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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사이펀》 문학토크
서울의 시인을 만나다
초청시인_김정수 시인(『사과의 잠』), 리호 시인(『도나 노비스 파쳄』)
시, 치유하고 사람을 살리는 힘
최은묵 제14회 《사이펀》 문학토크, <서울의 시인을 만나다>의 주인공 두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김정수 시인과 리호 시인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오늘 행사를 준비해 주시고 도와주신 계간 《사이펀》과 <사이펀의 시인들> <청색종이> <실천> <작가마을> 그리고 배재경 발행인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시인과 시집과 독자가 한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가을의 오후와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 귀한 자리에 저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최은묵입니다.
우선 두 분께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몇 년도에 어디로 등단하고 시를 쓰는 누구다, 이런 거 말고요. 비유적 이미지로 소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정수 오래 ‘서랍 속의 사막’에 들어가 살다 보니 삶이 참 삭막했어요. 제대로 활동하지 않아 위축되기도 했고요. 사막의 기후가 낮에는 무척 덥고, 밤에는 무척 춥잖아요.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어요. 그런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견디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서랍은 스스로 열리지 않아요. 누군가 열어줘야 그 속에서 나올 수 있지요. 다행스럽게도 곁에 그런 도반들이 있어요. 참 고마운 사람들이죠. 저를 어둠에서 밝음의 세상으로 이끌었으니까요. 서랍 속의 사막에서 빠져나오자 흩어진 가족과 병동의 병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하사탕을 싼 비닐이 말린 혀 같았지요. 그 혀가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 아래서 ‘홀연, 선잠’에 들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서는 요즘 사과를 깎고 있습니다. 하늘로 가는 혀에서 사과의 잠까지 가족, 특히 어머니의 삶을 깎고 있네요. 벗어날 수 없는 한계나 굴레 같은 것이지요. 그런 삶을 산 것도, 시인이 된 것도 운명이 아닐까요.
리호 얼마 전 강원도 화천에 있는 고등학교에 <시인과의 만남>에 초대되어 다녀왔어요. 결재용 서류라는 걸 제출해야 하니 작가 프로필을 적어내야 하는데요. 담당 선생님이 많을수록 좋다 하길래 정말 A4 용지 하나 가득 써서 보내드렸어요. 시토크가 시작되고 학생이 제 프로필을 읽으며 절 소개하고 제가 마이크를 잡게 된 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글쟁이는 저 긴 프로필이 다 필요 없습니다. 제 시집에 소개된 프로필이면 족합니다 라고요. 그렇게 소개하겠습니다.
리호가 말하는 리호 시인은, 2023년 전 2100광년 떨어져 있는 M2-9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파인애플을 먹다가 지구에 불시착했습니다. 절친한 친구로는 곰과 지구, 양 세 마리와 토끼 한 마리가 있습니다.
최은묵 시인이 등단이나 작품집 말고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도 색다른 경험인 것 같습니다. 두 분께 공통 질문드리겠습니다. <시>가 지닌 힘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김정수 가장 큰 힘은 ‘치유’가 아닐까요. 내 안에 그득한 고통과 슬픔을 시로 풀어내지 못했다면 저는 진작 무너졌을 거예요. 물론 술도 한몫했지요. 술과 시는 나를 견디게 해준 힘입니다. 지금은 건강 때문에 음주를 자제하고 있어요. 과음한 다음 날 일정에 지장이 생기더라고요. 음주 대신 글(시와 시평) 쓰는 데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흔히 저를 ‘가족주의자’라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가족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쓴 것은 사실이지요. 시와 삶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저를 그렇게 규정한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가족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요. 나를 힘들게 하면서도 나를 기쁘게 하는 대상이지요. 시적 대상이면서 시적 주체이기도 하고요. 다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일 수도 없지만 그래도 늘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가족을 시적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가족과의 화해 이전에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리호 배가 몹시 고파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좋은 시를 만나면 더 배고파지는 그런 이상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약을 먹으면 건강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한의사 말로는 그 한약이 입맛을 돌게 하여 밥을 잘 먹게 하는 약이라고 들었거든요. 오래전 시를 쓰면서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시가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쓰면서 내가 살았으니 내가 쓴 시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주만큼 큰 힘을 지녔다고 해야 할까요? 가끔 입맛 없게 하는 시나 시집도 있어요. 그럼 전 막 옆에 있는 사람한테 화풀이합니다. 그럼 얼른 떡볶이를 같이 먹으러 가줘야 해요.
