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석공님은, 주류경제학을 전공하고, 맑스경제학도 공부하신 분입니다. 최근 헨리조지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번에 한번 토론한바 토지사유재산제도에 대해서는 별의심이 없습니다.따라서 조지스트의 입장에서, 자유석공님의 글은, 한계가 있습니다.(조지즘은 토지사유재산제도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합니다.)그러나, 드물게, 다양한 경제사상에 대해 소개하고 있고, 균형있는 글이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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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자유석공 (2003-08-24 진보누리 쟁토방)
Subject 진보-좌파적 지평에서 보는 경제학의 의미와 가능성 (1)
1. Disclaimer and Warranty
오랫만에 진보누리에 재방문해 보니 반가운 아뒤도 있고 보이지 않아 궁금한 분들도 있다. 사실 그동안 진보누리 글을 읽으며 배우고 생각해 보게 되는 즐거움도 크지만 때로는 안타까움도 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몇번 진보누리에 글을 썼던 자유석공을 그 무슨 경제 전문가로 보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감사한 일이지만 동시에 오프라인의 익명성을 매개로 무슨 사기를 치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다.
분명이 고백하건데 나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란 해당 분야에 자타가 공인하는 상당한 지식을 갖고 적어도 자기가 매스터한 분야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주제로던지 응용할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나 자신이 아주 비좁은 특정분야에 얼마 안되는 알량한 경제 지식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걸로 무슨 경제 전문가를 칭한다면 해당분야의 진짜 전문가들이 웃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경제주제로 글을 쓰는 것은 나도 경제에 관심과 의문이 있고 더구나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서 관심분야의 생각을 정리해 교환할 자격조차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그동안 일 때문에 자주 들어오지 못했는데 이제 잠시 주어진 시간으로 얼마전 <가끔씩은> 님이 제기한 신조합주의론에 대한 숙제를 해볼까 한다. 그런데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정부분 개론적 정지작업을 할 필요를 느꼈으며 이 글은 바로 그같은 작업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
2. 연금술과 만병 통치약 - 경제이론에 대한 두가지 미신 혹은 하나의 신화.
경제이론에 대한 첫번째 오류는 일부 사람들의 경우 경제학을 마법의 연금술과( Alchemy) 혼동한다는 점이다. 즉 비금물질로 부터 황금을(부) 만들어 내는 신기한 절대 공식의 매개체로 경제학을 본다는 것이다. 이 계통의 생각은 주로 이재주의적, 경쟁주의적, 성장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나뭇가지와 흙으로 금을 만든다고? 천만에 말씀이다. 오히려 경제학은 황금은 금광석이나 사금의 필요한 원소를 (생산 요소) 시간과 인력을 들여 가공해야 나온다고 가르치며 따라서 금을 만든답시고 박쥐의 날개나 어린애의 손가락을 화로에 집어넣고 끓이지 말라고 타이르는 화학적 지식에 (Chemistry) 가깝다. 즉 인간의 경제활동에서 무지와 야만으로 인한 낭비나 부도덕을 이성의 눈으로 조명하고 행동방향에 영감을 제공하는 것은 경제학의 주요기능중 하나인데 이부분은 뒤에서 좀더 자세이 서술할 것이다.
경제에 관한 사람들의 두번째 오류는 만병 통치약(Panacea)에 대한 환상이다. 모든 경제이론은 저마다 독특한 사회 역사적 배경속에 녹아있는 세계관과 인간관이 반영되어 있으며 시대를 거쳐 전승되는 Knowledge Chain속에서 자리하는 Privity( 연결성?) 와 Reciprocity(호혜성?)가 있다. 만병 통치론자들은 하나의 이론이 모든 악과 부조리를 일거에 싹쓸이 할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이다. 우리사회에서는 주로 금기와 신비속에 쌓였던 좌파적 투쟁 경제론자들이나 최신 첨단 기술로 무장한 우파적 무한경쟁 경제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경향이다. 이들은 결국 만병통치약을 파는 싸구려 차력사가 되는 것이다. 신기한 차력시범을 보는 것은 재미있지만 문제는 이들이 파는 수상한 뱀기름이다.( 영어로 차력사는 snake oil salesman -즉 뱀기름 장수라고 한다.) 정력에 좋다는 말에 혹해서 이걸 마시고 배탈이 날 경우 차력사는 고쳐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금술이나 만병통치약의 오류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궁극의 파워를 가진 원형 철광석 Ore Arcon에 대한 집착이다. 오리할콘은 아득한 옛날 신들이 쓰던 금속으로써 지상의 모든 철광석의 어머니며 이 금속으로 만든 검은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스스로 모양을 바꿀뿐 아니라 절대 불에 넣어도 녹지 않고 물에 넣어도 녹슬지 않으며 바위 밑에 깔려도 부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가 철기시대로 바뀔 무렵 철공 장인들의 바램과 과장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통해 생겨났을 법한 이 환타지 피스는 현대에 들어 신검을 가진 영웅이 더이상 필요 없게되자 외계인의 비밀기술인 비행접시의 소재와 재빨리 결합함으로써 음모이론의 한 단위로 변신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파워를 추구한다. 우파는 지식의 힘으로 경쟁에서 이기려 하지만 진보/좌파들은 같은 힘으로 투쟁에서 이기고저 한다. 그러나 경제학에는 오리할콘의 이론이 있을수 없다. 어느 경제 이론이던지 만능 해법이 아니므로 만약 하나의 이론을 절대화 한다면 이는 우매한 짓이며 그 이유는 아래 설명한다.
