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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메일] 김혜정
1. 영미네 거실(낮)
현관벨 계속 울리며-
발끝부터 훑듯이 보이는 바닥에 쓰러져 누운 영미.
한 짝은 멀리 벗어던진 채, 실내용 슬리퍼 한 짝만이 발끝에 아슬아슬 걸려있고, 아무렇게나 말려 올라간 스커트, 무방비하게 늘어뜨린 팔, 한쪽으로 꺾어진 목, 의식을 잃은 듯 헤~벌어진 입,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 입 부근에는 마치 피를 토한 듯 붉은 와인이 바닥을 적시고 있어서, 얼핏 끔찍한 사고현장처럼 보인다.
현관벨 거푸 울려대지만 꿈쩍도 않는 영미.
바닥에는 와인잔과 빈 와인병들이 뒹굴고...
답답한 듯 다시 벨을 누르는 지선의 모습 인터폰으로 보이며
2. 동 아파트 공동현관
우편함에 꽂힌 파란색 편지 너머로 보이는 지선.
마침 누군가 나오며 자동문이 열리자 냉큼 안으로 들어온다.
그대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졌던 지선, 도로 우편함으로 와서 (1503호에 꽂힌) 파란편지와 우편물들을 뽑아 가고
3. 영미네 현관 앞
쾅쾅쾅 1503호의 문을 두드리는 지선.
지선 문 열어~. 나야 지선이.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얼른 열어. 죽었니? 박영미 죽었다고 동네방네 소문낸다~ 영미야~
4. 동 영미네 현관~거실
막 취기에서 깬 부스스한 몰골의 영미, 앓는 소리로 앞서 거실로 오고
지선, 뒤따라 들어오며
지선 문 한번 빨리도 연다. (거실로 들어서다) 어휴 이게 다 뭐야? 내 이럴 줄 알았지. 참 볼만하다.
영미 (소파에 누우려다) 혹시 약 사왔니?
지선 언제 나한테 약 사오랬니? 딱 한 잔만 마신다며? 으유~ (약 꺼내주며) 얼른 약 먹고 정신 좀 차려. 애 유치원에서 올 시간 다 됐어.
영미 (일어나며) 보라 오늘 스포츠교실 가는 날이라 늦어... (약 먹고)
지선 참 볼만하다. (테이블에 우편물 놓으며) 편지 배달해, 술 깨는 약 사다 바쳐, 나 같은 친구 없는 줄이나 아셔.
영미 (심드렁) 그럼~. 뻑하면 사고치는 그 인간 중매한 것도 너였을 걸.
지선 어유어유어유 내가 말을 말아야지.
영미 그 잘난 니 남편 친구분께서 이번에 또 해먹은 돈이 얼마 줄 아니? 갈비뼈 한 대 이빨 두 대, 합의금은 고사하고 치료비만 이 백이랜다. 내가 미쳐. 그 돈이 어떤 돈이냐구? 결혼 7년 만에 해외여행 한번 가보나 보다 했다.
지선 그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다잖아. 우리 민주아빠도 옆에서 봤는데, 솔직히 몇 대 때리지도 않았대.
영미 그러게. 그놈의 주먹에 살이 꼈는지 어쨌는지, 한번 휘둘렀다 하면 몇 백 우습게 날아간다는 거 아직도 모르냐구. 자기가 무슨 깡패야? 어떻게 한번도 안 빼고 해마다 이러니. 아주 연례행사야. 국기 달아줘야 한다니까.
지선 (끙 할 말 없고)
영미 내 복에 발리는 무슨 발리... 내가 그거 한번 가보려고 몇 년을 벼르고 별렀던 거 너도 알지? 정말 그런 인간을 믿고 평생을 살아야 되는 거니?
지선 안 살면? 이혼이라도 하시게? (일어나며) 걸레 어딨어?
영미 뭐하게?
지선 온 집안에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진동을. (욕실로 가고)
영미 나둬. 나중에 내가 치울게... (새삼 한숨 일고)
기분 떨치듯 우편물을 집어 드는 영미.
각종 고지서들을 대충 훑어보고 파란편지를 뜯는다.
어리둥절 편지 읽고
지선 (걸레 빨아서 들고 오며) 우리 나가서 운동을 하던지, 사우나라도 하자. 땀 좀 확 빼고 나면 기분도 풀리잖아.
영미 (떨떠름 혼잣말로) 뭐야 이게...?
지선 왜? 뭔데 그래? (채듯 가져다 소리 내 읽는) 난 니가 어디서 누굴 만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디서 운동을 하는지 다 알고 있어. 니가 뭘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도
어둠 속에서 협박장을 타이핑하는 남자의 실루엣 스치며
남자 (변조된 남자의 음성으로 겹쳐지며 계속되는/ E) 니가 뭘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도 아주 잘 알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니가 나한테 줬던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줄 테니까. 니가 한 짓을
다시 영미네 거실.
지선의 목소리로 겹쳐지며
지선 니가 한 짓을 뼈 속 깊이 후회할 때까지 천천히 갚아주겠어.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뻥해서)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누가 보낸 거니?
영미 (골똘한) ...
지선 (봉투 가져다 발신인 확인하고) 아무 이름도 없이... 무슨 이런 편지가 다 있어, 기분 나쁘게...
돌연 수화기 들고 전화 거는 영미.
지선 왜? 누구 짚이는 사람이라도 있니?
영미 누군 누구야, 이게 다 그 인간 때문이지. (부재중 메시지에) 뭐하느라고 전화도 못 받아. (음성사서함 버튼 누르고) 야 강상준! 언제까지 정신 못 차리고 그 따위로 살래? 도대체 누구한테 무슨 짓을 하고 다녔게 (편지 흔들며) 이 따위 편지가 집으로 날아오게 만들어. 여기 뭐라는 줄 알아? 당신한테 당한대로 고스란히 갚아주시겠대. 걸핏하면 사람이나 패고 다니더니 결국 이런 일 생길 줄 알았어. 어느 미친놈 짓인지, 그 작자하고 결판 볼 때까진 집에 들어올 생각 하지도 마. 만에 하나 보라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단 봐. 그땐 당신하고 끝장인 줄 알아! (끊고)
지선 (어이없어 보는)
영미 (기세 등등) 아까 뭐하자구?
5. 헬스클럽
경쾌한 음악 울려대는 실내.
운동복 차림의 영미와 지선, 러닝머신으로 오며
지선 아까 그 편지... 정말 보라아빠 앞으로 온 걸까?
영미 무슨 소리야?
지선 집으로 온 편진 대개 여자들이 챙기는데, 만일 보라아빠한테 보낸 거면 제대로 이름을 써서 보냈겠지. 아님 회사로 보내던가...
영미 (서며) 그러니까 니 얘긴 뭐야? 나한테 온 걸지도 모른다?
지선 뭐... (얼버무리려다) 가능성은 반반이지. 냉정하게 말하자면...
영미 참 냉정하다, 친구라는 게... 하지만 나한테 그런 편지 보낼 사람이 누가 있어? 내가 뭐 특별히 좋은 일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편지 받을 만큼 누구한테 나쁜 짓하고 살진 않았다.
지선 (놀리듯) 그러~엄! (분위기 바꿔 진지하게) 장난 편질거야. 이따 보자. (다른 운동기계로 가고)
영미 저건 암튼... (내심 불쾌해 러닝머신에 오르는데)
E (휴대폰 벨)
발신번호 확인하며 수건을 러닝머신에 거는 영미.
그 바람에 러닝머신 전면에 붙어있던 ‘고장’이라고 써 붙인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모르고
영미 누구지? (휴대폰 열면)
E (기계음의 안내 멘트) 팔이 부러지셨습니까? 건강에 이상이 있으십니까? 걱정 마세요. 월 18430원으로 6천 가지 이상의 질병이 보장되는...
영미 이건 또 뭐야? (불쾌해 휴대폰 닫고) 오늘 진짜 왜 이래... (기분 떨치듯 스타트 버튼을 눌러 운동 시작하고)
바로 옆 러닝머신에서 운동하던 여자.
여자 어, 그 기계 고장... (하다 갸우뚱 하고 말 뿐, 무심히 다시 운동하고)
모른 채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영미와 교차되는
- 기계 밑으로 들어가 있는 고장이라고 쓴 종이
- 우당탕 거칠게 돌아가는 러닝머신 안의 모터
-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며 모서리가 갈리듯 돌아가는 바닥벨트
- 스파크를 일으키는 접촉 불량의 전선 등등...
금방이라도 사고가 터질 듯 위태로운데
E (휴대폰 벨)
영미 (발신번호 확인하고, 휴대폰 열며 대뜸) 당신 또 한번만 그딴 편지 집으로 오게 했단 봐. / 장난? (러닝머신 끄고 내려오며) 내가 지금 당신 붙잡고 퍽도 장난하고 싶겠다. 못 믿겠으면 지선이한테 물어봐. 바꿔줄까?
