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소시집|김혜영
이별하는 방식 외 4편
어머니의 관을 장식한 꽃과 화관은 소박합니다. 소화데레사 성녀가 누워 있는 듯 옅은 화장을 한 엄마의 피부는 깨끗해요. 시체를 어루만지는 장의사는 영혼의 향기를 맡는다지요. 망자를 추모하는 스님의 어깨에 가끔 길 잃은 영혼이 올라탄다고 합니다. 뱃속의 태아에게 영혼이 깃드는 순간은 짧지만 영혼이 몸을 벗어나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리지요. 귀는 제일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소리를 듣습니다. 선한 영혼은 머리 위 정수리로 빠져나가고 중간 근기의 영혼은 가슴 부근에서 나간다는 말을 들었어요. 죄가 무거운 영혼은 발뒤꿈치 아래로 나간다고 해요. 『티베트 사자의 서』를 읽는 오후, 파크 하얏트 호텔 라운지에서 눈이 부시는 바다를 봅니다. “엄마, 아픈 몸을 벗어나니 가벼우신가요?” 화장장에 들어간 엄마의 관은 약 한 시간이 지난 뒤, 타다 남은 굵은 뼈 몇 개와 회색 재로 나왔어요. 화장장의 직원은 무심히 빗자루로 재를 쓸어 담아 둥근 틀에 넣어 가루로 빻았어요. 그 뜨거운 입술과 말랑말랑한 가슴은 이 지상에서 사라졌어요. “엄마, 공기 속으로 날아다니시나요? 바닷속 물고기와 헤엄을 치시나요? 49일이 되기 전까지는 유령처럼 사랑하는 우리 곁에 머무시나요?” 육신이 사라진 엄마와 마음으로 대화를 해요.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엄마는 가을의 깊은 고독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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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을 그리는 뮤즈의 독백
사는 것이 살얼음판 같지요
잠시 방심하면
북극의 얼음이 쩍 갈라져
바다에 빠진 곰처럼 허우적거리지요
당신은 꽃피는 사과나무이니까
힘내시고
꿋꿋이 걸어가세요
내 몸의 피를 짜내듯 붉은 잉크로 그린
이 부적은 아주 신묘합니다
이불 베개 안에 몰래 넣어두면
당신의 사건은 해결될 거예요
매일 새벽마다 세 시에 통도사에 가서
나는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립니다
돈을 밝히는 무당이 아니지요
할머니는 무당처럼 신을 모셨는데
치매가 생겼는지 총기가 사라졌어요
나는 명문대 출신 사주 철학자라 해석이 탁월해요
사는 것이 위태로운 촛불이지만
고민을 얘기해 봐요
애기동자처럼 들어줄게요
깊고 푸른 심연으로 걸어가는
뮤즈가 빨간 부적을 그린다
만세력을 넘기는 바람은 무심히 스쳐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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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창가의 풍경
어깨에 내리는 빗방울은
여름의 냄새를 아는지
초록 잎사귀를 닮았지요
풀잎에 내리는 비
흔들리는 풀잎들ㅡ
흔들 흔들리는 순간들
왼쪽 머리에 두통이 오고
생리가 시작되려는지
긴장하는 몸
햇살만큼이나 슬픔도 흔들리지요
풀잎의 욕망은
보도블록 틈새를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것일까요
최종 면접에서 세 번이나 탈락했는데
빗방울은 눈치 없이 희망이란 말을 소곤거려요
기도하는 엄마의 등은 휘어지고
시간의 무게에 서서히 밀려나는 사람들
여름에 내리는 비는
병든 장미와 수국의 얼굴을 적신 후
집 잃은 고양이를 만나러 걸어갑니다
토닥토닥
가만가만 내리는 빗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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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가족
마리아는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얄미운 요셉의 검정 구두를 찔끈 밟습니다
분노를 다스리는 그녀만의 처방이지요
그녀는 성당에 가서 고백성사를 합니다
요셉은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을
옹졸한 처신으로 되갚느라
쥐처럼 몰래 비밀계좌에 돈을 숨겨둡니다
보너스를 원하는 아내를 외면하는 요셉은
오크통에 성스러운 포도주를 담급니다
서재 베란다에서 술이 맛있게 익어갑니다
마리아는 딸이 데려온 이상한 사내가
뿔이 난 괴물처럼 보여
도저히 가족으로 인정할 수 없었어요
노란 머리의 딸은 대화를 거부하는 벽이 되더니
카카오톡을 지우고 페이스북 계정을 지우고
전화번호까지 바꾸고
지구 끝으로 잠수 중입니다
먼 이국으로 떠난 아들은
다정한 애인과 파나마 게이샤 커피를 마시며
털이 기다란 페르시안 고양이를 만집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지요
두려움이 없는 듯
왼쪽으로 입꼬리가 올라간 요셉은
냉담한 표정으로 권위를 지킵니다
겨울나무는 목선이 길어지고
부서지는 시간의 파편들이
콘크리트 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지구별을 방문한 녹색 눈의 외계인처럼
마리아는 해가 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가족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죄인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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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가 눈을 껌벅이는데
부엌에서 시금치 뿌리를 다듬다
톱날 같은 칼날에 엄지손가락이 스쳤어요
빨간 핏방울이 손가락 끝에 올라옵니다
면접하기 전날 밤에 갈색 재킷을 입어 보니
왠지 나이가 들어 보여 검은 재킷을 선택했어요
분홍 자수가 고운 블라우스를 골라 입었어요
화사한 화장을 하고 기다리던 대기실
비정규직을 대하는 면접관의 표정이 씁쓸했지만
낙타는 입이 마르도록 최선을 다했어요
갑자기, 출근하던 사무실이 사라지고
사막에 버려진 낙타가 눈을 껌벅이는데
지평선의 망막한 슬픔이 밀려왔어요
연금 액수는 쥐꼬리만큼인데
실업 급여 신청은 어디서 하나요?
