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목 정 성지
진목정은 단석산 줄기인 도매산 중턱에 있는 해발 350m 정도 고지대에 위치한 깊은 산골짜기이다. 예부터 참나무가 많았을 뿐 아니라 참나무 정자가 있어서 진목정(眞木亭)이라고 칭했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단석산 동편 정상에 넓은 분지가 있는데 이곳은 옛날 신라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했던 도장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그곳에 OK목장이 있다.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옛날 사기굴의 가마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였다고도 한다.
한편 부근의 탑골과 상선필에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으므로 이곳에도 일찍이 박해 시대 때 신자들이 피난와서 살았던 것 같다. 그 후 1815년 을해박해와 1837년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부들이 입국하여 포교 활동을 할 때 언양, 구룡과 이곳에 와서 성사를 주었다고 전한다.
1850년 경 부터는 최양업 신부가 상선필과 이곳 등 부근의 지방을 순회전교 했으며, 이어서 다블뤼 주교와 리델 신부도 병인박해 이전에 상선필과 이 부근의 지방을 순회 전교한 것 같다. 병인박해 때는 부근의 단석산 중의 범굴에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등 3인의 순교자가 체포되어 순교했다.
병인박해 후에는 1879년부터 1880년 사이에 두 세 신부가 상선필과 함께 부근 공소에서 성사를 주었다. 1882년 말부터 강원도 부흥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에 머무르면서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기 시작한 로베르 신부가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그 후 1890년부터 대구본당에서 분리하여 부산본당이 설립됨에 따라 초대 조죠. 신부 및 우도 신부 등 역대 부산본당 신부들이 이 공소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그러나 1895년부터 다시 이 공소는 대구본당 관할 공소가 되어 로베르 신부가 다시 이 공소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신자들은 1866년 병인박해 후에 이사 온 신자들이다. 병인박해 중에 이곳에 살았던 신자는 1893년 뮈텔 주교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할 때 이 공소의 회장이었던 박요한 가정과 박 씨 문중인 것 같으며 그의 형제 중에는 1892년에 울릉도로 이주한 사람이 있었다.
1898년경에 김문학 알로시오 가정이 병인박해 때 경주 양남에서 우중골과 소태골로 피난을 다니다가 박해가 완전히 끝날 무렵인 1898년경에 이곳에 정착해 산 후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열심히 살고 있다. 또한 그 무렵 순교자 김종륜의 가까운 집안 후손인 김종운이 충청도에서 피난오던 중에 포졸들에게 잡혀 순교한 후에 그의 부인이 이곳에 와서 살았다. 그러므로 그때 울산 동천 강둑에 묻어두었던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등 3인의 순교자 시신을 이 공소 뒤편의 도매산 중턱에 와서 모셨다. 현재 이 분들의 유해는 대구 복자성당에 모셔져 있고, 진목정에는 가묘가 있다.
그 후 충청도 구룡공소에 살던 이임춘 신부의 부친 이상우 바오로 가정이 이곳으로 이사와 살았으며 경주 성건 본당 소속 공소로 8세대 24명의 신자가 살고 있다. 1999년 7월 11일부터 산내면 의곡리에 산내공소를 새로 지어서 진목정, 의곡, 와항, 범곡 등 4개 공소 신자들이 매 주일 합동으로 주일 첨례를 드리다가 2005년 건천 성당이 새로 생겨 산내공소는 그 소속이 되어 있다.
1. 순교 유적지 진목정.
경북 월성군 산내면 내일 2리에 위치한 진목정은 경주에서 월성군 건천읍을 거쳐 청도로 넘어가는 험한 산길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위치한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던 곳이다. 박해를 피해온 이들 순교자들,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김종륜(金宗倫, 루가)의 가족은 언양 대재[竹嶺]에서 만나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정착한 곳이 소래동 단수골 이었다.
2. 선참후계령에 의한 참수형을 받은 순교자들.
이들은 병인박해 때 언양의 가날 산중에 은신하여 나무그릇을 깎아 연명하던 중, 1868년 5월 木器를 판매하기 위해 경주에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경주아문(慶州衙門)에서 영장(營將)의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들 3인은 곤장으로 피와 살이 터져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그해 7월 경주 진영에서 병마절도사가 있는 울산까지 80리 길은 죽음의 행진이었다. 큰 칼을 목에 차고 돌과 자갈, 가시밭길을 걸어 이틀 만에 도착한 울산 동천 강변 장대 벌에서 천주교를 믿는 이들을 私學罪人이라 하여 前代未聞의 선참후계령(먼저 죽이고 후에 보고하는 명령)에 의해 1968년 8월 14일(음 7월 28일)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일성록’ 73권, 고종5년조에 기록되어있다)
3. 허 야고보의 부인 박조아
당시 감영으로 잡혀가는 남편을 뒷바라지 하러 따라갔던 허 야고보의 부인 박조아는, 치명터에서 가까운 동천강 둑 아래 세 사람의 시신을 묻을 구덩이를 발견하고, 순교자들의 머리는 치마폭에 싸서, 몸 전체는 한 사람씩 업어 날라 얼굴과 몸을 맞추어 가매장하였다. 이들을 장사지낸 조아 부인은 죽령 산중의 가족들을 데리고 대구로 옮겨왔는데, 해마다 장마철이면 강둑 아래의 순교자들이 잠든 묘를 찾아가 물이 불지 않았나, 마음 초조해 하였으나 다행히 잘 보존되어 왔었다.