3. 경제학은 소크라테스적 논리에 입각해 목표를 가진 도구 학문
우선 만능이론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경제학은 무용지물인가?
경제학 무용론의 오류를 지적하기 전에 잠시 희랍의 소피스트 공리를 보자: 그들은 < 1) 아무것도 없다. 2) 있다해도 알수 없다. 3) 알수 있다해도 가르칠수 없다.> 고 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 너 자신을 알라> 응수 진리는 내면에 있으며 무수한 질문을 통해 이해에 도달할수 있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경제학을 보는 시각에도 중요한 연결점을 갖고 있다. 경제학에는 일부 가치중립적 지식 매카니즘이 들어 있지만 그것은 책 보고 설명들으면 누구나 어느정도 알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떤면에서 마인드 이다. 마인드와 만나는 경제학은 여타 다른 이성의 작업들처럼 질문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적 논리로 풀어가야 하며 그 첫번째 질문은 경제학이 무엇인가하는 실제적인 질문 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연히 경제학은 경제에 대해 연구하는 지식체계다. 그렇다면 경제는 무엇인가? 경제란 간단이 말해 사람이 먹고 사는 원리와 방식을 말한다. 당연히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고 돈을 쓰는 사람의 행동을 연구하는 것이 경제학이다. 경제원론 교과서에 나오는 '...생산을 위한 자원 할당과...소비를 위한 분배...를 연구하는 학문..' 이라는 정의는 돈을 벌고 (생산) 돈을 쓰는(분배) 행위에 대한 경제학의 관심을 현학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 정의를 좀더 풀어보자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어 모든 사회성원들이 원하는대로 공급받을수 없으므로 이를 가능한 많이 생산하고 효율적으로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을 연구하는 분야가 바로 경제학인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경제적이란 말을 쓸때 절약이란 의미를 나누고 있는데 이것도 맞는 얘기다. 인간의 가용자원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희소성의 한계에 묶여 있으므로 함부로 쓰면 다음번에 필요시 쓰게될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면에서 경제학은 철저하게 사회를 위해 복무하는 도구이며 재아무리 근사한 지식이나 논리도 현실의 작동에서 일푼의 도움을 주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무용지물이 되버리는 것이 바로 경제학이다.
4. 경제학 제 이론의 자리와 무게를 가늠해주는 Privity와 Reciprocity ( 연관성과 호혜성?)
그렇다면 경제학에 왜 만능이론이 나올수 없는가?
그 첫째 이유는 제 이론간의 Privity( 연관성?) 와 Reciprocity( 호혜성?) 때문이다. 경제학은 생산에서 시작해서 분배에서 끝난다는 정의를 상기해 보자. 생산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일상생활에 쓸모있는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인데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무에서 유를 창조 (create)는 할수 없고 현실에서 이미 주어진 자원을(given) 통해 구체적 물품이나 서비스를 생산( produce) 할수밖에 없다. 이같은 생산이 자연 (토지) + 노동+ 자본에 의해 이뤄진다는데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모두 동감하고 있으므로 이를 생산의 3대 요소라고 한다. 경제학자들은 경제의 기본단위인 생산 요소의 분석을 기반으로 경제학 이론을 발전시켜 왔으며 경제이론은 어떤 주장이건 간에 마치 세개의 기둥으로 지탱되는 신전의 기둥을 경건한 사제가 맴돌듯 이 세가지 생산요소중 하나를 축으로 삼고 있다.
이런 면에서 중상주의는 자본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중농주의가 땅을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해 왔다.. 이에비해 스미스에서 비롯된 고전주의자들은 예로부터 근로작업(work- 사실상 노동)에 초점을 마추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제 이론간에 연관성과 호혜성이 있으므로 단일 만능이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관성이란 무엇인가? 자본(돈)중심의 중상주의는 오늘날 밀턴 프리드만의 통화주의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계승되고 있으며 토지중심의 중농주의는 헨리 조지의 지대공유론에 의해 맥을 잇고 있다. 스미스의 고전주의 이론은 리카르도로 진전되었으며 훗날 알프레드 마샬에 의해 완성되고 존 메이나드 케인즈에 의해 수정계승 된다. 이같은 학문적 사고체계의( chain of idea stem) 흐름을 잇는 끈을 Privity 라고 한다.
