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암살 #경교장 #현대사
💥京橋莊의 총성 : 김구 암살 6-3
글 손세일
정리 송산
스탈린의 허가받아 南北韓 동시선거 제안
허헌은 이승만에 대해서는 더욱 혹독하게 매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긴〈보고〉를 마무리했다.
“반인민적 리승만 도당은 미국인들의 총검에 의하여 조국 남반부에서 인민들에게 미증유의 폭력과 테러정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형편이 확실치 못함을 느끼고서 동족상쟁의 내란을 계획하고 우리나라의 민주기지인 북조선에 대한 침공, 즉 ‘북벌’을 공공연히 말하고 있습니다.
전조선인민들은 신속한 조국통일과 민주화를 일일이 천추같이 갈망하고 있습니다.
인민들은 평화통일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만약 매국노 이승만 도당이 이것을 방해하는 때에는 인민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길에서 소탕하여 버릴 것입니다.”19)
일요일인 6월 26일에는 조국전선 결성대회는 휴회하고, 북로당의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로부터 승인된 남북총선거안을 제의하자 회의는 낭패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결국은 전원일치로 이 선언서를 결성대회에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저녁 때에 열린 주요 정당 사회단체대표자 회의에서도 김일성의 제안에 대한 반응은 북로당 중앙위원회 회의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일부 참가자는 남한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하기는 불가능 하다고 말했고, 또 다른 참가자는 공화국정부가 이승만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는 것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도 결국 김일성의 설명으로 제안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20)
이날 서울에서는 김구가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 의하여 암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洪命憙는 金九를 두둔했으나
조국전선 결성대회 이틀째 회의는 예정대로 6월 27일에 모란봉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의 회의는 김구와 신뢰관계를 유지해 온 부수상 홍명희(洪命憙)의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허헌과는 달리 홍명희는 김구의 피살을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김구씨는 일생을 두고 조국 독립을 위하여 분투한 분입니다. 비록 그가 민주주의적 자주독립 방향에 대하여는 반민주주의적, 철저하지 못한 견해가 있었으나 … 미군주둔을 반대하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인사였습니다. 이러한 분이 이승만 도당의 손에 조난당한 것은 비분할 뿐입니다. …”21)
이날 회의의 중요의사는 조국전선 강령 채택, 대회 선언서 채택, 조국전선 중앙위원 선거 등이었는데, 가장 눈길을 모은 것은 ‘강령 보고에 대한 토론’ 시간에 가장 먼저 토론에 나선 ‘한국독립당 열성자 대표’라는 김세련의 연설 내용이었다.
그는 먼저 김구의 조난 소식을 듣고 “한독당 당원인 나로서는 남다른 심회를 억제할 수 없습니다”라고 전제하고, 김구의 살해자는 이승만이라고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김구 선생은 누가 죽였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식민지학살자 미제국주의자들과 매국노 이승만임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우리 국토의 남반부를 영구 분할하여 식민지화하려고 기도하는 미제국주의자들과 또 미국의 무기를 얻어 동족상잔 을 감행하는 리승만 매국도당은 저희들의 반인민적 정책과 음모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를 불문하고 처치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중언부언한 이 ‘한독당 열성자 대표’는 김구에 대해서도 이승만 세력과 투쟁하는 대신에 타협하려 했다고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우리 당수 김구 선생에게 확실히 잘못이 있습니다. 그는 항상 독립과 통일을 주장하면서도 미국인들과 이승만 도배에 미련을 가지고 그들과 투쟁하는 대신에 타협하려고 한 것이 곧 잘못입니다. 자기가 참가한 작년 연석회의 방향으로 어김없이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독립과 예속, 민주발전과 반동암흑, 구국과 매국, 통일과 분열, 오직 이러한 두 갈래의 길이 있을 뿐이며, 조선민족의 양심의 일편이라도 있다면 그 누구나 전자의 길을 취할 것입니다.
제3의 길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주저도 방황도 준순(浚巡)도 인제는 있을 수 없으며 또 있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우리 한국독립당 앞에는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김구 선생의 조난으로 이것은 더욱 명백해졌습니다.
미군철퇴를 실현시켜 조국통일을 완성함으로써 남반부 인민을 구출하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또한 우리들 한독당원들은 자기의 당수의 원수이며 인민학살자인 매국노 이승만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22)
‘한국독립당 열성자 대표’ 김세련이 누구이며 그가 어떻게 맨 먼저 토론 발언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金九 암살은 安斗熙 단독범행 아니다
김구는 6월 26일 오후 12시40분 조금 지나 경교장 2층 거실에서 포병사령부 소위 안두희의 흉탄 4발을 맞고 절명했다.
김구의 암살에 대해서는 사건 당시부터 그 배후에 대한 강력한 의혹이 제기되어 왔으나 아직도 완벽하게 규명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수사기록이나 공판기록도 보존되어 있지 않다.
정부기관의 기록으로는 사건이 있고 40년이나 지나서야 구성된 국회법률사법위원회 백범암살진상조사 소위원회 (위원장 강신옥·姜信玉)가 1993년 5월부터 3년 동안의 조사 끝에 발표한《백범김구선생암살진상조사 보고서》23)가 유일하다.
그러나 이 《조사보고서》로 김구암살사건의 진상, 특히 사건의 배후와 관련된 진상이 완전히 규명된 것은 아니다. 《조사보고서》는 ‘맺음말’을 다음과 같이 썼다.