그 뒤로 영미가 내려온 러닝머신으로 올라가는 은주 보이며
영미 (발끈) 그거야 당신이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아주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당해. / 됐어. 그딴 얘기 듣고 싶지도 않아. 차라리 맞아죽고 말지 다신 주먹질 안하겠다고 맹세한 게 얼마나 됐다고... (통화하며 가고)
러닝머신 위의 은주, 허겁지겁 달리며 속도 조절 버튼을 눌러보지만 속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은주 이 기계 왜 이러지? 여기요~ (다급히 소리치는데)
스파크를 일으키며 갑자기 서버리는 기계 내부 인서트.
순간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튕겨나갔던 은주, 손잡이에 걸려 다시 뒤로 튕겨지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진다.
운동하던 사람들 놀라 돌아보고
막 통화를 마치던 영미, 역시 놀라 돌아보고
영미 (의아히) 저긴...?
지숙 (다가와 무심코) 어머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니? 암튼 너 운발 좋았어. 하마터면 니가 다칠 뻔 했잖아. (하다, 퍼뜩 생각이 미쳐 돌아본다)
영미 (같은 생각으로 보는)
지숙 ... 아까 그 편지... 장난이 아닌가 봐...
영미 (불길한 예감으로 굳어지고)
6. 달리는 지숙의 차 안
지숙, 운동복 차림으로 운전하고
역시 운동복 차림 그대로 옆자리에 앉은 영미, 불안한 위로 스치는
편지 인서트/ ...어디서 운동을 하는지 다 알고 있어. 니가 뭘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도 아주 잘 알지...
영미 (초조해 한숨)
지숙 (내심 불안하지만) 괜찮을 거야. 설마 무슨 일이야 있을라구...
영미 (혼잣말로)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기만 했단 봐...
지숙 ... (서두르듯 차선 바꾼다)
차 쌩 달려가고
7. 스포츠센터 앞
달려와 급정거하는 지숙의 차에서 내리는 영미,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8. 동 수영장
훑듯이 보이는 실내.
또래들과 어울려 수영하던 보라가 엄마~소리치며 밝게 손을 흔든다.
영미, 그제야 휴~ 안도하고
9. 병원 물리치료실
운동복 차림의 은주, 신음하며 근육마사지 받고
옆에 서서 쩔쩔매는 헬스클럽 사장
사장 (옆에 서서 쩔쩔매며) 거 참 어쩌다 이런 일이... 그래도 이만하기 천만다행이죠. 뼈라도 부러졌으면 어쩔 뻔 했어요. 고장이라고 써서 붙여놓기까지 했는데 왜 그걸 못 보시고...
은주 사장님 말씀 정말 이상하게 하시네. 순전히 내가 잘못해서 사고 난 것처럼 말씀하시는데요 (하다) 아~ 좀 살살해요... 어우 아퍼... (신음하며 치료받고)
10. 아파트 단지 일각
바닥에 떨어진 꽁초를 줍는 창희.
익숙한 일인 듯, 이미 담배꽁초와 과자봉투 따위가 담긴 비닐봉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담는다.
그 옆을 스쳐 지나가는 지선의 차 안의 보라.
보라 새마을 아저씨다!
지선 (운전하며 힐끗 백미러로 보고) 새마을 아저씨?
영미 (장 본 봉투들 챙겨 내릴 준비하며) 우리 동 17층 사람인데,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지 마라, 계단에 물건 싸놓지 마라, 애고 어른이고 따라 다니면서 어지간히 잔소리하나봐.
보라 막 야단치고 대따 무서워요.
영미 왜? 너 뭐 잘못해서 저 아저씨한테 혼났니?
보라 (풀 죽어) 아냐...
영미 (모르고) 됐어 여기 내려줘. 그래야 너 가기 편하지.
지선 여기나 거기나...
11. 영미네 아파트 공동현관 앞
지선의 차 달려와 현관 앞에 정차하고
지선 보라야, 모르는 아줌마 아저씨가 사탕 사준다,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가자 그럼 어떻게 하라 그랬지?
보라 따라가면 안돼요.
지선 그래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 큰일 나. 엄마 못 볼 지도 몰라.
영미 왜 애한테 겁을 주고 그래. (보라와 내리고)
지선 (차 안에서) 얼른 들어가서 문 꼭 잠그고 있어. 괜히 불안하다.
영미 알았어. 오늘 고마워.
지선의 차 떠나고
돌아서던 영미, 주차한 차에서 엉거추춤 내리는 은주를 발견하고
영미 (다가가며) 어머 여기 사세요? 아까 다친 건 좀 어때요?
은주 네?
영미 아까 헬스클럽에서 사고 나는 거 봤어요. 괜찮아요?
은주 네 뭐... (대충 얼버무리고 가는)
영미 네 뭐... (못마땅한 듯 흉내 내고) 남은 기껏 생각해서 물어봤더니... 보라야 가자.
불편한 거동으로 엉거주춤 가는 은주를 앞질러 가버리는 영미, 공동현관으로 들어가고
12. 동 엘리베이터 안
엘리베이터에 타는 영미와 보라.
보라 내가 할거야~ (까치발로 15층을 누르고)
영미, 무심코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데
힘겨운 듯 천천히 엘리베이터로 오는 은주가 보인다.
달갑지 않지만 기다리던 영미, 엘리베이터가 막 닫히려는 순간 열림 버튼을 눌러준다.
서두는 기색 없이 다가와 타는 은주, 고맙다는 말을 눈인사로 얼버무리며 16층 누르고
영미 16층 사세요? 3호예요 4호예요?
은주 3호요.
영미 우리 바로 윗층이네.
은주 예에...
떨떠름 서로 외면하는 영미와 은주, 나란히 선 채 제 각각
영미 (마음의 소리) 야밤에 홈씨어터 쩌렁쩌렁 틀어대는 여자가 누군가 했더니 (힐끗 훑듯이 살피며/마음의 소리) 이 여자군...
은주 (마음의 소리) 누가 저렇게 무식하게 부부싸움을 해대나 했더니 (돌아보며/ 마음의 소리) 이 여자잖아.
서로 살피듯 보던 영미와 은주, 시선 마주치자 짐짓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내 미소를 거두며 제각각 시선을 돌리는 영미와 은주.
타인이라는 이름의 냉랭함과 무관심 속에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13. 동 은주네 현관 앞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은주.
그 너머 천장에서 무언가(CC카메라) 반짝 빛을 발한다.
이하 CCTV화면으로 보이는/
현관문을 여는 은주, 기다렸다는 듯 집안에서 튀어나와 매달리는 강아지에게
은주 우리 샤비 혼자 심심했지? 안돼, 엄마 오늘 아파서 못 안아줘. 들어가자~ (문 닫히고)
14. 영미네 거실 (밤)
잠든 보라의 이불을 여며주는 영미가 열린 방문 안으로 보인다.
빨래거리를 챙겨서, 불 끄며 방에서 나오던 영미.
벽시계를 보면 11시가 넘었다.
영미 지선이가 얘길 안 했을 리도 없고... (주방으로 가며) 마누라가 다칠 뻔했다는데 이 시간까지 전화 한통 없이... (서며) 으유~ 구제불능.
하고 보면, 식탁에 파란편지가 놓여있다.
영미 ... (집어 들고) ... 정말 나한테 온 건가? ... 도대체 내가 뭘 어쨌게...? ... (골똘한데)
E (현관벨)
영미 어우 깜짝야. (인터폰 보고) 너도 양반되긴 틀렸다. (현관으로 가 걸쇠 풀면)
벌컥 문 열고 들어오는 상준.
상준 (짐짓 호들갑으로) 여보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감히 내 소중한 마누랄 노려? 우리 보라는? 보라야~ (방으로 가려는데)
영미 왜 이래? 애 자, 조용히 해.
상준 자식... 벌써 자냐. 보라 괜찮은 거지? (소파로 가며) 민주엄마한테 얘기 듣고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다구. 솔직히 당신하고 보라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겨봐. (앉으며) 내가 어떻게 살겠어?
영미 (마주 앉으며) 그렇게 걱정되는 사람이 이제야 오셔?
상준 마음이야 총알같이 달려오고 싶었지. 하지만 영업하는 놈이 퇴근시간이 어딨냐? 그리고 빨리 한 건이라도 더 올려야 당신 발리 보내주지...
영미 (콧방귀로) 하~! (탁자에 소리 나게 편지 딱 놓고) 이거나 보시고 언놈인지 잘 생각해보셔. 당신 마누라하고 애 어디 하나 부러져서 발리도 못 가보고 드러눕기 전에.
상준 넌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하냐. 내가 딴 건 못해줄지 몰라도, 내 식군 내가 지켜. (보란 듯이 편지를 털어 탁 펴며) 알어?
영미 (코웃음 치고)
상준 (편지 읽는) ... 순 협박이네... (하다 봉투 확인하고, 순간 픽 실소한다. 편지로 머리 쥐어박고) 어유~
영미 왜에?