그렇다면 Reciprocity는 무엇인가? 스미스의 고전주의가 근로 작업에 초점을 마추었다고 했는데 스미스의 분업설과 거친 노동가치설을 본격적인 투하 노동 가치설로 발전시킨 사람이 리카르도 이다. 그런데 칼 마르크스는 스미스- 리카르도 라인의 투하 노동 가치설을 비판하면서 잉여 노동 가치설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잉여노동 가치설은 어느날 하늘에서 혼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경제 테제를 반박하는 가운데 생성된 것이며 상품가치가 노동에 있다는 근원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고전주의에서는 이같은 사회주의 경제관을 반박하고 있으며 양자가 반론을 교환하는 가운데 이론가치를 점검, 공히 발전할수 있게된다. 이같은 관계를 이론적 호혜성 (reciprocity) 의 관계라고 한다. 경제학에서 보자면 이론적 호혜성의 관계는 노동 중심 경제학 내부의 이견끼리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중심의 경제학이나 자본중심의 경제학 그리고 토지 중심의 경제학이 모두 나눌수 있는 삼자성(trilaterality)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제 이론간의 Privity와 Reciprocity는 왜 생기는 것일까? 이는 한마디로 경제학이 절대 독립, 절대 중립의 비밀 실험실에서 탄생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성과 사회성이 반영된 지식체계이기 때문이다. 노동, 토지를 무시하는 자본만의 경제이론은 절름발이며 그재체로 본원적 위험성을(Intrinsic Risk) 갖고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리라. 결국 좌우파를 막론하고 모든 이론체계는 현실가치의 저울위에서 타 이론들과 어느만큼 강력한 Privity/ Reciprocity를 교환하며 서있는가에 따라 그 무게가 가늠되는 것이다.
5. 결국 경제 이론은 시대가 선택한다.
이쯤에서 혹자는 그럼 중립적 균형론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답한다. 경제는 역사성과 사회성의 가치를 추구하는 분야이며 현재가치와 함께 미래가치도 고려하는 분야다. 혹자는 효용성이 경제가치라고 반박할지 모르나 효용성은 사회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가치일 뿐이다. 효용성은 동일한 한계 조건 아래 가능한 많이 벌기 위한 가치인데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나중에 가능한 많이 쉬면서 필요할때 어려움 없이 쓰자는 것이 아니던가? 돈이란 혼자서는 도저이 벌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모종의 거래가 필요한 것이므로 이같은 논리를 나와 너 그리고 제 3자에게 까지 연장하다 보면 결국 사회성에 도달하게 된다.
또 다른 사람은 그렇다면 혼합적 시각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역시 아니라고 답한다. 토지, 자본, 노동 중심의 경제학은 이론의 외곽분야는 벤치마킹 될수 있지만 핵심분야는 섞일수 없다. 서로 다른 전제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섞을 필요도 없다. 각 이론들이 독립적으로 기능하며 사회발전에 기여할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할 것이거니와 핵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바로 사회 성원들의 자유로운 정치적 선택에 의해서 어느정도 가능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예를 들어보자.
노동중심의 경제학은 잉여 가치설을 자본 중심의 경제학은 한계용설을 최대 이론적 무기로 현장에서 부딪힌다. 간단히 소개하면 노동 경제학의 잉여가치설은 불변 자본과 가변자본론 그리고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론에 입각해 노동이 잉여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주장인데 비해 자본 중심 경제학은 확률과 선택에 입각해 소비자들의 한계 효용도가 시장가치를 만든다는 주장이다.
조금 더 역사적 과정을 전제로 설명하자면 노동가치설은 원래 경제학을 사회 정치학과 결합했던 고전주의자들이( 스미스, 리카르도) 작업중심의 현실을 ( Centrality of Work) 인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마르크스가 이를 비판적으로 수정 잉여 가치설과 착취론을 주장하자 자본주의 이론진영은 이에 크게 반발, 노동가치설은 리카르도의 투하노동 가치설을 끝으로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자본주의 주류 경제학은 착취론에(by exploit) 대응해 선택론을(by choice) 제기하니 이것이 바로 신고전주의자들의 한계 효용론과 기회비용론이다. 마르크스가 상품가치의 설명을 전제로 생산요소인 노동을 중심으로 잉여가치론을 완성하자 먀살등 신고전주의 진영은 상품 가치를 생산요소인 자본의 기회비용론과 분배요소인 소비자의 한계효용론으로 분리해 이에 대응했던 것이다. ( 경제 개념의 발전사는 다음에 간략히 소개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옳다는 말인가?
기회 비용/한계 효용설인가? 아니면 잉여 가치설인가?