“백범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 안두희는 그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암살자에 지나지 않았다. …
백범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역시 이승만과 미국의 관련성 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 에서 우선 도덕적 책임이 있다. 또한 사건 뒤처리에서 개입한 것이 확인된다. 다만 암살사건에 대한 사건 개입과 지시는 불투명한 편이다.”24)
1948년 말부터 암살계획 추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김구암살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48년 말에서 1949년 초였다. 김구암살 계획은 안두희를 포함한 서북청년단의 일부 단원들이 한독당 에 가입하면서 구체화되었다.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는 서북청년단 태평로 지부로 가서 서북청년단원 10여명의 입당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안두희는 김학규에게 접근하여 1949년 4월 14일자의 한독당 당원증 을 발급받았다. 당원증에는 군복을 입은 사진을 붙이고 ‘비(秘)’자의 도장을 받아, 뒷날 재판정에서 한독당 비밀당원 의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범행을 지휘한 인물은 포병사령관 장은산(張銀山) 중령 이었다. 김구의 암살은 6월 하순에 이르러 세차례에 걸쳐서 시도되었다.
첫번째는 국회프락치사건의 2차 검거가 진행중인 6월 23일 밤에 실행되었다.
정치브로커 김지웅 휘하의 서북청년단원들인 홍종만, 한국용, 이춘익, 독고녹식, 한봉수, 정익태와 포병사령부의 초급장교들 인 안두희, 오병순, 한경일, 강창걸 10명이 경교장에 숨어 있는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체포한다는 구실로 경교장을 습격하여 김구를 살해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실패하고 김약수는 6월 25일 새벽에 운니동에서 체포되었다.25)
두번째 시도는 이틀 뒤인 6월 25일에 진행되었다. 암살을 지휘하기 위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던 장은산은 김지웅, 안두희, 홍종만을 불러 김구가 6월 25일에 공주에서 있을 건국실천원 양성소 10기 개교식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중간 지점인 수원 병점고개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구의 공주행은 전날 밤에 공주경찰서에 의하여 행사가 갑자기 취소되는 바람에 중지되었다.
25일 오전 6시쯤에 전화를 받은 김구는 “이제는 내 발마저 묶어 놓으려는 것인가?” 하고 불쾌해했다. 이 무렵 이승만과 정부관계자들은 김구가 각 지방에 건국실천원 양성소를 개설하고 다니는 것을 반정부 캠페인이라고 위험시하고 있었다.
建國實踐員 양성소를 위험시해
김구는 4월 하순에 군산과 옥구에서 개최된 건국실천원 양성소 개회식에 갔다가 귀경길에 전주에 들렀는데, 전주 시민들은 집을 비우고 총동원되다시피 하여 김구를 환영했다.
전주 극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김구는 “정부는 관제품 공산당을 만들지 말라!”, “공산당 토벌한다 합시고 양민을 살해하지 말라”며 정부를 비판했고, 청중은 미친 듯이 “옳소! 옳소!”를 연발했다.26) 정부 당국자들은 김구의 이러한 행보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날 공주행이 취소되자 김구는 오전 11시 무렵에 고향 친지들인 윤예학(尹禮學) 목사와 이병찬(李秉讚), 그리고 정릉에서 한의원을 하는 위병식(魏秉植) 등과 함께 한강으로 나가 뱃놀이를 했다.
공주행이 취소되어 울적한 김구의 심기를 위로하려는 친지들 의 배려에서였다. 차일을 친 배를 전세내어 오후 서너 시까지 점심도 배에서 간단히 들면서 뱃놀이를 했다. 이날 따라 김구는 손문(孫文)의 무덤을 비롯하여 중국의 유명한 무덤 이야기를 많이 했다.27) 이렇게 하여 김구의 생명이 하루 연장되었다.
이날 밤에 임시정부와 만주에서 활동한 김승학(金承學)과 김구암살 계획을 들었던 대광중학교 교감 박동엽(朴東燁)이 함께 경교장을 방문하고 김구에게 이날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김구는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면서 예사롭게 받아넘겼다. 두 사람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김구의 아들 김신(金信)에게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거듭 일렀다.28)
그날 저녁에 장은산은 다시 안두희를 불렀다. 장은산은 안두희에게 단독범행을 지시했다. 장은산의 ‘쌀쌀한 명령’에 안두희는 “그저 하겠시다” 하고 대답했다.
장은산은 입원실 문을 나서는 안두희의 손을 잡고 장개석 정부의 특별 테러단인 남의사(藍衣社)의 사칙(社則)과 행동 관례를 언급하면서 “만약에 일이 실패하게 되면 너두 갈 수 있다” 하고 위협했다.29)
19) 《北韓關係史料集(Ⅵ)》, p.247.
20) 和田春樹, 앞의 책, p.57 ; 森善宣, <朝鮮勞働黨の結成と金日成>,《國際政治》134, 日本國際政治學會, 2003, pp.141~142.
21) 《로동신문》1949년 6월28일자, 都珍淳, <1949년 김구의 ‘마지막 노선’에 대한 검토>,《于松趙東杰先生停年紀念論叢Ⅱ 韓國民族運動史硏究》, 나남출판, 1997, p.983에서 재인용.
22) 《北韓關係史料集(Ⅵ)》, pp.276~179.
23)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 編,《白凡金九全集(12) 暗殺》, 대한매일신보사, 1999, pp.430~450.
24) 《調査報告書》, p.450.
25) 《調査報告書》, p.440.
26) 김학규, <백범선생님을 추모하면서>,《白凡金九全集(12)》, p.311.
27)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8, pp.211~212.
28) 위의 책, p.217.
29) 《調査報告書》, p.440.
김구 암살 당시 안두희 소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