상준 (봉투 주며) 자 봐봐.
영미 뭘...? (받아서 보며) 뭘 보라구...?
상준 두 눈 크게 뜨고 똑똑히 좀 봐봐. 일도 아닌 일을 갖고 누굴 이상한 놈으로 만들고 있어.
영미 (그제야 주소보고) 어머, 윗 층 거네~! (손뼉 치며) 맞다! 오늘 헬스장에서 다친 여자가 바로 윗 층 여자야. 아휴~ (안도하고) 그럼 그렇지.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다구... 괜히 쫄았잖아!
상준 쌩쑈를 해라, 쌩쑈를.
영미 (머쓱해) 아니... 난 우리 집에 온 거니까 당연히 우리 건 줄 알고... 화났어?
상준 너 솔직히 말해봐. 나 보고 싶어서 집에 들어오게 하려고 쇼한 거지?
영미 뭐어? 허이구 참... 꿈 깨세요, 주먹씨. 주먹 쎈 거 말고 뭐 잘하는 게 있다고 보고 싶어.
상준 그래? 그럼 도로 민주네로 가지 뭐. (일어나고)
영미 가아, 가. 그 집 부부 앓던 이 빠졌다고 시원해하고 있을 텐데, 퍽이나 반가워하겠다. (하다 돌연) 제발 싸울 때마다 민주네서 뭉개지 좀 마. 아무리 친구지만 쪽 팔린단 말야.
상준 친구끼리 쪽 팔리긴... (어물쩍 도로 앉고, 옆자리 툭툭 치며) 이리 와 봐. (힐끗 방 쪽 보며) 보라 자지?
영미 왜 이래, 갑자기?
상준 (끌어당겨 안으며) 이리 와 봐. 며칠이나 못 봤잖아. 너무 굶었다 야.
영미 어우 놔아. 애 깨면 어떡하려고... (밀어내며 일어난다)
탁자에 놓인 편지를 뒤로 한 채
영미와 상준, 웃음 죽여 서로를 희롱하며 안방으로 들어가고... (F.O)
15. 영미네 엘리베이터 앞(다른 날 아침)
(F.I)
현관문 열고 나오는 상준, 엘리베이터에 타고
뒤늦게 현관문을 열고 몸만 내미는 영미
영미 (편지 내밀며) 여보 편지 좀~ (하는데 이미 엘리베이터 닫힌다. 도로 들어가려다 엘리베이터로 가며) 얼른 갖다 놔버려야지, 자꾸 까먹네...
보라 (E) 엄마~
영미 어 그래 보라야. (도로 들고 들어가고)
16. 근처 일방통행 길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는 상준의 차.
일방통행로로 접어들어 달려가다 때마침 마주 달려오던 민규(썬팅으로 안 보임)의 고급승용차와 맞닥뜨려 선다.
상준 자식, 차 디따 좋네.
괜히 기죽어 순순히 후진하던 상준, 자기 쪽 일방이라는 표지판을 발견하고
상준 (그제야 생각나) 아 맞어. 여기 내가 일방이잖아.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와버렸다) 아침부터 뭐야 저 자식... (투덜투덜 차 빼주면)
그대로 쌩 달려가는 민규의 차.
상준 어쭈! 저게 고맙다는 사인도 안 해? 5430! 너 딱 걸렸어. (차 출발하며) 지금은 생업전선이 바빠서 그냥 보내주지만, 두고 보자구.
차 달려가고
17. 아파트 공동현관 앞
주차한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민규.
현관으로 다가가 카드키로 문 열려다가,
1603호 인터폰 누르고
18. 동 아파트 공원
은주, 강아지 목줄을 풀어주며
은주 엄마랑 산책하자. 엄마 아직 다리 아프니까 혼자 멀리 가면 안돼. 엄마 옆에 잘 따라와야 돼, 샤비 알지? 자 가자.
훨씬 편해진 걸음걸이로 강아지와 보조를 맞춰 산책하던 은주,
휴대폰 벨 울려 받고
은주 (걸으며 휴대폰으로) 제사 잘 지냈어요? / 여기? 공원. 샤비 산책 시키려고 지금 막 내려왔어요. / 이제 훨 편해요. / 인정! 매일 밤 당신이 찜질해준 덕분이라고 봄! (웃고) / 다른 일도 아니고 제사 지내러 간 건데 무슨... (서며) 제사 지내러...서윤 엄마도 왔겠네? / 신경? 쓰이지. 그 자리 영 안내주겠다고 버틸까봐 무섭기도 하고... (얼버무리듯 웃고) 얼른 일해요. 출근하자마자 연애질 한다고 눈치 주겠다.
어느새 뒤에 와 선 민규
민규 (은주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출근은 무슨 출근.
은주 어머 당신?! 아 참, 오늘 노는 토요일이지.
민규 (휴대폰 닫으며) 나한테 관심 좀 가져줘. 샤비만 챙기지 말구. 근데 샤비는 어디 갔어?
은주 어, 어디 갔지? 샤비야~
19. 동 공원 밖 일각
뛰어오는 샤비.
보면, 정차한 차 안에서 누군가 애견용 간식으로 유인하고 있다.
간식거리를 ?아 뛰어온 샤비, 차에 타면
그대로 문 닫히며 차 서행해 떠나고
20. 백화점 일각
까르르 웃는 지선과 영미.
지선 어떻게 우리 둘 다 그걸 못 봤니?
영미 (아이 쇼핑하며) 안 그래도 보라 아빠가 한참 한심해했어. 두 여자가 어쩜 그렇게 똑같냐고.
지선 내용이 하도 섬뜩하니까 놀래서 그랬지 뭐. 암튼 다행이다. 근데 그 윗층 여잔 누구한테 무슨 원한을 샀길래 그런 편질 받을까?
영미 그러게? 얼핏 보기에도 싸가지가 영~ 빵인 걸 보면 (하다) 어머 발리 경품행사 하잖아! 야야야 우리도 얼른 가보자.
지선 나 민주 옷 사야 된단 말야.
영미 그건 내일 사도되잖아. 빨리 와, 빨리~ (끌 듯 가고)
21. 아파트 단지 일각
은주 (서행하는 차 안에서 고개를 뺀 채) 샤비야~ 샤비야~
은주를 태우고 서행하는 민규, 샤비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다 일하는 경비에게
민규 아저씨 혹시 흰색 강아지 한 마리 못 보셨어요? 털이 한 이 정도 길구요, 요만한 쉬츤데...
보라와 함께 지나가던 영미, 무슨 일인가 목이 빠져라 돌아보고
은주 머리에 분홍색 핀 꽂은 강아지거든요.
경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다시 제 할일을 하고
울상이 되는 은주.
민규, 다시 차 출발하고
영미 강아지 잃어버렸나...? (걸어가다) 아 참, 편지! 에고~ 엄마 또 깜박했다! (헤헤 웃고)
보라 (덩달아 웃으며 걸어가고)
22. 영미네 아파트 현관~주방
식탁에 장 본 물건들과 우편물을 내려놓는 영미,
우편물 속에서 파란편지를 발견하고 집어 든다.
영미 (주소 확인하고) 이게 또 우리 집으로 왔네. 왜 자꾸 잘못 오는 거야, 귀찮게...
편지 들고 현관으로 오는 영미, 신발장 위에 방치되어 있는 첫 번째 편지 위에 다시 새 편지를 툭 던져놓고 가고
23. 은주네 거실 (밤)
은주, 머리 감싸 쥔 채 소파에 앉아있고
식탁에서 와인을 따르는 민규.
민규 (잔 들고 와서 탁자에 놔주고) 마셔. 여기저기 신고해놨으니까 너무 낙담하지 말고 기다려보자. 우는 거야?
은주 (고개 들고 반 혼잣말로) 나 정말 벌 받나봐. 서윤엄마한테서 당신 뺏었다고... (씁쓸히 술 마시고)
민규 참 말 된다. (술 마시고)
은주 (잔 놓으며) 아님, 누가 나 벌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거나.
민규 무슨 소리야?
은주 이상하잖아요. 어제 오늘 계속... 누가 일부러 데려간 게 아니면, 샤비 절대 내 옆에서 안 떨어지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어제 헬스장에서도 분명히 고장이라고 써서 붙여놨었다는데, 내가 할 땐 그런 거 없었단 말야.
민규 아무리 그렇다고 집사람이 (하다 눈치 보여 주춤하고) 서윤엄마가 당신 운동하는 델 어떻게 알고 일부러 그런 짓을 했겠어.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냐.
은주 그러게. 너무 유능하고 자존심 센 사람이, 나같이 하는 일도 없는 무능한 여자한테 당신을 뺏겼으니 얼마나 열불이 나겠어.
민규 (제지로) 은주야.
은주 (왈칵) 그래서 더 이혼 못해주겠다는 거잖아.