솔직이 말하자면 둘다 옳다는 생각이다. 순수 이론관점에서 보자면 둘다 자기 축의 중심관점에서 상당부분 맞는 논리들이다. 이같은 섯부른 주장이 과연 경제학의 과학성에 대한 신성모독인가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경제학의 과학성이 뭔지를 반문하고 싶다. 경제학자들은 자연과학적 가설과 귀납적 논리를 이용하지만 주제와 방법론이 가치에 달려있고 전분야에 걸쳐 파라다임이 자주 바뀌므로 순수 과학적 접근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경제학의 가치로써 효용성과 타당성은 주관적/객관적/개인적/사회적 기준들이 복합적으로 반영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수리적 개념만으로는 도저이 풀수없다.
물론 이론적 한계도 있다. 잉여가치설의 이윤의 전제인 노동의 내재적 절대가치가 너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계 효용론이 주장하는 기회 비용의 ( 은행 평균금리) 개념은 평균 산업수익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시장가치는 너무나 상대적이며 조작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이이상으로 노동과 상품 그리고 시장과 자본의 매카니즘을 설명한 이론들은 현재까지 인간의 지식체계안에는 없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착취론에서 이어지는 혁명론이나(exploit to revolution ) 선택론에서 이어지는 공동번영론과(choice to commonwealth) 같은 정치공식에 너무 매몰되지 말자는 것이다. 혁명을 했지만 빈곤과 관리불능을 초래했고 공동번영을 주장하지만 전쟁과 불황 그리고 부익부 빈익빈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유롭고 개방적인 정보소통과 의사결정이 정치적 선택으로 실현돼 시대 상황적 필요성에 부합하는 타당한 이론에 힘을 실어주다 보면 뭔가 실천속에서 맥이 잡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소견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제이론이 시대를 이끌어 간것이 아니라 시대가 경제이론을 고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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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동적 사고와 자본적 사고의 갈등이 오늘 선택의 고민이다.
시대가 경제학을 골랐다고 했지만 시대는 손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을 빌려 경제학을 고른다. 사실 사람들이야 말로 역사속에서 한 시대를 실현하는 주체이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다. 힘과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99 마리의 양에 1마리를 더해 100마리를 만들기 위해 고용한 이론인가 아니면 열심히 일하는 다수가 오늘저녁 가족의 식탁위에 빵을 올려놓기 위해 의지한 이론인가 여부에 따라 그 역사-사회적 정당성이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지평에서 판단은 천사와 악마를 구분하는 것처럼 쉽고 단순하지 않다. 심지어 법정에서 조차 근소한 사실이나 관점의 차이에 따라 유죄와 무죄가 구분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바로 여기에 오늘 선택의 열쇠를 가진 우리의 딜레마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정부에서 노동자 파업을 엄단하겠다는 주장은 종종 국가 경쟁력 제고나 시장안정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상당이 복잡한 얘기 같이 들리지만 그 본질은 간단히 안정적 성장을 통한 분배를 추구하겠다는 말이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협상권의 강화나 노동시간 단축을 외치면서 분배속의 성장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답변은 무엇이 이같은 차이를 불러오는 것일까에 대한 질분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이 글이 주지하는 관점으로 보자면 경제학의 목표인 성장과 균형의 갈등이라고 할수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성장 중심의 자본적 사고와 분배중심의 노동적 사고의 충돌이라고 본다.
이를 한국경제사로 적용해 보자면 한국경제는 박통 당시 일련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리즈를 통해 고속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그 본질은 소련식 경제개발과 케인즈식 수정시장의 거시 모델을 독재의 Context에서 아류로 결합한 것이다. 결국 정부주도의 저임금 굴뚝산업 개발이 그 요체다. 그후 신군부 시절는 내수를 풀어 탄성을 받는 미시 케인즈 이론이 경제를 주도했으며 문민시절에는 재경원장이 부총리를 겸임하는 등 통화주의에 힘이 실렸지만 통화주의를 실물경제로 구현하지 못한채 과중한 외채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외환위기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의 정부는 재경원을 재경부로 원위치 했지만 통화주의를 버린 것은 아니며 통화의 양을 조정하기 보다는 통화량을 조정하는 질서에 더 초점을 마추어 금융감독 위원회를( 미 재무관리 위원회의 벤치마킹) 출범시켰다. 또 사양산업을 대치하는 과정에서 정보통신을 육성했으며 국가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정리 해고제를 도입하는 친자본 정책을 수용했는데 이과정에서 노동계와 마찰을 빚는다.
분단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의 분신으로 시작해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에 이어 80년대 초에 해방신학과 도시산업 선교회 탄압으로 이어지면서 줄곳 정치권과 기득권 경제체제의 이중 견제를 받아왔다. 이같은 견제속에는 한국이 이념적 분단국가라는 것과 노동운동이 민주화 운동과 결합하고 이었다는 점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86-7년에 이르는 전민항쟁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노동운동은 민주 노총 설립과 민주 노동당의 결성이라는 쾌거를 올리며 특히 외환 위기 이후 심화되는 대량실업과 부익부 빈익빈등 사회모순에 맞서 사민주의의 이념 스펙트럼 아래 임금투쟁과 정책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불거져온 대립이 노동중심 사고를 주장하는 노동운동과 자본중심 사고를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의 충돌인 것이다.
