다. 명륜동에서 온천장으로 가는 길을 ''대낫들이''라고 한다.
이 지명은 동래부사가 도임하거나 이임할 때 동래부에 속한 백성과 군졸이 환영, 환송식을 이 거리에서 거행하였는데 이 행사의 모습이 큰 나들이와 같다고 하여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온천 입구에서 명장동 사이 길을 시싯골이라 한다. 이곳은 본래 돌감나무가 많아 감나무골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이에 감나무골 한자로 훈차하여 시실로 되고 ''골''이 중복 결합되어 ''시실골''로 되어 이것이 음운 변동이 일어나 ''시싯골''로 명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망월대
동래고등학교 뒷산 정상에 동장대(東將臺)가 있는 산을 망월산 또는 망월대(望月臺)라고 한다. 망월대라 한 것은 높이 솟아 달을 바라보는 경관이 좋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동해에서 달이 떠서 주위 산하를 비추는 경관이 일품이다.『동래부지(1740)』에는 이 산을 증산(甑山)이라 했다. 시루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루 甑 즉 증산이 되었을 것이다.
문헌기록인『동래부지(1740)』에는 그 "증산을 부에서 동으로 2리 떨어져 있다 하고 위에 장대가 있고, 아래에 성황사가 있다"고 하였다. 장대가 있다는 것은 오늘날 복원된 동장대를 말한 것이다.『동래부읍지(1832)』에도 "증산을 부(府)의 동쪽 성안에 있다" 하고 안령(鞍嶺)에 이어졌다고 했다. 동래의 중심지에 있는 산으로 장대산(將臺山) 또는 칠산이라고도 한다.
몰운대
몰운대(沒雲臺)는 전형적인 육계도로 낙동강하구 최남단에 위치하여 16세기까지도 "몰운도"라는 섬이었으나, 강 상류에서 운반된 토사의 퇴적으로 다대포와 연결되었다. 몰운대의 남단은 파도의 침식으로 해식애와 해식동이 발달하였고, 배후의 수려한 사빈해안이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몰운대는 예부터 우거진 숲과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 출렁이는 창파, 수려한 사빈으로 빼어난 경승지로 이름나 있다.
몰운대란 지명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끼는 날에는 이 일대가 기류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데서 비롯하였다. 몰운대의 지형은 학이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멀리서 바라보는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노래한 시(詩)가『동래부지』에 전하고 있다.
몰운대의 아름다운 자연절경은 해안변의 기암괴석과 수목으로 그 빛을 더해주고 있다. 몰운대는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 해전에서 왜선 500여척과 싸워, 100여척을 격파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순신장군 함대의 우부장으로 큰공을 세운 녹도만호 정운장군이 선봉에 나서서 끝까지 적선을 쳐부수다가 순절한 사적지로 유명하다.
못골과 갯번덕
대연동은 옛날부터 못골이라 하였으며 이 지명은 지금도 남아 전하는데 대연이란 ''큰 못''을 한자로 훈차한 것이다.『동래부지(1740)』〈제언조〉에는 생천언이란 연못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못골에 있었던 못은 바로 이 생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못은 일제시대까지 남아 있었는데 그 축조방식이나 기법으로 보아 신라시대 이전의 연못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대연동에는 지금은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지명이 있다. 그것은 지금의 부경대학교 대연동 캠퍼스가 자리잡고 있는 일대의 지명인 ''갯번덕''이다. 갯번덕은 지형의 특징으로 붙여진 지명으로 그 어형은 ''개+ㅅ+번덕''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ㅅ''은 된소리 현상을 반영한 것이고, ''번덕''은 ''버덩''과 ''언덕''이 혼합한 어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갯번덕''은 갯가에 늘어선 언덕이라 한데서 유래한 지명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갯번덕''은 부경대학교(구 수산대학교)가 들어서기 이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니 이를 미루어 보아 그 유래를 추측할 수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이 지역에 주둔하면서부터 매립되어 ''갯번덕''이라 불리던 그 당시의 그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범천동
범천(虎川)은 호천으로 기록되어 전함과 아울러 범내(凡川)라고 한다. 여기서 ''범천''의 ''천''은 ''내''를 뜻하는 것이고, ''범천''과 ''호천''에서의 ''범''은 음차한 것 ''호''는 훈차한 것이다. 그것은 증산에 인접한 산들이 산세가 험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호랑이가 살면서 이 계곡에 자주 출현했다는데서 연유한 것이다.
서면
서면(西面)은 현재 부산의 중심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교통·산업·유통·금융 등의 중심지라 할 수 있을 만큼 번화한 곳이다. 이곳은 행정상으로 부산진구 부전동에 속하여 있다. 서면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동래부(군)에 속하는 면으로『동래부지(1740)』에는 동래부가 7개면(읍내면, 동면, 남촌면, 서면, 북면, 사천면, 동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서면에는 11리(산저리, 여고리, 석사리, 대조리, 거벌리, 초읍리, 양정리, 연지리, 범전리, 전포리, 만덕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4년 간행된『경상도동래군가호안』에는 서면이 서상면과 서하면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재 서면이라 불리는 지역은 서하면의 부전리 일대로서 서상면·서하면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조선시대『동래부지(1740)』에는 동래부 동평면 부현리(釜峴里)에 속하였다. 부현은 지금의 부암고개로 추정된다. 부전동은 부현리 중에서도 범전리와 전포리에 인접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며, 1936년 시·군의 구획정리 때 부전동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지금도 행정구역으로는 부산진구 부전동이지만 옛 행정구역이었던 동래부 서면(西面)이라는 명칭을 구전으로 사용되면서 굳혀진 지명이 된 것이다.
석말추
남항동은 영도의 대표적인 동리(洞里)이다. 남항동의 옛이름은 석말추(石末秋)이다. 석말추라는 지명은 이 지역의 앞바다에 큰 돌이 있었는데 썰물 때 돌끝이 조금 보였다가 밀물 때는 보이지 않는데서 붙여진 것이다.
1885년 절영도 첨사 임익준이 영도의 행정지명을 지을 때 동해는 본래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신선과 연관된 이름을 많이 지었는데 이때 석말추는 "신선이 사는 시내가 있다"는 뜻의 영계로 바뀌었다. 남항이란 이름은 광복 후 1947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고유 지명으로 개칭 때 부산의 남항을 끼고 있다 하여 명명된 것이다.
석포
석포는 등하천 옆에 있던 포구로, 등하천에 돌이 많아 돌 ''石''자와 포구 ''浦''자를 합하여 석포라고 불렀다. 돌개라고도 부른다.『신증동국여지승람(1530)』산천조에 의하면, 석포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래부지(1740)』산천조에 의하면, 석포는 부의 남쪽 23리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759년에 간행된『동래부지』에는 옛날에 목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옮겼다고 하였다.『동래부지(1740)』방리조에는 "석포리는 남촌의 관내에 있으며, 관문에서 27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04년에 간행된『경상남도동래군가호안』에 의하면, 남하면 관내에 석포동이 있다. 당시 석포동의 호수는 10호고, 10호 모두가 정씨이다.
석포에는 오래 전부터 동래 정씨가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1530년 무렵 동래성의 수문장인 정복덕의 아들 정춘세가 동래에서 수영을 거쳐 용소마을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석포는 천제등(부산공고 뒷산 일대)과 전선등(남부운전면허시험장 일대)사이에 있던 한적한 포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