E (민규 휴대폰 벨)
민규 ... (휴대폰 꺼내 보고, 난처한 듯 일어나려는데)
은주 할 말 있으면 와서 하라 그래요. 밤마다 전화하지 말고.
민규 후~ (방으로 가며 휴대폰 열고) 어 왜? ... 아니 아직 안 잤어. 얘기해. ... 서윤이가? 얼마나 아픈데? (방으로 들어가고)
은주 (속상해 헛웃음으로) 또 아퍼? 애가 무기지...
민규 (E) 이 사람이 왜 또 울고 이래? 그 얘긴 이미 끝난 얘기잖아.
짜증스레 TV켜는 은주, 신경질적으로 볼륨을 높인다.
마침 방영되는 영화의 효과음이 홈씨어터를 통해 요란하게 울려나오고
24. 영미네 거실
벽을 타고 울리는 그 소리 이어지며
식탁 위에 창간 10주년 기념 이벤트로 발리여행을 경품으로 건 잡지책이 펼쳐져 있고,
이벤트응모용 체험담을 쓰다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든 영미.
요란하게 울리는 총소리, 여자의 비명소리에 퍼뜩 깨고
영미 이게 무슨 소리야... (계속되는 울리는 소리에) 암튼 저 집 몰상식은... 시간이 몇 신데.
보라 (방에서 나오며) 엄마~
영미 어 보라야. 왜 깼어?
25. 은주네 거실
인터폰 울리고
물끄러미 TV를 응시하던 은주, 힘겹게 일어나 받으면
영미 (E) 아래층인데요, 테리비 좀 조용히 보죠. 자던 얘가 다 깨네요. 12시 넘었거든요.
은주 알았어요, 주의할게요. 그런데 그 집 부부싸움 할 때, 우리도 참았거든요. (끊고)
26. 영미네 거실
영미 뭐, 뭐라구? 이 여자 말하는 것 좀 봐. 기가 막혀서... (인터폰 쾅 놓고) 그러니 저 딴 협박을 받지. 당해도 싸다, 싸. 보라 뭐해?
아이스크림을 통 째 껴안고 퍼먹던 보라, 입가에 잔뜩 아이스크림을 묻힌 채 천진하게 웃고
27. 대형약국 앞 (다른 날 낮)
샤비를 찾는 인쇄물이 전봇대에 붙어있다.
무심히 그 옆을 지나는 영미, 약국으로 들어가는데
때마침 약봉투를 들고 나오는 창희.
영미 (의례적으로) 안녕하세요? (하다 약봉투 보고) 무슨 약이 그렇게 많아요? 어디 많이 아프신가 봐요?
창희 (물끄러미 약봉투 보며 남 얘기 하듯) 오늘 낼 오늘 낼 한다네요.
영미 네?
창희 (뜬금없이) 보라라고 따님 있죠? 하드봉지 아무데나 버리지 말라고 교육 좀 시키세요. 요즘 애들은 왜 그렇게 공중도덕을 모르는지... (가고)
영미 (기막혀 말문 막혀하다) 아니 저 아저씨 정말 왜 저래? 어우 맘에 안 들어... (들어가고)
28. 영미네 거실
상준, 바닥에 대자로 누워 코골며 자고
보라가 그 옆에 배를 감싸쥔 채 쪼그리고 누워있다.
들어오는 영미.
영미 내가 미쳐. 애가 아프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쿨쿨 퍼잘까... (끙 참고) 보라야 약 먹자. 자니?
보라 배가 자꾸 쓰라려...
영미 그러게 엄마가 아이스크림 작작 먹으랬지? 일어나. 빨리 약 먹어. (약 따러 먹이며) 너 새마을아저씨한테 혼나놓고 엄마한테 왜 거짓말했어?
보라 몰라~ 아프단 말야. (배 감싸 쥐며 도로 눕고)
상준 (설핏 깨서) 어? 보라 아퍼? 아빠가 만져줄게 이리 와, 이리와... (보라 배에 손만 댄 채 도로 코곤다)
어이없어 실소하던 영미, 주위 둘러보다 빨래집게로 상준의 코를 확 집어버린다.
상준,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고
29. 죽 전문점 주차장
민규 차 주차해 있고.
서행해 들어와 그 옆자리에 주차하는 상준의 차.
상준 (안전벨트 풀며 힐끗 영미 눈치 살피고) 여보 우리 기왕 나왔는데, 밥 먹고 놀이동산이라도 갈까?
영미 애가 아픈데 무슨 놀이동산? 가서 또 등짝 붙이고 주무셔야지. (내리고)
보라 (따라 내리며) 나 안 아퍼. 갈 거야.
상준 비위 맞추기 힘들다 힘들어...
차에서 내리던 상준, 민규 차 발견하고
상준 어? (가서 차번호 확인하고, 벼르듯) 5430~!
영미 왜, 아는 사람 차야?
상준 어? 알긴... 차 좋다구. (회심의 미소로 가고)
30. 동 죽 전문점 안
앞서 들어오는 상준, 카운터에
상준 밖에 5430 차, 실내등 켜져 있던데요. (해놓고, 안으로 들어간다)
상준, 자리 잡고 앉고
보라와 뒤쳐져 들어온 영미, 자리에 앉으며
영미 당신이 아무나 패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아까 그런 외제 차 뽑고도 남았어.
상준 아~ 참 애 앞에서... 보라야, 아빠가 괜히 팬 게 아니라, 아니 괜히 때린 게 아니라, 그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오니까 응분의 대응을 한거야. 알았지?
영미 (삐쭉 흘기고) 보라 무슨 죽 먹을래? 골라.
주인 (마이크로/E) 5430차 손님, 차 안에 실내등이 켜져 있답니다.
상준 (기다렸다는 듯 둘러보면)
은주와 마주 앉아 식사하던 민규, 차 키 꺼내며 출입구로 간다.
상준 (혼잣말로) 너야~아?
영미 뭐가 너야? (시선 따라 돌아보다) 어 저 사람 그 여자 남편인데.
상준 그 여자?
영미 우리 윗 층 여자. 그 협박편지. (찾듯 둘러보면)
입맛이 없는 듯 깨작이며 음식을 먹는 은주 보이며
영미 (낮춰) 저 여자야, 저 여자.
상준 (제 생각에) 어~어. 우리 윗 층이란 말이지. 세상 넓은 거 같아도 참 좁다니까.
영미 뭐야 아까부터 자꾸 수상하게... 당신 혹시 1603호 남자하고 무슨 일 있었어?
상준 일은 무슨 일? 오늘 첨 봐.
영미 (반신반의로) 당신 일 낸지 한 달도 안됐어. 또 사고만 쳤단 봐.
상준 (딴청으로) 여기요. 주문 좀 합시다~
31. 다시 죽 전문점 화장실
들어오는 상준, 소변보는 민규 일별하고 옆으로 가 나란히 선다.
상준, 꼬나보지만
모른 채 힐끗 보고 마는 민규, 세면대로 가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민규 (발신번호 보고 달갑지 않은 듯) 어 왜? / 지금? 오늘은 곤란한데... 무슨 얘긴지 내일 하면 안 돼? 여기 요즘 계속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예민하다고 얘기했잖아.
세면대로 오는 상준, 손 씻고
민규 야 이제 지겹다, 그만 좀 하자. 그래 나 너 사랑했어.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라구. 당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이게 우리 현실야. (하는데 끊긴다)
짜증스레 휴대폰 닫는 민규, 그제야 상준 의식하고 거북한 듯 나가고
상준 (꼴려) 바람까지~. 젊은 자식이 외제 차 타고 다닐 때부터 알아보긴 했다만, 하여튼 잘난 것들은...
꿀리는 기분을 털어내듯 손의 물기를 털던 상준, 문득 거울을 보며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겨본다.
자신의 매력을 확인하듯 어깨에 힘도 줘보고
32. 동 주차장
제각각 차에 타는 상준과 영미, 보라
영미 (안전벨트 메며) 우리 윗 층, 남자가 꽤 능력도 있고 괜찮은 거 같은데 왜 그런 여자하고 결혼했을까?
상준 (차 출발 시키며) 그 여자가 어때서?
영미 남자가 화장실 갔다 와서 뭐라고 한마디 하니까, 여자가 그대로 쌩 나가는 거 있지. 그래도 그 남자 마누라 핸드백이랑 옷이랑 다 챙겨갖고 따라 나가대. 어우~ 나도 그렇게 부드럽고 매력적인 남자하고 한번만 살아봤으면...
상준 매력 좋아하시네. 그래서 잘난 값 하시느라고 바람이나 피고 다니고 그럼 좋기도 하겠다.
영미 바람?
상준 다 지가 지은 죄가 있으니까 설설 기는 거지, 뭘 알지도 못하면서...
영미 당신 어떻게 알았어? 그랬구나아~
차 달려가고
33. 아파트 공동현관 앞
경광등을 번쩍이며 경찰차가 서있다.