현대 신자유주의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자본중심의 경제이론에 가장 충실한 자유 경쟁론의 최고 거장이다. 하이에크는 경제 행동은 공평한 게임과 같은 것이며 사업이 망하면 그 자원이 좀더 효율적인 다른 중개자( 경쟁에서 이긴 사업자) 에게 재배치되 사회안에서 유통됨으로써 결국 망한 사람도 최종 분배의 수혜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파산이던 실직이던 자유경쟁의 인과를 수용하는 것이 결국 뭔가 좀더 나은 생산과 분배체제를 위한 최선의 방편이라는 것이다. 케인즈의 라이벌이던 그는 계획 경제식 사회주의의 몰락은 당연한 것이며 심지어 사민주의도 정부가 개입해 인위적 재분배를 하기 때문에 과정은 서서이 진행될 지언정 종국의 몰락이라는 결과는 같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하이에크의 공정 경쟁과 수혜의 논리는 그 자신이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비판에서 지적했듯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의 보위를 받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현 한국 상황에서 기업의 한계 성장수익이 노동자들에 공정한 한계 분배수익으로 돌아왔는가? 더우기 파산하고 실직한 사람들이 효과적 사회 재분배의 혜택을 누리긴 커녕 노숙자로 전락되는 현실은 무엇인가?
덧붙이자면 신자유주의의 원산지인 미국은 90년대 후반 잠시 정보통신 사업으로 경기가 좋았을뿐 그후 내리막길을 가고 있으며 만성적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계속 돌아가는 이유는 자본중심의 시장경제나 신자유주의가 최대 생산성을 보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최대 군사력이라는 국제권력의 프리미움 때문에 해외투자금이 끝없이 유입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부의 유입을 바탕으로 미국의 자유시장은 노동자가 자본가로 진입하기 비교적 수월한 체제와 장치를 보장하고 있으며 분배에도 어느정도 기여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 군사력 50위 이면서도 현재의 생활수준과 체제를 유지한다면 나는 민족주의 진영에서 욕을 먹어도 두말없이 미국 복사론를 주장할 것이다.
하이에크는 불공정한 경쟁구도가 불공정한 분배구도의 원흉이라고 설명하지만 이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경제는 오늘 너와 나의 밥숫갈로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라도 없느니만 못하다.
7. 경제 체제 운영에 있어 역사적 시행착오와 가능성.
경제는 밥숫갈 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분배 만능론은 최종 해법인가? 역시 답변은 '아니다' 이다. 최대 생산이 없으면 최고의 분배는 이뤄지지 않는다. 양심적인 정치인들이나 제도권 학자들이 좌파와 고민을 나누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현상태에서 노동자의 파업으로 임금이 <과도>하게 오르면 기업은 경쟁에서 수익을 내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망하고 망하면 실업자가 생기게된다. 국가차원에서는 실업을 방지하기 위해 망하는 기업이 유지되도록 손실분을 보충해 주어야 하는데 국가의 돈이라는 것도 사실은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국민 모두가 조금씩 돈을 잃게된다.
좀더 대담한 가정을 해보자. 현 체제에서 국가가 모든 사람들의 돈을 한번에 몰수, 다시 일인당 혹은 가구당 똑같은 종잣돈으로 나누어 준다고 가정하면 어떻게될까? ( 주-국가는 원천적으로 몰수권이 있다는 것이 법학의 다수론이지만 위와 같은 방식의 몰수/분배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으로 계속 국가가 돈을 줄 것으로 생각하며 일을 소홀히 하게된다. 즉 생산성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돈을 더 벌고 싶은 사람들은 창업을 할 것이다. 그런데 사업이 생기면 경쟁이 생기고 자연히 흥하는사업과 망하는 사업이 나오게 될 것이다. 흥한자는 흥한자끼리 다시 경쟁하고 이런식의 체인경쟁이 어느정도 진행되다 보면 결론은 다시 대기업-부유층과 영세상인-노동자로 나뉘게 된다. 가설에 불과하지만 결국 변한것은 없이 몇십년 시간만 낭비한 셈이다. 경제 모순이라는 악업의 윤회를 벗어나려면 시스템의 모색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국가가 몰수한뒤 아예 운영까지 해버리는 사회주의 계획경가 망한 것은 더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계획경제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산성의 감소와 분배의 위축을 주장하지만 간단히 말해 관리 부담이 관리 혜택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결국 경영에서 실패한 것이다. 자본의 노동착취를 막기위해 노동 중심으로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뒤 국가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을 하거나 적극적으로 자기개발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혁명성과 품성론을 강조하며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을 관리해야만 했다. 흥미로운 것은 50년대 까지만 해도 이들 구 소련좌파의 경영/관리학 수준이 영미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영학의 최대 이론적 도구인 Matrix 기법도 소련에서 배급경제를 위해 개발된 기법이며 심지어 오늘날 계량 경제학의 기초가된 응용 통계론은 소련과 동구권이 단연 강세를 자랑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이론을 갖고 있던 그들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경영하는데 실패했고 이같은 실패가 혜택을 압도하는 관리 비용의 누적을 불러왔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의 마음이란 사회주의를 반대하며 억지로 노동했던 사람들 뿐 아니라정치적으로 크레믈린을 지지하면서도 자기능력을 최대로 개발해 생산성에 기여하지 못해던 사람들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산 수단을 몰수하지 않고 자본가들의 이윤을 국가가 일정부분 예산으로 충당해 교육, 의료, 연금 복지체제를 갖추는 사민주의는 어떠한가? 사민주의 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은 미국, 일본등 비사민주의권 국가 보다 낮으며 실업과 인플레 율도 높다.