사막개미처럼 일한 직원을 해고한 뒤에
내년 공채에 뽑아줄 수 있다며
결과보고서를 발표하라고 요구는
사실, 아주 은밀한 폭력입니다
피 흘리는 손가락에 밴드를 붙이고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지만
낙타는 결과보고서 발표에 불참하기로 결정했어요
사하라 사막을 비추는 햇살이
낙타의 야윈 어깨를 감싸고
북쪽에서 온 바람이 모래 능선을 스쳐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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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지난여름은 몹시 무더워 두려웠다. 북극의 빙하가 녹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가 여름을 피해 가을에 돌아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92세인 어머니의 생일에 모인 우리 형제들은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다정하게 웃었다. 며칠 후 어머니는 병원 욕실에서 쓰러졌지만 다시 깨어나셨다. 독감과 코로나 환자가 갑자기 늘어 금지되었다. 2024년 8월 23일 금요일 오후 6시 무렵에 오빠의 전화가 왔다. 엄마가 위독하니 보러오라고 했다. 강원도 인제에서 군복무를 하는 아들을 만나 휴가를 보내려던 계획을 급히 취소했다. 잠시 후 다시 휴대폰이 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생과 사가 종이 한 장처럼 경계가 없는 듯하다. 오빠만 마지막 임종을 지켰고 다른 형제들은 보지 못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노인들이 요양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기에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삼십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할머니가 나타나 아버지를 데리고 가시는 꿈을 꾸었다. 때로는 의식보다 꿈과 같은 무의식이 진실에 더 다가간다. 암 투병 중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하고 나는 진주의 친정집으로 내려가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전 10시경에 아버지는 신비스러운 눈빛으로 남쪽 창문을 응시하시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고요하고 평화롭게 돌아가셨다. 임종을 지켜본 탓인지, 가족의 죽음이 처음이라 경황이 없어 나는 많이 울지 않았다. 아버지가 좋은 곳으로 가신 것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맑은 마음으로 사신 분이라 천국에 가셨으리라 믿지만, 임종을 보지 못한 아쉬움에 가끔 눈물이 난다. 이 지상에서 나를 가장 순수하게 사랑해주는 존재가 사라졌다! 그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 슬픔이 밀려든다.
시작 노트인데 하동 용연사에서 어머니의 49재를 지내는 중이어서 그런지 죽음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부자이든 가난하든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무게로 힘겨워한다. 현대 사회에서 시를 통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요즘은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시를 쓰고 싶다. 등단초기에는 미국의 고백파 시인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시에 드러내고 그것을 공적인 사회의식과 융합하는 측면이 내게 스며든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영미 시인들의 시에 대한 산문집을 엮으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소박하고 쉬운 언어로 독자의 감성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시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시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지만, 시의 아름다운 운율로 독자의 가슴에 은은한 울림을 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하느님의 자리, 어쩌면 불성佛性의 자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고 싶다. 어제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 감사한 마음이 온 우주에 가득했다. 잠시 이 세상 이대로 극락 같은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1997년 《현대시》 등단
*시집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다정한 사물들』
*평론집- 『메두사의 거울』 ,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
*산문집- 『아나키스트의 애인』, 『천사를 만나는 비밀』
*제8회 애지문학상 수상