잠든 보라를 안은 상준과 놀이공원에서 산 풍선과 장난감을 들고 현관으로 오던 영미.
영미 웬 경찰차래? 무슨 일이지?
안으로 들어가고
34. 은주네 현관 앞
아니 벌건 대낮에 이게 무슨 일이래? / 세상에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등등 열린 현관 앞에 모여선 사람들 수군거리고
(보라를 눕혀놓고) 의아히 계단을 올라오는 영미와 상준
영미 무슨 일예요?
여자1 이 집에 도둑이 들었대요.
영미 도둑요?
충격에 빠져 소파에 앉아 있는 은주, 부서진 홈씨어터, 민규에게 뭔가 묻는 경찰관, 한쪽에서 쩔쩔매며 서 있는 아파트경비, 집안을 꼼꼼히 살펴보는 경찰관 등 집안 풍경 위로
여자2 (E) 근데 이상한 건, 훔쳐간 건 아무것도 없고, 저렇게 홈씨어터만 작살을 내놨대요.
여자3 (E) 얼마 전엔 강아지도 잃어버렸다면서요?
여자4 (E) 잃어버린 게 아니라 누가 일부러 데려간 거 같다던데...
흥미진진 듣던 상준과 영미
영미 일부러요? 어머 웬일이래?
상준 언제 도둑이 들었대요?
여자1 나가서 잠깐 점심 먹고 온 새 그랬대요. (천장에 CCTV를 설치했다 떼어 버린 빈 구멍 보이며) 것도 아주 자기 집처럼 버젓이 현관으로 들고 날고 했다지 뭐예요.
영미 어머어머어머~
여자2 누가 아주 작정하고 노리고 있었던 거 아냐?
여자3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여자2 안 그럼 어떻게 그 잠깐 사이에, 감쪽같이 일을 쳤겠어요?
여자4 그러게... 누구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샀나...?
여자3 어우 왜 그래요, 무섭게...
내심 찔려 서로 보는 영미와 상준.
상준 (낮춰) 편지 줬어?
영미 어~어 그게....
35. 영미네 주방
그 사이 세 장이 된 파란편지가 식탁에 놓여있다.
편지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상준과 영미
영미 (난감해 편지 보고)
상준 (역시 난감한)
영미 어떡하지 여보?
상준 그러게 재깍재깍 갖다 줘버리지, 무슨 보물단지라고 꿍치고 앉아있냐? 하여튼 니 돌박 알아줘야 돼.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이게 뭐야?
영미 그러는 당신은? 출근할 때마다 갖다노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번번이 잊어버려 놓고...
상준 내가 그런 거까지 해야 되냐?
영미 어우 몰라. 이제 어떡할 거야? 경찰까지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데, 이제 와서 우리 집에 잘못 왔더라고 해봤자, 괜히 우리가 오해받을 수도 있잖아.
상준 아~ 경찰. 우리가 이걸 꿍치고 있었다는 걸 걔들이 아는 순간, 우린 기냥 이상한 인간이 되는 거지. 내가 그동안 걔들 좀 겪어봐서 알잖아.
영미 자랑이다. 그러니까 어떡할 거냐구?
상준 할 수 없다. 이건 어차피 우리가 뜯어봤으니까 주기도 그렇고, 얘네들이 문젠데... 택 일! 버린다. 몰래 갖다 놓는다.
영미 버려? 그건 좀 그렇다, 남의 편진데... 그리고 혹시 범인 잡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그러지 말고, 당신이 이따 밤에 몰래 갖다 놔.
상준 내가 왜? 당신이 갖다 놔.
영미 싫어~어. 그러다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어떡해? 나 간 작은 거 알잖아.
상준 난 뭐 간댕이가 부었냐? 니가 해.
영미 으유~ 이런 때 좀 남자가 나서고 그래야지, 어떻게 마누라 뒤로 숨냐? 갖다 놔.
상준 그래 나 비겁해. 니가 하셔요.
영미 당신이 해.
상준 니가 해.
영미 당신이 해~에.
36. 동 주방(밤)
주전자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편지의 접합 부분을 수증기에 쏘이는 상준.
영미 영화에서 보긴 봤지만, 이러면 정말 뜯어본 티 안 나?
상준 그렇다니까. 내가 소싯적에 우리 누나 연애편지도 이렇게 다 뜯어봤지만, 한번도 안 걸렸다는 거 아냐.
영미 암튼 안 해본 짓이 없어요.
상준 그게 뭐 나쁜 짓이냐? 그냥 재미로 그런 건데...
영미 그럼~. 살짝 뜯어보고 갖다 놀 건데 뭐 어때. 뭐라고 써있을까? 어우 궁금해~
37. 다시 영미네 주방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는 상준.
식탁에 마주앉은 영미, 호기심에 차 기다리는데
상준 (대충 눈으로 훑어보고, 휘파람) 휘유~ 살벌한데.
영미 어우 뭐야. 얼른 읽어봐.
상준 (헛기침으로 목 가다듬고, 자못 협박조로 읽는) 내 경고를 듣지 못했나보군? 아니면 무시한 건가?
이하, 변조된 남자의 목소리로 바뀌며
-어둠 속에서 컴퓨터로 협박장을 타이핑하는 남자의 실루엣.
-어느새 나란히 붙어 앉아 편지를 보는 영미와 상준.
-컴퓨터 모니터에 타이핑 되는 협박장.
-흥미진진 다음 편지로 넘겨보는 영미와 상준
-편지 인서트
등 흐르는 위로
남자 (E) 애석하게도 네 소중한 강아지가 날 아주 잘 따르더군. 너에게 이제 안전한 곳은 없어. 비록 너의 집이라 할지라도. 그러니 입 닥치고 조용히 사는 게 좋을 거야. //
조용히 살라고 말했을 텐데 왜 내 말을 듣지 않지? 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피해만 주는 암 같은 존재야. 사실 니 사랑이란 것도 남한테서 빼앗은 거잖아? 그 잘난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남들에게 피해주지 마.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38. 영미네 안방
침대에 누운 영미와 상준, 제각각 골똘하다가
영미 (손가락 튕기며) 알았다! 니가 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안다. 강아지였지? 입 닥치고 조용히 살아라. 홈씨어터 부셔놨지. 남한테 피해주지 마라,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집 밖에 있는 게 뭐겠어?
상준 뭔데?
영미 차 밖에 더 있어. 이번엔 차야 차.
상준 차?
영미 그렇다니까. 그리고 니 사랑이란 것도 남한테 뺏은 거잖아, 그 얘기는 16층 남자가 지금 딴 여자랑 바람을 피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여자랑 바람이 나서 마누라랑 헤어진 거야. 어쩜 아직 이혼은 못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저번에 당신이 들은 전화는 와이프 전화였던 거지.
상준 으음... (끄덕이다) 머리 좀 돌아가는데.
영미 근데 누구 찰까? 저번에 보니까 여자도 쪼만한 거 하나 몰고다니던데.
상준 기왕에 부술 거면 비싼 걸 부셔야지.
일방통행로에서 부딪쳤던 민규의 차 스치고
상준 (흥미로운 듯 골똘한데)
영미 몇 시야? 자기 전에 편지 갖다놔야지.
상준 (일어나며) 내가 갔다 올게.
영미 웬일? 아깐 그렇게 싫다더니...
상준 머리 굴리느라 애 썼는데 몸은 내가 쓸게. (나가고)
영미 (혼잣말로) 차가 분명해, 차가....
지선 (E) 너 남 일이라고 너무 재밌어하는 거 같다.
39. 야외 카페(다른 날 낮)
테이블에 마주앉은 영미와 지선, 차 마시며
영미 재밌어하긴... 그냥 그렇단 얘기지.
지선 그러셔?
영미 솔직히 너두 재밌지 않니? 내가 편지를 안 줬더니, 거기서 경고한 일이 그대로 현실로 일어난 거잖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여자의 행?불행이 내 손에 달려있었던 거지.
지선 일부러 그랬으면 정상 아니지. 너두 참... 그나저나 그 편진 왜 자꾸 니네 집으로 온대? 잘못 꽂히는 것도 한두 번이지, 번번이 니네로 오는 게 난 더 신기하다.
영미 그러게? ....(골똘해지고)
지선 또 추리력 발동한다. 아주 재미 붙였어, 얘가. 그나저나 오늘 왜 이 먼데까지 오자 그랬어?
영미 어 참 너 가습기 필요하다 그랬지? 오늘 여기 무진장 큰 가전매장 오픈 한다니까 여기서 사자구.
지선 겨우 그거 사러 여기 오자 그랬단 말야?
영미 글쎄 오픈 기념으로 10만 원 이상 구매고객한데 발리 경품권 준대. 선착순 딱 천 명한테만. 난 뭐 사지? 전기 프라이팬 살까? 니 경품권도 나한테 밀어줘야 돼.
지선 너 아주 발리에 한이 맺혔구나, 맺혔어.
