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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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귀환 1946년 8월 13일인가, 그 이튿날 나의 고조모 박씨 할머니의 제사가 드는 날이었으니.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열시가 좀 넘은 것 같다. “어메, 어메, 내가 왔소.”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부채를 들고 대낮의 여름더위로 치닫던 더위를 식히시느라고 안방에서 쉬고 계시던 할머니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비명 같은 소리를 울음과 함께 쏟아냈다. “아이고, 저 소리가 의환이 소리 아이가!” 나와 작은 아버지는 책 보느라고 엎드렸던 몸을 화들짝 재치고 일어났다. 할머니가 ‘아이고, 아이고’ 소리와 함께 나가시는 뒤를 따라 나갔다. 축담에 선 아버지를 보고 나는 눈물이 빙 돌아 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했다. 그러나 흐릿함 속에서도 보이는 얼굴모습은 분명히 아버지였다. 할머니는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나는 왼편에 작은아버지는 오른편에 매달려 껴안았다. “아버지!” “형님!” 아버지를 둘러싼 세 식구는 그저 반가움에 끌어안고 떨기만 했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흐르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거저 ‘어메, 어메’ 소리뿐이었다. 그 이상 무슨 말로 반가움을 나타내랴. 만남이라는 감격의 순간이 지나 정신을 수습하고 모두 서로 붙들고 마루 위에 올라왔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피골이 상접하다는 정도는 아니지만 얼굴이 유달리 길어 보였고 팔다리가 옛날처럼 튼실하지 못하고 가늘었다. 아마 남양이라는 곳이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야위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더운 곳에서 몇 년이나 살았다니 피부도 검을 터인데 오히려 보얗다. 아버지는 일제 말기에 조선 청년을 마구 징병으로 징용으로, 좀 나이가 든 남자들은 보국대로 끌어갈 때 징용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군 군속으로 들어갔다. 징용에 끌려가면 광산에서 노예노동을 하다가 죽거나 전선에서 토치카를 구축하는 중노동이나 하다가 죽을지도 몰라 때마침 일제 관료로 판임관 대우를 하며 일본군에 붙잡힌 연합군의 포로 감시 군속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로 지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산 서면에 있던 일본 병영에 들어가서 군사훈련을 받고 어느 날 가족에게 아무 소식도 전해지 못한 채 말레이시아 반도의 남쪽 끝에 붙어있는 싱가포르로 갔다. 싱가포르는 전쟁 전에 영국의 식민지였고 동양함대 사령부가 있었으며 군사적 요충지로서 수만의 군대가 집결되어 있어서 그 일대의 영국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지키고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진주만을 공격할 때 동시에 말레이시아 동쪽 해안에 상륙하여 그 반도의 남쪽 끝에 붙어있는 싱가포르로 향해 전격전을 전개하여 70여 일만에 점령했던 곳이다. 이때 영국군은 일본군에 무조건항복을 했는데 그때 붙잡힌 영국군의 수는 2만여 명이나 되었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거류하고 있던 영국 사람까지 합하면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은 약 3만 명이나 되었다고 했다. 교활한 일제는 연합군 포로의 감시원을 조선사람에게 떠넘겼다. 포로는 전쟁포로에 관한 스위스협정에 따라 대우해야 했다. 거기에는 포로를 명예로운 자로 취급해야 하고 포로수용소의 생활은 수용자의 자치에 맡기기로 되어 있고 인간적인 대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을 생각한 왜놈들은 아예 그 국제협정을 무시하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포로감시를 조선청년에게 맡겨 국제협정의 위반문제가 전후에 불거질 때 그 책임을 몽땅 조선청년에게 지울 요량으로 조선청년을 감시원으로 모집했던 것이다. 실제로 전후에 그 지역에서 전쟁포로에 대한 전쟁범죄자로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그 책임을 지고 전쟁법죄자 재판에 회부되어 중형을 받기도 했고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징용으로 끌려가는 절대절명의 지경을 면하려고 여기에 지원했다. 이는 군속으로 지원한 조선청년들의 공통된 정황이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쟁으로 하여금 불행한 처지에 놓인 연합국의 청년들과 동병상린의 심정으로 그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지나기를 작정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심정으로 연합군 포로들을 대하다가 왜놈들로부터 숱한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왜놈들로부터 당한 그러한 고난은 전후에 필연적으로 감시원에게 닥친 보복으로부터 면할 수 있었고 포로로 고통당한 연합국 청년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1942년 7월에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1945년 8월까지 당시 영국군 사령관 버시벌 중장과 그 참모장인 와일드 대령이 수용되어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 군속으로 근무했다. 