설명을 하자면 회사수익에서 복지를 위한 세금이 많이 나가게 되기 때문에 마진이 줄어든다. 즉 이윤이 압박을 받기 때문에 설비 투자가 위축되며 이는 실업률과 직결된다. 공장을 함부로 늘리지 못해 신규 노동자들을 받을수 없기 때문이다. 이윤압박은 또 연구 개발비의 축소를 가져오기 때문에 시장에서 경쟁력이 약화되고 자연히 외부 투자도 감소하게 된다. 기업 생산이 위축되 시장공급이 제한되는데 비해 정부는 사람들에게 실업연금을 제공함으로 실직자들도 사실상 정액소득자의 시장수요를 갖게 되기 때문에 실제 구매력이 떨어지는 인플레 현상이 생긴다. 인플레가 생기면 기업들은 같은 액수로 같은 양의 원재료를 살수 없기 때문에 손해를 보게되고 결국 이윤을 만들기 위해 비용을 줄이는데 그 비용이 바로 인건비니 이미 일하는 노동자도 정리해고하게 되는 것이다. 실직자나 정리해고자들에게 정부에서 다시 기업에서 받은 세금으로 연금을 주며 내일이 시작되니 이것이 사민주의의 한계다.
그러면 사민주의는 어떻게 살아남고 있는가? 유럽형 사민주의는 이제 사실상 굴뚝 산업 보다 상표 산업으로 돌아간지 오래다. 물론 굴뚝 산업은 제3세계로 공장을 이식해 현지 생산을 함으로써 인건비를 절약해 미. 일과 경쟁도 하고 세금도 낸다. 국내에 남아 있는 사업체들은 주로 대규모 유틸리티 ( 철도, 전화, 수도, 전력) 회사들이며 국가의 기간산업 ( 스웨덴 철강) 등에 불과하다.
또하나는 사민주의 내부 경제 매카니즘에 일정한 장점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주는 연금이나 복지혜택이 유효수요로 연결돼 경기를 재가동하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유효수요란 간단이 말해 돈을 줌으로써 구매력을 제공해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노동자들에게 시간과 돈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여유시간에 소비하게 되니 그것이 다시 회사의 이윤이되어 사회를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주의건 사민주건 그 체제가 과연 끝없이 생산-분배의 무한궤도를 진행할수 있는 영구기관 (Perpetual Mobil) 인지는 솔직이 아직 단언할수 없다. 글 서두에 어떤 경제 이론이던 연금술이나 만병 통치약이 될수 없다고 했는데 바로 이상의 이유이다.
9. 신 조합주의 노사관계론에 대하여- 신 경영주의 노사관계론도 필요하다.