최은묵 김정수 시인께선 1990년 등단 후 첫 시집을 14년 후에 출간하셨는데요. 33~34년간의 활동에 『서랍 속의 사막』, 『하늘로 가는 혀』, 『홀연, 선잠』, 『사과의 잠』 이렇게 시집을 네 권밖에 출간하지 않으신 까닭은 의도적인 과작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김정수 시인이기 전에 생활인, 먹고사는 게 우선이었어요. 허약한 뿌리에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다 보니 한낮을 온통 광합성을 하는 데 골몰했지요. 시의 숲 근처에라도 머물렀으면 도움이 될 텐데 외따로 떨어진 사막에 서 있다 보니 한동안 시와 멀어졌어요. 삶터에서도 온탕과 냉탕을 오갔어요. 부끄러움이 오래 자리 잡아 내면을 괴롭혔고요. 뜨거운 사막에서 지쳐갈 즈음 숲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물론 곁의 도움이 있었지요. 숲을 찾는 여정의 첫 번째는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쓰는 것보다 읽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사막에서 숲으로 가는 길에 발견한 오아시스쯤 될까요. 많이 읽다 보니 쓰는 방식에도 변화가 찾아오더군요. 사막을 벗어나자 시의 숲에 가까이 와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후 광합성과 그늘의 여유, 바람을 몸에 들일 수 있었고요. 여유와 탄력을 찾으니 자연스레 과작에서 다작으로 바뀌더라고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요즘은 행복합니다.
최은묵 리호 시인께서 2020년에 출간한 『기타와 바게트』가 상상력과 난해함 등으로 큰 화제가 되었는데요. 신경림 시인께서 표4 글에, “그의 시는 동시대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해한 시와는 조금 다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화려하고 당돌한 비유와 표현의 밑바닥에 실핏줄처럼 陰刻되어 있는 숨은 그림이 보이기 때문이다. 張三李四의 한숨과 눈물도 보인다. 어쩌면 여기에 리호 시의 참맛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여기서 ‘난해함’이라는 부분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면, 혹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리호 난해함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독자들이 그 ‘뜻’이라는 것을 텍스트 분석에만 머물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합니다. 시의 종류는 정말 많습니다. 독자는 텍스트 분석 말고도 시를 만지고 듣고 그것을 그림인 양, 있는 그대로 감상하면 좋을 텐데요. 참고로 중학교 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어렵지 않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내 시는 절대 난해하지 않아” 이러면서 말입니다.
최은묵 네, 저도 개인적으로는 난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시집인데요. 『기타와 바게트』 이후에 두 번째 시집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디카시집 『도나 노비스 파쳄』을 들고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디카시집이라는 특성이 있겠지만, 『기타와 바게트』와 결이 다른 색깔을 제시한 까닭은 ‘난해함’을 의식한 까닭입니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가요?
리호 네, 의도가 있습니다. 사실 시집과 디카시집을 동시에 출간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2017년 계간 ≪디카시≫에 「투영」이란 작품을 발표했는데 뜻밖에도 2018년 제4회 디카시작품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얼떨결에 디카시 잘 쓰는 시인이 되었고 그 후 꾸준히 작품을 쓰고 발표했습니다. 이번 시집은 5년간의 발표 시와 신작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발표 지면이 많지 않아 신작 시가 더 많이 수록되었습니다. 1회부터 5회 수상자들 모두 디카시집이 나온 터라 등 떠미는 이가 없어도 괜히 시집을 출간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겼습니다. 미루고 미루다가 어느 날 아침 문득 시집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후 일사천리로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첫 시집 『기타와 바게트』 때는 준비 기간이 길었는데 이번 경우는 일사천리로 발간이 되어 신기하기도 했네요. 꼭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입니다. 디카시집을 받은 분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는데 “첫 시집은 뭔지 모르겠는데 이번 시집은 사진이 있어 그런지 좋아요~!” 결과적으로는 난해함을 의식하여 출간한 경우가 되어버렸어요.
