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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치유자이고 나는 나의 신화이다. - 죽음과 재생의 신화교육 김봉준 (화가, 오랜미래 신화미술관 www.mafm.kr )
<기억의 가족- 김봉준의 어린 시절을 그린 목 판화 . 1979년작 > 나는 교육의 피해자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의 어린 시절 학교교육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나쁜 추억들 투성이다. 그 건 분명 나를 죽이는 교육이었다. 6.25 전쟁 후 는 베이 비붐세대 였다.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한 반에 90 명까지 수용하던 학교 도 있었다. 이건 수용소이지 학교가 아니다. 서강, 미동, 일신, 다시 미동학교로 전학도 많이 했고 마포 서강에서 서대문 미동초등학교까지 버스 통학도 3년인가 했다. 정신 없이 뺑 뺑이 돈 기억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초등학교 시절이다. 예술이 나를 스스로 치유하게 만든다는 예술치유설은 맞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어서 초등학생이 재수를 해서 겨우 중학교를 들어가야 했 었 다. 어린 나이에 5대1의 경쟁을 뚫고 용산중학교를 들어갔다. 책가방이 무거워 가방줄이 끊어지 기도 했 다. 지금처럼 등에 지는 가방도 아니고 옆 으로 들고 다니 는 가방인데 무슨 가방이 그렇게 무겁던지 작은 체구를 옆으로 기울게 한다 .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다. 7~8교시 수업에 쓸 교과서, 공책, 실내화 , 체육복, 교련복, 때로는 참고서까지 가방에 들 고 다 녀야 했 다. 나의 중고교 시절은 군사문화 가 팽배하던 시대 였 다. 6.25 전쟁의 싸움터에서 살아 남아야 했던 어른들은 체벌을 일삼 았다. 폭력은 대물림한다는 교훈도 그때 얻은 것이다. 등교시간이 늦으면 ‘엎드려 뻗 쳐’를 시키고 머리가 좀 길면 바리깡 으로 고속도로를 내던 시절이다. 아 이들끼리 도 폭력 이 있어서 나는 허약해서 주로 맞는 쪽이다. 그 래도 명문 중고등학교를 다닌다고 주6일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지독한 학풍 은 있었 다. 내가 특히 싫어하 던 시간은 운동장에 동원되어 서 줄 세우고 하는 아침조회, 군사훈련 받는 교련시간, 빈번한 시험치기, 암기 식 공부들이다. 가장 활달해야 할 나이에 숨죽이며 기 못 피고 학교질 서를 지키며 다 녀야 했던 시절이다. 분명 이 교육질서는 날림이다. 나의 유일한 희망의 시공간은 미술반 실기실에서 그림 그릴 때 이다. 나는 수업 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10킬로의 하교 길에서 해방감을 느꼈 다. 집으로 돌아 갈 차비는 까먹고 걸어 갔다. 용산 후암동에서 서강까지 철길 따라서 야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거의 모두가 빈민촌이었던 허름한 동네들을 지나서 집으로 오는 길, 그 길은 ’6 0 년대 수도 서울의 전형적인 거리이다.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여 닥 치는 대로 돈벌이하며 살던 험한 시절의 우리 부모들 시대의 모습 들 이다. 모두가 가난했으나 돈벌이 기회와 출세의 길이 거기 있 기에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던 시대 였다. 그 시대는 누구나 공부 잘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자녀를 입시경쟁에 이기게 하려 했던 시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공교육이 생존경쟁 방식을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난 그 당시 기성세대가 바라는 학생 도 못되었 고 공교육의 모범생으로 사회에 배치되지도 않았 다. 입시경쟁교육의 낙오자였 고 정규직 기성인도 아니 다. 대학은 꼭 들어가야 한다는 부모의 권유로 마지 못해 갔다. 선택 하고 싶은 유일한 학교 는 미대였다. 내가 잘 할 수 있 는 것 은 미술 밖에 없 는 것 같았 다. 이렇게 나의 학창 시절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는 어둡고 축축하고 폭력적이고 재미가 없 고 우울했 다. 집안도 교육적인 환경이 못되었으니 내 영혼이 쉴 곳, 훨훨 날아 갈 곳 이 나의 세계에는 없어 보였다. 나는 우울증, 실어증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내게 유일한 희망 이 있 었다면 미술과 거리였 다. 미술실에서 그림 그리는 시간이 몰입의 즐거움에 빠진 시간이고 나를 내 스스로 위무받게 하던 시간이었 다. 미술은 성취의 보람 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 예술이 나를 스스로 치유하게 만 든다는 예술치유 설은 맞다. 강변으로 산보하고 길거리 노점상과 허름한 시민들과 전후 시대 풍물들이 어른거리던 시대 , 마포강 나루에서 갈대밭에 누워 실컷 울고 소리치며 혼자 놀던 시절, 강과 들은 우울증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나에게 큰 위안이었다. 이제 는 모두 시멘트와 차와 매연으로 뒤덮인 그곳을 나는 미련 없이 떠났 다. 