전후 1년간은 전쟁범죄자 조사위원회의 영국군 책임자였던 와일드 대령의 부탁으로 이번에는 영국군 측 조사위원회에 통역관으로 근무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귀국이 그처럼 늦었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1942년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여름에 남양으로 가셔서 1946년 여름에 에 오셨으니 꼭 만 4년 만에 오셨다. 이야기를 다시 되돌려, 이윽고 할아버지가 기별을 받고 달려오셨다. 할아버지는 그때 부산감옥에서 석방되신지 한 달쯤 되었는데 당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갓 조직되어 밀양군지부의 의장단에서 수석의장을 맡고 계셔서 밀양군의 각 정당ㆍ사회단체들의 간부와 매일 회합하시느라고 매우 바쁘셨다. 그곳으로 다른 아재들이 달려가서 기별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들어서자 절하려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목매인 목소리로 ‘네가 전쟁이 끝났는데도 너무나 소식이 없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구나.’라고 하시면서, ‘어디보자, 얼굴이 왜 일 수척하노. 고생이 많았겠지.’ 하면서 붙든 몸을 놓는다. 아버지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고 할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버지는 방문 밖에서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의 모습은 몇 년 사이에 몰라보도록 변했다. 남양으로 떠나셨을 때 통통하던 볼도 홀쭉해졌고 마침 그때는 여름이라 짧은 소매 밖으로 나온 팔은 튼튼한 근육을 자랑하던 팔뚝이었던 팔이 볼품없이 가늘었고 눈이 유달리 크게 보였다. 입고 온 옷은 일본 군복이었고 구두도 편상화라는 일본군화였다. 커다란 키슬링 배낭을 메고 오셨는데 여러 가지 잡품이 들어 있는 듯 겉보기로 울퉁불퉁 했고 일본군대가 쓰던 수통과 반합이 겉에 매달려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한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군복을 입은 사람이 총이 없으면 영 볼품이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할머니는 자꾸 아들의 모습을 보고서는 치마말 끈 자락을 눈에 갖다 대며 우신다. 말씀은 안하셔도 여윈 모습을 보고 마음이 몹시 아프신 것 같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밀양읍내에 있는 할배, 할매, 아재들이 모여들었다. 연계소 그 넓은 대청에 가득 찼다. 모두 죽음에서 돌아온 큰집 조카를 반갑게 맞았다. 서로 끌어안고 울음 반 웃음 반으로 반가운 말들이 오고갔다. 좀 나중에 나의 끝에 종증조부인 ‘뒷집’할배가 오셨다. 나의 증조부는 3형제이신데 그중 맏이 바로 나의 큰할아버지이고 가까운 대소가 일가들은 모두 ‘큰집’할배라고 불렀고 좀 촌수가 뜬 일가들은 영산 고을의 도천이라는 동네로 장가를 가셨기에 댁호로 도천할배라고 불렀다. 나의 큰할아버지는 내가 너덧 살 때 돌아가셨다. 둘째는 앞서 말한 구 제국 때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참위로 임관하셨던 윗집할배, 촌수가 좀 뜬 일가나 고향사람들이 부르는 참위할배, 참위어른이라고 불렀다. 3형제분 중 끝에할배인 ‘뒷집’할배는 장가를 밀양의 청도면에 있는 한목이라는 동네로 장가를 가셨기에 촌수가 뜬 일가 사람들은 한목할배라고 불렀다. 한목할매는 일찍 돌아가셨고 구 왕가의 궁녀 출신인 후처가 들어왔지만 그 후처인 할매는 전처의 댁호를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 우리 조선사람들의 풍습이라 그대로 한목할매로 통했다. 그러나 가까운 대소가 일가 사람들은 댁호로 부르지 않고 그냥 ‘큰집’, ‘웃집’, ‘뒷집’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옛날 우리집은 할아버지 대 이전에는 밀양시 초동면 성만리에 있는 앞서 말한 ‘통바우’라는 동네를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그때에 두 큰할아버지가 장가를 가셔서 큰집 곁에서 집을 새로 짓고 첫 살림을 차렸는데, 둘째 큰할아버지는 큰집의 북쪽, 즉 위쪽에 집을 지어 살았고, 셋째의 끝에 큰할아버지는 큰집의 바로 뒤쪽에 살았다고 해서 ‘웃집’할배, ‘뒷집’할배라고 부르게 된 것이 가까운 대소가 일가들에게 그렇게 고유명사화 된 것이라고 한다. 고향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어른들은 아직도 우리집안을 ‘통바우’ 안씨댁이라고 부른다. 좀 험구가 담긴 말을 할 때는 ‘통바우’ 안가라고도 하지만. ‘뒷집’큰할배가 오셔서 어른들은 모두 모였다. ‘뒷집’큰할배는 반가운 빛이 낯에 완연했지만 그냥 힐끗 아버지를 옆눈으로 한번보고 그대로 방안에 들어가셔서 가장 윗자리에 좌정하셨다. 옛 선비들은 아무리 반가운 일이라도 반가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아야 하고 인사를 하고 난 다음에 천천히 점잖은 말로써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윽고 웃옷을 입고 몸을 단정하게 한 다음 아버지는 방문턱 밖에서 “작은할배, 저 의환이 돌아왔습니다” 라고 여쭈면서 큰절을 올렸다. 