이제 가끔씩은 님이 제기했던 < 신 조합주의 노사 관계론> 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겠다. 우선 그같은 이론이 나오게된 배경을 나는 이해한다. 한국이란 나라는 기름도 안나오며 식량자급도 안되는 나라다. 교역이 없고 수출에서 벌어들이는 경화( 달러) 가 없으면 이 컴퓨터 조차 생산해 낼수 없다. 컴퓨터 외장보드는 원유찌꺼기 플라스틱으로 만드는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수출이 위협을 받고 있다. 역시 경제 시스템의 원죄다. 한국은 과거로부터 노동력을 팔아 수출을 해온나라이다. 싸구려 가발부터 시작해 의류, 트랜지스터 라디오, 티브이, 요즘은 조선과 자동차, 반도체까지 모두 노동 중심의 가치를 경쟁한 제조업으로 성장해온 나라다. 최대 시장은 미국인데 요즘 미국에서 보호무역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수출에 적신호가 걸리고 있다. 일본처럼 인공적 기술 경쟁력으로 환경산업이나 과정산업에 진입했다면 미국의 보호장벽도 소용이 없지만 한국의 유일한 과정산업인 정통산업은 아직 그 단계에 있지 못하다. 더구나 외환 위기 이후 구조조정에서 실직자가 많이 나왔고 기업의 신규채용이 위축된 상태에서 늘어나는 실직자나 비정규 노동자 문제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술 잠재력과 저 인건비의 강력한 파워를 가진 중국이 맹렬한 기세로 추적해 오고 있다. 여기서 주저 앉으면 일본을 따라잡긴 커녕 중국에 추월되 기생할수 밖에 없게된다. 그러니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핸드폰 수출경기가 끝나면 다음엔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를 걱정하며 잠을 못이룬다는 것도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기업인들이 자기 회사 장래를 걱정하듯 정치인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다. 노조 파업이 계속되 삼성이나 현대 같은 재벌들이 생산기지를 중국이나 동남아로 옮기게 되면 자연히 국내 실업자는 더늘어나고 그나마 연금도 없는 상태에서 국내 수요는 크게 감축되 전반적인 경기가 어려워진다. 또 노조 투쟁이 강해지고 경영 참여가 이뤄지게 되면 기업은 비노조권인 비정규직의 확대나 이들 비정규직에게 정규노동자에 돌아갈 임금분에서 일정 혜택을 떼어주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정부는 이런 점들을 걱정하는 것일 테고 이건희 회장의 2만불 인내론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수 있다. 파업자제나 투쟁보다 타협을 장려하는 신조합주의는 이같은 배경에서 현실적 해법찾기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리라.
나 개인적으로 보자면 가끔씩은님이 말하는 신 조합주의도 가능하다고 본다. 단 신 경영주의가 뒷바침 되어야 가능하다. 성장과 분배의 현실적 해법을 전제로 일정 조건하게 노동과 자본이 손을 잡을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될 경우 회사는 노사 투쟁으로 인한 생산 수출의 손실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연구 개발등에 좀더 많은 투자를 할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자면 몇가지 전제를 확인해야 한다.
1) 노동이 양보하는 만큼 자본도 양보해야 한다. 여기서 양보란 공동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반분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말한다. 더이상 선성장 후분배의 논리로 노동자를 몰아쳐도 소용없다는 이야기다.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나 혜택이 당장 어려울 경우 기업은 그만큼 시한부 스톡옵션을 노동자에게 증여할수 있다. 만일 연구 개발이나 설비투자를 위해 당장 제공할수 없는 이익의 분배라면 현재가치와 미래가치로 나누어 분산 증여하라는 말이다.
2) 노동의 제한적 경영 참가는 그 어느경우에도 필요하다. 경영이란 생산을 위한 의사 결정과 집행을 위한 관리를 말하는데 생산의 3요소중 하나인 자본가는 경영에 참여하지만 노동자는 참여하지 못한다면 앞뒤가 안맞는다. 노동자(대표)는 적어도 노무관리에 대해서는 의사결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수 있어야 하며 기타 회사의 경영 정보에 대해서도 세세이 알아야 서로 협동이 가능하다.
3) 비 정규직 문제는 국가와 기업 그리고 노동의 3자가 함께 머리를 짜내 풀어가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너무나 남용되고 있다. 미국 조차도 어떤 공장에서든지 비정규직을 6개월 이상하면 정규직으로 승진시켜 임금외 혜택을 준다. 특히 용역업체의 순환 보직을 이용하는 것은 명백한 변칙적 법적용이니 만큼 이에 대한 규제 장치가 필요하다. 대체 같은 업체 몇몇을 돌면서 비정규직을 수년이나 하도록 허용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4) 노동 보호뿐 아니라 자본 진입의 벽도 수월하게 보완해야 한다. 노동과 자본뿐 아니라 부유계층과 빈곤계층을 전체로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을 교정하는 구조조정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10-20년 정도 일한뒤 퇴직해서는 그 퇴직금과 은행융자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소자본가로 거듭날수 있도록 정부차원의 정보 제공이나 교육 그리고 창업지도와 지원이 필요하며 장기 금융 대출의 벽이 낮아지고 계약이나 손배등의 법률 시스템도 균형적 수혜를 위해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5) 이같은 조건들이 제대로 만족되려면 노동계의 시각도 변해야 하지만 자본-경영 라인의 철학도 변해야 하며 이와 관련해 가끔씩은 님이 지적한 한국형 노사문화의 정착에 적극 동의한다. 모든 나라는 독특한 역사와 문화가 있으며 우리도 우리것이 있다. 영국의 노동 보호 일본의 노동 안정 미국의 자본진입 수월함등이 결합되어 우리의 경제구조와 의식속에 실현될때 한국형 노사문화는 정착될 것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사민주의는 현실적으로 상당이 설득력이 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한국의 문화 사회 가치구조와 가장 가까운 정치 경제시스템이지만 미.일 중심의 현행 교역구조를 감안해 한국형 사민주의의 틀을 만들어 내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민노당 정책 브레인이라는 송태경님의 글도 유심이 읽는다.