영미 너라면 안 맺히게 생겼냐? 대신 커피 값은 내가 낼게. (계산서 들고 가고)
지선 (어이없지만 일어나 따르고)
40. 영미네 엘리베이터 안
유치원에서 막 돌아온 차림의 보라,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이고
나란히 선 채 속수무책 앞만 보던 창희.
창희 (엄하게) 뚝!
보라 (놀라 울음 참고)
창희 (주머니를 뒤져보지만 마땅히 줄 게 없다. 아쉬운 김에 휴대용 약병을 열어 손바닥에 약을 덜어 내민다) 아저씬 징징거리는 소리 싫어하니까 울지 말고 이거 먹어.
보라 (싫다는 듯 고개 젖고)
창희 왜,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먹지 말라든?
보라 (끄덕이고)
창희 아저씨 몰라? 그럼 아저씨랑 놀아도 안 되겠네? 엄마 올 때까지 혼자 기다릴 거야?
보라 (울음 머금은 소리로) 아저씨 알아요....
창희 또~! 자꾸 울면 아저씨 안 놀아준다. 이거 먹고 얼른 뚝 그쳐.
보라 (울음 삼키며) 약 싫어요...
창희 쓴 거 아냐. 몸에도 좋다니까 먹어 봐.
보라 (싫지만 한 알을 집는다)
창희 (자신도 몇 알 입에 넣고, 남은 걸 약병에 도로 넣으며) 나도 너처럼, 무서우면 무작정 울어댈 때가 있었는데...
보라 (그제야 입에 넣는다)
창희 그럼 엄마가 와서 얼러주고 아버지가 목마도 태워주고... 어른이 되면 아무리 울어도 아무도 안 와... 오히려 다 떠나...
보라 (맛있는지 오물거리고)
41. 동 아파트 공동현관 안
아이들 서넛이 편지함의 편지들을 뒤섞어 꽂으며 장난을 치고 있다.
보라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창희.
창희 (호통으로) 이놈들!
아이들 (놀라 들고 있던 편지를 떨군 채 후다닥 도망가고)
창희 어디 편지를 갖고 장난을 쳐?! 집에서 그러라고 가르치든?! 못된 놈들 같으니... (편지함으로 가서 떨어진 편지들을 주우며) 애나 어른이나 요즘 것들은 어떻게 저 재밌고, 저 편하면 그만야? 도대체가 공중도덕을 몰라, 공중도덕을...(하다 보면)
보라가 무서운지 뒤쳐진 채 서 있다.
창희, 돋보기를 꺼내 쓰고 주소 찾아 편지들을 바로 꽂으며
창희 넌 커도 저런 애들처럼 편지 갖고 장난치면 안돼. 아주 못된 짓이야.
보라 ...
창희 이게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아도 이 중엔 중요한 편지도 있어. 편지가 잘못 가기라도 해서 못 받게 되면, 학수고대 목을 빼고 기다리던 사람은 얼마나 실망하는지 아니?
보라 (끄덕이며 주춤주춤 다가오고)
창희 어떤 사람은 중요한 편지를 못 받아서 아주 큰 손해를 보기도 해.
보라 (떨어져 있던 편지를 주워 내민다)
창희 ... (받아서 꽂으며) 아저씨도 10년이나 보험을 붰는데 중간에 해지가 돼서, 지금 이렇게 아픈데도 땡전 한 잎 혜택을 못 받았어. 보험료가 석 달이나 연체가 돼서, 보험회사에서 계속 연체통지서 보냈다는데, 난 한 통도 못 받았던 거야. 내가 왜 그 통지서를 못 받았는지 아니?
보라 엄마~ (뛰어나가고)
창희 (보면)
전기프라이팬 박스를 든 영미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인다.
밖으로 뛰어나간 보라가 그 품으로 뛰어들고
창희 그저 쇼핑이나 하고 사다 쟁일 줄이나 알지, 애 오는 시간 하나 제대로 못 챙기고... (끙 다시 제 할 일 하고)
보라와 들어오는 영미.
영미 안녕하세요? 어디 좀 갔다 오는데 차가 막혀갖고... 보라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창희 챙긴 거 없어요. 집 앞에서 하도 시끄럽게 울어대길레 데리고 내려 온 거뿐이지.
영미 암튼 감사합니다. (가려다) 그런데 지금 뭐하세요?
보라 오빠들이 편지 막 장난쳤어. 그래서 아저씨가 다시 하는 거야.
영미 어어.... (혼잣말로) 그래서 자꾸 잘못 오나?
창희 (제 할 일만 하고)
영미 수고하세요. (가려다 다시) 아 참, 요즘 사모님이 통 안 보이시네요. 몇 달 째 반상회도 안 나오시고.... 어디 가셨어요?
창희 (남 얘기하듯) 사업하다 망하고 났더니 애들 데리고 도망가 버려서 나도 어딨는지 몰라요.
영미 (까르르 웃고) 농담도 잘하셔. 사업 크게 하신단 얘긴 들었어요. (생각난 듯) 정말, 아드님 조기유학 보낸다 그러더니, 거기 같이 가셨나보구나.
창희 (자조로 실소하고)
영미 그럼 요즘 혼자 계세요? 식사며 살림은 어떻게 해요? 힘드시겠다.
창희 힘들 거 없어요. 밥은 안 먹으면 그만이고, 살림은 다 팔아버려서 치울 것도 없으니까. (나가고)
영미 (어이없다) 어떻게 한번도 순하게 말하는 법이 없어. 무서워서 어디...
보라 난 이제 안 무서운데.
영미 그래? (엘리베이터로 가며) 너한테 잘해주시든? ...
42. 영미네 주방 (저녁)
찌게 간 보는 영미.
흡족한 듯 불 줄이고, 작은 냄비에 찌게를 덜어 담는다.
43. 창희네 현관 앞
찌게냄비에 밥도 한 공기 퍼서 쟁반에 담아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영미, 1703호 현관벨을 누른다.
영미 (기다리다) ...? 어디 가셨나? ... (다시 벨 누르고, 문고리 돌려보고)
44. 동 현관 안
현관벨 이어지며
영미 (조심스럽게 문 열며) 실례합니다. 안 계세요?
그러나 기척 없고,
난감한 듯 찌게냄비를 보다 들어오는 영미.
그 바람에 현관등 켜지며 보이는 실내.
말 그대로 가구고 뭐고 하나도 없이, 신문이며 잡동사니만 굴러다니는 어두운 집안이 을씨년스럽다.
영미 어머? 정말 아무것도 없네... 그냥 한 말이 아니었구나... (강아지사료 봉투를 발견하고) 언제 강아지도 키웠나? ...
하는데 현관등 꺼지고,
서둘러 신발장 위에 쟁반 째 내려놓는 영미, 쟁반 밑에 무언가 걸려 꺼내는데 다시 현관등이 들어온다.
CCTV카메라 설치법을 설명한 책자다.
무심히 한쪽으로 치워놓고 나가고
45. 은주네 안방
샤워하고 들어오는 민규.
민규 뭐 찾아?
은주 (서랍마다 열어놓고 무언가를 찾으며) 엄마한테 받은 시계요. (문득) 은영이 줬나? (다시 찾으며) 경찰에서 없어진 거 뭐 있냐고 그러는데, 뭐가 없어졌는지,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어... 당신이 첨 사줬던 목걸이도 안 보이고...
민규 어디 있겠지. 그리고 그거 같이 여행 갔다 기념으로 산거지, 비싼 것도 아니잖아.
은주 (계속 찾으며) 나한텐 소중한 거란 말야.... 참, 당신 차 스페어 키, 나줬었죠? (울상으로) 그건 또 어디 갔지?
민규 (마주 앉으며 달래듯) 은주야, 이러지 마. 그냥 도둑을 맞은 거뿐이야. 안 좋은 일도 좋은 일도 쌍으로 온다잖아. 샤비 일도 이번 일도 그런 거뿐이야.
은주 맞아요. 그럴 거야...
민규 (안아서 달래듯 다독이고)
은주 (안긴 채) 그치만 무서워. 무서워 죽겠어...
46. 민규 차 안(밤)
알맞게 찌그러뜨린 캔에 본드를 짜 바른 뒤, 브레이크 밑에 붙이는 손 인서트
47. 동 아파트 공동현관 앞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으로 나오는 영미.
영미 (툴툴) 대리운전을 해서 돈을 벌어 와도 이뻐할까 말깐데... 들어오기만 해봐... (좌우를 둘러보는데)
저만치 어둠 속에 주차한 (민규의) 승용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창희.
영미 17층 아저씨 아닌가? (다가가다 알아보고) 늦으셨네요?
창희 (추춤하고)
영미 이렇게 오래 비우시면서 왜 문을 안 잠그고 다니세요? 아무리 집에 아무것도 없어도 조심해야지, 얼만 전에 16층 도둑맞았잖아요.