사지에서 돌아온 장손의 인사받기가 기다리기에 지치셨는지 이미 눈물이 글썽하신 음성으로 “오냐, 얼마나 욕봤노. 이리 들어온나. 할애비가 손이나 만져보게” 라며 끝소리는 울음이었다. 당시 읍내에 계신 여러 할배들이 모두 뒷집할배가 앉아 계신 큰방으로 옮아가서 뒷집할배의 오른편에 앉으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버지를 둘러싸고 온 가족이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는 저녁때에 나의 존고모, 할아버지의 누이인 활천할매와 아버지의 누이인 교동으로 시집간 고모가 헐레벌떡 숨을 쉬면서 대문에 들어선다. 대문에서 울음섞인 왁짜한 소리가 활천할매와 고모의 목소리이다. “야야아, 의환아, 니가 살아왔구나. 어디 보자아.” “오빠아, 오빠아, 뭐하고 있다가 인제 왔노!” 그 높은 축담과 대청을 언제 어떻게 넘은지도 모르겠다. 고함소리와 함께 할매와 아지매가 들어선다. 활천할매는 아버지의 뺨에 자기 얼굴을 비비고 반가운 눈물을 흘렸고 고모는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서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운 오빠를 보니 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울음이 통곡이 된다. “오빠는 그 수만리 떨어진 데서 해방되었다고 이처럼 돌아왔는데 손서방은……” 아버지는 그때서야 누이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아셨다. “야야, 거기 무슨 소리고? 손서방이 우쨌다고?” 그러자 활천할매는 치마짜락을 걷어 눈물을 훔치고, “의환아, 그 소문은 못들은 모양이제. 손서방은 감옥에서 안즉도 몬나왔다 아이가.” 활천할매는 아버지에게 고모부 신상에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나의 고모부는 일제 말기에 어렵게 일본 군수공장인 밀양읍 북편에 있는 범북 내화벽돌공장에 취직을 해서 징용을 면하게 되었다. 고모부는 거기에서 창고 경비업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는 전쟁 말기라서 일반소비물자의 시장유통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어서 민중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생활에 필요한 물자는 왜놈들에게는 그런대로 배급으로 충족시켜주고 있지만 조선사람들에게는 극히 소수 친일분자를 제외하고 일체 배급이 없었다. 그래서 엄청나게 비싼 암시장을 통해 충족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암시장의 물자 원천은 이와 같은 군수공장의 창고였다. 이들 창고에는 그런 물자가 가득히 쌓여있었다. 당시에 귀한 설탕, 밀가루, 석유 등을 비롯해서 내복, 양말, 광목 거기에다 성냥조차 그곳으로부터 새어나와야 했다. 새아재는 그 창고로부터 많은 식량과 소비물자를 빼내다가 암시장에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중 일부분은 못사는 일가친척들에게 주었고 암시장에 흘려보낸 것은 상부 감독자에게 유통사실을 묵인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상납했다. 그런데 이 일이 발각되어 잡혀갔고 사건을 몽땅 혼자 뒤집어쓰고 징역을 살게 되었다. 그때 나의 고모는 18살이었다. 시집간지 1년 남짓했다. 나의 고모도 왜놈들이 정신대로 끌어가는 소동 때문에 17살에 8살이나 많은 노총각인 고모부에게 시집가게 된 것이다. 그러자 해방이 되어 정치범과 경제사범은 석방되었다고 하지만 왜놈들은 폭력범과 절도범이 경합된 자들은 석방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놈들과 무력이나 폭력으로 저항했던 사람이나 강제공출에 저항하다가 경찰에게 폭행한 사람은 폭력범으로, 군수공장 창고에서 물자를 빼낸 사람은 절도범으로 경합되어 있다고 해서 8.15 해방을 맞은 석방에서 빼놓은 것이다. 새아재는 해방이 되었으니 곧 나갈 줄 알았는데 그대로 가두어두고 있는지라 감옥 당국에게 항의를 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라 실력행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탈출을 조직해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당시 도처에 있는 감옥에서 탈출사건이 빈번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원인이 있었다. 새아재는 감옥에서 경영하는 농장에 일하러 나갈 때 미리 조직한 탈출계획을 실천했다. 농장을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을 끊고 모두가 거기로 빠져나가는데 간수들이 달려왔다. 새아재는 다른 동료들이 달아나가도록 그 간수들과 삽을 휘두르면서 막아 나섰다. 새아재가 막아나서는 바람에 다른 동료들은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지만 정작 탈출을 조직한 새아재는 수많은 간수들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어서 붙잡히고 말았다. 새아재는 이 탈출사건으로 해서 2년의 가형을 덧붙이게 되고 말았다. 활천할매의 긴 설명이 있자 모두 일단 만남의 반가운 흥분이 가라앉았고 여자들은 부엌으로 가서 저녁밥 차리기에 바빴다. 아버지는 그 이튿날 고향마을 성만으로 가셨다. 거기에는 아버지를 기다리시는 어머니가 3남매를 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양에 계신 동안에 태어난 용아가 아버지의 첫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