4. 순교자 3인의 유해 안장(安葬)
그 후 시대가 달라져 교난이 그치고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조정에서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순교자들이 치명한지 19년(1868-1887)만에 일이었다. 순교자들의 가족들은 세명의 순교자 유해를 정식으로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서 모셔다가 안장하였다.
1932년 5월 29일 허인백 야고보의 손자 허명선 안드레아와 김종륜 루까의 손자 김병옥 요한에 의하여 대구 월배 감천리 천주교 묘소로 모셨던 것을 1974년 10월 19일 대구 복자성당(현재 신천동성당)으로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순교 유적지 보존
진목정은 오지인 데다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교회사적 의의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였으나.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대구 대교구가 순교유적지 개발계획을 마련하면서부터 진목정이 순교자 유적지로서 보존되어 오고 있다.
6. 진목정에 묻혔던 순교자 3위 약사
가. 허인백(야고보) - “나는 잡혀가니 천주 공경 잘하라” 울산 장대 벌에서 군문효수형 당해
김해에서 태어난 허 야고보는 본래 중류 계급으로 생활이 넉넉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무 것도 부러울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25세(1846년)에 입교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1866년 병인박해 초기 포졸들에게 붙잡힌 그는 재물에 어두운 그들에게 돈을 주고 간신히 풀려난다. 식솔을 데리고 길을 떠난 그는 언양(彦陽) 산골에 잠시 머물다 울산에 있는 한 교우촌으로 피난해 여기에서 이 베드로, 김 루가를 만나 순교의 길을 예비하게 된다. 그는 체포당시 가족을 모아놓고 “나는 포졸들에게 잡혀가니 너희들은 천주 공경을 잘하고 어머니를 잘 공경하여 사후에 천당에서 만나자”고한 뒤 사형장인 울산 장대벌에서 칼을 받을 때 그는 “머리는 날세게 베고 머리를 각각 분별할 수 있게 놓아두시오. 후에 부활할 육신이외다.”라고 말하고 십자성호를 긋고 참수를 당하였다고 한다.
나. 이양등(베드로) - 죽령리 공소회장하며 꿀 팔아 생활, 믿음 지키려 단석산 범굴로 피신.
이양등 베드로의 행적에 대해 구전에 의하면 대재(언양의 죽령) 마을의 공소회장이었던 이 베드로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박해를 피해 경상도로 내려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울산 대재 공소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꿀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가며 전교에 힘쓰던 그는 허야고보와 김루가를 만난 후 또다시 박해를 피해 안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었다. 여러 날 끝에 경주 산내면 산주의 소래동 단수골에 있는 석굴을 발견하고 이를 천혜의 피난처로 삼아 세 가족은 모두 이곳에서 피난살이를 하였다.
다. 김종륜(루가) - “죽음당해도 교리책 만들어” 십자성호 긋고 치명당해
김종륜 루가의 행적에 관한 구전에 의하면, 충청도 공주 태생인 김 루가는 어려서 입교해 신앙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었다. 박해로 충청도 일대가 소란해지자 길을 떠나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의 교우촌으로 피신했던 그는 다시금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소래동 산수골의 석굴(일명 단석산 범굴)로 들어가 신앙생활을 하였다. 체포되어 경주 감옥에서 모진 문초를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울산 장대벌에서 참수형을 받고 처형장에서 마지막 이슬로 사라지기 전 술 한잔을 받아 마시고,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3명중 첫 번째로 치명 당하였다. 그는 ‘사후묵상’이라는 교리책을 남기기도 했다.
7. 순교자들의 흘린 피,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집과 전답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경상도의 교우 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이다. 천주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해야만 했던 그 애환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또한 우리들의 믿음은 이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임을 기억해야 하며, 순교자 성월을 맞아 순교사적지를 순례하는 우리들에게 한없이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신앙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고향을 떠나 어린 자식과 힘없는 부녀자를 이끌고 수십 수백 리 길을 쫓겨 다닌 이들... 오히려 순교함으로써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되었다. 터덜거리던 현세의 고달픈 삶은 순교의 피를 뿌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