최은묵 제 생각에 ‘서정’은 단연코 시의 근간이라고 봅니다. 두 분의 작품세계를 보면, 김정수 시인께선 ‘서정’에 가까운 곳에 무게를 두고, 리호 시인께선 ‘서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세계를 펼치시는 걸로 보이는데요. 다행스러운 점은 두 분의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는 점이겠습니다. 김정수 시인께 질문드리겠습니다.
김정수 시인께서는 네 권의 시집을 출간하셨습니다. 이전의 시집에서 보여준 서정과 이번에 출간한 『사과의 잠』이 보여준 서정은 어딘가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데요. 제 생각으로는 그 이유가 ‘상징’에 조금 더 무게를 둔 까닭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북쪽」, 「서쪽」, 그리고 시집 처음을 여는 「섭씨 33도」 같은 작품이 오래 마음을 끄는데요. 이처럼 독자가 무언가 다른 결을 느끼는 까닭이 ‘상징’ 외 또 다른 게 있을 것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정수 오래 대상을 관찰하고 사유하는 방식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시적 대상과의 거리가 더 멀리 존재한다고나 할까요. 가족의 관계성보다 골목에서 마주한 풍경이나 경험을 객관화하면서 상징과 은유를 더 활용했다고 할 수 있어요. 사유에 더 치중한 면도 있고요. 짧은 시 「북쪽」은 『사과의 잠』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축약해 담았습니다. 왜 북쪽인지, 그냥 돌멩이가 아닌 “지나가는 돌멩이”가 상징하는 것, 그리고 차마 던지지 못하고 슬그머니 도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 등. 진술에 의존하는 방식을 극소화한 게 이전 시집과 다르게 느껴진 원인일 것 같습니다. 또한 한결 차분한 시선과 감정을 시종일관 유지하려 했습니다. 「섭씨 33도」는 과학적 사실을 시로 쓴, 동물성을 식물성으로 전환해 대화하듯 썼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성(性)이 결정되는 인간에 반해 악어는 온도에 따라 성별이 결정됩니다. 인간 중심 사고(상식)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그 자리에 사고의 다양성이 들어섰어요. 요즘은 나를 열고 좀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과의 관계는 여전히 힘드네요.
최은묵 두 분의 작품집을 큰 테두리에서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번에 나온 리호 시인의 디카시집 『도나 노비스 파쳄』은 라틴어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라는 뜻인데요. 이 시집은 『기타와 바게트』와는 달리 ‘서정’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지만,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시인이 향하려는 세계의 본질은 같다고 읽히는데요. 『기타와 바게트』에서 「신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낸 이유」 등 여러 편에서 ‘신(神)’이라는 대상을 향해 ‘시적 질문’을 던졌다면, 디카시집은 그 연장선에서 어떤 구체적 행위로 읽어도 될까요?
리호 솔직히 시집을 엮을 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엮어놓고 보면 큰 그림이 나타납니다. 꼭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느낌이랄까요. 이번 디카시집도 세상에 내어놓고 보니 사람들이 첫 시집과 함께 말을 합니다. 대부분 같은 이야기지만요. 질문처럼 구체적 행위 그 연장선에 놓은 듯 저도 그리 보입니다.
최은묵 ‘서정’은 아무래도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조금 가깝다고 여겨지는데요. 내용으로서의 서정과 형식으로서의 서정에는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김정수 시인께서 이번에 『사과의 잠』에서 보여준 서정은 근거리에서 원거리의 세계로 향하는 전환점으로 봐도 좋을까요?
김정수 “근거리에서 원거리의 세계로 향하는 전환점”, 참 예리한 지적입니다. 시집을 꼼꼼히 읽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질문이지요. 어떤 면에서 제 시의 형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내용은 나와 가족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점차 공동체로 나아가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사회, 나아가 지구 공통의 과제로 시적 대상과 세계관을 확장하고 했지요. 그동안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현실성과 자아에 집착했다면 이번 시집은 현실성에 바탕을 둔 상상과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에서 타자로, 좁은 공간에서 넓은 공간으로 나아가는 데 꽤 오래 걸린 셈입니다. 그동안 이해의 폭이나 이타적인 삶에 인색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은퇴를 하고 오로지 글 쓰는 일에 전념하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나 봅니다.