내가 도시를 미련 없이 버리고 시골로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이 강변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의 치유자는 분명히 자연과 예술이었다. 죽음과 절망을 이기며 소생한 길 - 누구나 자기 신화가 있는 법이다. 아무튼, 학교와 집은 모두 다 나의 희망과 다르게 나를 길들이려 고만 했고 나는 ‘이유 있는 저항’을 했던 시대 같다. 가장 창의적이고 정서적인 교육기관이어야 할 미대에서 미안 하게도 내가 배운 것은 별로 없다. 한가지 , 4년 동안 벗은 육체를 탐미하게 했던 누드 모델링 수업이 고맙다. 배운 것이라면 학창시절 자유의 분위기이지 학교 커리큘럼이 아니다. 유신시대의 대학은 비정치를 전제로 한 낭만 이었다. 난 그런 장애를 가진 인문예술이 싫었다. 오히려 서클활동이 내 겐 스승이었다. 민속문화연구회, 탈춤, 풍물, 민화·불화, 민요 … . 내 스승은 논두렁을 타던 탈꾼이고, 두메 산골의 풍물치배이고, 절 속의 장인 승려이고, 써클의 선배와 학우들이었다. 얼마 전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는 동창회 30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거의 모두 상대 법대 의대 공대를 지망하였던 터라 30년 후인 지금 나와 아주 다른 길에 서 있었다. 예술의 길을 걸었던 자는 내가 유일하다. 옛 친구들은 다르게 산 나에게 인사말을 청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들 반갑다. 어려운 시절 만나서 잘들 사느냐. 난 두메 산 골 화실에 산다. 얼마 전 내 화실 앞에 신화미술관을 차렸다. 놀러 와라~.”
<강원도 문막 취병리에 세운 신화미술관> <어머니 아버지 대지 의 신 - 신화미술관 > 나는 학창시절 나를 왕따시키던 친구들이 나를 무대에 올리는 것을 보고 세월이 변했음을 실감했다. 나는 얼마 전 우리 마을에서 펼쳤던 <여신신화축전>리플 릿 을 돌렸다. 축제가 사라진 물질 시대에 왠 축제인가 신기해하는 모습 들 이다. 예술과 인문학이 천시되는 사회, 돈도 출세도 못 되는 금단의 길 , 없는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나는 졸업 후 학교 언저리도 가기 싫었고 예술교육자의 길도 싫었고 오로지 내 손과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창작 예술 과 노동을 하며 살고 싶었다. 그게 청년시절의 꿈 이었으니 기어코 이룬 것이다. 이건 꿈 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나는 사회에서 무엇이 되려고 애쓴 적이 별로 없다. 그저 미적 기술자- 예술인 이면 된다. 나는 무슨 고집으로 이 길을 걸어 왔나. 이 길을 걸어온 나는 지금 좌절 의 상처를 핥으며 성취한 보람으로 행복하다. 나의 길은 기성 사회가 안내 해주던 길도 아니고 나는 사회적 질서가 바라는 자도 아니 다. 내가 스스로 개척한 죽음과 절망을 이기며 소생한 길이다. 이 길은 나만의 신화이다. 누구나 자기 신화가 있 는 법이다. ‘ 출중한 인간 이란 원래 태생이 출중해서가 아니고 나름의 신화를 창조했기 때문 ’이 란 말을 읽은 적이 있 다. 나는 지금 마음은 풍요롭고 사는 것 또한 남 눈치 볼 것 없이 별 거침 없다. 아, 이 자유의 삶, 자기 다운 삶으로 부활 하는 신화 를 만들기가 이 땅 에서는 그 토록 지 난하단 말인가. 자라나는 후세대는 나처럼 험한 길보다 지름길을 알 것 같다. 그들은 내가 자라나던 시대보다 선택의 여지가 더 넓다. 나는 지금 쟁취한 자유를 만끽하며 산골 미술관에서 산다. 싱그러운 산바람처럼 자유의 바람을 이제 야 비로소 만끽한다. 나는 물질적으로 별로 가진 것 없어도 정말 행복하다. 삶은 학습 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하는 것이다 . 이제 나를 교육적으로 회고해 보자 면, 나는 제도교육에 저항하며 제도교육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 같다. 입시지옥같은 중고교를 탈출하자마자 스스로 스승을 찾아 다녔고, 내 스스로에게 스승이 되기도 하였다. 누구나 좌절과 재기의 굴곡진 삶이 있게 마련이다. 신화적으로 말하면 죽음과 재생으로 살아남은 자는 모두가 자기 인생 의 영웅이다. 얼마나 줄기차게 재생의 신화를 키워 왔느냐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약 7번의 죽음 같 은 좌절을 겪었다 . 밑 바닥을 헤매던 얼음계곡이 일곱 차례 있었던 것 같다. 흡사 뱀이 허물을 벗고 재생하듯 깊은 웅덩이 속에 쳐 박혔다가 꿈틀거리며 기어나왔다. 때로는 개기고, 피범벅이 되고, 우울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 응급실에 가고, 망신당했다. 망신당하지 않고 인간이 진짜 성숙할 수 있나? 망신을 무릅쓰고 수모를 견뎌내지 않고 위대한 행복이 거저 오나? 나는 아이들을 마 마보이처럼 키우지 말기 를 바란다. 부모가 자식을 평생 돌보지 못할 것이면서 무한책임을 지려고 과욕부리지 말기 바란다. 나는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교육이 없어서라기보다 쏟아 지는 ‘ 쓰레기 같은 교육 ’ 이 문제라고 본다. 보다 더 큰 문제는 학 부모 와 교사가 자기교육 , 자기문화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시대는 부모의 문화상실, 기성세대의 문화실종이 더 큰 문제이다. 