창희 ?
영미 오늘 해물찌게가 맛있게 끓여졌길래 아까 잠깐 올라갔더니 안 계시더라구요. 밥 한공기랑 같이 현관에 뒀으니까 드세요.
창희 내일도 끓여올 건가요?
영미 네?
창희 아니면 앞으론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 (가버린다)
영미 (기막혀 말도 안 나오고)
48. 아파트 단지 주차장 (다음 날 아침)
햇살 화창한 아침 전경이 평화롭다.
시동을 걸며 현관 쪽에서 걸어오는 민규, 차에 타 안전벨트 맨 뒤 올려다보면 은주가 베란다에서 손을 들어 보인다. (보일려나?)
기분 좋게 출발하는 민규.
저만치 후진으로 차를 빼고 있는 다른 차를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다, 순간 당황한다.
영문도 모른 채 거푸 브레이크를 밟아보지만 밟히지 않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후진하던 차가 코앞에 있다.
쓰레기통 쪽으로 다급히 핸들을 꺽는 데서
49. 영미네 주방~거실
E (아파트를 울리는 요란한 충돌음)
영미 (상 치우던) 무슨 소리지?
베란다로 쪼르르 가보는 영미, 밑의 광경을 확인하고
영미 (돌아보며 호들갑스레) 여보여보여보~
50. 다시 아파트 현관 앞 주차장
쓰레기통을 박고 선 민규 차.
에어백 속에 묻혀 있던 민규, 놀라 달려온 경비들의 도움을 받으며 차에서 나온다.
혼비백산 뛰어나온 은주.
은주 민규씨~ ! (뛰어와) 괜찮아요? 다친 데 없어?
민규 (목 돌려보며) 어 괜찮아. 괜찮은 거 같애. (경비들에게) 감사합니다. 놀래셨죠? 죄송해요.
은주 (맥이 풀려 주저앉는)
민규 은주야. (잡아 안고) 저쪽으로 가서 좀 앉자. (부축해 가고)
하나 둘 모여든 구경꾼들 속에서 지켜보던 상준(출근차림)과 영미.
영미 (낮춰) 어때? 내 말이 맞지? 다음엔 차라고 했잖아. 그것도 남자 차.
상준 (내심 고소해하며) 그러게.
영미 근데 이상하다. 편지를 봤으면 조심 좀 하지, 저렇게 싱겁게 (하다) 당신 표정이 왜 그래?
상준 (당황해 웃음 감추며) 응? 내 표정이 뭘?
영미 (곰곰이 보며) 당신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상준 숨기긴 내가 뭘? (시계 보며 얼렁뚱땅) 늦겠다. 갔다 올게. (가려는데)
영미 (팔을 뻗어 딱 막고, 부러 크게) 당신 편지 갖다 논 거 확실해?
상준 (주위 의식하고 쩔쩔매며) 야, 너, 미쳤어.
영미 (씩~웃고) 똑바로 이실직고 하시지.
51. 동 일각
상준의 차 안에 나란히 앉은 상준과 영미
영미 기도 안 막혀, 진짜. 일방에서 밀린 게 뭐가 그렇게 꼴릴 일이라고... 그러다 사람이라도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상준 안 다쳤잖아. 그럼 됐지. 야 그리고 저런 찬, 시속 100킬로로 달리다 사고 나도 안 다치고 멀쩡하대.
영미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말고, 그렇게 부러우면 당신도 출세해. 괜히 그딴 곤조 부리다 사고 좀 치지 말고. 내가 불안해서 정말... (내리고)
상준 (차안에서) 대신 야, 내 덕분에 니 말이 맞다는 게 확실히 증명됐잖아.
영미 고마워서 눈물 나.
상준 암튼 내 마누라 똑똑해. (짐짓 은근한 투로) 일찍 올게. 기다려. (차 빼서 가고)
영미 (좋아서 삐쭉삐쭉 웃다 보면)
쓰레기통에 코를 박고 있는 차를 빼고 있는 민규가 보인다.
영미 (자못 흥미롭게) 다음엔 무슨 일이 생길까...?
52. 아파트 공동현관 안 (다른 날 낮)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영미, 기웃이 편지함 쪽을 보면
시간 맞춰 내려온 듯 마침 우체부가 편지를 꽂고 있다.
우체부, 일을 마치고 나가면
편지함으로 오는 영미, 기대에 차 자신의 우편물을 꺼내 확인해보지만 파란편지는 보이지 않는다.
영미 (실망스레) 올 때가 됐는데... (경계하듯 주위 살피며 다른 집 편지함에 꽂힌 우편물들도 뒤져본다. 그러나 역시 없고) ... 윗 층 여자가 벌써 받았나? ... (불현듯 1603호에 꽂혀있는 우편물 중 하나를 슬쩍한다)
53. 은주네 현관 앞~ 계단
슬쩍한 1603호의 우편물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영미, 막 계단참을 돌아서는데
벌컥 문을 열며 나오는 서윤모의 기세가 등등하다.
뒤?아 나오는 은주.
은주 잠깐만요, 제 얘기 좀 (하며 잡는데)
서윤모 (그대로 따귀를 갈긴다)
영미, 흠칫 놀라 보는 가운데
서윤모 이제 두 번 다시 너한테 사정하러 오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알아둬. 나 이혼 절대 안 해. 꿈도 꾸지 마. (엘리베이터 누르고)
은주 (차분히) 그럴수록 고통을 당하는 건 그 사람과 당신이지, 내가 아녜요. 난 이대로도 만족할 수 있어요.
서윤모 (실소로 엘리베이터에 타고) 그래, 언제까지 만족하고 버티나 보자구.
은주 당신말대로 내가 떠나면, 그가 당신한테 돌아갈까요? 아닐걸요.
순간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서윤모의 얼굴이 닫히는 문 뒤로 사라진다.
눈물을 삼키며 발길을 돌리던 은주, 영미를 발견하고 뜨악하다.
영미 (당황해 편지 내밀며) 아니 저 난, 이게 우리 집에 잘못 왔길래...
은주 ... (말없이 편지 받아 들어가려는데)
영미 저기요. 지난 번 차사고, 원인이 뭐래요?
54. 헬스클럽 (다른 날 낮)
땀으로 젖은 지선과 영미, 생수대로 걸어와 물 마시며
지선 너두 참... 아니 그 와중에 그걸 물어봤단 말야?
영미 궁금하잖니. 아 근데 그 얌체 같은 게 끝내 말을 안 하는 거 있지.
지선 (놀리듯) 어떡하니, 궁금해서?
영미 그런다고 못 알아낼 내가 아니지. 경비아저씨가 그러는데 전에 그 집 도둑맞았었잖아. 알고 보니까 그 집 엘리베이터 앞에 천장 있잖니. 거기다 누가 몰카 설치했다 없앤 구멍이 있었댄다, 글쎄. 그걸로 현관키 번호를 알아내서 감쪽같이 들어왔었던 거래.
지선 어머 우리도 번호킨데, 무섭다 얘.
영미 그치? 그리고 이번 차 사고는 어떻게 된 거냐면....
55. 아파트 현관 앞 주차장
기분도 가볍게 걸어가던 영미, 보면
막 주차한 지프에서 내리는 창희, 아픈 듯 배를 감싸 쥐고 진땀을 흘리며 걸어온다.
영미 오늘 낼 오늘 낼 한다더니 그 말도 진짠가...? (현관으로 가며)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를 말아야지... (하다, 돌아보고) 차 바꿨나? 저번엔 승용차에서 나오더니...? 맥없이 또 험한 소리 들을라... (피하듯 서둘러 현관으로 들어가고)
56. 동 현관 안
영미네 편지함에 파란편지가 꽂혀있다.
순간 얼굴이 환해지는 영미, 주위 살피며 얼른 챙기고
57. 영미네 주방~거실
아직도 잔 김이 올라오고 있는 주전자를 뒤로 한 채, 편지를 읽으며 소파로 가는 영미 위로
남자 (E) 내가 누군지 궁금하겠지? 니가 조금만 양심을 갖고 생각한다면 금방 알 수도 있을 텐데 참 애석한 일이야. 남을 불행에 빠뜨려놓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다니. (편지 계속되며)
편지에 몰두한 채 소파에 앉는 영미, 엉덩이 밑에 깔린 리모컨이 작동하며 TV가 켜지지만 옆으로 비켜 앉을 뿐, 상관없이 편지 읽는 위로
남자 (E) 어쨌든 이제 그만 끝내야 할 때가 됐어. 이유는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다 니 덕분이지. 어쨌든 마지막 선물을 준비했는데, 아마 마음에 들 거야.
영미 마지막 선물? 뭐지? ... (골똘한데)
아나운서 (E/ 발리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멘트 나오고)
영미 발리? (귀가 번쩍해 TV보면)
때마침 TV에서 발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하고 있다.
