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와 갈대에 관한 시모음]
1. 11월 단장 / 김용락
늦가을에 비 맞으며
온몸을 떤다
이 비 맞으며
오늘도 울 어머니
들깻잎 찌러 들에 가겠지
그 길가의 들국화 흔들리겠지
설워라
억새풀 자지러진 언덕으로
조선무시 뽑아 바지게에 얹어 가는
울 아버지 구부러진 등짝이 보인다
울렁거리며 가는
70년 삶의 굴곡이 보인다
2.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ㅡ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3. 친구 / 나태주
바람은 갈대의 친구
갈대들 온종일
심심하게 서 있을 때
바람이 찾아와 놀아준다
갈대는 친구가 좋아
춤추기도 하고
노래 부르기도 한다.
4. 억새의 필체 / 신형식
손 흔들고 있는 것만 보면
눈물이 난다고
한발 늦게 눈물이 난다고
편지를 씁니다
이미 마음 비워버린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5. 갈대 / 나호열
힘을 주면 부러지기 쉽고
너무 힘을 빼면
영영 쓰러져 버린다
광막한 도회지의 한복판에서
다만 흔들리고 있을 뿐인
늪 속에 발목을 묻은
사람들이여!
6. 가을억새/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성 열차로 고개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 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7. 억새 / 박남준
꽃이 있었네. 하얀꽃
하얗게 새어서, 새어서 죽어 피어나는 꽃
바람 부는 들녘의 언덕에는 하얀 소복으로 바람 날리며
너울거리는 억새들의 잔잔한 한숨이 묻혀 있다
이 땅을 일구며 지켜온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정결하고도
기막힌 삶들의 숨결 같은 억새밭의 곁에 서면 어데선가
나타나는 새하얀 꽃상여의 행렬
흔들리며 흔들리며 물결쳐 오는 그 애잔하던 울음
8. 억새 / 이수익
너희들은 누가
거기 세웠니?
누가 너희들을
사람들이 지날 적마다 손 흔들라고
시켰니?
쓸쓸한 초겨울 여행길
외진 산등성이에서 만난
억새들,
몸부림치며 눕고
몸부림치며 일어서서
내게 인사했지만
아, 나는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절절한 몸짓의 언어를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버스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온통
눈물이었음을 알았다.
9. 갈대/ 구재기
나는
세상을 향해
적당히 미치려 하는데
세상은
여전히 나에게
꼿꼿이 서라고만 한다
10. 갈대 / 용혜원
나에겐 당신의 열손가락에
붙잡힐 사랑이 없습니다
당신은 갈망하는 눈으로 쳐다보지만
나는 미친듯이 들판을 헤매이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바람에 온몸을 날리며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소리가
신음처럼 들리는 나의 고통이
그대에게 무슨 사랑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붉은 노을 속에 불지르고 싶은 몸짓밖에
남은 것은 없습니다
11. 갈대꽃 / 유안진
지난 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손
그대의 흰 손
갈대꽃은 피었어라
12. 갈대 -그것은 꿈이었다 /정완영
흩을 만큼 흩었으니 세월도 허허롭고
울 만큼 울었으니 흰 터럭이 눈부시다
꺾이고 부러진 후라야 갈대라고 하느니.
13. 억새풀 /도종환
당신이 떠나실 때
가슴을 덮었던 저녁 하늘
당신이 떠나신 뒤
내 가슴에 쌓이는 흙 한 삽
떠나신 마음들은
이런 저녁 모두 어디에 깃듭니까
떠도는 넋처럼
가으내 자늑자늑 흔들리는 억새풀
14. 갈 때와 억새 / 신형식
갈대와 억새를
여전히 구분하지 못해도
늘그막의 가을엔
직립이나 독립이나 큰 의미 없음을,
간월재에 노을이 걸릴 즈음엔
억세게 부는 바람에 맞서는 것보다
바람따라 흔들림이 완연함임을
갈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네
산다는 것 또한 그런 것이라
억수로 심하게 흔들려야 비로서
그대 눈에 보이고
하얀 손수건 꺼내던 찰나가
바로 절정의 순간이었던 것을
15. 억새꽃 / 오세영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계곡의
굽이치는 억새꽃밭 보노라면
꽃들도 강물임을 이제 알겠다
갈바람 불어
석양에 반짝이는 은빛
물결의 일렁임,
억새꽃은 흘러흘러
어디를 가나
위로위로 거슬로 산등성 올라
어디를 가나
물의 아름다움이 환생해 꽃이라면
억새꽃은 정녕
하늘로 흐르는 강물이다
16. [노랫말 ] 숨어우는 바람소리
/ 김지평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
길 떠난 소녀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
김이나는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으면
그 사람 목소린가 숨어우는 바람소리
둘이서 걷던 갈대밭길에 달은 지고 있는데
잊는다 하고 무슨 이유로 눈물이 날까요
아 길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
쓸쓸한 갈대숲에 숨어우는 바람소리
17. 제주억새 / 김윤숙
가시리 오름 들녘을
긁히며 밝혀 돌아와
산정 향해 세운 갈기
은빛으로 타오르는
허공 속
말발굽 소리
출렁이는 저 바다
18. 갈대 섰는 풍경 / 김춘수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