10. 진보, 좌파 경제학은 앞으로 어디로?- <생명의 나무>를 찾아가는 작업
진보/ 좌파의 경제학이 가야할 다음 좌표를 찾기 전에 과거의 전개 패턴을 보자. 고전주의의 거장 리카르도 이래 경제학은 <생산과 분배의 평형>을 경영학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내는데 그 목표의 초점을 마추게 된다.
경제학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원래 최초의 경제이론은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이것이 후에 중세의 수도사와 중상주의 상인들의 이론으로 넘어갔다가 흄등 18세기 경험 철학자들이 이를 인수한뒤 아담 스미스의 고전주의에 이르러 정치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비로소 본격적인 학문분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아담 스미스 자신도 본직은 윤리학 교수였다. 그 뒤 경제학은 잠시 정치학이나 사회학등 많은 분야를 포괄하다가 이 학문들이 독립해 나가면서 20세기 초에야 마샬의 신고전 학파에 이르러서야 순수 경제학 이란 이름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하긴 자본론의 마르크스 조차도 원래 신학자 바우어의 제자가 아니었던가? 그후 1920-30년대 경제학에서 경영학이 분리해 나갔으며 1950-70년대 회계학 그리고 재무학이 독립하는등 꾸준이 내부분열을 계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수 이론 경제학은 평형에 그리고 경영학은 성장에 초점을 마추어 분야별 연구가 심화된 상태고 더이상 고전주의 시대나 자본론시대의 통론적 시각보다는 훨씬 분화되고 전문화된 각론이 관련 단위별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양상이다. 이렇듯 오늘날의 경제학은 분야도 넓어지고 경영 회계 재무 통계등 인접/휘하 주제 학문들과 꾸준한 교류를 이루는 가운데 계속 확장하고 읶기 때문에 설사 전공자라 해도 모든 분야나 주제를 알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경제학의 본질과 목적에 비추어 진보나 좌파 지평에서 몇가지 방향은 생각해 볼수 있다고 본다.
먼저 좌파 경제학은 자본중심적 논리의 틀에 도전해야 한다. 생산 요소는 분명이 자연 노동 자본이고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경제활동은 계속 노동중심성에 의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행 제도권 경제학은 자본중심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관리인 역할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본중심 논리를 벗어나 노동 중심성에 초점을 마추고 토지등 타 생산요소를 중심으로 보는 이론체계와도 교류해야 한다.
또하나는 사상적 교조주의에서 벗어나 실물 친화적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적 경제학은 고전주의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전주의가 주도한 시장주의 경제학에서 백안시 되어 오거나 금기시 되어 왔다. 특히 일부에서는 이런 터부의 전통을 지식 프리미움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는 것은 반성해볼 문제다. 더구나 현대 경제학의 제분야는 분파가 많고 그 지식의 내용도 복잡하며 상이하기 때문에 이론적 장벽이 있으며 전공자 사이에서도 의사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물 친화적 언어로 이를 치환해 정보나 사고를 교환하면 공공 정책수립도 용이해지며 시대적 선택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시민들과 정보나 지식을 공유하는 것도 쉬워진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경제 이론이 연금술이나 만병 통치약이 아니며 화학적 지식에 가깝다고 했지만 경제는 화학 그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좌파나 진보의 경제학적 탐구는 태초에 에덴 동산에 있었다는 생명의 나무 ( Tree of Sefirot)를 찾아가는 작업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범한뒤 그들은 낙원을 잃었고 실낙원의 세대는 바로 자원 희소성과 노동 중심성의 한계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엉겅퀴 속에서 땀흘리는 수고를 지불한 뒤에야 땅의 소산을 먹고 살수 있었던 것이다.
생명의 나무에는 신의 지식이 들어 있다고 하며 이를 얻은 자는 선악과를 훔쳐먹은 아담의 과와 업에서 벗어날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나무에 비유했으며 유대교 카발라 일파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신지학을 탄생시켰다. 세피로트 나무가 신이 태초에 부여한 열개의 신성한 가지로 이뤄져 있듯이 경제학도 자연, 노동, 자본이라는 거대한 세개의 뿌리에서 자라난 수많은 줄기와 가지들로 이뤄진 하나의 나무와 같다. 이 경제 나무는( Tree of Economy) 과학성과 신념이라는 두 기반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가난은 나랏님도 못구한다는 옛말이 생활고로 인한 자살로 재현되는 오늘 우리 현실이고 보면 경제학의 나무에서 세피로트의 열매을 얻고저 하는 바램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희소성과 노동 중심성의 노예 살이에서 벗어나 경제의 주인으로써 한계와 잉여를 통제하며 이웃과 더불어 편하게 살아갈수 있는 날을 그리는 것은 나만의 환상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