기성세대 문화 의 부재가 아이들의 정체성과 가치관 교육을 시키지 못하게 하였다. 언제까지 선생과 부모를 반면교사로 삼으면서 자기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 하려는 가. 나의 학창 시절처럼 사는 모습 자체가 스승의 길임을 암시해 주 던 전인적 삶의 교육자가 요즘은 과문해서인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삶 자체가 노출이 되 지 않아서 이다. 디지털 코드로 폐 쇄 회로를 타고 다니기만 하고 간접적 일방소통만 만연한 시대이다보니 전인적 교육이 힘들다. 이런 시대 에 오히려 권 하는 교육은 따로 있다.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는 교육, 우리동네 살림공동체교육, 원형문화교육, 학예일치교육을 권하고 싶다. 공교육 안에서 한꺼번에 바뀔 수 없다면 틈새에서라도 놀이와 써클활동으로 스스로 배우고 서로 배우는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나길 바란다. 특히 춤와 노래와 악기 가 동시에 같이 있는 가무악 프로그램과 시와 그림과 글씨가 융합된 시서화 교육을 권한다. 가무악과 시서화가 전인적 교육형식이다. 형식의 벽을 넘고, 사람 사이의 벽을 넘고, 나의 ‘ 얼음 구덩이 ’를 넘고, 나 속 나와 만나는 3통의 통전세계 를 학습하 시라 , 그리고 학습마저 버리 고 삶을 창작하시 라.
<신화교육은 치유와 재생의 힘 을 키우는 교육이다.
> <신화미술관 의 ’ 붓으로 푸는 신화상징 ’ 교육현장과 한 학생의 시서화 책> 신화는 내가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 신화학자 조셉 켐벨은 이렇게 말했다. “신화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세계적인 석학 의 답변은 의외다. 인식론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체험론이다. 그렇다.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을 돌아보아라. 행복은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 황홀한 체험이다. 신화는 인식이 아니다. 문화는 인식세계만 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신화는 우리말로 본풀이다. ( 김열규, 임재해 교수) 나의 근본을 풀 어내 는 신성한 이야기이다. 신화가 있었던 시절 의 어린이들은 자기 종족 의 정체성을 듣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통과의례 축제로 내 안에 원형질서를 알고 그 힘으로 사회적 질서를 창조적으로 개척하였다. 너무 과거를 미화 하는가. 그게 아니 고 나는 신석기시대 의 문화유산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평화가 어머니대지처럼 드넓고 자유가 산바람처럼 싱그럽던 저 위대한 여신문명 신화시대 말이다. 모든 생명에는 영혼이 깃들고 전쟁의 무기를 모르 던 평화여신을 섬기던 시대이다. 마리아 김부타스는 유럽 여신문명의 신석기 시대 유물을 정리하면서 유적지마다 전쟁유 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모계시대는 평화의 시대임을 입증한 것이다. 당시 신이란 우리 부족의 살림 을 돌 보는 신성 한 힘 정도 로 이해하던 시대이 다. 신이란 절대적이고 유일하 거나 거대하지 않 은 시대였다. 우리는 최후의 공동체 가족이 행복의 무한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하는 살벌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공교육이 국가주의 이념과 생산력주의에 경도되어 개인의 행복과 평화의 가치, 정체성과 자부심 이 잡히지 않아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힘을 못찾고 헤매는 경우가 많다. 자기중심이 안 잡히는 혼란의 문화시대이다. 이런 시대 우리 아이 교육은 어떻게 시킬 것인가. 우리는 언제든지 곤경에 처할 때가 온다. ‘ 신화란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곤경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카렌 암스트롱) ’ 영웅신화는 우리에게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 모두가 포기할 준비가 되지 않으면 영웅이 될 수 없다. 혼란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 부모가 먼저 자기 신화를 창조하 고 아이들이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에게 이미 신화이다. 아이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산고를 치룬 모든 어머니는 이미 신화이다. 좁고 긴 산도를 통과하면서 죽음을 극복하고 태어나는 순간 아기 스스로도 이미 영웅이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가치도 삶의 곤경을 헤치고 나오는 지혜를 가르치는 신화로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내 안의 신성한 힘 인 문화항체 - 신화 로 어려운 시대를 이겨나가자. 나의 신화를 만들자. 나는 나의 치유자이고 나는 나의 신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