영미 (아쉬움에) 우리가 갈려던 데가 바로 저긴데... (편지를 잊은 채 소리 키우며 몰두해 보고)
58. 은주네 안방
들뜬 기분으로 서둘러 외출준비를 하는 은주.
이 옷 저 옷 꺼내보고, 목걸이도 이 것 저 것 대보고, 귀걸이를 하다 급한 마음에 한쪽은 주머니에 넣으며 나간다.
방문 열리며 다시 들어오는 은주, 차키 챙겨 나가고
59. 동 은주네 현관 앞
위에서 누군가 지켜보듯 계단 사이로 보이는-
현관문 열며 나오는 은주, 재촉하듯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대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고
60. 도로
서둘러 달려오는 은주의 차 위로
민규 (E) 서윤엄마가 이혼 해준대. 벌써 서류 정리 다 끝났고 구청에 접수만 하면 돼. 나와, 저녁 먹으면서 축하하자.
운전하는 은주
은주 (기쁨에 겨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잘 살게요. 잘 살 거야.
E (휴대폰 벨)
은주 (들떠서 번호 확인 안하고) 민규씨? 나 지금 가고 있는데, 어디야?
창희 (E) 어딜 그렇게 급히 가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봐?
은주 누구세요?
창희 (E) 내가 누굴까? 아직도 그걸 모르다니... 편지를 한 통도 받지 못했나보군. 강아질 데려갈 때도, 너희 집에 갈 때도, 니 남자 차에 약간의 장난을 칠 때도, 난 매번 미리 경고를 했었는데 말야.
은주 누...누구세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죠?
창희 (E) 사람들은 참 편리해. 자기가 다른 사람한테 한 짓은 쉽게 잊어먹거든.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니가 한 짓을 잘 생각해봐.
은주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이러세요? 샤빈... 우리 샤비는 어딨죠?
창희 (E) 샤비가 보고 싶겠지? 차 트렁크를 열어봐. (끊고)
은주 여보세요? 여보세요?
갓길로 차-끽 서고
61. 아파트 근처 공중전화 부스
막 전화를 끊은 그 포즈 그대로 잠잠히 서있는 창희의 뒷모습.
잠시 후 건조한 얼굴로 부스에서 나오는 창희, 평소대로 바닥에 떨어져있는 꽁초며 쓰레기를 주우며 가고
62. 다시 도로
황망히 차에서 내리는 은주, 서둘러 트렁크를 열면
죽어있는 샤비의 하얀 털에 빨간 핏자국이 선연하다.
순간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는 은주.
충격에 빠져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 악- 비명을 지른다.
그 비명소리 경적소리와 겹치며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달려오는 택시에 치여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은주,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급히 사고 택시에서 뛰어나온 택시기사,
기사 봤어요? 봤어요? 저 여자가 차도로 뛰어드는 거 보셨죠? 저 여자가 여기까지 나왔어요, 여기. 보셨죠? 보셨죠?
‘다친 사람부터 어떻게 해야죠?’ 누군가 소리치지만
신음하는 은주는 뒷전인 채, 당황한 택시기사 목격자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에 정차한 차들 사이를 뛰어다니고...
63. 아파트 현관 앞 (다른 날 낮)
서행해 들어온 장의차가 은주가 살던 동 앞에서 멈춰 선다.
은주의 영정을 들고 내리는 민규, 말없이 흐느끼고
하나 둘 모여든 구경꾼들 속의 영미
영미 어머, 저 여자 죽었네? 세상에... (어리둥절 놀라운데)
역시 구경꾼들 속에 선 창희가 차가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영미 (의아히) ?
순간 스치는
- 민규의 차에서 내리던 창희
- 창희의 집안에서 본 강아지 사료
- 은주네 현관 천장에 난 구멍
- CCTV 설치법 책자
- 묵묵히 편지를 정리하던 창희의 모습(#42)들 흐르고
영미 (보며) 설마....
창희 (시선 느끼고, 차가운 미소로 보는)
영미 (당황해 시선 피하는데)
E (휴대폰 벨)
영미 (주위 눈치 보여 얼른 열고, 걸어가며) 여보세요? / 네 전데요... (가면서도 창희 신경 쓰여 돌아보며) 수기요? (하다) 아 예, 보냈었어요. / (순간 반색으로) 예에? 정말요. 어머! 그럼 저 발리 여행 그거... /어머나! 네, 네 그럴께요. 감사합니다. (전화 끊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영미, 전화 걸고
영미 여보 난데~
신나서 소식을 전하는 영미 뒤로
다시 민규를 싣고 떠나는 장의차, 점점 멀어지고
64. 창희네 거실(밤)
물잔 속에 흰 가루약이 녹아내린다.
물끄러미 그것을 지켜보던 창희, 담담히 물잔을 집어 들어 마시려는데
E (전화벨)
창희 (한손에는 물잔을 든 채, 수화기 들고) 여보세요. (묵묵히 듣다가) 췌장암 말기라는데 그래도 보험이 될까? / 농담... 사람들은 참 이상하지. 왜 남의 얘길 곧이곧대로 안 듣는지 모르겠어. (마시고/ 이하 적당히 마시면서) 뭐 보험이라면 나도 10년 동안 부은 게 있지. 중간에 연첼 해서 해지되긴 했지만... / 아 당신들을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쪽에선 꼬박꼬박 연체통지서를 보냈다더군. 하지만 난 한 통도 받질 못했어. 아래층으로 잘못 갔던 모양인데... 보험이 해지된 뒤에야 아래층 여자가 들고 온 거야. / 그러게 그러면 안 되지. 하지만 그 여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않더군. 그게 왜 자기 탓이냐고, 억울하면 고소를 하라나 어쩌라나... (잔 비우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마시려다 빈잔 확인하고, 소리 없이 웃는)
65. 백화점 일각(다른 날 낮)
들떠서 쇼핑하는 영미와 상준
비키니 수영복도 몸에 대보고, 선글라스도 이 것 저 것 껴보고, 비치용 모자도 써보며 벌써부터 기분을 내고
66. 아파트 공동현관
편지함에서 우편물을 챙기던 영미, 파란편지를 발견하고
영미 이거 또 왔네?
상준 (E) 뭐해? 엘리베이터 왔어.
영미 귀찮게 자꾸... (성가신 듯 위층에 꽂고, 바닥에 뒀던 쇼핑봉투를 챙겨가고)
67. 영미네 거실
상준, 트렁크를 닫느라 끙끙대는데
영미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나오며) 여보여보 이것도.
상준 이민 가냐? 지금도 가방 안 닫혀.
영미 뭐가 안 닫혀. 비켜봐. (들고 나온 물건을 우겨넣고, 트렁크 위에 올라 앉으며) 빨리 잠궈.
상준 (잠그며) 역시 아줌마 엉덩이 힘은 대단해. (엉덩이를 툭툭 치고)
영미 (따라 툭툭 치며) 이 엉덩이도 쓸만해.
상준 어쭈~ (잡으려는데)
영미 (도망치고)
서로 쫓고 쫓기며 꼬리잡기를 하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높다.
보라도 뛰어나와 덩달아 끼어들고
68. 은주네 거실
그 웃음소리 이어지며
분노에 차 파란편지를 읽던 민규, 편지를 구겨 쥐며 위층을 노려보고
69. 창희네 현관 앞
편지를 구겨 쥔 채 계단을 뛰어올라 오던 민규, 주춤 보면
구조대원들이 창희를 들것에 싣고 나온다.
그 얼굴에 이미 흰 천이 씌워져 있다.
들것에 실려 계단을 내려가는 창희 위로
창희 (E) 날 죽이고 싶겠지? 하지만 난 그땐 이미 난 이 세상에 없을 거야. 날 용서하란 말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잊지 마. 난 당신 여자가 나한테 했던 그대로 갚아 준 것뿐이야. 늘 편지로 미리 경고했지만 당신들은 한번도 받지 못했지.
분노에 차 지켜보던 민규, 싸늘한 얼굴이 되고
70. 아파트 공동현관 (다른 날 낮)
1403호 편지함에 협박장(이번엔 검은 편지?) 이 꽂혀있다.
그 너머로, 갓난아이를 들쳐 업고 사내아이 손잡고, 한 손엔 휴대폰 들고 통화하며 들어오는 여자.
여자 정말 미치겠네. 아니 어머님은 무슨 돈을 자꾸 보내라는 거예요? / 아니 그 연세면 다 아프지, 병원 가봤자 뾰족한 수도 없는데... (1403호 우편함에서 편지 꺼내 가며) 그 쓸데없이 뭔지도 모르는 건강식품 좀 사쟁이지 말라 그러세요. 돈이 뭐 그냥 땅 파면 나온대요? 누군 안 아파서 병원 갈 줄 모르나.... 자기 아들 뼈골 빠지는 것도 모르고...
통화하며 엘리베이터로 멀어지는 여자.
업은 아이를 받친 그 손에 들린 협박장이 흔들리며 멀어지는 데서-<끝>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