최은묵 김정수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 사물, 즉 시적 대상의 내면을 바라보는 탁월한 힘을 볼 수 있는데요. 이전에 보여준 시 세계가 ‘소수의 사회’에 무게추를 두었다면, 『사과의 잠』은 조금 ‘다수의 사회’로 기울임을 두었다고 보여집니다. 물리적으로 확장된 세계와 달리 상징으로 인해 비움과 깊이는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는데요. 『사과의 잠』 전면에는 고요함을 드러내면서 안쪽에는 예리함을 숨겨놓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정수 어쩌면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서 기인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시집에 유독 죽음을 다룬 시가 많습니다. 탄생에서 다시 갑(甲)으로 돌아오는 나이가 되니, 종종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접하게 됩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 한층 가까워진 것이지요. 죽음의 사색이 깊어지면서 채우기보다는 비우고, 관계를 넓히기보다는 좁히고,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복잡함보다는 단순해지려 하고 있습니다. 고요함 속에 움직이는 정중동(靜中動)이라 할까요. 생각과 행동이 단순해지니 한곳에 집중하는 게 더 수월해지더군요. 산책도 자주 하는 편인데, 전에는 걷기 바빴다면 지금은 주변 풍경을 완상하며 느긋하게 걷습니다. ‘마음 걷기’라고나 할까요. 산책길에 부처님을 만나면 합장도 합니다. 종교적 접근이라기보다 그저 마음의 평안을 위한 행위 같은 것이지요.
최은묵 작품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두 분은 다른 시인의 작품을 읽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일테면 본인의 취향에 맞게 골라 읽는 편인가요? 아니면 작품의 성향을 고르는 편인가요? 아니면 대부분 다 읽는 편인가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정수 시 작품에 대한 특별한 기준이나 취향은 없습니다. 시인들이 보내주는 시집은 거의 빼놓지 않고 읽습니다. 일간지에 연재할 때는 짧은 시를 먼저 찾아 읽었지요. 연재가 끝난 지금은 처음부터 읽습니다. 시내 서점이나 중고서점에도 종종 찾아가 서서 읽다가 마음에 드는 시집이 있으면 사지요. 오래 자주 읽다 보니까, 시 한 편을 읽고 파악하는 속도가 빠른 편입니다. 통독한 다음 마음에 드는 시집은 천천히 의미를 파악하면서 정독합니다. 한 번 읽어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시보다는 몇 번 읽어야 시인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는 시를 선호합니다. 그런 시는 나에게 자극을 주지요. 그런 시(시집)를 읽고 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리호 일단은 다 읽습니다. 전 시집을 소리 내 읽는 편입니다. 그럼 이상하게 비문 같아도 술술 읽히는 시집과 쉬운 말인데도 턱턱 막히는 시집이 있습니다. 후자인 경우는 목록에서 삭제합니다. 첫 시집이 그러면 두 번째 시집이 잘 읽히는 경우는 극히 드물거든요. 또 첫 시집이 맘에 들면 두 번째 시집은 꼭 찾아 읽는 편입니다. 두 번째 시집이 성에 안 차면 속이 막 상하는데 세 번째 시집이 나오면 또 찾아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또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면 그 후론 체념하게 됩니다. 그럴 땐 속이 상해요.
최은묵 하루에도 수십 권의 시집이 쏟아지는 시대입니다. 시를 쓰는 우리도 출간되는 시집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런 시대에 시가 이 세상에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김정수 『시의 역사』(소소의 책, 2022)를 쓴 존 캐리는 시란 “기억에 남고 가치를 부여받도록 특별히 지은 언어”라 했습니다. 구전됐거나 기록됐던 많은 시가 사라졌지요. 여러 이유로 소멸했지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은 「길가메시 서사시」로, 약 4000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어졌습니다. 폭군을 질책하는 현실참여나 풍자시라 할 수 있습니다. 시는 현실과 괴리돼서는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직접적으로 의도를 드러낸 시도 있겠지만,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심경을 드러낸 시도 있겠지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현실 비판이나 저항 이전에 자기 성찰도 중요합니다. 철저한 저기 반성이나 성찰의 토대가 단단해야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도 선호합니다. 시를 쓸 때 생명에 대한 연민이나 애정, 경외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시각으로 쓴 시가 세상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좀 과격하게 말하면 시는 ‘금기를 깨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리호 자장가 혹은 졸피뎀쯤이요. 같은 말 같은데 또 같은 뜻은 아니지요? 제가 잠이 안 올 때 쓰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요. 하나가 자장가를 밤새 듣는 것, 하나는 수면제를 먹는 법, 하나는 안 자는 법이었습니다. 요즘은 유튜브를 틀어놓습니다. 처음엔 쇼팽만 들었고요, 그 후 빗소리를 들었고요, 마지막은 시편이나 잠언 낭독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시작되는 5시간을 넘는 시편이 자장가가 되는 셈입니다. 제 시집을 언젠가 제가 낭독하여 녹음해 보려고요. 혹시 아나요? 누군가 잠들 수 있게 할지.
