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GBDSfMtRmA
나눔과 나누기
'리처드 도킨스'라는 학자가 쓴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은, 동물적이고 탐욕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생명체의 자기 DNA 복제 욕구의 정당성을 들춰내서 이런 이기적인 행동이 당연하다라는 것을 자연과학적으로 들이미는 책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타적인 행동을 보이는가에 대한 경험 과학적 연구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 우리 그리스도인(=기독인)은 사랑의 나눔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저 상호 호혜적인 정도의 이타성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다른 존재 집단을 돕는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즉, 내가 잘 살기 위해 내 dna를 복제하기 위해 다른 dna나 다른 객체의 집단을 도울 수 있다는 것 까지는 명백하게 연구 데이터가 나와요.
그리고, 실제로 안타깝게도 인간의 교육체계에서도 이걸 그대로 인간의 윤리 덕목인양 이것이 '나눔'이다라고 교육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 내용은 과학의 산물일 뿐인데요.
근데 '나눔'이란 것은 윤리적 차원의 행위로 내가 살기 위해 위해 다른 집단을 돕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란 것이죠. 신앙교육은 더더욱 아니고요.
앞서 말한 사고(교육)방식은 좀 나쁘게 말하면 처세술이죠. 경험적으로 협력하는 인간이나 어느 정도 관용을 보이는 인간이, 나중에 봐서 더 큰 이익이나, 더 큰 사회적 명예를 갖는 경우를 우리가 경험으로 다 알아요. 지혜롭기만 하면 그걸 다 알 수 있는 거죠.
이 세상이 그 정도는 다 안다는 거예요.
논리를 여기서부터 시작하고 싶어요.
우리 기독교가 지금 보이는 선교나 이웃 사랑의 방식이 사실은 그저 상호 호의적인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교회 타교회와 경쟁 관계 안에서 우리 교회의 교세 확장을 위해서 더 많은 선교비와 구제비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많은 경우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거나 혹은 아주 겸손하더라도 사실은 결국 돕는 자로서의 나의 어떤 자존감, 만족감, 하나님 앞에서의 당당함, 돕는 자 자체로서의 기쁨 이런 것들에 매몰되버린 경우도 있거든요.
근데 앞에 말했듯이 그런 행위는 이제 과학자들도 다 말한다고요.
저는 기독교의 나눔의 정신은 그것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상 그럴 수는 없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면서까지 궁극적으로 어느 순간에는 보여줄 수 있는 그 가능성,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는 제자 공동체라는 그 지점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걸 저는 불가능성과 가능성이라고 하거든요.
불가능한 것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삶을 쫓아가는 우리들.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이 가능성 속에서 가능성만 얘기하는 거라면 ,
기독교 신앙은 사랑으로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이루어내는 내면적 공동체의 힘을 기르는 게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스도인의 나눔이 사랑의 영역이라면 나누기(사회안전망에 대한 신뢰)는 정의(正義)의 영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