최은묵 두 분의 답변을 통해 독자들은 이후 김정수 시인과 리호 시인의 작품활동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조금 예상할 수도 있겠는데요. 혹시 이후의 작품이나 출간계획을 예고편처럼 조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김정수 인간의 본성과 행위, 급변하는 사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위기와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기술 발달, 그로 인한 미래 사회의 불투명.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린 디스토피아의 세계. 시로 접근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휴식이랄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그럴 여유 없이 청탁 시를 쓰기 바쁩니다. 이것이 옳은 방법이 아닌 줄 알면서도 눈앞에 닥친 급한 일부터 하게 되네요. 생존형 글쓰기를 하고 있어요. 제2의 은퇴가 필요한데, 아직 먼 것 같습니다.
리호 이후의 작품활동을 먼저 말해볼까요? 올해 봄호부터인가 봅니다. 시에 그림을 그린 시를 발표했습니다. 아니 그림에 시를 입혔다고 할까요? 음악을 들으면서 악보를 적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출간계획을 말씀드리면 두 번째 시집을 투고하려고 합니다. 준비는 다 되어 있는데 디카시집처럼 어느 날 문득 눈을 떴을 때 오늘 해야지, 하는 날 투고하지 않을까요? 생각한 대로만 된다면 내후년쯤에 나오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또 하나는 중학생들과 함께한 앤솔러지로 묶을 계획도 있습니다. 이건 어찌 될지 몰라서 생각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최은묵 말씀을 듣고 보니 앞으로 두 분의 활동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더욱 궁금해지고 기대됩니다. 마무리로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김정수 한 편의 시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습니다. 살아온 환경과 경험, 시를 대하는 태도와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여 다 충족시킬 수는 없지요. 즉 다 소통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20대에 읽은 책을 40대에 다시 읽으면 새로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쓰는 것만큼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쓰는 것보다 읽는 게 우선이지요. 그리고 요즘 염치(廉恥)란 말을 많이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체면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는 것 같습니다. 불의나 불합리한 것을 너무 당당하게 드러내 행하지요. 미안함이나 죄스러움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끝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사이펀》에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리호 어느 잡지 인터뷰에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배우 오정세의 남자조연상 수상소감을 듣던 중 맘을 단단하게 하는 문장이 있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그냥 계속하다 보면 평소와 똑같이 했는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위로와 보상이 여러분들에게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367일을 디디는 힘이 ‘신의 잔소리’라면 368일을 견디는 힘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혹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그것’이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카메라에 찍힌 찰나의 지구든 사람이든 하늘 우물 속 바람이든 간에 말입니다. 이 자리에 와주신 분, 이 글을 읽는 분 모두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평화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최은묵 “우리는 곡선이 직선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광장의 사이클」) 이 문장은 시집 『사과의 잠』을 지탱하는 커다란 축으로, 휘어짐으로써 얻어지는 공간에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367일은 디디는 힘/ 말캉한 화이트초콜릿”(「신의 잔소리」)은 디카시집 『도나 노비스 파쳄』에 나오는 작품입니다. ‘도나 노비스 파쳄’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라는 뜻으로, 이 시집에는 ‘신’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이 가을, 두 시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았는데요. 우리도 두 시인처럼 어떤 사유를 품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자리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최은묵
2007년 《월간문학》 및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수주문학상, 천강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 시집 『괜찮아』, 『키워드』, 『내일은 덜컥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